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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세워진, 주님의 몸인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를 소망하며, 주님의 몸인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결단코 이길 수 없는 유일한 곳임을 선언한다.
1988년 10월 1일 대조동 순복음신학교 4학년 재학 시절에 첫 번째 교회 개척을 하였다. 당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이단이라는 오해 속에 이중고를 겪는 때였다. 1992년 故한경직목사님의 선언이 있기 전까지 복음을 전할 때마다 ‘기하성’ 교단명칭에 대한 설명까지 하지 않으면 전도가 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생의 신분이고 또한 전도사로서의 개척이었지만 교회는 조금씩 부흥이 되었다. 부천 ‘순복음사랑교회’ 부설 ‘사랑선교원’을 통하여 자모들이 교회로 가까이 할 수 있었다. 사랑선교원 어린이들의 행사(발표회) 또는 교회 축하행사를 계기로 학부모들을 초대하여 복음을 전하곤 했다.
1991년 5월 드디어 목사 임직을 받았다. 그런데 건물주가 갑자기 교회 보증금을 500만원 올려 달라고 했다. 보증금 1000만원에 월 40만원으로 임차했었는데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성도들에게는 아예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말하지 않았다. 목사임직을 받는 자리에서 선배 목사님이 그런 사정을 알고서 “김전도사! 보증금 마련하기가 어려우면 그리고 평생 거기서 목회할 생각이 아니라면, 목사 안수를 받은 차에 형편에 맞는 곳에서 아예 목사의 신분으로 개척을 시작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이었다. 때마침 신학교 동기이고 목사 임직 동기 목사님이 후임자로 오고 싶다는 것이었다. 보증금도 있다는 것이다. 블레셋과 전쟁을 함에 있어서도 다윗은 먼저 하나님을 물었으나(삼하5:19-25) 나는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은 채 당연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려니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경솔하게 결정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아쉬움을 갖게 되었다. 담임목사 이취임예배 때 후임목사님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 만큼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공교롭게도 그때부터 나는 3년을 주기로 하여, 일곱 차례의 교회 개척과 한 번의 건축을 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나 아쉬움이 남는 첫 번째 개척이었다. 그 일이 결정된 후에 누군가가 선배 목사님과 전혀 다른 논리의 주장을 하였다. 전도사의 신분으로 성도가 30명가량 부흥이 되었으니까 목사 임직을 받게 되면 축도권과 영적 권위가 더해지니까 훨씬 더 많이 부흥하게 될 것이 아니냐는 설명이었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가 된 후였다. 하지만 좋은 경험이었고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신앙생활과 목회는 우리 모두가 짐을 서로 지는 것임을(갈6:2) 가르치며 헌신하도록 했어야 되었는데, 성도들에게 미안한 마음(인정) 때문에 교회의 형편이나 사정을 얘기조차 꺼내지 않는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는 깨달음, 그리고 선배라고 할지라도 즉흥적인 조언은 삼가야겠다는 교훈이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주님께서는 나를 강원도 정선군 함백탄광 근처에 있는 시골교회를 1년간 섬기도록 하셨다. 그야말로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열악하고 가슴 아픈 목회현장이었다. 교회가 우선적으로 신경 쓰면서 복음을 전해야 될 대상은 학생들이었다. 주일학교와 중고등부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교회 승합차로 등하교를 시켰다. 수요일과 금요일도 예배에 참석했다. 토요일 오후 학생부 모임까지 함께 병행하였다. 그때 내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읍면 단위에 있는 농어촌교회들이 교회학교에 전심전력을 다하여 믿음의 일꾼들을 배출하면, 종국엔 그들 대부분이 도회지로 진출을 하게 되는데 도시 교회는 가만히 앉아서 믿음의 일꾼들을 흡수만 할 뿐, 그들이 자라난 농어촌교회엔 아무런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도시로 나가 직장을 얻고 경제적 활동을 함으로써 수입이 생기면 모든 십일조와 헌금은, 현재 출석하는 도시교회에 한다. 그런 경우 그 교회들은 마땅히 그들을 양육해낸 농어촌교회에 선교후원부터 해야 마땅하지 않나 싶다.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볼 문제임이 틀림없다.
자녀의 학업과 진학 문제로 인하여 1년여 농촌교회 목회사역을 마치고, 정선군 예미교회의 후임자 목사님이 새로 부임한 후, 서울 문정동에 두 번째 개척을 하였다. 장로교 목사님이 개척을 한 교회였는데 사모님의 건강 문제로 더 이상 목회를 할 수 없어 후임자를 구하는 처지였다. 햇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완전 지하 1층의 교회였고 40평가량 되었다. 부엌과 숙소로 방 2개를 8평으로 꾸며 놓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쪽 벽면에는 조그만 창문이 있었다. 감사하게도 불과 2~3개월만에 성도들이 늘어났다. 우리도 개척교회였지만 또 다른 개척교회 5교회를 5만원씩 선교후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말 행복하고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지하실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건강에 해롭고 악영향을 미치는지 그때 알게 되었다. 새롭게 목회를 시작한지 불과 8개월 만에 면역력 약한 사모가 희귀병 루퍼스(일명, 전신성 홍반성 낭창)에 걸렸다. 경찰병원 담당 내과 과장이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을 하는 분이냐고 물었다. 개척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사라는 나의 말에, 사실대로 말하겠다며 안타깝게도 아직 백신치료제가 개발되지 못한 Lupus로 판명이 났다면서 형편이 허락된다면 장기간 입원을 시켜놓고 갖가지 약을 차례대로 투약해보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는 것이다. 일종의 임상실험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설명이었다. 일단 본인에게 그 의향을 묻기로 했다. 사모는 단호히 거절을 하고 퇴원을 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돈이 문제였다. 만약에 우리가 개척교회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섬기던 여전도회 회장과 부회장이 우리 교회를 떠났다. 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교회 사모가 몹쓸 병이 결려 죽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겠냐면서 수군대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나머지 귀한 제직들마저 대전과 일산으로 이사를 떠나게 되고 새신자 가족도 구로동으로 집을 샀다면서 인사를 왔다. 루퍼스라는 병명 진단과 함께 3개월이 못되어 대다수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고 우리가 문정동을 떠나기까지 두 명의 성도가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여 주었다. 그 할머니 집사님들은 내가 평생토록 잊지 못할 고마운 분들이다. 신집사님과 문집사님. 당시 80세였으니 지금은 낙원에 계실지도 모른다.
성도들이 떠난 후로 2년 가까이 문정동 지하 교회에서 두 분 집사님과 함께 예배를 드렸고 기도회를 가졌다. 두 분 할머니 집사님들의 아들들이 다른 먼 도시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듣게 되었다. 그래서 같이 눈물로 기도하며 끝까지 함께 해주셨나보다 싶다.
가장 기쁜 일이 그 시절에 생겼다. 큰 아들이 흰돌산기도원으로 목회자 자녀 세미나에 다녀왔다.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라며 말을 꺼냈다. 당시 가락고등학교에서 전교 1~2등을 다투던 아들이었다. 학교에서는 서울대학교에 진학을 시킬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뜻밖의 말을 하였다. “저도 아버지처럼 주의 종이 되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얼마나 기쁘고 기뻤는지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눈이 적셔진다. 단 한 번도 학원에 보내주지 못해서 늘 미안하고 안쓰럽게 생각해 왔는데 이토록 고마운 말까지 해주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 가족은 다같이 손을 맞잡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보너스로 방언의 은사도 받아 왔던 것이다. 뜨거운 눈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야말로 은혜가 넘치는 부흥회 같은 기도의 시간이었다. 결국 연세대 신과대학에 특차로 합격하여 감리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1995년 봄, 경기도 고양시 흰돌마을에 새로 건축한 영구임대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무주택 서울 거주자의 자격으로 영구임대아파트에 입주신청을 했던 것이 당첨이 된 것이다. 말 그대로 출애굽하는 기분이었다. 캄캄한 지하 교회에서 3년간 힘들고 고통스러운 날들도 성도들이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곳도 즐거움과 기쁨이 넘쳤겠지만, 주변의 시선과 투병 중인 사모로 인하여 정말 외롭고 쓸쓸한 순간들이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없었다면 결코 견뎌내지 못하였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을 더욱 의지합니다.”
드디어 일산신도시로 이사를 왔다. 지하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13평 아파트 꼭대기 층으로 짐을 옮기면서 마치 천국에라도 들어가는 것처럼 좋았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13블럭 내 위치한 지하 25평을 임대계약하고 세 번째 교회 개척을 하게 되었다. 서민들이 살기에 참 좋은 곳이라 여겨졌다. 건물주에게 물었다. 시장이나 슈퍼마켓이 어디 있느냐고 했더니 5분만 걸어가면 이마트가 있다고 하였다. 난생 처음 듣는 단어가 내겐 생소한 방언이었다. 요즈음이야 대형마트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확산이 되었지만 그땐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교회 개척은 정말 재미있는 사건들이 무척 많았다. 물론 사모에게 발병했던 루퍼스는 성령하나님의 은사와 능력으로 깨끗하게 치료되었다. 다만 3년 이상 복용해오던 치료약의 부작용으로 두 번이나 인공고관절 수술을 받기도 했지만 루퍼스는 완치가 되었다. 그 부작용은 다름이 아니라 그 약을 먹는 동안 반드시 섭취해야 될 것이 있는데 뼈에 있는 칼슘과 칼륨이 보충되도록 계란과 바나나와 칼슘영양제를 꼭 먹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주의 사항을 들은 바가 없었다. 만약 외국의 경우라면 의료사고에 해당되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치료제 장기복용의 부작용으로 오른쪽 고관절이 잘못되어 인공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사실 네 번째 개척은 그런 사유로 불가피하게 이뤄졌다. 13블럭에서 7블럭으로 옮기게 된 것은 보증금을 줄여서 새롭게 개척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일을 통하여 나로 하여금 영적 세계를 더욱 잘 알아갈 수 있도록 만드셨다. 질병으로 고통 받던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다. 종로 3가에 있는 극장 ‘단성사’에서 경비로 일하고 있던 박희남씨의 부인 김인자씨를 말기 간암에서 고쳐주셨으며, 폐결핵으로 8년 동안 가족과 떨어져 마산과 공주에 있는 결핵요양소에서 지내오던 문인경집사님을 고치게 해주셨다. 그 외에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주님은 역사하셨다.
하지만 또 한 번의 고통과 어려움이 찾아왔다. 불과 2년 남짓 지나서 이번에는 사모의 왼쪽 고관절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만큼 아프다고 했다. 부랴부랴 일산 복음병원 특실로 들어갔다. 일반 병실에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 사용료가 그렇게 비쌀 줄은 정말 몰랐다. 결국 적지 않은 수술 입원비용도 비용이지만, 사모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성도들의 느낌과 생각은 달랐다. 언제나 부정적임을 알고 있었기에 또 다른 결단이 있어야했다. 너무 괴로운 마음에 어디론가 멀리 떠나가서 새롭게 출발을 하고 싶은 마음이 불일 듯 생겨났다.
어머니께서 대구에 있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맡아 일하고 계시고 둘째 아우가 김천에서 살고 있으니까 차라리 김천이나 대구에서 목회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내어 경상도로 내려갔다. 동생이 하는 말이 부곡동에 새로 지은 건물들이 많으니까 한 번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부곡동에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 대로변 건너편에 건물주가 불교신자인데도 불구하고 교회를 세워도 된다는 말에 만나봤더니 개인택시를 하는 분인데 인상도 좋고 마음 쓰는 것도 참 좋아 보였다. 위치도 아파트 단지 앞이었다. 소위 황금어장이라고 말하는 곳. 더구나 지하가 아닌 2층이기에 정말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작은 방과 주방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설레는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계약을 하고 3주가 지난 즈음에 이사를 왔다. 사모는 토요일에 기차를 타고 내려와 주일 저녁에 올라가서 자녀 뒷바라지를 하기로 했다. 처음엔 그곳이 얼마나 우상숭배가 심한 곳인지 전혀 몰랐다. 그리고 천주교가 폭넓게 뿌리를 내린 지역이었다. 우리 신학교 후배 출신인 전도사님 한 분이 자기 딸과 함께 동참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설마 오겠지’라고 기대했던 아우와 제수씨는 한 번도 예배에 참여하지 않았다. (렘17:5) 도울 힘이 없는 인생과 방백을 조금이나마 기대를 했다는 사실이 주님께 너무나 죄송하고 부끄럽기만 했다. 임대료와 생활비 그리고 열차 요금까지도 부담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대다수의 국민을 힘들게 만들었던 IMF의 거센 파도가 덮쳤다. 값비싼 엠프 시설까지 마련했지만 별로 사용하지도 못하고, 김천 부곡고등학교 교목으로 있던 어느 목사님이 후임자로 오신 뒤 김천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섯 번째 개척은 그렇게 참담한 마음으로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정말이지 회개해야 될 일만 만든 것 같아서 내 마음은 더욱 아팠다.
주문진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친구 목사님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강원도 동해시에 가정집 창고를 개조해서 교회가 세워졌는데 교인은 3명이 남아 있고 담임목사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니까 나더러 맡아서 해볼 의향이 있다면 길을 모색해 보겠다는 얘기였다. 기도해보고 마음이 생기면 한 번 가보겠노라고 했다. 한 주간 기도한 후 묵호(동해시)로 향했다. 묵호 중앙시장 뒤편에 정말 초라하기가 그지없는 그런 교회였다. 45년이 지난 목조주택에 딸려 있는 10평짜리 창고가 바로 교회였다. 마음이 찡해졌다. 가장 오래 함께 섬겨왔다는 김집사님을 만났다. 지금은 3명밖에 없지만 모두 믿음이 회복되어 돌아오게 되면 10명은 된다고 하면서 꼭 오시기 바란다고 했다. 정말 갈망하는 눈빛이었다. 잘 알겠다며 대답하고 돌아왔다. 2001년 8월 마지막 주일, 첫 설교를 했다. 새로 목사님이 온다고 해서 그랬는지 다섯 명이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기쁨이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느껴졌다. 주일낮예배 설교를 마치고 광고를 하면서 교회 건축을 위해서 우리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성도들 모두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1년이 조금 더 지난 뒤인 2002년 11월 19일 감격스러운 교회 예배당 건축 입당예배를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성격대로 쓰시는 분이신가 싶었다. 입당예배에 동참한 모두가 비슷하게 느꼈다. 한 마디로 급한 성격에 ‘이거다’ 싶으면 무조건 밀어붙이는 내 성향대로 하나님께서 용납을 하셨다. 교회 땅을 담보로 은행에서 6천만원을 대출받아 시작한 건축이 4개월 만에 입당을 한다니까 부자 목사님이 왔다는 오해와 더불어 ‘대단한 목사’라는 소문까지 났다. 성도들은 마냥 기뻐했다. 교인들이래야 모두 14명이었다. 발한동지역이 눈부시도록 훤해졌다면서 묵호중앙시장 상인들도 좋아했다.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헌신이 있었다.
교회를 건축하는 중에 어느 월요일 아침, 천곡동에서 역시 개척교회를 섬기고 계시는 연세 많으신 김은경목사님이 찾아오셨다. “하나님께서 김정우목사님을 무척 사랑하시나 봐요”하며 봉투를 내밀었다. 새벽에 기도하는데 주님이 “갖다 주라”고 하셔서 갖고 왔다는 것이다. 250만원이 들어 있었다. 깜짝 놀랐다. 어촌지역에서 넉넉지 않은 개척교회를 하시는 분이 본인이 섬기는 교회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적잖은 금액을 이렇게 선뜻 내놓으시다니..... 그 이듬해에 김은경목사님도 천곡동에 아름답게 교회를 건축하셨다. 그 즈음 인건비 때문에 무척 난감해하던 나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도와주시며 위로해주신 일이었다. 순복음사랑교회 입당예배를 마친 후, 하루하루가 기쁘고 즐거웠다. 하지만 월말이 되고 신용카드 결제일이 다가오면 온통 신경이 쏟아졌다. 소위 돌려막기를 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마냥 불어나는 금액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게다가 성도들이 교회 사정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던 터라 예배를 드리려고 교회로 올 때마다 마음에 큰 짐이 되고 있었다. 성도들에게서 기쁨이 사라진 것이다. 한 달 내내 죽으라고 헌금들을 해봤자 이자조차 어려우니 의욕은 떨어지고 담임 목사님 얼굴 보기가 죄송하고 마음이 괴롭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를 건축한 뒤로 도저히 목회자 생활비지급이 곤란한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교회 건축을 한 후로 달라진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기독교연합회에서의 나의 입지였다. 동해로 간지 고작 2년이 못되어 동해시 기독교 연합회의 회계를 맡게 되었다. 연합회 회장 목사님을 위시하여 여러 임원들과 회원들과의 교제가 폭넓게 이루어졌다. 교회 형편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것까지도 준비를 하신 것이었다. 늘어나는 부채 때문에 이만 저만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급기야 51세의 나이에 아랫니 일곱 대를 발치하고 틀니를 맞추게 되었다. 주문진 권치과라는 치과의원에서는 목회자들을 무료로 치료해준다면서 친구 목사님이 자꾸 권하여 한 번 찾아갔더니 내 치아의 사진을 찍어 보여주는데, 치아는 깨끗하고 튼튼하지만 치근이 거의 다 삭아서 2mm미만 남은 상태였다. 동해시에서 주문진까지 거의 1시간 반쯤 시간이 걸리니까 오신 김에 발치를 하자는 것이었다. 매우 건강한 편이라 괜찮을 것 같다며 왼쪽 아래 앞니를 포함하여 어금니까지 나란히 7대를 뽑았다. 교회로 돌아와 거울을 쳐다보니까 영락없는 영감님으로 변해 있었다. 얼굴 왼쪽 부분이 퉁퉁 부은 데다 아래쪽 치아 절반이 사라졌으니 그야말로 늙은이처럼 보였다. 2층 교회로 올라가서 강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앞으로 어찌하면 좋습니까?” 울고 또 울었다. 그 순간 주님의 위로하심이 있었다. 여기까지가 내 몫임을 깨닫게 하셨다. 동해시 기독교 연합회 임원 목사님들은 이런 형편을 모두 알고 있어서 늘 중보기도하며 신경을 써주고 있었다. 그 중에 부회장이었던 성결교회 조완희목사님이 조심스럽게 내게 물으셨다. “같은 교단이어야 되겠죠?”
사실 기하성 교단에 속한 여러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었다. 모든 재산권을 넘겨드릴 터이니 3년만 여기서 더 목회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의 편지들을 보냈지만, 서울순복음교회 김용완목사님께서 10만원씩 후원해주겠다는 답장뿐이었다. 김용완목사님이 정말 고마웠다. 달리 방안이 없어서 교인들과 의논한 결과, 부채 상환이 가능한 건전한 교단이면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당시 삼척에서 부목사님으로 계시던 40대 젊은 목사님이 오셔서 새롭게 출발을 하기로 하고 나는 또 교인들과 이별을 했다.
그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하던 친구 목사님이 위로하며 말을 하였다. “목사님, 철원지역이 춥기는 해도 50m/m 조립식 건물도 있고 성도가 서너 명은 있다니까 거기서 사역을 하면 어떻겠냐?”는 얘기였다. 성도의 수는 상관없다고 대답을 하고 이삿짐을 준비했다. 얘기했던 대로 3명의 성도가 있었다. 40평가량의 대지, 35평 단층건물 안에 10평 남짓 사택이 딸려 있었다. 정말 혹독한 겨울을 두 번 지내야 했다. 현재 우리 교단 동서노회 노회장인 김남심 목사님이 지붕을 우레탄 폼으로 덮을 수 있도록 200만원을 헌금해 주셨다. 실내 온도가 5~6도 가량 차이가 났다. 벌써 10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 고마움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또한 감사했던 것은 가까운 군부대 안에 있는 청운교회를 함께 사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주님을 처음으로 만났던 곳이 강원도 철원군 신술감리교회였고 육군 상병 시절이었다. 신철원에서 2년간 목회하면서 가장 보람된 일이 바로 군부대사역이었다. 내 가슴은 뛰었다. 내가 그 현역 군인들과 같은 시절에 주님의 은혜를 받았고 주의 종으로 서원을 했고 이제는 내가 청년 군인들에게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감격스러웠다. 처음엔 설교가 시작이 되면 아예 엎드려 잠을 청하는 장병이 절반이 넘었다. 영혼을 살리는 시간이 그렇게 허비되어선 아니 되겠기에 그 다음 주부터는 부흥회식으로 주일예배를 인도하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는 적중했다. 그 이듬해 나름 큰 계획을 세웠다. 갈현제일교회 김진석목사님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 교회는 매월 마지막 주일이면 항상 군부대 선교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왕이면 우리 교회가 함께 섬기고 있는 청운교회에 한 번 와달라고 했더니 기꺼이 동의를 해주셨다. 참 감사했다. 드디어 약속된 주일 저녁, 군부대에 갈현제일교회의 청년 열대여섯 명과 장년들 몇 분이 동행을 하였다. 내가 예상했던 장병들 숫자는 200명 남짓... 그러나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300명이 훨씬 넘었다. 결신자로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왕과 구주로 영접한 장병이 50명도 훨씬 넘었다. 다함께 일어나 찬송을 부르며 눈물로 기도했다. 목사님이 추첨한 5명의 장병에게 대대장님이 직접 특별휴가증을 나눠주었다. 함께 율동을 하면서 온몸으로 찬양을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동해시에서 건평 70평(2층) 교회를 건축한 후로, 부흥사로서 일하도록 인도하셨다. ‘한국 기독교 영풍회’에서 11년째 임원으로, 현재는 공동회장으로 섬기고 있다.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주의 종으로써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다양하고도 폭 넓게 열어주셨다. 지나간 26년을 돌아보면 정말이지 별의별 일들을 다 겪게 하셨다.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나를 다듬어 가시면서 나를 만들어 오셨다. 앞으로도 더욱 그리 하실 것을 기대한다.
은퇴하신 선배 목사님께서 강권하셔서 경산에 있는 기도원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단독목회 10년을 보장해준다는 구체적인 내용의 목회계약서까지 써주시겠다고 약속하시기에 조금도 염려하지 않고 내려갔다. 내가 속해 있는 부흥사 단체의 목사님들을 강사로 모시고 넉 달간 매주 연속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처음에는 그 지역에 있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제법 많이 참석을 했다. 아마도 기도원(수양관) 주인이 바뀐 줄 알고 왔던 모양이다. 나중에야 알았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름을 바꿔야 삶이 펴진다”면서 개명을 권유하고 이름을 지어준 뒤엔 적잖은 헌금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미 그 주변에 사는 사람은 대다수 그런 얘기 때문에 부담을 느껴왔다는 후문이었다. 바로 그러한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부흥회 참석인원이 자꾸 줄어들었다. 석 달째 접어드니까 현저하게 줄어드는 상황이 되었다. 고작 10여명만 참석하는 지경이 되었다. 강사 목사님들께 송구하고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도저히 그대로는 아니 되겠기에 선배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다. 목회계약서에 명기된 대로 목회 현장에는 나서지 말아달라고 했다. “연세 많으신 원로목사님이 부흥회 시간에 팔짱낀 채 다리를 꼬고 앉아 계시면 어떤 강사가 마음 편하게 설교를 할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내가 몸이 아파서 그런 것 아니냐”며 되레 섭섭한 마음을 표하시기에, “그래서 참석하시지 말라고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했더니 “어찌 목사가 아프다고 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빠질 수 있겠느냐”하시더니 그때부터 노골적으로 나더러 집을 비워주고 떠나가라고 하셨다.
정말이지 경산을 떠나오게 된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고 설교해왔던 내가 또 큰 실수를 한 것이다. 2012년, 내 나이 벌써 60이 되었다. 이젠 마지막 개척이라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매달렸고, 마침내 2012년 5월 26일(토) 인천시 효성동에 열방교회를 설립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돕는 손길들을 붙여 주셨다. 비록 지하 50평이지만 검도장을 하던 곳이어서 바닥으로부터 15Cm 위에 값비싼 원목으로 마루가 깔려져 있고, 탈의실과 샤워장도 갖춰져 있어서 우리 입장엔 최적의 조건이었다. 개척준비를 마치고 5월 26일(토) 설립예배를 드리는 날, 50명이 넘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참석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축복해 주었다. 그날로부터 10개월이 지나는 동안 효성동 지역에선 단 한 명도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뼈 속 깊이 한 영혼의 귀함을 실감하도록 만드셨다. 그 무렵에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동신) 동서노회 노회장인 김남심목사님이 “우리 같이 한 번 일을 해보자”며 거듭 교단 가입을 권하면서 모든 절차(비용)까지 책임지겠다기에 편목과정을 수료하기로 하고 25년간 몸담았던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를 탈퇴하고 합동동신 교단으로 교회 가입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나를 예쁘게만 보셨는지 ‘민족사랑 부흥사회’라는 단체를 맡겨 주셨다.
지금 현재 ‘민족사랑 부흥사회’ 대표총재이신 전석도목사님께서 목회자 모임을 마치고 함께 식사를 하던 중에 느닷없이 나더러 대표회장을 맡아보라는 권유에 우리 열방교회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제 입장을 모르셔서 그런 말씀을 하신다고 했더니, 당장 가서 보자시며 동행을 하자셨다. “전혀 지하실이 아닌데?! 너무 아름답고 멋지다”고 하면서 금일봉을 내어 놓으며 정식으로 대표회장 취임예배를 드리고 출범하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결국 2013년 2월 24일 10년간 함께 해오던 부흥사 단체인 ‘한국 기독교 영풍회’의 귀한 동역자인 현 대표회장과 세 분의 증경회장 목사님들을 모시고 ‘민족사랑 부흥사회’가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밤새 폭설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50 여명의 목사님들이 원근각처에서 동참해 주셔서 참 감사했다.
짚신을 신은 사람에게 턱시도를 입힌 것과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지만 벌써 9개월이 지나는 동안 많은 일들을 하게 하셨다. 회원 교회를 중심으로 지금껏 14차 연합 부흥성회에 이르기까지 주님은 선하고 아름답게 인도하셨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제2차 부흥성회 때 특송하기 위하여 새하늘교회 집회에 참석을 했던 대금찬양 사역자(현 열방교회 전도사) 김기연전도사님 부부를 만난 것이다.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모른다. 주님께서 그날 밤 증거하게 하신 말씀이 그들에게 큰 은혜가 되도록 역사하셨음에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성회가 끝나고 인사를 하는 그 표정이 남달랐다. 찬양사역자 명함을 주기에 그 다음날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전화를 했더니, 느닷없이 나더러 자기 영적 Mentor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겨우 단 한 번 부흥회 때 만난 게 전부인데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느냐고 했더니 밤늦도록 부부가 함께 얘기를 나누고 내린 결론이라고 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6년 동안 성가대 지휘자로 대우(유급)받으며 인정(존경)받고 있던 기득권까지 포기하면서 내린 결론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 뿐임을 알고서 얘기를 하였다.
우리는 사례도 못 주고 교인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껏 섬겨오던 교회 담임목사님에게 축복기도를 받고, 성가대 지휘 후임자가 결정되어야만 된다고 했다. 물론 그렇게 하겠다고 했고 그 후로 불과 2개월도 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실력 있는 새로운 지휘자를 후임자로 보내주셨다. 그리하여 4월 첫 주일부터 두 사람이 함께 우리 교회에서 동역을 해오고 있다. 열방교회를 설립하고서 거의 1년 만에 보내주신 성도가 바로 교역자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열방교회의 모든 예배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에는 없던 야마하 키보드가 마련되어 미가엘 반주기는 이따금 사용을 하게 되었고, 지역 주민을 위한 팬플룻 무료 렛슨과 함께 ‘찬양콘서트’를 분기별로 개최하게 되었다. 그리고 CBS 작은교회 섬김센타(SCF) 찬양사역자들과 함께 폭넓은 찬양 사역의 길도 열려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제 효성동에 살고 있는 분들 중에서 이따금 한 명씩 열방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17개월이 됐지만, 많은 것을 깨닫게 하시며 준비하도록 주님께서 인도하고 계시기에 더욱 소망이 넘친다. 지난 9월 2~3일 중계충성교회에서 열린 <제11회 전국 목회자 초청 어머니기도회 세미나>를 다녀오면서 확인하게 된 것은 ‘어머니기도회’가 하나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복음전파에 적절한 통로(매개체)임을 알았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감성을 배려하여 누구든지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원하는 어머니들에게 마음껏 기도하는 장소와 기회를 제공하면서 복음을 만날 수 있도록 매주 금요일마다 어머니기도회를 진행하려고 계획을 세워놓고 기도로 준비를 하고 있다. 팬플룻 무료 렛슨과 병행하여 자살예방센터를 개설함으로써 지역사회와 나라와 민족을 지키고 섬기는 역할을 열심히 감당해 나갈 것이다. 비록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임대료가 밀리고 휴대폰이 정지되거나 자동차 가스비가 없어서 난감하고 괴로울 때도 있지만, 다소 불편할 따름이지 주님을 따라가는 이 길이 결단코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감사하고 또한 감사하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깨닫고 결단하는 것은, (눅13:6-9)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가 3년 동안 땅만 차지하고 열매를 내지 못하여 주인이 과원지기에게 찍어버리라고 했을 때 과원지기가 약속한 것처럼, 아무리 어려운 역경과 현실이 다가와도 결코 피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더욱 열심히 땀 흘리며 거름을 주면서 결실하도록 남은 생애 목숨을 걸겠다는 것이다. 힘들어도 매일 매순간 감사하며 기뻐하며 주님을 찬양하면서 순종해 나갈 것을 다시 한 번 결단한다. 분명한 사실 중 하나는, ‘작은 나무들이 없이 큰 나무로만 아름다운 숲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규모가 크든 작든 주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교회들이 더 많아져야 될 것이다. 개척교회를 섬기는 성도들과 목회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쳐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한다. 또한 도회지의 수많은 개척교회와 농어촌 미자립교회들이 우리 주님의 은혜로 승리하기를 기대한다. 작은 위로와 용기가 되길 바라며... 김정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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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생이 많으셨군요.
고생이라고 여겨지지 않으니 그것이 더 감사하답니다.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