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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 하느님의 어린양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사랑 실천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오 9,9-13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성 마태오 사도는 카파르나움에서 로마 제국을 위하여 세금을 걷는 세리로 일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마태오 사도가 전하는 증언의 핵심은 “부활하신 이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서가 서술하는 나자렛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주석 성경』, ‘마태오 복음서 입문’)이다. 전승에 따르면, 마태오 사도는 에티오피아 또는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오늘의 전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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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야, 그간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
우리 모두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어쩔 수 없이 크고 작은 죄를 범하고,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0년, 40년 전에 지었던 죄, 이제는 그만 떨치고 작별하면 좋으련만, 아직도 똑같은 죄를 고백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제게 생각만 해도 큰 위로로 다가오는 인물이 있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마태오 복음 사가입니다. 마태오라는 이름 앞에는 언제나 하나의 수식어가 따라다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세리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직업이 세리라는 것은 곧 죄인을 의미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조직폭력배나 고리대금업자였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가오면 얼굴을 마주치기가 싫어서 멀리 돌아갔습니다. 그가 지나가고 나면, 오늘 하루 재수 옴 붙었다며, 불편해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지, 요주의 인물, 진상, 속물, 인간 말종으로 각인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세리로 일하던 시절 마태도 역시 뜨거운 피가 도는 인간인지라,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분명히 의식하였을 것입니다.
하루 하루 인간도 아닌 삶, 세상의 보통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된 삶, 비참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아가던 세리 마태오에게 어느 날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오는 어느 순간 특별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신비스럽고 세상 따스한 누군가의 눈길을 느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없이 자상한 얼굴에, 측은지심 가득한 눈동자의 예수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빛은 세리 마태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분의 눈길은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태오야, 그간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네 심정 다 안다. 네 잘못 하나도 아니란다. 너무 자책하지 말거라. 아무 걱정 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나와 함께 새 인생을 시작해 보는거야.”
이윽고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향해 결정적인 초대의 말씀 한 마디를 던집니다. “나를 따라라.”(마태 9,9)
이어서 던지는 말씀, 제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욧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죄속에 깊이 파묻혀 살아가서는 안될 일입니다. 죄를 지어야 하느님 자비의 바람이 불어온다고 밥먹듯이 죄를 짓고 또 지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일부러 죄를 지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량없이 베푸시는 자비에 대해서도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자비의 배경에는 진실과 정의가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정의가 없으면 자비도 없습니다. 자비와 무책임이나 불의 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히 그어야 합니다.
불의한 일을 지속적으로 저지르는데도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방임주의 보다는 엄중하게 대응하는 것이 더 주님 자비와 가깝지 않을까요? 자녀가 무슨 짓을 하든 허락하는 부모는 무책임한 것이지 자비로운 것이 절대 아닙니다.
따라서 자비에는 어느 정도 엄격함이 포함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인내하지만, 많은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릇된 자비의 형태를 비판하는 올바른 목소리에도 마땅히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묵상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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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 신부님 글 드립니다~~
「내 생각의 크기는?」
일반 세일즈맨들의 평균 매출액보다 5배의 매출을 올리는 세일즈맨들을 따로 분리해서 그 비결을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온 비결을 찾을 수가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그들의 생각의 크기(매출목표)가 일반 사람들보다 5배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의 크기는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한계 지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한계 짓는 이유는 간절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간절한 사람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데, 그 간절함이 없기에 ‘이 정도면 되었어.’라고 스스로 한계를 짓는 것이지요.
목표를 달성했을 때의 내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그 모습을 나의 것을 만들 수 없다면 답답하지 않습니까?
이는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의 실천에도 해당합니다.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는 간절함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내가 받을 사랑만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뜻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입구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사람들은 다 웃으며 들어가고 있는데, 사랑의 실천이 부족해서 들어가지 못한다면 답답해하지 않을까요?
***<가진 것 없이 행복해지는 방법, 그건 참 간단하다. 행복을 찾기 위해 소매를 걷지 말고 무엇보다 욕심을 버릴 수 있다면 그만큼 행복을 담는 그릇은 커진다(오늘의 명언)>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오 9,9-13)
イエスは通りがかりにマタイという人が
収税所に座っているのを見かけて、
「わたしに従いなさい」と言われた。
彼は立ち上がってイエスに従った。
「わたしが来たのは、正しい人を
招くためではなく、罪人を招くためである」
(マタイ9・9-13)
As Jesus passed by,
he saw a man named Matthew
sitting at the customs post.
He said to him, “Follow me.”
And he got up and followed him.
“I did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Mt 9:9-13)
聖マタイ使徒福音記者 聖人の記念日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ナル タララ。" クロザ マテオヌn イロナ クブヌル タラッタ。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오 9,9-13)
イエスは通りがかりにマタイという人が
이에스와 토오리가카리니 마타이토 유우 히토가
収税所に座っているのを見かけて、
슈우제에쇼니 스왓테이루노오 미카케테
「わたしに従いなさい」と言われた。
와타시니 시타가이나사이 토 이와레타
彼は立ち上がってイエスに従った。
카레와 타치아갓테 이에스니 시타갓타
「わたしが来たのは、正しい人を
와타시가 키타노와 타다시이 히토오
招くためではなく、罪人を招くためである」
마네쿠 타메데와 나쿠 자이닌오 마네쿠 타메데 아루
(マタイ9・9-13)
As Jesus passed by,
he saw a man named Matthew
sitting at the customs post.
He said to him, “Follow me.”
And he got up and followed him.
(Mt 9:9-13)
Feast of Saint Matthew, Apostle and evangelist
Mt 9:9-13
As Jesus passed by,
he saw a man named Matthew sitting at the customs post.
He said to him, "Follow me."
And he got up and followed him.
While he was at table in his house,
many tax collectors and sinners came
and sat with Jesus and his disciples.
The Pharisees saw this and said to his disciples,
"Why does your teacher eat with tax collectors and sinners?"
He heard this and said,
"Those who are well do not need a physician, but the sick do.
Go and learn the meaning of the words,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I did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2024-09-21「わたしに従いなさい」と言われた。彼は立ち上がってイエスに従った。」
+聖マタイ使徒福音記者 聖人の記念日に、神に賛美をささげよう。
おはようございます。
今日は聖マタイ使徒福音記者 聖人の記念日です。
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と天の元后聖マリア、聖母の配偶者聖ヨゼフ、聖マタイ、諸聖人の大いなる祝福がありますように!
また、大天使とすべての天使、私たちの守護の天使が今日も皆さまを見守り平和でありますよう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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マタイによる福音
<わたしに従いなさい」と言われた。彼は立ち上がってイエスに従った。>
そのとき、イエスは9・9通りがかりに、マタイという人が収税所に座っているのを見かけて、「わたしに従いなさい」と言われた。彼は立ち上がってイエスに従った。10イエスがその家で食事をしておられたときのことである。徴税人や罪人も大勢やって来て、イエスや弟子たちと同席していた。11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これを見て、弟子たちに、「なぜ、あなたたちの先生は徴税人や罪人と一緒に食事をするのか」と言った。12イエスはこれを聞いて言われた。「医者を必要とするのは、丈夫な人ではなく病人である。13『わたしが求めるのは憐れみであって、いけにえではない』とはどういう意味か、行って学びなさい。わたしが来たのは、正しい人を招くためではなく、罪人を招くためである。」(マタイ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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サレジオ会ヤンスングク様の黙想文「マタイよ、これまで徴税人として生きるのがどれほど大変だったか。」です。
私たちは皆、この地上に生きている限り、大なり小なり罪を犯し、そのために痛みや苦しみの中で生きています。
振り返ってみると、私も同じです。30年、40年前に犯した罪を、今では忘れてしまいたいと思っているのですが、それでもまだ同じ罪を告白しているので、本当に恥ずかしく、情けない限りです。
そんな私に大きな慰めを与えてくれる人物がいます。今日の記念日を迎えるマタイです。マタイという名前には常に一つの形容詞がつきまとう。それは「徴税人」でした。
イエス様の時代に徴税人という職業は、すなわち罪人を意味しました。現代でいうと、組織暴力団や高利貸しのようなものでした。誰も彼を良く思っていませんでした。彼が近づくと顔を合わせたくないために遠回りをしました。彼が通り過ぎた後は、今日は運が悪かったと言い、不快感を覚えていました。
誰もが他の人に良い思い出として残りたいと思うもので、注意人物や厄介者、守銭奴、道徳に欠けた人間として刻まれたいとは思わないでしょう。徴税人として働いていた頃のマタイも、血の通った人間でしたから、世間の冷たい視線を意識していたはずです。
毎日、人間らしい生活とは言えない、世間の普通の人たちとの関係が断絶された、みじめな生活を送っていた徴税人マタイに、ある日奇跡のような出来事が起こりました。収税所に座っていたマタイは、とても特別な感じを受けました。それは神秘的で、世のすべての温かさを持つ誰かの視線を感じたのです。
顔を上げると、限りない優しい顔で、哀れみの心に満ちた瞳のイエス様が自分を見下ろしていました。その視線は、徴税人として生きてきた今までの人生で一度も感じたことのない、柔らかく暖かいものでした。その瞳がこんな風に語りかけているようでした。
「マタイよ、これまで徴税人として生きるのがどれほど大変だったか。私は、どうすることもできない君の気持ちを全部知っている。君のせいではないんだ。そんなに自分を責めるな。心配することは何もない。これからは私と一緒に新しい人生を始めるんだ。」
やがてイエス様は徴税人マタイに向かって、決定的な招待の言葉をかけます。「わたしに従いなさい。」(マタイ9・9)
続けて言われた言葉が、私にどれほど大きな慰めを与えるか計り知れません。「医者を必要とするのは、丈夫な人ではなく病人である[中略]わたしが来たのは、正しい人を招くためではなく、罪人を招くためである。健康な者に医者は必要ないが、病人にはいる。」
しかし、罪の中に埋もれて生き続けてはならないのです。罪を犯すことで神の慈しみが訪れると思って、簡単に罪を繰り返してはいけないのです。わざわざ罪を犯す必要はないのです。
主が私たちに惜しみなく与えてくださる慈しみについても、真剣な省察が必要です。慈しみの背景には、真実と正義が存在するべきです。正義がなければ、慈しみもありません。慈しみと無責任や不正の間の境界線を明確に引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
不正を犯し続けているのに、何もせずにただ放任してしまうのは、主の慈しみとは言えません。子どもが何をしても許す親は、無責任であって、慈しみ深いとは決して言えません。
したがって、慈しみにはある程度の厳しさが含まれます。愛はすべてを忍耐しますが、多くを要求することもあります。私たちは、誤った慈しみのあり方を批判する正しい声にも、きちんと耳を傾けるべき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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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や公正な厳しさ、真実な主の慈しみです。主に従ってわたしたちも人々に慈しみ深いキリスト者となれますように聖霊、きてくださ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