◈ 고양시의 문화유적 찾기
◇ 필리핀군 참전비 : 고양시 덕양구 대양로 5
- 6·25전쟁 시에 참전한 필리핀군을 기리기 위한 비
1950년 북한 공산군의 불법 기습 남침 때인 9월 19일에 참전한 필리핀군은 많은 전과를 거뒀다. 이는 미국, 영국에 이은 세 번째의 지상군 파병이다.
이 참전비는 한국의 안전과 자유 수호를 위해 힘쓴 1,496명의 필리핀군을 기리고, 후손에게 그 뜻을 전하기 위해 국방부가 1974년 10월 설립했다.
부조에 조각된 50명의 모습과 표정은 절망과 좌절을 딛고 일어난 우리 국민의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모습이며, 탑신 전면의 부조는 필리핀 고유 민속 문화를 표현한 것이다.
참전비 주위로는 공릉천과 대자천이 흐르고 있으며, 2km 정도 걸으면 성령 대군 묘와 최영장군묘를 동시에 볼 수 있어 역사 여행이 가능하다.
◇ 장평사(章平祠) :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31-2
- 조선 초 성종의 9남, 이관(李慣), 이성군을 모시는 사당
2018년에 묘역 입구에 후손들이 이관, 이성군의 신도비와 이성군을 모시는 사당인 장평사(章平祠)를 건립하였다.
◇ 이성군(利城君, 1489~1552) 묘 :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31-2(고양시 향토유적 제4호)
- 조선 초 성종의 9남의 묘소
본명은 이관(李慣 : 1498~1552)으로 조선 초 성종의 9남이다. 어머니는 숙용 심씨이며, 친형제로는 누나 경순옹주와 숙혜옹주, 남동생 영산군이 있다. 전주 이씨 이성군 파의 파시조이다.
당시 경복궁 문소전과 연은전(延恩殿). 사옹원 등의 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를 맡아 역임했다.
1545년(인종 1년)에는 중종의 어진(御眞)을 기억에 의존해서 그릴 때 도제조로서 작업에 참여했다. 명종 즉위 후에 대윤파의 거두 윤임(尹任 : 인종의 외삼촌)을 탄핵한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이성군은 질병을 치료한다는 핑계로 거처를 만들어 첩을 데리고 살면서 민간에 손해를 끼쳐 지역 백성들이 이사 가는 일이 발생하자, 사간원이 중종에게 이성군을 파직한 뒤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였다.
이성군의 묘소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배(配) 곤산군부인 남평문씨와 계배(繼配) 풍산군 부인 안동 권씨의 봉분이 좌우에 있다. 3기의 봉분 앞에는 묘비가 서 있으며, 묘소 앞 중앙에 상석, 장명등, 망주석, 문인석 등이 각기 배치되어 있다.
1556년(명종 11년)에 세운 대리석의 묘비는 ‘왕자 이성군 증시 장평공지묘(王子利城君贈諡章平公之墓)’라 쓰여 있는데, 장방형의 비좌(碑座)에 정교하게 조각된 이수(螭首)를 갖추고 있다.
◇ 충민사(忠愍祠) :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 문종의 부마 영양위 정종과 경혜공주를 모신 사당
충민사는 영양위 정종과 경혜공주를 모신 사당이다.
대자동 노인정 정류장에서 길을 건너 경혜공주(세종대왕의 손녀, 문종의 맏딸, 단종의 누나) 묘 방향으로 걸으면 경혜공주와 그의 남편 영양위 정종의 사당인 "충민사(忠愍祠)"가 나온다. 이 사당은 유달리 반짝이는 청기와집이다.
충민사는 1993년에 한보철강의 고 정태수 회장(전 해주 정씨 종친회장)이 건립한 사당이라고 전한다.
충민사에서 들머리 커피집을 지나면 외딴 비닐하우스 농가가 있고, 안내판도 없이 경혜공주의 묘를 찾을 수 있다.
◇ 영양위 정종(鄭悰) 제단과 경혜공주 묘 :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 문종의 딸 경혜공주의 묘 옆의 세워진 부군(부마) 영양위 정종의 비석
<'공주의 남자' 영양위 정종(鄭悰) > 1450년(세종 32)에 문종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와 혼인한 뒤 영양위(寧陽尉)에 봉해지고, 단종 초에 형조판서가 되어 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영양위 정종은 1455년(단종 3)에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의 반역사건에 관련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이 해에 수양대군이 즉위하였는데, 문종의 유일한 사위라 하여 경기도 양근(楊根)에 양이(量移)되었으나, 1456년(세조 2) 사육신 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다시 수원 · 통진을 거쳐 광주(光州)에 안치되었다.
이후, 1461년 광주에서 승려 성탄(性坦) 등과 반역을 도모하였다 하여 체포된 후에 능지처참 되었다. 그와 함께 유배되어 관비(官婢)가 된 경혜공주가 적소에서 아들을 낳자,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친히 양육하고 세조가 미수(眉壽)라 이름하였다.
그 후 영양위 정종은 297년 뒤인 조선 후기 영조 때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고, 영월 장릉(莊陵) 경내 장판옥(藏版屋)과 공주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헌민(獻愍)이다.
영양위 정종은 시신이 없으니 무덤이 없다. 다만 아내 경혜공주가 잠든 무덤 곁에 비석만 세워져 있다. 잠든 아내를 장승처럼 우뚝 서서 지켜보는 모습이 내내 애처롭게 느껴진다.
< 경혜공주(敬惠公主) > 경혜공주[1436년(세종 18년)~1473년(성종 4년)]는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맏딸이다. 7세 때인 1441년(세종 23년) 어머니 현덕왕후가 남동생 홍위(弘暐, 단종)를 낳다가 산욕(産褥)을 이기지 못하고,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경혜공주는 어머니는 없지만 할아버지 세종대왕, 아버지 문종, 삼촌들인 수양대군,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컸다. 15살 되던 1449년(세종 31)에 할아버지 세종의 건강이 악화하고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왕실에서는 그녀의 혼사를 서둘렀다. 세종대왕이 상을 당하면 만 2년 이상 결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혜공주는 16세가 막 되던 1450년(세종 32) 1월, 영양위 정종(鄭悰, ?~1461년(세조 7))과 급히 혼사를 치렀다. 그로부터 52일 만에 세종이 승하했다.
할아버지 세종의 삼년상이 끝나고 불과 한 달 뒤에 아버지 문종마저 세상을 떴다. 그리하여 남동생 홍위가 1452년(단종 즉위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경혜공주의 나이 18세 때였다.
본래 미성년인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성년에 이를 때까지 대왕대비나 대비가 섭정을 맡는다. 그런데 할머니 소헌왕후나 어머니 현덕왕후가 앞서 세상을 등졌기에 섭정을 맡을 사람이 없었다. 세종과 문종은 김종서와 황보인을 비롯해 집현전 출신 신료들에게 단종을 부탁했었다.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1453년(단종 1년) 10월 10일 밤, 수양대군은 김종서 등을 죽이고, 계유정난(癸酉靖難),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영의정이 되고 권력을 잡았다.
이어서 1455년(단종 3) 윤6월, 수양대군은 금성대군과 단종을 돕던 혜빈 양씨 등을 귀양보냈다.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단종은 쿠데타 세력에 밀려 결국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내어준다.
세조는 영양위 정종의 유배지를 수원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경혜공주는 유배지로 남편 정종을 따라갔다. 그리고 1456년(세조 2년) 경혜공주는 남편의 유배지 경기도 광주에서 아들 정미수(鄭眉壽)를 낳았다.
1456년 윤6월, 성삼문과 박팽년을 위시한 집현전 유신들과 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이 시도한 단종 복위운동이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상왕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귀양을 갔다.
이듬해 1457년(세조 3년) 9월, 유배 중이던 금성대군과 순흥 부사 이보흠 등의 단종복위 계획이 발각되었다. 결국, 세조는 18세 어린 조카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다. 4년 뒤인 1461년(세조 7년)에는 영양위 정종과 승려 성탄(性坦) 등이 함께 역모를 꾸몄다고 하여 능지처참하고, 『연려실기술』에는 경혜공주를 순천부의 관노(官奴)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종이 죽은 후 경혜공주가 여승이 되어 가난하게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세조가 이를 불쌍히 여겨 몰수한 재산과 노비를 돌려주었다고 전한다.
동생 단종과 남편 정종이 죽은 다음에 경혜공주는 다시는 세조와 대립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아들과 딸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1473년(성종 4) 12월 30일, 38세에 세상을 떠났다.
영양위 정종과 경혜공주 묘역은 무척 검소하다. 봉분과 봉분 주변으로 상석, 혼유석, 묘비, 장명등, 문인석 2기, 망주석 등의 석물이 세워져 있으나 봉분이 여느 봉분과 달리 낮은 것이 특이하다.
봉분 앞의 묘갈 앞면에 새겨진 ‘조선국 경혜공주 지묘’는 겨우 읽을 수 있을 정도이고, 뒷면의 글씨는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마모가 심했다. 경혜공주 묘 옆에 작은 묘가 정종의 가묘(假墓)이다.
◇ 공빈 최씨(恭嬪 崔氏) 묘 : 고양시 대자동 964-1번지
- 조선 초 문종의 후궁인 공빈 최씨의 묘소
공빈 최씨(恭嬪 崔氏 : 생몰년 미상)는 조선 초 예종의 후궁이다.
최씨는 종2품 숙의로 있다가 1483년(성종 14년) 음력 6월 15일, 종1품 귀인에 봉해졌다. 이후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예종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한편 공빈 최씨의 묘는 고양 덕양구 대자동 경혜공주의 무덤 인근에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정조 때 공빈 최씨의 무덤에 대해 수소문하였는데, 지평 정필조는 "고양 대자동에 경혜공주 무덤이 있는데, 그 옆에 예장한 큰 무덤이 있으나 비석이 마멸되어 자세히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한편 그 묘의 묘지기는 "최빈의 묘라고는 하는데 자세한 빈호는 알 수가 없다."라고 하였고, 또 공빈 가문의 후손 최광억을 불러 조사하였으나, 최광억은 "공빈의 묘가 대자동 경혜공주 무덤 왼쪽에 있다고는 하는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현재 공빈 최씨의 묘는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964-1번지 전주최씨봉례공파종중회 선산 묘역에 마련되어있으며, 전주최씨 봉례공파에서는 매년 후손들이 공빈 최씨의 시향 제를 올리고 있다.
당시 금성대군은 공빈 최씨를 단종의 왕비로 세울 생각을 할 정도의 집안이었다.
이러한 집안 배경을 갖고 있었던 그녀는 처음에 소훈(昭訓)으로 입궁했는데, 예종 연간에는 기록에서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성종 대에 "예종의 후궁인 숙의 최씨를 귀인으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다만, 빈(嬪)으로 품계를 올려주었다는 기록은 없고, 전주 최씨 족보에서 공빈(恭嬪)으로 기록하고 있다.
◇ 성녕대군(誠寧大君) 이종(李褈) 묘 :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경기도 호)
- 14세에 세상을 떠난 태종의 4남의 묘
성녕대군(1405 ~ 1418)은 조선초 태종의 일곱째 아들이나, 첫째부터 셋째 아들이 일찍 사망하고, 넷째인 양녕대군이 장남 역할을 하였으므로, 성녕대군은 실질적으로 4남으로 여겨진다. 성녕군(誠寧君)에 봉해졌다가 1414년(태종 14)에 대군이 되었으며, 대광보국대부의 위계에 올랐다.
어려서부터 태도가 의젓하고 총명하여 부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14살 때 홍역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가례』에 의거하여 엄수되었고, 태종은 이를 애통하게 여겨 성녕대군의 사저(私邸)를 원찰(願刹)로 삼아 명복을 빌도록 하였다. 그러나 대언(代言) 등의 계청에 따라 경기도 고양 북산에 있는 묘소 남쪽에 대자암(大慈庵)을 세우고, 사패지(賜牌地: 국가에서 내려 준 땅)를 내려 불공을 올리게 하였다.
그 해에 변한소경공(卞韓昭頃公)에 추증되었고, 또한 대자암은 선종(禪宗)에 속하는 원찰로 왕족의 기신제(忌晨祭: 존친족의 忌日에 지내는 제사)를 시행하는 처소로 자주 이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