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과 영주, 그리고 그가 남긴
선비정신
소홀하던 삼봉 정도전
최근 재조명 활발
대하사극 인기에 영주선비 이미지도 부각
▲ 정도전 영정(문화체육부 표준영정 제 54호)
‘정도전’이 최근 KBS 대하사극으로 방영되면서 전 국민들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우리고장 영주가 낳은 큰 인물이면서도
지금까지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 않다가 최근 몇 년 사이 정도전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KBS 1TV가 2년여의 준비 끝에 지난 1월부터 선보인 대하사극 ‘정도전(극본 정현민, 연출 강병택·이재훈)’을 통해 14세기
이후 동서양을 통틀어 최고의 정치·사상가이자 학자였던 그의 일대기가 되살아나고 있다. 이와 함께 정도전의 고향이자
학문적 연원지인 우리고장 영주도 그의 부활과 더불어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고 있다.
삼봉의 고향인 우리고장 영주도 소개됐다. 지난 1월 5일 방영된 2화에서 극이 끝나자 바로 삼봉 정도전이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삼판서고택과 제민루 등이 소개되며 그동안 단양출신 등으로 잘못 알려졌던 그의 고향이 영주임을
밝혔다.
또한 드라마 속 촬영지 일부 역시 선비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도전의 집은 선비촌의 ‘두암고택 가람집’이고
목은 이색의 집 역시 선비촌의 ‘해우당 고택’이다. 정도전이 분경(화분 항아리)을 들고 집을 나서 걷는 길과 유년시절
정몽주와 나란히 걷는 배경 역시 선비촌이다.
특히 포은 정몽주와 어릴 적 각촉부시(초에 새겨진 금이 타기 전까지 시한을 정하고 시를 짓는 놀이)를 겨루던 장소는
소수서원의 ‘취한대’, 정몽주와 시국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장소는 봉화 청암정(구암정)이다. 이와 함께 경북도와
영주시도 드라마 제작지원과 장소협조 등의 후원을 통해 지역 알리기에 나서 앞으로 드라마가 진행되면 될수록 영주도
함께 알려지고 있다.
그가 태어난 고향에서 조차 오래동안 잊혀졌던 그의 생애가 다시 한번 조명을 받고 있는 것이다.
■ 정도전의 고향은 영주, 그런데 왜 단양이었을까
▲ 삼판서고택 현재(좌)의 모습과 과거(우)의 모습
정도전(1342-1398)은 영주 구성공원 아래에 있는 삼판서 고택에서 태어났다. 당시 어린 정도전이 격동의 역사를 이끌어
갈 인물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어린시절을 이곳에서 보내며 구성공원에 올라 뛰어 놀기도 하고
소백산을 바라보며 큰 꿈을 키웠을 것이다.
정도전이 10대 중반이 되었을 때 아버지(정운경. 1304-1366)가 개경으로 벼슬을 옮기자 아버지를 따라 개경으로 올라가
이색의 제자가 됐다.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아버지 정운경이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과 가까운 사이였던
것이 인연이 됐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정도전은 학문의 깊이가 더욱 깊어졌으며 정몽주, 이숭인, 이존오 등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됐다. 14살 위인
이색은 정도전을 군자라 칭하며 “존경한다”고 했고 5살 위인 정몽주는 “안목이 뛰어나다”고 했다.
하지만 삼봉 정도전이 목은 이색을 스승으로 모셨다는 데 대해서는 반론이 있다. 지난해 11월 인문도시 선정 일환으로
동양대 한국선비연구원이 주최한 ‘삼봉 정도전 학술포럼’에서 정광순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정도전의 스승은 드라마에서처럼 목은 이색이 아니라 우리고장의 당대 유학자였던 최림과 진중길이었고
익재 이제현의 문하에서 배우기도 했다.
진중길은 영주의 향토성씨 중 하나인 풍기진씨로 이색의 아버지 이곡과 동문수학한 사이고, 최림은 진중길의 사위로
현재 소수박물관에 보관중인 국보 제111호 안향 선생 초상을 흥주군수 시절 처음 모본해 흥주향교에 모신 인물이기도
하다.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고 그동안 잘못 알려진 정도전의 일대기를 재조명해 바로잡을 학술지가 책으로 출간됐다.
동양대학교 한국선비연구원이 발간한 학술지 ‘한국선비연구논총(출판 영주미디어)’이 바로 그것이다. 이 학술지에는
정도전 생애와 학문, 사상 등 관련 논문이 10편이 실려 있다.
우리고장 영주가 역사인물에 대한 평가를 게을리 하는 사이 소백산 넘어 인근 단양에서는 삼봉 정도전의 출생지를 자신의
지역이라고 굳혀갔고 도담상봉 공원에는 아예 삼봉의 동상까지 세웠다. 단양군이 이처럼 꿋꿋하게 삼봉의 고향이 자신의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단 하나의 전설에서 기인한다. 단양군 문화관광 홈페이지에는 도담삼봉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전설을 게시하고 있다.
<당시 정선군에서는 단양까지 흘러들어온 삼봉에 대한 세금을 부당하게 요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어린 소년이었던
정도전이 기지를 발휘해 “우리가 삼봉을 정선에서 떠내려 오라 한 것도 아니요,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어 아무
소용이 없는 봉우리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으니 도로 가져가시오.”라고 주장하여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훗날 정도전은 호를 삼봉이라고 지을 정도로 도담삼봉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세 개의 커다란 봉우리가 단양까지 흘러
들어온 깊은 사연을 알 수 없지만 팔도강산에 더욱 아름다운 풍광을 더하고자 했던 하늘의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 이야기 외에도 인터넷 정도전의 출생지가 현재의 단양읍 도전리이며 심지어 도담삼봉의 정자도 정도전이 세웠다는
자료도 많이 검색되고 있다.
지금까지 나왔던 학술지도 예외가 아니다. 9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정도전의 선향은 경상북도 영주이며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라고 돼 있다. 이 글을 쓴 한 대학 교수는
학계에 정도전을 소개하는 자신의 논문에 “아이를 길에서 얻었다 해서 이름을 도전(道傳)이라 하고, 부모가 인연을
맺은 곳이 삼봉이므로 호를 삼봉(三峰)이라고 지었다”고 주장하는 등 잘못된 내용들이 수십년동안 정설로 굳어져 왔다.
■ 단양 출생은 속설일 뿐, 고향 영주 스스로 밝혀
정광순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삼봉 정도전의 단양 출생설 등에 대해 “한 마디로 속설일 뿐 근거 없는 얘기로
거론할 가치도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를 위해 직접 27차례나 단양을 방문해 조사했다는 그는
“도전리의 전은 밭전(田)이고 삼봉은 한양 삼각산(북한산)으로 동료인 이숭인이 처음 불러줬으며, 어머니 우씨는
‘단양 우씨’가 아니라 영주의 옛지명 영천(榮川)을 근원으로 한 토착성씨인 ‘영천(또는 강주) 우씨’로 우연(禹淵)의
따님이었다”는 것이다. 영주 우씨의 시조인 ‘우부(禹傅)’는 문성공 안향 선생의 어머니 강주 우씨의 증조부가 되니
한 혈족이기도 하다.
특히 부친 정운경이 37세의 늦은 나이에 귀하게 얻은 첫 아들 이름을 ‘길에서 만난 여자(밭)에게서 자식을 얻었다’ 해서
‘도전’이라 했다는 것은 말도 안되며, 정도전의 동생들도 모두 ‘道’자를 써 도존(道存)과 도복(道復)으로 누가 봐도
이는 항렬이란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정 위원은 “당시 절륜한 유학자였던 삼봉의 부친 정운경이 ‘도를 밝히고
전한다’라는 뜻에서 도(道)자와 전(傳)자를 취해 ‘도전(道傳)’ 이라 작명한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정 위원은 또한 정도전 스스로 영주가 고향임을 밝힌 사실을 ‘삼봉집’ 권2에 들어 있는 오언율시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찾아냈다.
다음 시는 자신이 태어난 삼판서 고택이 있는 고향 영주 구산(구성산)에 들러 유민들을 찾아봐 주길 당부하는 시다.
送鄭副令洪出按慶尙(송정부령홍출안경상) 경상도안렴사로 나가는 정부령 홍을 전송하다
萬古鷄林碧(만고계림벽) 만년을 푸르러라 저 계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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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 영천군(현 영주) 토성 조에 “민(閔)·우(禹)·예(乂)·팽(彭)·동(董)씨가 있다”고 기록돼 있고
‘여지도서’ 영천군 토성 조에도 영주 우씨가 2대 토성의 하나라고 전하고 있다.
■ 삼봉은 삼각산(북한산)을 지칭하는 호
정도전의 호인 ‘삼봉(三峯)’에 대해 더 알아보면 정 위원은 ‘삼봉(三峯)’이란 정도전의 호를 ‘도담삼봉’에서 따왔다는
속설을 부정했다. 그 호의 연원은 정도전 본인과 지인이 남긴 시에 삼봉이 삼각산임이 뚜렷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정 위원에 따르면 정도전이 부모상을 같은 해에 당해 고향 영주에서 4년여 동안 시묘살이를 한 후 1369년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쳤다. 그 소식에 지인들이 찾아왔고 그중 이숭인이 처음 삼봉이라 호칭했다. 이후
수많은 동료들이 이를 따라 칭했으며 그 자신도 삼봉이 마음에 들었던지 강학을 위해 지은 작은 누옥을 ‘삼봉재
(三峰齋)’로 했다고 한다.
정도전이 24살 때인 1366년 1월에 부친(정운경) 상을 당해 영주로 내려왔다. 1개월이 넘도록 산소자리를 구했으나
길지를 얻지 못했다. 하루는 한 자나 되는 눈이 왔는데 이산면 신암리 선영 구내에만 한 점의 눈도 없으므로 그 자리에
장사 지내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같은 해 12월에 또 모친(영천 우씨)이 돌아가시니 전후로 3년간 시묘(侍墓, 부모의 상중에 3년간 무덤 옆에서 막을 짓고
삶 )살이를 했다.
▲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의 묘(좌)와 어머니 영천우씨의 묘(우) (이산면 신암리)
정도전은 아버지 묘소 앞에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는 상중에도 학문에 전념하는 열정을 보여 줬다. 이 때 남방의
학자들(안비판, 이안렴, 성중서, 김사농, 유판도 등)이 배우러 왔으므로 그들을 잘 가르쳐서 모두 등과시켜 좋은 벼슬에
오르게 했다.
영주향토사연구회 김태환 회장은 “신암리에 있는 문천서당은 정도전이 3년동안 여막살이를 하던 곳으로 상주가 여막
에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소문을 듣고 선비들이 모여들자 강론을 하는 등 후학에 힘썼는데 그 여막이 지금
문천서당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또한 영주에서 시묘살이를 할 때 정도전에게 맹자(孟子) 한 질을 정몽주가 보내 준 일이 있었다. 정도전은 그 책을 보내
준 뜻을 새기며 하루에 한장 혹은 반장을 넘기며 정독해 맹자의 진수(眞髓)를 터득했다고 한다.
젊은 정도전에게 민본사상과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교시(敎示)했던 사람이 바로 정몽주였다.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
개혁에 대한 의견이 달라 갈라서게 됐다.
■ 유배 또 유배, 그 때마다 고향에 왔다
1371년 태상박사에 올라 부보(옥새)를 담당하는 등 요직을 맡은 기간이 5년이나 됐다. 1375년 정도전은 “원나라 사신을
맞아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다가 나주 회진현에 유배됐고 그곳에서 백성들을 만남으로써 개혁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1375년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1377년 이후 4년간 고향 영주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삼각산 밑에
집(삼봉재, 三峯齋)을 짓고 글을 가르치니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1383년 가을 정도전은 함경도에 있던 이성계를 만나 역성혁명의 주역이 된다. 1391년 역성혁명을 완성하기 위해 반대파를
탄핵하려다 도리어 패해 봉화로 유배됐다가 직첩과 녹권을 회수당하고 나주로 이배(移配)된다. 정도전은 봉화에서 나주로
이배 될 때 이별의 시를 남겼다.
北望行行遠(북망행행원) 북쪽을 바라보니 차츰차츰 멀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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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봄에 귀양에서 풀려 영주로 돌아왔으나 4월 4일 고려 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 등의 탄핵을 받아 영주에서
또 다시 체포돼 보주(甫州. 예천) 감옥에 갇힌다.
다시 귀양지를 광주로 옮겼다가 6월에 조정에서 다시 불러 돌아오게 하여 충의군에 봉했다. 같은 해 7월 위기에 처한
이성계는 반대파의 영수인 정몽주를 격살하고 역성혁명을 성공시켜 이성계를 신왕으로 추대해 조선을 개국했다.
개국 공신이 된 정도전은 제도와 법을 정비하고 유교 덕목을 적용한 새 도읍지 서울의 도시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요동정벌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만다.
그는 끝내 선영이 있는 고향 영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비운의 영웅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봉화정씨 영주종친회 정동섭 총무는 “참사 당시는 선생의 시신을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삼봉재 후학들이
시신을 수습해 삼각산 어딘가에 모셨을 것으로 보고 최근까지도 삼각산 근처를 백방으로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며
“현재 삼봉 기념관이 있는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에 가묘가 있다. 언젠가는 영주로 모셔 와야 한다”고 말했다.
■ 그가 남긴 선비정신
정광순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은 ‘삼봉 정도전의 출생과 학문적 연원에 대한 고찰’이란 자신의 논문에서
“삼봉은 4대 혁명 즉 전제(田制), 왕조(王朝), 국시(國是), 천도(遷都)를 완성한 인물”이라며 “이 모든 일들을
단 한 사람이 해냈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이며 세계사 속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위대한 사상가이자 정치가가 우리고장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너무 소홀하게 다뤄져 온 것 같아 부끄러움이
느껴질 정도이다.
그러나 몇해전부터 정도전이 태어났던 삼판서 고택이 이전 복원되고 그를 다시 조명하는 학술지가 발행되는 등 재조명
되고 있어 선비의 고장을 지칭하는 영주시민들의 자긍심으로 자리잡고 있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그쳐서는 안된다.
영주가 ‘선비의고장’이라고 스스로 지칭하고 있는 만큼 정도전에 대한 연구가 지금보다 더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그에
대한 선양 사업도 더욱 많아져 대한민국 대표인물로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우리고장에서는 매년 4월 이산면 신암리(작은솟골) 소재 모현사(慕賢祠)에서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
(삼판서 고택의 첫 판서)의 향사(享祀, 추모의식)가 봉행되고 있다.
▲ 모현사-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의 위패를 모신 사당 (이산면 신암리)
모현사(사당)에는 한가운데 염의공(정운경) 선조의 신위를 모셨고 오른쪽에 문헌공(정도전)과 희절공(정도전의 아들)의
신위를 모시고, 왼쪽에 일봉공(정도복, 정도전의 막내동생) 신위와 양경공(정도전의 증손)의 신위등 다섯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왕실의 반역자라는 오명으로 인해 오랜 세월동안 숨어서 제향하다가 고종 2년에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수도 한양의
설계자인 정도전의 업적이 부각되고 널리 알려지게 됨으로써 정도전의 공훈과 지위를 회복시키고 ‘문헌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지면서 공개적인 제향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우리 영주는 정도전의 숨결이 남아있는 삼판서 고택과 문천서당, 그리고 제향이 이루어지고있는 모현사에서 그가
후대에 남긴 선비정신과 학자정신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설계하고 디자인한 600년 수도 서울은 오늘도
아름답게 건재하고 있다.
출처 컬처라인 문화포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