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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한국 천주교 태동에 대하여.
1. 들어가는 말.
아래 글은 2000년 9월 경에 교구 심포지움 직후 작성된 글이다. 교구 심포지움에서 천진암 성지의 문제점들을 언급하면서, 광암 이벽 선조의 역할에 대하여 심히 폄하하는 발언들이 나온 까닭에 이에 대하여 정당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작성한 글이었다. 그런데 요즘 <기쁨과 희망 사목 연구소>에서 그 기관지인 <함께 하는 사목> 등에서 다시 천진암 성지의 가치를 폄하하고 부정하는 글이 나오고 있고, 또 일부 교수들에 의하여 서울 교리신학원등에서 천진암 성지가 거의 조작된 것이라는 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말들이 나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에 많은 신자들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으며, 도대체 천진암 성지의 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표하고 있다. 본인은 천진암 성지에서 근무한 경험과 그동안의 사제생활 동안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천진암 성지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또 무엇이 여러 학자들로부터 문제가 되고 있고, 바른 판단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근거을 제시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아룰러 가능한 범위내에서 천진암성지의 내적 문제점에 대하여도 언급을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천진암 성지의 내적 문제점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음으로 해서, 외부로부터 계속 지적당하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천진암 성지가 왜 한국 천주교회의 중요한 성지인가부터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2. 본 론
이승훈 영세 이전에 조선에는 이미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고 보는 이유에 대한 논증.
가. 초기 선각자들의 저술을 통하여 증명함
- 「천주공경가」, 「십계명가」, 「성교요지」 글 중심으로.
가장 신빙성있는 증거는 1777년경에서 1779년 경에 있는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문건이다.1) 즉 1779년경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천주공경가’ ‘십계명가’ ‘성교요지’등의 글이 있다. 이 글들에 대한 자세한 해석과 형성배경에 대하여는 김옥희 수녀의 「한국 천주교 사상사 I」-광암 이벽의 서학사상 연구-를 참조할 수 있다. 蔓川遺稿(만천유고)2)라는 글 속에 들어있는 이 글들은 학자들의 분석에 의해 1779년 천진암 강학회 당시 이벽과 정약종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본다. 3)
이 글들의 존재로 인하여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도 증명이 되고, 그곳에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의 존재도 증명이 되는 것이며 광암 이벽의 신학 사상과 공동체의 지도력도 함께 검증될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천주공경가를 살펴본다. 천주공경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4) 이를 현대말로 옮겨 적으면 다음과 같다.
어와세상 벗님네야 이내말씀 들어보소 -> 집안에는 어른있고 나라에는 임금있네.
네몸에는 영혼있고 하늘에는 천주있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는 충성하네
삼강오륜지켜자자 천주공경 으뜸일세 이내몸이 죽어저도 영혼넘어 무궁하리
인륜도덕 쳔주공경 영혼불멸 모르며는 사라서는 목석이요 죽어서는 지옥이라
천주있다 알고서도 불사공경 하지마소 알고서도 아니하면 죄만점점 쌓인다네
죄짓고서 두려운자 천주없다 다시마소 아비없는자식봤나 양지없는 음지있나
임금용안 못뵈았다 나라백성 아닐런가 천당지옥 가보았나 세상사람 시비마소
있는천당 모른선지 쳔당없다 어이아노 시비마소 쳔쥬공경 미더보고 따르면은
영원무궁 영광일세
이러한 훌륭한 글을 이미 이벽선생은 천진암 강학회 당시 작성하였던 것이다. 5) 학자들은 강학회 당시 또는 강학회가 끝난 직후 이 작품을 만들었으리라고 본다.6)
또한 선암 정약종의 <십계명가>를 살펴보자.
십계명가의 내용을 살펴볼 때 당시 조선 학자들 내에서 성서와 교리에 대한 인식이 얼마만큼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고 본다. 선암은 십계명에 대해 매조(每條)마다 한글 정형시로 읊었고, 어떠한 방법으로 이 십계명을 사람들이 준수해야 하며 경건히 항상 잘 지켜 나가야 하는 것인가를 교훈적으로 가르치고 있다.7)
<제 1 계> ‘한분이신 천주를 만유위에 공경하라’에 대하여
세상사람 선비님네 이아니 우수운가 -> 사람나자 한평생에 무슨귀신 그리많노
아침저녁 종일토록 합장배례 주문외고 있는 돈 귀한재물 던져주고 바쳐주고
자고깨자 행신언동 각귀귀신 모셔봐도 허망하다 마귀미신 우뫼한고 사람들아
허위허례 마귀미신 믿지말고 천주믿세 하늘위의 계신천주 버레갓탄 우리보소
광대무한 이우주에 인간목숨 내어주셔 지혜지가 깨달으며 우주섭리 알고나면
천주은혜 밝은빛을 무궁토록 받들련가 사람지혜 우둔하여 꼭두각시 나무신막
외고우러 복받드냐 절한다고 효자되냐 잘되어서 베복이라 못되면은 남탓이네8)
<제2 계> ‘천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에 대하여
죄짓고서 우는자요 천지신명 외찾느뇨 가난하야 굶주리자 조물주는 외찾느냐
음양태극 선비님네 상재상선 외논하뇨 말이일러 몰랐으나 이모두가 천주시네
천주닐러 거룩하샤 다고말고 론치마소 금수갈길 져인고로 사람갈길 따로있네
곤경하여 빌지말고 가르침을 깨쳐보세
<제 3 계> ‘주일을 지키라’에 대하여
일곱날중 엿새간은 근면노력 다하고서 일곱째날 고요히 천주공경 하여보세
갑론을박 쉬지않고 논쟁구궐 무용일세
<제 4 계> 부모에게 효도하라에 대하여
천지고금 만물지사 부모효도 으뜸일세 부모은혜 모르고서 불효자식 되고나면
죄중에서 제일크고 죽은후에 지옥가네 하늘같이 넓은 부모정이 일컬으면
일간금수 초목만물 그아버지 천주일세 부모효도 알고지면 천주공경 알고지고
영원불멸 큰 은혜 하시필경 얻어지네
이상과 같은 <십계명가>와 <천주공경가>의 내용을 볼 때도 그 내용의 깊음과 표현의 탁월함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글들이 서양 선교사가 한 사람도 들어와 있지 않고 정식으로 선교사로부터 한 사람도 교리를 받고 영세한 적이 없는 1779년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벽의 「聖敎要旨」에 대하여 살펴본다. 이벽의 성교요지의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결정적으로 이승훈의 영세 이전에 또는 영세를 한 직후 한국의 초기 공동체에서 이미 상당한 수준의 신학적 사상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그 중에서도 이벽의 투철하고도 탁월한 신앙심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벽의 <聖敎要旨>는 분량도 상당하고 내용도 매우 심오한 것이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소개하고 자세한 것은 출판된 책을 통하여 알아보도록 안내하고자 한다.9)
<제 1 절>
아직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 / 이미 상제(上帝)가 계셨으니,/ 오직 한분 참 신(神)으로/ 능히 비할 성인이 없으셨네. / 천주님 엿새동안 우주를 지으실 때/ 하늘과 땅을 먼저 열으시니/ 그 가운데 온갖 만물 많기도 하고/ 희한하며 또한 기이하도다./ 마침내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드시고/ 장차 영혼을 불어 넣으신 뒤/ 살아갈 땅과 떠를 주시고/ 그밖에 천만 가지를 다 주시었도다./
다시 사람으로 하여금 가정을 꾸미도록 / 여자를 시집보내 남편을 지아비라 부르게 하니/ 비로소 인간과 하느님 한 뜻이 되었도다/ 거기엔 구하는 모든 것이/ 예비되지 않은 것이 없건만은/ 그러나 인간의 선․악의 욕망 손재디 말라 명하심을 듣지 않고/ 먹으면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다고/ 악마가 고하는 그 말을 듣고 /금단의 열매를 만지고 따니/ 이로 인해 하느님께 죄를 지었네.
<제 2 절>
아벨에게 천주 친히 전하시니/ 양을 잡아 제사하고 마음 깊이 신앙하게/ 맏아들 카인이 살의를 품고 죽이니 / 그 죄의 미침이 오늘에 이르도다./ 죄에 물든 저 종족 / 다만 안일과 명리만을 구하거니/ 육신을 사랑하고 여색(女色)을 즐기며/ 말과 황금(재산)만을 늘어 놓도다./
이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 옛날과 같지 않아/ 그 종 노아에게 뜻을 이미 밝히시고/ 곧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 큰 홍수가 사방으로 횡행하여/ 가권이 흩어져 모두 다 죽으니/ 그 죽은 무리를 어찌 다 물으리오?
의인과 함께 방주로 돌아온 여덟 사람/ 그들이 각각 끌어 들인 암․수 동물이 뒤따라 들어와 살았을 뿐이네.
< 제 3 절>
그런고로 또 더욱 가르치심을 독려하여/ 세상에 복을 심히 더하시고/ 예수님을 보내시니/ 이분을 구주로 맞이하셨네/ 이분은 성부,성자, 성령의 삼위중 제이위이시나/ 오륜을 따라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셨네.
꽃다운 나이에 성전에 이르러/ 모임 가운데서 성경책을 받으시고/ 뭇선비와 서로 언약을 맺으시되/ 이치와 법도에 모름이 없으셨네/ 예절과 율법을 지켜/ 12 사도를 거느리셨네/ 냉가성읍(冷迦城邑)과 파미 도로와 유태국과 시내산에서/ 왕으로서 온아하심은/ 후장에서 밝히 노래하리라.
( 중략)
<제 49절>
예수님은 신하와 각료를 거느리고/ 태평 성대를 이룩하신/ 우탕 요순과 같은 어지신 임금이요/ 세상을 경계하고 바로잡기론/ 仲由와 閔損, 孔孟 같으신 성현이시로다./ 부화하고 방종함과/ 청렴하고 순박함을 헤아려/ 사람의 도리를 엄히 구별하셨으니/ 악은 불태우고/ 뜨거운 가슴을 어루만지며/ 하느님을 간절하게 간구하여라/
이상은 광암(曠菴) 이벽(李檗) 선조의 성교요지의 극히 일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 잠깐의 인용을 통하여도 이벽 선조의 신앙과 그의 신학사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은 선교사가 한 명도 없었고, 정식으로 가톨릭 교리를 배운 것도 아니며 오직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서학(西學) 서적만을 가지고 천주교의 도리를 학습할 수 있었음을 생각할 때 그의 탁월함이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심지어 성서 공부를 정통으로 한 사람도 짓기 어려운 문장이 곳곳에 엿보인다. 따라서 이것이 과연 이벽의 작품인가 그리고 과연 이것이 1779년 경에 이루어진 것인가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성교요지를 가지고 박사학위 논문을 쓴 사람이 두 사람이나 되고 (이성배 신부와 김옥희 수녀) 그리고 교회사에 일가견이 있는 문학박사 하성래 교수가 성교요지를 현대어로 번역한 책들을 보면 이것은 분명 이벽 선조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성교요지(聖敎要旨)가 분명히 광암 이벽의 작품으로 보고 이것에 대한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주요한 논서들은 다음과 같다.
가. 김옥희, 한국 천주교 사상사 I- 광암 이벽의 서학사상 연구. 서울:도서출판 순교의 맥, 1990.
나. 하성래, 국역 영인판 한국 천주교회 고전 총서② 성교요지(聖敎要旨), 이벽지음, 하성래 번역.성황석두 루가 서원, 1986.
다. 이성배, 유교와 그리스도교- 이벽의 한국적 신학원리- 분도출판사, 1979.
이중에서 가) 김옥희 수녀의 책과 다)이성배 신부의 책은 각각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을 기초로 한 것이다. 이 분 들의 저서는 그들의 학문적 깊이나 또는 학위 수여과정의 검증을 거친 것으로 볼 때 모두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저술 연대에 대하여는 조금씩 이견이 보이지만 포괄적으로 볼 때 천진암 강학회가 이루어진 1779년에서 이벽 선조가 귀천(歸天)하게 되는 1785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1812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한글필사본에서 분명하게 “이 성교요지는 옛 이벽선생께서 「천학초함」 읽으신 후 지으심이라”고 나온다고 한다.10)
나는 이 상황에서 묻고 싶다.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를 부정하고 그곳에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묻고 싶다. 자발적인 신앙 공동체의 형성과 공동의 수계 생활 없이 어떻게 이러한 글들이 나올 수 있는가 하고. 이러한 글들이 출현한 것은 명백히 공동의 수계 생활을 통하여 즉 신앙공동체의 형성을 통하여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신앙공동체의 생활을 명백히 뒷받침하여주는 기록들이 있다.
나.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의 존재와 그 신앙 공동체성을 통한 논증
김옥희 수녀는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에 관한 기록들을 다산 정약용 문집에 있는 녹암 권철신(鹿菴 權哲身)의 묘지명과 다산의 형 정약전(丁若銓)의 묘지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11) 그리고 다산의 문집과 기사들을 원사료로 하여 이루어진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와 빠리의 외방전교회의 고문서인 외국 사료들 안에서도 이 사실에 관한 기록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는데 주로 광암 이벽의 활동을 중심으로 찾여져 있다고 한다. 12)
다산 정약용이 지은 정약전의 묘지명에 나타난 천진암 강학회에 관한 글과 샤를르 달레 교회사에 나타난 강학회에 관한 글의 전문은 김옥희 수녀의 「한국 천주교 사상사 I」에 잘 나타나 있다. 13) 김옥희 수녀의 글에 의하면 다산의 문집에 나타나 있는 자료와 달레 교회사의 자료가 천진암주어사 강학회에 관한 상황을 알 수 있는 전체 자료이다. 그 중에서도 이벽과 함께 지냈던 다산의 기록은 가장 신빙성있는 일차 사료라고 말할 수 있겠고, 한국교회의 중요한 사료들을 모아서 만든 달레의 기록으로 이 강학회의 성격을 보충하여 알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다산의 저서로 보이는 「蔓川遺稿」안에 나타나는 <천주공경가>,<십계명가>,<성교요지> 등의 내용을 살펴볼 때 이 강학회가 어떤 분위기에서 이루어졌고, 또 강학회 이후 이벽을 중심으로한 친서학적(親西學的) 선비들이 어떠한 신앙의 삶을 살았는가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고 본다. 김옥희 수녀는 <십계명가>와 ,천주공경가>를 자신의 저서에 풀이하여 놓고 종합적으로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 지금까지 보아온 광암의 <천주공경가>와 선암의 <십계명가>에서 일별한 설명과 강조점을 종합하여 보면, 그들은 일반 대중인 신도들에게 종교적인 행사와 의식을 통하여 심리적인 긴장과 새로운 광명의 세계에 대한 희망을 주면서, 교단생활(敎壇生活)을 이끌어 나아가는 교단조직의 운영방법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남인신서파 인사들의 천지암 주어사의 강학회와 광암 이벽의 서학(西學) 사상이 한국 사상사적인 견지에서 볼 때 주자학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출발하여 복고주의적 문화활동으로 간주되는 고대 원시유학(原始儒學)인 수사학(洙泗學)의 표방에서 그리스도교 사상인 서학과 철학적인 연관성을 찾게 되었고, 이러한 광암의 문화적인 활동이 두 세계의 종교 문화 사이에서 교량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역사적인 의의가 내포되어 있음을 표출하는 것이다.”14)
김옥희 수녀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1779년을 즈음한 저서들과 당시 정황을 살펴볼 때 이미 조선 안에서는 이벽을 비롯한 선비들을 중심으로 상당한 정도의 수계 생활과 아울러 신도들을 이끌 수 있는 신앙의 초기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훗날 이승훈의 북경파견도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강학회에 관한 사료들을 살펴보자.15)
<<與猶堂全書>>의 <先仲氏(정약전) 墓地銘>
당시 성호 이익의 문하인 이윤하, 이승훈, 김원성 등은 석교(石交)를 맺고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기 위하여 주자의 학을 넓히고 수사(洙泗)에 까지 소급해서 ‘揖讓講磨’하여 서로 ‘進德修業’을 했으며 권철신에게 집지(執贄)하여 교(敎)를 듣기를 청했다. 그들은 겨울달에 주어사에 우거(寓居)하여, 강학에 오임 자가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몇 사람이 이었다. 이 때 녹암 권철신이 스스로 규정을 정해 주어서, ,새벽에 일어나 얼음을 깨고 내수로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주자의 숙야잠(夙夜箴)을 외우고 해가 뜨면 경재잠(敬齋箴)을 외우고 정오에는 사물잠(四勿箴)을 외우고, 해가 지면 서명(西銘)이라는 것을 외웠는데, 그 때의 분위기가 장엄하고 신중하며 정성껏 하였고, 아무도 규정과 법도를 잃거나 깨뜨리는 이가 없었다. 특히 득 웅에서도 이 때를 당하여 이승훈은 자신을 부숴뜨리고 갈고 닦아서 자신을 강하게 연마하여서 서교(西郊)에 나아가 향사례(鄕射禮)를 하였는데 그 광경을 보려고 모인 자가 백여명이나 되었다 한다. 오임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칭찬하기를 삼대(三代)의 시대가 다시 밝는다고 하였으며 풍문을 듣고 義를 행하기 위해 모인 자가 군중을 이루어 정연했다. 계묘년 가을에 정약전이 경의(經義)로서 진사가 되었으나 과거를 경시하여 말하기를 “대과(大科)가 우리들의 뜻하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일찍이 이벽을 따라 역수지학(曆數之學)을 배우고 기하원본(幾何原本)을 연구하여 그 정확하고 섬세한 뜻을 철저히 이해했으며 새로운 학설을 듣고 흔연히 기뻐했다. 그러나 직접 실천하지는 않았다.(漢文原本 생략)
<<與猶堂全書>>의 <녹암 권철신 묘지명>
선형(先兄) 약전은 문인(門人)으로서 공을 섬기었는데, 공(권철신)은 일찍이 기해년(1779) 겨울에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하였다. 그때 이벽은 눈길을 헤치고 밤에 찾아와 오래도록 촛불을 켜놓고 경(經)을 담론하였다.
(先兄若銓執贄以事 公昔在己亥冬 講學于天眞庵朱魚寺 雪中李檗夜至 張燭談經)
<<蔓川遺稿>>의 <天主恭敬歌>
기해년 납월 (음력 12월)에 주어사에서 광암 이벽이 지음
( 己亥年 臘月 於朱魚寺 李曠菴檗 作歌)
<<蔓川遺稿>>의 <十誡命歌>
기해년 납월 주어사 강론 후에 정선암 권공상학 이공총억 등이 작사하여 노래하였다.
(己亥年 臘月 於朱魚寺 講論後 丁選菴(若鍾) 權公相學 李公寵億 作歌寄之)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16)
정유년(1777)17)에 유명한 학자 권철신은 정약전과 학식을 얻기를 원하는 그밖의 학자들과 함께 방해를 받지 않고 깊은 학문을 연구하게 위하여 외딴 절로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은 크게 기뻐하며 자기도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때는 겨울리라 길마다 눈이 덮여 있었고, 절까지는 백여 리나 되었다. 그러나 그런 곤란이 그렇게도 열렬한 그의 마음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즉시 출발하여,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길을 용감하게 걸어갔다. 그의 여행 목적지까지 얼마 안되는 거리에 갔을 때 밤이 되었다. 그는 더 오래 기다릴 수가 없어서 내쳐 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정께 어떤 절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과 자기가 찾아가는 길은 그 산 뒤쪽 산 허리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실망은 어떠하겠는가. 그 산은 높고 눈이 쌓였고 호랑이 굴이 많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도 상관이 없었다. 이벽은 중들을 깨워 자기와 동행하게 하였다. 그는 맹수의 습격을 막아내기 위하여 쇠고창이가 달린 몽둥이를 짚고서 캄캄한 밤중에 길을 계속하여 희망하던 목적지에 도달하였다. 이벽과 그 일행의 도착은 산 속에 파묻힌 그 절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무슨 까닭으로 그 밤중에 그처럼 많은 손님들이 찾아들었는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미구에 모든 것이 밝혀져서 두려움 위에 기쁨이 따랐으며, 그 기쁜 상봉으로 빚어진 심경을 얼마동안 털어 놓느라고 미처 날이 새는 것도 몰랐다. 연구회는 10 여일이 걸렸다. 그 동안 하늘, 세상, 인성(人性)등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탐구하였다. 예전 학자들의 모든 의견을 끌어내어 하나하나 토의하였다. 그 다음에는 성현들의 윤리서들을 연구하였다. 끝으로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지은 철학, 수학, 종교에 관한 책들을 검토하고, 그 깊은 뜻을 해독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온 주의를 집중시켰다. 이 책들은 조선 사절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북경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실은 당시 조선의 많은 학자들이 그러한 책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니, 그 까닭은 연례적인 사신 행차 때에 조선 선비들이 따라가서 서양의 과학과 종교에 관해 중국인과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과학 서적 중에는 종교의 초보적 거론도 몇 가지 들어있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 신령성(神靈性)과 불멸성 및 칠죄종(七罪種)을 그와 반대되는 덕행(德行)으로 주목함으로써 행실을 닦는 방법 따위을 다룬 책들이었다. 중국 서적들의 어둡고 흔히는 모순된 학설에 식상한 그들은 정직하고 진리를 알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인지라 천주교 도리에는 아름답고 이치에 맞는 위대한 무엇이 있음을 이내 어렴풋이 느꼈다. 완전한 지식을 얻기에는 설명이 부족하였으나 그들이 읽은 것만으로 마음이 움직이고 그들의 정신을 비추기에 넉넉했다. 즉시로 그들은 새 종교에 대하여 아는 것은 전부 실천하기 시작하여 매일 아침 저녁으로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7일 중 하루는 하느님 공경에 온전히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읽은 뒤로는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다른 일은 모두 쉬고 묵상에 전심하였으며, 또 그달에는 육식을 피하였다. 이 모든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극히 비밀리에 실천하였다.
한편 작고한 유홍렬 교수의 「한국 천주교회사」에서도 이 부분에 관하여는 달레 교회사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18)
이상의 인용된 사료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1779년을 즈음하여 천진암주어사 지역에서 분명히 강학회가 열렸고, 성리학의 논증에서 나아가서 천주학의 도리를 연구하게되었으며 나아가 신앙적인 모습을 보이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며 그 신앙적 생활의 결실로 나온 것들이 천주교 도리를 설파하는 가사(歌辭)가 지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최소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신앙 공동체가 이승훈 영세의 배경이 되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김옥희 수녀는 이 즈음의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편 기해년(1779)에 천진암 주어사의 강학회 때 작사된 천주가사(天主歌辭)들, 즉 심도깊은 신앙에 대한 <십계명가>나 <천주 공경가> 같은 내용들이 한번의 강학회 집회로 쓰여졌다고는 아무도 생각할 수가 없으며, 천주교 신앙과 교리에 대해 세련되고 깊은 내용임을 누구나 다 인지하는 사실이다. 그렇게 때문에 1779년 단 한 번의 모임이었다고 생각할 수가 없으며 달레의 교회사의 내용 중에 나오는 바와 같이 벌써 1,2년 전부터 이 집회가 존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언하면 원시유학적 분위기의 이 강학회는 결국 광암의 주도 아래 순수한 서학적인 종교의 교단조직체로 연결되게 되고 평신도 성직조긱의 모체가 된 셈이며, 그 시기는 1777년부터 1783년 이승훈이 북경에 가기까지 천진암과 주어사 등지에서 계속해오다가, 이승훈이 북경에 가고 나 뒤 이벽이 서울 수표교로 옮겨온 후부터는 이 모임이 거의 해체되었다가 이승훈이 북경에서 돌아온 후부터 다시 이 집회의 성격이나 차원을 갈리한 교계 조직적인 집회로의 모임이 되었다.”19)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이승훈 북경파견 이전에 상당한 정도의 신앙 집회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3. 마무리 글
이상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할 수 있다. 즉 1777년에서 1779년 사이에 천진암 주어사에서 권철신 등을 중심으로 강학회가 이루어졌으며, 이곳에서 상당한 수준의 철학과 종교의 문제가 다루어졌고, 초기에는 성리학을 중심으로한 유학의 원리를 다루었으나, 이벽 등이 강학에 합세하면서 천주학의 도리를 논하게 되었고 이벽의 탁월한 논리와 실천으로 말미암아 정약종 등 여러 선비들이 천주교의 도리를 실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것은 그들의 수계 실천 생활에서 매 칠일을 정하여 주일계명을 지켰다는 점과 정한 날에 육식을 피하였다는 점과 <천주공경가>와 <십계명가>, 그리고 <성교요지> 등의 상당한 수준의 천주교 도리를 설파하는 문헌이 저술된 점으로 증명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할 때 이승훈의 영세에서 한국 천주교의 신앙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심히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고, 그러한 사고는 한국 천주교회를 태동시킨 거대한 뿌리를 잘라놓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떻게 강학회과정과 그 이후에 이루어진 선조들의 수계 생활과 탁월한 신앙과 신심을 보여주는 저술들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인가. 이상에서 이승훈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이 비롯되었다고 하는 000신부님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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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7년전 발표했던 소논문의 첫 번째를인용하여 제시하였다. 나는 ‘기쁨과 희망 사목 연구소’의 누가 <함께 하는 사목지>에 글을 썼는지 글쓴이의 이름이 누군인지 밝히기를 원한다. 우리 신앙 선조의 위업에 대하여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 이름을 밝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면 ‘기쁨과 희망 사목 연구소’의 발간인과 주간 되시는 분이 그 책임을 지으셔야 할 것이다. 나는 연구소측이 원하면 지상논쟁도 공개토론도 어떤 방식의 토론도 응할 수 있다. 나는 천진암 성지의 ‘성지로서의 타당성’ 수호와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 선조들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라면, 나는 그분들 앞에 너무나 부끄러운 희생이겠지만, 어떤 희생도 치룰 마음이 있다. 연구소는 천진암 성지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로서의 가치까지 훼손하는 발언 (글)을 한 것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사과하실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행하신 가장 중요한 업적에 대한 무지와 폄하의 소산이기 때문이고, 자랑스런 우리 신앙의 선조들에 대한 크나 큰 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 합 수 가브리엘 신부. 2008년 3월 24일. 안식년 중 씀 jgabriel3@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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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아기가 태어나기전 과정이 있듯이 강학회 과정을 무시할 수 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감사 일치! 제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강학회가 없었으면 이승훈의 영세도 없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