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공회 알아보기 2
지난 시간에 성공회의 명칭, 초대교회의 시작, 영국에 뿌려진 교회의 씨앗, 로마교회와 만남, 종교개혁과 로마교회와 단절, 헨리 8세의 이야기와 엘리자벳1세 때 이루어진 성공회의 기틀까지를 알아보았습니다.
〓12 오늘은 영국의 17,18,19세기의 상황과 세계성공회로의 발전 그리고 대한성공회의 발전에 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5. 세계의 성공회로 발전
■ 청교도혁명과 영국성공회
〓12-1 이와 같이 16세기에 영국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고, 17세기에 들어 영국성공회는 크롬웰에 의한 청교도혁명(1642-1651)과 명예혁명 등의 시대를 거치면서 소용들이를 겪게 됩니다.
청교도들은 신대륙으로 뻗어나가 새로운 교회로 발전해 나가고 명예혁명의 권리장전은 국왕의 권한을 축소하고 시민의 권리를 최대로 보장하는 의회민주주의의 사회를 만들어 나갑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미국의 독립선언과 프랑스혁명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었습니다.
17세기 영국성공회는 크롬웰의 청교도혁명시기에는 개신교적으로 기우는가하면 왕정시대에는 로마교회 쪽으로도 흔들리다가 드디어 명예혁명 후 의회는 권리장전에 ‘왕위 계승자는 로마 가톨릭 교도를 배제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이 후로 로마 가톨릭을 신봉하는 국왕은 다시 나오지 않았으며, 성공회는 영국의 국교가 됩니다.
이보다 앞선 17세기 초 제임스1세(1566-1625) 제위 시에 역사에 크게 기록된 것으로홈정역성서(킹 제임스 성서 King James Version, 1611)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성서는 세 번째 영어번역 성서로 전 시간에 이야기 한 위클리프의 필사본 성서와 틴들의 성서 등을 종합적으로 참조하여 최고의 영어 번역 성서를 편찬한 것으로 오늘날까지 영어사용권의 표준성서가 되고 있는 중요한 것입니다.
제임스 1세는 엘리자벳1세의 뒤를 이은 왕인데 스코틀랜드 메리의 아들입니다.
여기서 잠깐, 되새겨 봅시다.
영어번역 최초의 성서는? 존 위클리프 성서.
두 번째 영어번역 성서는? 틴들 성서.
세 번째 영어번역 성서는? 홈정역 성서.(킹 제임스 성경) 알아둡시다
■ 산업혁명과 복음주의 운동
〓12-2 18세기에는 영국에서 산업혁명이라는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산업혁명이란 지금까지 수공업과 가내공업으로 이루어지던 산업이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기계적 동력을 이용한 공장공업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공장지대가 생기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시가 만들어 집니다.
산업혁명과 함께 대영제국으로 발전하여 세계로 뻗어나감과 더불어 성공회도 전 세계로 확산되어 퍼져 나갑니다.
그러나 교회는 산업혁명과 합리주의 사상의 대두 등의 급변하는 사회적 요구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므로 신앙과 사랑의 교회가 되기보다는 형식화되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형식화된 교회에 신앙적 활력을 불어넣기 위하여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나는데. 이 복음주의 선구자는 요한 웨슬리 신부였다.
이러한 복음주의 운동은 영국성공회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박애활동, 사회개혁활동, 노예해방운동, 주일학교의 조직, 활발한 선교단체의 조직 등 성공회의 경건한 신앙생활과 복음적인 선교활동의 전통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살던 고택의 기도실 마룻바닥에는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답니다. 두 개의 구멍은 쥐구멍이 아니라 웨슬리가 꿇어 기도한 흔적의 자리랍니다.
복음주의 운동으로 감리교가 생겨났지만 정작 웨슬리 신부 자신은 죽을 때까지 성공회 사제라고 생각했답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보면
1차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2차 산업혁명은 전기 동력으로 3차 산업혁명은 컴퓨터의 발명으로 이루어 졌는데, 우리나라는 지금 IT강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제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소프트산업이라고도 하는데 우리가 머릿속으로 가상하는 것을 현실로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창의력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직업들 태반이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1차 산업혁명 후 겪은바와 같이 사회의 큰 변화에 따르는 종교의 선교 전략도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공회도 교세를 넓혀나가기 위한 새로운 페러다임으로 바꿔 나가야 합니다.
■ 교회의 전통과 옥스퍼드 운동
〓12-4 19세기 중엽까지 복음주의 운동은 영국성공회의 부흥의 길을 열었으나 교회가 직면한 당시의 급진적 사회변화와 교회개혁에 대한 위기에 해답해 줄 수 없었습니다.
복음주의와 앵글로 가톨릭주의가 충돌하게 되는데 이러한 위기에 대하여 교회갱신운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옥스퍼드운동(Oxford Movement,1833-1845)입니다.
옥스퍼드운동은 영국성공회가 국가적 교회개념에서 더 나아가 보편적 교회에 대한 영적근거와 사명을 자각하게 했으며 교회의 전통과 예전과 성서를 중요시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영국성공회는 국왕이 교회의 수장이 되는 영국의 국교를 탈피하여 보편적으로 열린, 세계의 성공회로 발전합니다.
또한 수도원제도의 부활과 많은 학교와 대학의 설립, 빈민선교, 해외선교 등 성공회의 보편성을 재확립시키는데 공헌하게 됩니다.
옥스퍼드운동은 특히 한국성공회의 성격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한국에 선교사로 오는 분들이 이 운동의 영향을 받은 분들입니다.
18세기 복음주의 운동이 프로테스탄트(개신교적) 유산의 강조라면, 19세기 옥스퍼드 운동은 가톨릭적 전통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유산은 성공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하여 각각 복음을 강조하는 저교회(Low Church)와 전통을 존중하려는 고교회(High Church)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광교회(Broad Church)로 함께 발전해 나갑니다.
6. 세계 성공회 공동체 형성과 람베스
20세기 이후 오늘날의 성공회는 옥스퍼드운동으로 더 이상 영국의 국교회가 아닙니다.
세계적인 성공회로 전 세계 모든 지역에 널리 퍼져 있으며 성공회는 각 나라마다 관구라는 이름으로 독립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공회가 다양한 언어, 문화 및 정치적 상황 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각 지역의 성공회가 영국성공회의 선교정책에서 탈피하여 각 지역이나 민족 또는 국가에 맞는 자율적이며 독립적인 자치교회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교회처럼 교황제도나 중앙집권제도를 택하지 않고 각각 독립된 지역 성공회가 서로 상통하는 한 가족으로서 ‘세계성공회공동체’(Anglican communion)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공회의 조직으로는
〓13-1.2 여러 개의 전도구 교회들이 한 주교의 행정적 목회적 지도에 따르는 교구와
〓14-1.2 4개 이상의 여러 교구가 소속되어 한사람의 대주교 또는 수좌주교(한국에서는 의장주교)가 관할하는 관구를 이루는데 관구는 한 국가에 한 관구를 이루는 곳이 많으며 캐나다 및 미국과 같이 큰 나라에는 한 나라 안에 여러 관구가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는 38개 관구가 있다고 합니다.
〓15-1.2 이렇게 각 나라의 관구들이 모여 세계성공회를 이루는데 성공회 전체의 모임에는 특별한 중앙의 기구가 없습니다.
〓16 다만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져 오는 교회로서 세계성공회의 결속을 다져주는 몇 개의 조직이 있습니다.
① 캔터베리 대주교(The Archibishop of Canterbury)
〓16-1 가장 중요한 것이 켄터베리 대주교입니다.
캔터베리는 영국교회 내의 가장 오래된 교구로 이 교구의 교구장을 켄터베리 대주교라 하며. 켄터베리 대주교는 영국 성공회를 대표하는 관구장이면서 세계성공회공동체의 권위적인 상징으로 세계성공회를 대표합니다.
하지만 켄터베리 대주교는 다른 모든 나라 성공회의 관구장 주교 및 교구장 주교들과 동등한 관계 안에서 성공회의 수장으로서, 교황과 같은 강제적인 권한은 없으며. 성공회 내의 모든 협력 관계가 이루어지는 중심 고리가 되는 것입니다.
〓16-2 현재는 저스틴 웰비(Justin Portal Welby)가 제105대 캔터베리 대주교로 사목하고 있으며, 저스틴 웰비 대주교는 지난해 대한성공회 125주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하였고 세계교회협의회 참석차 부산교구를 방문한 바 있습니다. 켄터베리 대주교는 별도로 영국 국회의 상원의원이 됩니다.
세계 성공회 모든 주교들이 10년 마다 모이는 회의입니다.
이 회의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소집으로 열리고 캔터베리 대주교가 의장을 맡습니다.
〓16-3 람베스 회의란 이름은 캔터베리 대주교가 사는 런던의 람베스궁에서 회의가 열리기 때문에 생겨났답니다.
세계성공회는 38개의 독립적인 자치 관구교회의 자유로운 연합이라 할 수 있는데,
람베스 회의는 이러한 38개의 관구 교회들이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는 가장 중요한 기구라 할 수 있습니다.
람베스 회의는 참여한 교회에 대해 강제적으로 권한을 행사하지 않으며. 이 회의의 목적은
‘성공회의 주교들이 함께 모여 공동의 협의를 통해 세계성공회를 어떻게 다스리고 이끌어 갈 것인가?를 논의하고, 이로부터 나오는 보고서와 결의안을 통해 세계의 각 관구 교회와 교구를 지도하기 위한 자문을 얻는 것’입니다.
람베스 회의는 어떠한 법적 집행 권한을 갖고 있지 않으나 회의의 결의사항은 세계성공회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제1차 회의는 1867년에 열렸으며 76명의 주교가 참석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30년-1948년 사이를 제외하고는 매 10년 마다 열려왔습니다.
가장 최근에 열린 14차 회의는 2008년 7월에 약 20일간 캔터베리 대주교인 로완 윌리엄스 대주교의 소집으로 전 세계 44개국 성공회 교회를 대표하는 약 880명의 성공회 주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③ 세계성공회 협의회(Anglican Consultative Coucil)-(ACC)
세계성공회 협의회는 세계성공회공동체 내 각 회원 관구에서 뽑은 주교, 사제, 평신도와 여성 대표들로 구성되며, 2-3년마다 한 번씩 개최하고 람베스 회의에서 논의된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해결하고 실천하기 위한 방법을 상호 모색합니다.
④ 관구장 회의(Primates Meeting)
세계성공회의 각 독립된 관구(38개 관구)의 관구장이나 수좌주교 혹은 대표주교들이 모여 2-3년마다 개최하고 있는데. 성공회가 당면한 문제와 상호 관심사를 검토하고 이를 통해 이해와 협력을 결집하기 위한 모임입니다.
이 모임은 특별히 ACC와 람베스 회의의 의제 개발과 의회 권고사항을 입안하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
⑤ 선교교리위원회(The Theological and Doctrinal Commission)
그 외에 선교교리관리위원회가 있는데 이 위원회는 성공회 내에서 국제적인 협의와 협력을 창출하기 위한 기구로 전 세계 성공회에서 뽑은 14명의 저명한 학자로 구성되어 선교와 교리에 대하여 연구하고 논의합니다.
지금까지 16세기 종교개혁이후 400년 정도의 성공회의 발전과정과 세계성공회의 기구들에 대하여 간략하게 알아봤습니다.
〓17-1(성공회의 지향)
이와 같이 성공회는 독특하고 긴 역사와 경험을 바탕으로 양극단을 피하고
중용과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지향하여 하느님의 진리에 가깝도록 끊임없이 변화하고 개혁해가는 교회로 20세기에 들어 교회일치운동(ecumenical movement)의 중심적 역할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17-2 그렇기 때문에 성공회는 ‘초대교회의 믿음’과 ‘캘틱교회의 영성’, ‘로마 가톨릭교회적인 전통’과 ‘개신교적인 복음주의의 열정’이 함께 어우러져서 ‘굳어진 정체성’이 아닌 변화하는 교회로 다양성 속에 일치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7. 대한성공회의 126년
〓18 그러면 우리나라에 전파된 한국의 성공회는 어떻게 발전하여 왔는가?를 알아보겠습니다. 한국의 성공회는 선교를 시작한 지 올해로 126주년이 되는데 발전 과정을 몇 대목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8-1.2 1889년 11월 1일, 조선교구 설립을 목적으로 코프(Charles John Corfe, 한국명:고요한,1889-1894))신부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켄터베리 대주교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는 것으로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조선종고성교회(朝鮮宗古聖敎會)로 시작됩니다.
그는 주교서품을 받은 후에 한국 선교를 위하여 동역자들을 모집하여 영국을 출발했고, 드디어 1890년 9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하여 함께 온 랜디스 의사와 서울에 성마태병원 인천에 성루가병원을 설립하여 진료활동을 시작하였고 인쇄소를 설치하여 발췌성서집인 ‘조만민광’과 기타 교회에 필요한 성가와 기도서를 한글로 발행하였습니다.
이 당시 조선은 병인양요(프랑스,1866), 신미양요(미국,1871),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동학혁명과 청일전쟁(1894)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세가 불안한 시기였음으로 성공회는 교회의 자체적 성장보다는 병원과 고아원을 각지에 설립하여 고통에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우선적인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든 것입니다.
■ 정착기
〓19-1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한국에 대한 정치, 경제, 문화적 침탈이 점차 강화되는 가운데
제2대 교구장 아더 터너(Arthur Bresford Turner, 한국명:단아덕,1905-1910)주교가 승좌하고 서울과 경기도 그리고 충청도 지방에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성공회는 한국 개화기에 신교육을 보급하기 위하여 각지에 신명학교를 설립하고 인천, 여주, 진천 등지에 병원을 설립하였으며, 수원과 안중에는 보육원을 개설합니다.
〓19-2 대한성공회는 선교초기부터 한국문화에 뿌리를 내리는
교회가 되고자 토착화에 힘을 씁니다.
토착화에 바탕을 둔 가장 큰 본보기로 한국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성당들이 지금도 강화읍, 강화온수리, 진천, 청주 등에 남아 있습니다.
1903년에 대한성공회는 한국 선교의 역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YMCA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합니다. 청년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진 터너 주교는 1907년 YMCA회장에 선출되어 한국 YMCA를 일제 지배에 정면으로 대항, 한국YMCA의 자주적, 민주적인 기틀을 마련합니다. 터너 주교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축구를 보급했답니다.
〓20-1 1910년 10월 28일 터너주교가 과로로 순직하고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역에 안장한 이후
〓20-2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 한국명:조마가,1911-1930)주교가 3대교구장으로 승좌하면서 대한성공회는 새로운 단계로 1914년에는 성직자 양성을 위한 성미가엘 신학원(현 성공회대학교)을 설립하여 첫 영세자인 김희준씨가 졸업하고 최초의 한인 사제가 됩니다.
1925년에는 수도자를 위한 성가(聖架)수녀회가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20-3 특히 1925년 5월에 서울대성당건물을 부분적으로 완공을 하였고 그뒤 선교100주년을 맞아 잃어버린 설계도를 영국왕실의 도움으로 찾아 모자라는 부분 즉 십자가의 양 날개 부분을 증축 완공을 하게 됩니다. 당시에 완공을 하지 못한 것은 영국에서 보내지는 자금이 부족한 탓도 있었으나 우리 성당을 지은 돌이 강화도산 화강암인데 이 때 일본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해 화강암을 찾기에 혈안에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굳이 일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 선교 100주년에 증축할 때 쓰인 돌은 강화도 돌이 바닥나서 가장 비슷한 중국 칭다오산 화강암이 같이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서울대성당은 동양에서 유일한 로마네스크 양식을 갖춘 우아한 교회로 서울지방문화재 3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로마네스크양식이란 로마답다는 뜻이며 뾰족탑 형식의 고딕 양식보다 앞선 것으로 십자가형태의 구조이며 중앙 제대를 동쪽으로 두고 벽이 두텁고 창문이 작은 아치형입니다. 특히 제대 위쪽에 모자이크로 된 예수님의 모습이 대단히 아름답습니다.
〓20-5 1931년 제4대교구장쿠퍼(Cecil Cooper, 한국명:구세실,1931-1954)
주교는 북한지역 선교에 역점을 두어 1930년대 말에는 53개의 교회로 평양교구를 설립 하고자 하였지만 수난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21-1 ■ 수난기
1939년 세계 제2차 대전이 일어나고 일제는 침탈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동아전쟁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한국에 있는 모든 외국인 선교사 추방령을 내려 쿠퍼 주교를 비롯한 외국인 신부들이 한국을 떠나게 되고. 이로 인하여 대한성공회는 공백상태가 되어 병원, 고아원, 교육사업 등을 이어갈 수 없었으며 신학원 마져 강제 폐교됨으로써 성직자 양성도 중단되고 남아있는 성직자들이 교회를 지키기에 벅찬 시기가 되고 맙니다.
〓21-2 전쟁 속에서 쿠퍼 주교가 북으로 납치되고 홍갈로, 이도암 영국 신부님 두분과 윤달용, 조용호, 신부와 클라라 아일랜드 수녀가 북한에 납치 총살당하여 순교하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 분들을 기념하는 순교추모비와 조형물을 선교 100주년 사업으로 대성당 마당에 꾸며놓았습니다.
구세실 주교님은 평양-중강진 등지의 포로수용소를 전전하며 ‘죽음의 행렬’을 이겨내고, 포로송환 결정에 따라 만주, 시베리아, 모스크바를 거쳐 마침내 1953년 4월22일 런던에 무사하게 도착하였습니다.
〓22 ■ 도약기
〓22-1 1955년 제5대 존 데일리(John Daly, 한국명:김요한,1955-1965)주교가 교구장에 취임하면서
대한성공회는 교회 재건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며 한국 최초의 산업선교를 시작하여 영등포지역에 산업선교센터를 설립하고 황지 탄광촌에 학교를 세워 운영하였으며.
한국기독교협의회(KNCC)에 가입하여 교회일치운동과 지역사회 개발운동 및 기아해방운동을 전개하여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을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은, 우리나라는 전쟁 후 폐허를 복구하는데도 힘들고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이 때 외국으로부터 많은 원조와 구호가 있었는데 미국성공회로부터 구호품을 가득 실은 배가 부산항에 도착하였는데 성공회는 이를 거절합니다.
그래서 이게 몽땅 천주교로 넘어가요. 이것으로 천주교는 크게 구호사업을 벌입니다.
그래서 소위 밀가루 신자, 구제품 신자들이 늘어납니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 성공회가 구호품을 받았는데 저도 옷 한 벌을 얻어 입었어요.
아주 소중하게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5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여러분 잘 알지요?
우선 먹는 것을 해결하셨습니다. 굶주림을 채우는 것이 급선무겠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배불이 먹은 5천명 모두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을 먹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 우리 성공회가 그 사업을 하였더라면 아마 지금 하고는 다르지 않겠냐고 생각해 봐요. 한 편 생각하면 성공회는 그만큼 고고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드디어
다시 9년이 지난 후 1974년 대전교구를 대전, 부산교구로 분할하여
대전교구장에 배두환(마가)주교가, 부산교구장에 최철희(윌리암)주교가 승좌하여
서울, 대전, 부산 3개 교구 모두 한인 주교 시대를 맞이하고 명실상부한 민족의 교회 대한성공회 발돋움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22-3.4 1990년 9월 29일 대한성공회는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23 ■ 관구설립
세계성공회 내의 주체적인 선교의 독립체가 되는 관구의 꿈이 선교 102년만인
1992년 9월 29일 관구헌장을 선포함으로 그 꿈이 실현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캔터베리대주교 관할로 보호 받던 대한성공회가 독립과 자치의 신앙공동체로 태어나 역사와 민족에게 외쳐야 할 진리를 외치고, 실천해야 할 정의를 실천하는 책임을 부여 받는 의미로서의 관구로 태어난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한국성공회의 발자취까지만 말씀 드리고 성공회의 신앙과 남다른 점이 무엇인가는 다음 시간에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참으로 보잘 것 없고 쓸모없는 우리를 부르셔서 주님의 귀한 자녀로 삼아주시고, 주님께서 세우신 성공회 교회에서 항상 저희를 반갑게 만나주시고 말씀을 나눌 수 있게 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귀한 말씀으로 우리를 더욱 온전하게 하셔서 좀 더 사람답게 살게 하시려고,
이곳으로 불러주신 줄 믿습니다.
바라옵건대, 우리가 성공회 안에서 주님께서 일러주신 계명을 충실하게 지켜 행하며, 세상에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굳건한 믿음을 풍성히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흡족한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이 곳에 더 많은 성공회 신자들이 모여 주님께 찬양드릴 수 있기를 바라며
모든 말씀을 참 소망과 기쁨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