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ch Fromm은 사랑을 인간이 존재하는 문제에 대한 응답으로 보았다.
그는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특별한 단원으로 묶어서 고찰하였고, 그 외에 이웃 사랑, 어머니 사랑, 성애(erotic love), 자기 사랑, 하느님 사랑 등을 들고 있다. 여기서는 커플간의 성애에 대해 보고자 한다. 현재 임상 실제에서 입원 환자를 제외한 많은 내담자들은 거의 모두가 인간관계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에서 성인들은 성애 문제로 외롭거나 괴롭거나 슬프거나 불행하고, 폭력까지도 감수한다. 성애에는 남녀간의 사랑 뿐 아니라 동성애도 있으나 여기서는 남녀 사랑으로 축약하기로 한다.
1. 사랑
남녀 관계는 서로 분리되고 독립된 두 사람이 하나이기를 원하는 특성을 가졌다. 이 친밀감의 특성으로 인하여 공격성이 문제가 된다. Bergmann(1980)은 프로이드의 사랑에 대한 세가지 개념을 구별하였다.
첫째, 프로이드가 1905년에서 1912년까지 쓴 글을 보면, 사랑이 원초적인 관계, 즉 모아 관계의 재발견(Die Wiederfindung der primären Bindung)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각각의 개인이 무의식적이고 유아적인 근친상간 금기 환상을 어떻게 극복하고 그 힘을 활용하는가이다.
두 번째, 프로이드는 1914년 <나르시시즘 입문Zur Einführung der Narzismuß>에서 인간의 자신에 대한 사랑이 이상적인 자아로 전이되고 그것이 다시 사랑하는 대상으로 투사된다고 하였다. 자신 스스로 기대하지만 될 수 없는 것을 상대방에게 기대한다는 것이다. 자아 이상의 공유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셋째로, 1915년 <추동과 추동의 운명Triebe und Triebschicksale>에서 자신의 추동 충동이 성적 대상(genital object)을 향한 사랑으로 발전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프로이드의 전통에 따라 정신분석에서는 사랑을 리비도(libido)와 같은 의미로 쓰기도 하였다.
정신분석은 남녀관계에서 대상(object)의 존재에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인간 발달에서 대상의 의미를 더 깊이 연구하면서 다시 사랑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즉, 사랑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체험으로 이해된 것이다. Winnicott같은 대상관계 이론가는 삶의 시초에 신생아와 어머니가 있기 보다는 어머니와 신생아의 단일체(union)가 있다고 하였다. Blanck와 Blanck(1979)는 사랑과 리비도를 동일어로 이해하며, 리비도는 대상과 합일하고자 하는 추동으로, 공격성은 대상으로부터 분리하고자 하는 추동으로 설명하였다. Kernberg(1977)도 사랑을 하나의 추동으로 받아들이지만 추동뿐 아니라 자아의 능력을 특징짓는 여러 요소들을 사랑이라는 체험에 포함시킨다. 사랑은 추동의 힘과 대상에 대한 부드러움(tenderness), 대상에 대한 헌신을 체험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는 것이다.
Boesky(1980)는 여러 언어를 분석하여 사랑과 이별과 신뢰가 서로 연결돼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우리 유행가에도 거의 모든 사랑 노래에는 이별의 주제와 신뢰의 문제가 들어 있다. 남녀간 사랑의 역사는 전외디푸스기, 외디푸스기, 그리고 후외디푸스기로 나누어서 고찰할 수 있다. 전외디푸스기에는 구강기적, 항문기적 추동 발달은 물론 분리와 개별화 과정의 문제가 제기된다. 외디푸스기에는 부모의 사랑관계에 관여하는 아이의 심리적 상황이 빚어내는 여러 가지 체험과 세대간의 간격 문제, 자신의 성(sexuality) 정체성과 다른 성에 대한 유아적 이해 등이 주제가 된다. 후외디푸스기에는 외디푸스 갈등을 극복함으로써 초자아가 성숙하고 가치와 규범에 대한 추상화, 개별화, 탈개인화가 일어난다.
그 외에도 Kohut(1984)의 자기 심리학에서는 자기-대상(selfobject)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원초적 대상의 사랑이 자기(self)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요소로 보았다. Kohut은 사랑을 추동의 표현, 즉 추동의 파생물이거나 추동의 승화가 아니라 자기의 체험으로 보았다. 자기 심리학에서는 자기 체계의 응집력(cohesiveness)이 크면 클수록 더 진실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고 본다.
상호주관주의(intersubjectivity) 이론에서는 사랑의 관계를 자기와 대상간의 관계라기보다는 자기와 자기의 관계로 본다. 이 이론에서는 사랑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토대 위에 상대방에게 의존하고자 하면서도 자신이 유일하고자(unique) 하는 욕구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다고 본다. 상호주관성의 평형이 깨질 때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생기게 되는데 이것은 사랑 관계가 아니다(Benjamin, 1988; Fromm, 1977 참조). 두 사람의 합일에 대한 동경과 두 사람 각각의 유일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간의 갈등은 사랑에 있어서 영원한 과제이다(Mertens, 2000 참조).
2. 공격성
프로이드는 여러 글에서 공격성에 대한 언급을 하지만 특히 1920년 <쾌원리를 넘어서Jenseits des Lustprinzips>, 1930년 <문명 속의 불만Das Unbehagen in der Kultur>, 1940년 <정신분석개관Abriß der Psychoanalyse> 등에서 공격성이 죽음의 추동의 표현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혔다. 그는 이 파괴적인 힘을 미움, 증오, 마조히즘, 인간과 문명에 대한 원초적인 적개심과 같은 현상에 연결시켰다. 그는 삶의 추동과 죽음의 추동이 모든 삶에서 유기체의 세포 하나에까지 영향을 입힌다고 하였다. 프로이드는 삶의 추동이 발달과 종족 보존을 향해 있고, 죽음의 추동은 무기질의 안정성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특성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프로이드는 <정신분석입문 새강의Neue Folge der Vorlesungen zur Einführung in die Psychoanalyse>(1933)에서 모아관계에 대하여 강의하면서 유아의 끝없는 욕구 혹은 열망에 대해서 언급하였는데, 부모가 아무리 완벽하게 아이를 돌보아준다 하여도 좌절감을 체험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프로이드는 좌절감에 의한 공격성, 즉 반응적 공격성에 대해서도 언급한 셈이다.
죽음의 추동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Anna Freud(972)까지도 죽음의 추동 이론을 둘러싸고 정신분석 이론가들이 두 파로 나뉘어졌다고 하였다. Green(1987)을 위시한 불란서 정신분석가들과 Klein(1972)은 이 죽음의 추동을 인정하면서 대상관계 이론을 통하여 이 이론을 어느 정도 보완하였다. 그러나 Fairbairn(1952)과 Guntrip(1968)같은 대상관계 이론가들과 자아심리학자들은 죽음의 추동 이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죽음의 추동 개념 없이도 유아 관찰을 통해서, 혹은 심한 정신병리를 통해서 인간의 불안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편화나 자기 소멸에 대한 극도의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불안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Hartmann(1972)은 에너지를 리비도 에너지, 공격적 파괴적 에너지, 그리고 원초적인 중성의 자아 에너지로 구별하였다. 자아 기능이 성숙하고 분화되면 욕구를 즉각적으로 만족하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이러한 유보 능력은 다시 자아 능력을 강화하고 분화시킨다. Hartmann은 이러한 자아의 갈등없는 공간(conflict free sphere)을 상정함으로써 인간이 추동의 통제로부터 점차 자유로와질 수 있다고 하였다. Winnicott(1950), Greenacre(1960), Spitz(1965)같은 분석가들은 공격 추동을 상정하는데, 공격 추동에는 처음부터 건설적인 측면과 파괴적인 측면이 병존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파괴적인 추동은 주로 좌절에 대한 반응이다. Kohut(1973, 1979)은 자기 심리학에서 나르시시즘에서의 공격성을 설명하고 있다. 유아가 어머니를 한 독립된 존재로 지각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공격성은 비파괴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경계를 짓는(abgrenzen) 기능을 하며, 이로써 자기정체감이 성취된다. 인간에게 생명만큼 소중한 것은 생애 초기에 필요한 만큼의 보살핌과 감탄과, 어려울 때 달래주고 위로해주고 안정시켜주는 이 모든 역할이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필요가 끊임없이 그리고 외상이 되는 방법으로 좌절될 때, 만성적인 자기애적 노여움(rage)이 생기는데 이것은 공격성의 파괴적인 형태이다. Kohut에 의하면 이러한 공격성의 파괴적 형태는 자기응집성이 약해서 생긴 산물이다. 버텨주고 안아주는 환경(holding environment)이 미흡하면 유아는 자기 체계의 붕괴 위험을 체험하는 것이다. Kernberg(1995)는 그의 저서 <사랑관계Love relations>에서 전외디푸스기의 공격성과 나르시시즘으로 인해 사랑의 능력이 약화되고 때로는 손상되는 것에 대하여 강조한다. 무의식에 깊이 억압된 자기애적 좌절은 사랑 대상과 세상에 대하여 시기심과 복수심을 불러 일으킨다고 한다. Fromm(1977)도 인간의 파괴성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했는데, 그는 파괴성의 원인을 개인사와 사회 구조에서 찾았다. 착취적이고, 개인의 자유와 통합성, 비판적 사고, 생산성을 억제하는 사회는 파괴성을 낳는다. 그리고 유아기에 체험하는 공허감과 무기력감, 아무 것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먹먹한 분위기, 그리고 기쁨이 없는 상태는 한 인간을 평생 얼어 지내게 할 수도 있다.
최근의 신생아 연구(예를 들면 Stechler, 1987, 1990; Lichtenberg, 1999) 결과에서 신생아들이 보이는 호기심, 탐구 능력은 공격 추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생물심리학적인 활동이고 자기 주장을 하고자 하는 동기 체계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유아는 구강기, 항문기를 거치면서 많은 기쁨과 좌절을 겪게 되는데, 적당한 좌절은 자율성과 개별화(individuation)와 분리(separation) 과정을 촉진시키지만, 과도한 좌절이나 과잉보호(overprotection)는 이러한 발달 과정을 해치고 병리적인 영향을 끼쳐 파괴적인 공격성을 증가시킨다. 한가지 덧붙일 것은 부모의 파괴적인 행동은 아이들이 모방을 통하여 학습할 수 있고, 그러한 행동을 멀리하고 싫어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동일시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