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금(後金)... 즉,청나라의 태조가 "애신길라 누르하치"라 했으나...코메디입니다.
누르하치는...이징옥장군을 금황제(야선,에센)으로 추대한...이징옥의 여진족 후계잡니다. 그럼 명실상부한 후금의 최초황제는...이징옥장군이 분명한 셈입니다.
이런 역사적 중요한 상식을...왜 학자님들은 건성으로 넘기셨는지...실망스럽기만 합니다.
명나라 토목보의 변은...이징옥의 난을 이르는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저,뭔 이유에서...동아시아 역사가들이 명나라와 조선의 황조 계보를 지역제후까지 섞어 헤깔리게 했을 뿐으로 보입니다.
의심은 엄청 가나...
자료가 없어 헤메던 중... 엄청난 선각자적 식견을 가지신 분의 글이 올라...다리를 후들거리고 읽어 내려가고 있었었는데...젤 밑을 보니...
대륙조선사연구회...서.우.성...이런 글 출처가 있더군여...
서우성선생님의... 한 참 앞서 달리신 혜안에 탄복하며...차례 차례 이징옥이 에센(야선)임의 정황들을 퍼 옮기겠습니다.
먼저...너무 고차원이라 종전엔 뭔 말씀인지 못 알아 들었던... 서우성 선생님의 옛 글을 복습하겠습니다.
....................................................................................................................................................
[스크랩] 오이라트
글쓴이 : 선생안봉두 조회수 : 2006.12.13 13:24 http://cafe.daum.net/physicaledu01/HDN7/44
지금의 중국사와 한국사가 바른 정사라면 기록에 나타난 상황도 맞아야 한다. 현재의 중국사에서 明시기의 기록은 한국사의 조선 초기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명사에서 1449년의 전후의 기록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면서 조선왕조실록과 대비하여 보고자 한다.
명의 영종은 1435년 만 아홉 살이 채 안된 나이에 즉위하였다. 영종은 환관 왕전을 신임하여 그에게 많은 권력을 주게 된다. 영종 이후부터는 명의 중기로서 환관 정치가 성행하여 내부적으로는 항상 정국이 불안 하였고 밖으로는 북방의 몽골족의 침입과 연해로는 왜구의 침입이 창궐하여 항상 어지럽고 재정의 위기 등, 불안한 요인들이 항상 많았다. 이 시기에 북방의 유목민들의 침입에 항상 시달림을 받았기 때문에 기존의 만리장성을 보수 증축하여 방어하였기에 이시기에 구축된 산성이 지금의 만리장성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한다.
조선의 기록에도 하필이면 이시기에 장성의 축성이 이루어진다. 평안도에서 시작하여 함길도까지 옛 장성[古長城]이 있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하는데, 평안도 인산군(麟山郡) 서쪽 진병곶강(鎭兵串江)으로부터 쌓기 시작하여 의주(義州) 남쪽을 지나서 삭주(朔州)·창성(昌城)·운산(雲山)·영변(寧邊)에 연하여 뻗치고, 희천(熙川) 동쪽의 옛 맹주(孟州) 지경에 이르며, 함길도 정평(定平) 지경에 닿았다.】(실록에서)”
성화 연간(1464-1487)에는 오르도스[鄂爾多斯, Ordos]지역의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의 구축되는데 이 또한 실록의 성종때 많은 축성의 役事가 있는 것은 우연일까.
제국의 소수민족의 통제는 조공형식을 통한 무역이었는데 이것은 공납을 하고 그에 적당한 금액을 받아가는 것이었다. 1449년 오이라트 집단은 명에 사신을 보내 말을 공물로 보냈다. 이때 오이라트의 족장은 에센[也先]이었는데 그는 세력이 강대하여 여러 집단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때 명에 공납한 말의 대금이 삭감을 당하게 되자 상당한 치욕을 느끼고 여러 집단을 동원 하여 네 갈래로 쳐내려 온다. 이때 영종은 왕전에게 기만당하여 다른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출정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영종의 군대는 수십만의 사상자를 내며 대패하게 됨과 동시에 토목보에서 영종은 포로가 된다. 이것이 명사의 “토목보의 변”인 것이다. 이들은 1450년 영종을 석방하게 되고 정상적인 교역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으며 1455년 야선이 부하에게 살해됨으로서 내분에 휩싸인다. 이후 오이라트가 쇠퇴하게 되고 타타르가 흥하게 되며 17세기에는 중가르왕국이 성립되기도 한다.
이때 오이라트 집단은 누구인가. 이들은 지금의 천산산맥 북쪽의 중가르분지[準噶爾盆地], 더욱 위쪽의 이르띠쉬하[額爾齊斯河] 유역에 거주하던 유목민족이다. 이 오이라트 집단이 지금의 신강위구르자치구의 북쪽인 중가르분지와 그 북쪽 지역에서 문제를 일으킨 집단이라면 황제가 직접 그 먼 지역까지 친정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오이라트와 조선의 관계는 어떤가? 조선이 한반도라면 거리상으로 그들과의 접촉이 가능하기는 할까? 실록으로 들어가 보자
** 세종 29년(1447) 11월 6일 (을미) 야선이 경도에 이를 경우에 대한 대책을 유시하다
도승지 이사철(李思哲)·좌부승지 안완경(安完慶)을 명하여 정부에 가서 의논하기를, “야선(也先)이 군사를 거느리고 친히 이르거나, 또는 장수를 보내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강제로 곧장 경도(京都)에 이르고자 하면 변장(邊將)이 권도 말로 대답하고, 만일 들어서 좇으려 하지 않으면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니,................... 드디어 이 뜻으로 평안도·함길도 감사와 도절제사에게 유시하였다.
** 세종 30년(1448) 2월 26일 (임오) 야선의 동향 보고와 군역으로 백성을 피로하게 하지 말 것을 유시하다
의정부 좌의정 하연(河演) 등을 불러 비변책(備邊策)을 의논하고 함길도 도절제사(都節制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야선(也先)의 병마(兵馬)가 지난 겨울에 해서(海西)에 이르렀은즉, 본도(本道)는 경계가 저들의 땅과 연접되었으므로 성식(聲息)을 듣는 데에 어렵지 아니하기 때문에, 전에 이미 유서(諭書)를 내려 이를 물었는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아뢰지 않는가. 다시 친신(親信)하는 야인(野人)에게 자세히 성식(聲息)을 들어 아뢰라. 대개 성식을 알지 못하고 미리 군졸을 모으는 것은 진실로 옳지 못한 것이니, 아직 연대(煙臺)에서 망을 보고 봉화(烽火)·방수(防守) 등의 일을 더욱 더 조심하고 삼갈 것이며, 연변(沿邊)에 사는 백성들의 농사짓는 일은 또한 전과 같이 권과(勸課)하라.”
하고, 또 평안도 도절제사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적변(賊變)이 나타나지 않는데 먼저 우리 백성들을 피로하게 하는 것은 진실로 좋은 계책이 아니니, 병마(兵馬)를 별도로 징발하지 말고 예전대로 척후(斥候)를 멀리 보내고 봉화(烽火)를 삼갈 것이며, 변방 백성들의 농사[耕種]는 또한 때를 잃지 말게 하라.”
하였다. 또 양도(兩道)의 비어 사건(備禦事件)을 유시하기를,
“1. 삼위 달단(三衛韃靼)과 해서 야인(海西野人), 이만주(李滿住) 등 여러 종류의 야인(野人)들이 혹 야선(也先)에게 몰리게 되면, 일이 궁(窮)하고 형편이 군색하므로, 와서 혹 귀순하여 머무르겠다고 사칭(詐稱)하더라도, 그들로 하여금 강을 건너게 하지 말 것이며, 저들이 만일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고 오랫동안 견디면서 먼저 침범할 마음이 있으면, 기회를 봐서 날쌔게 칠 것이며, 또 만일 식량을 청하면 마땅히 대답하기를, ‘군수(軍需)는 함부로 줄 수 없으며, 또 남은 것도 없으니 청(請)을 들어주기 어렵다.’ 하고, 비록 범찰(凡察)과 동창(童倉)이라 하더라도 역시 강을 건너게 하지 말고, 그 무리의 많고 적은 것과 성심(誠心)의 여부(與否)를 관찰해서 비보(飛報)하여, 상지(上旨)를 받아 시행하라. 이 조항은 절제사(節制使)와 변장(邊將)이 깊이 생각하여 처리해서 삼가고, 시끄럽게 떠들지 말라.
** 세종 30년 4월 25일 (경진) 001 / 함길도 도절제사에게 야선의 동태를 보고하고 방수에 힘쓰라고 유시하다 함길도 도절제사에게 유시하기를,
“지금 사은사(謝恩使)의 통사(通事) 김신(金辛)이 와서 말하기를, ‘야선(也先)의 군사가 삼위 달달(三衛韃韃)을 치고, 또 노온강(老溫江) 기리미(其里未) 등처의 야인을 치매, 야인들이 힘을 합하여 막아 싸움으로 불리하여 물러 돌아갔다 합니다.’ 하였으니, 본도(本道)는 저들의 지경과 연하고 또 친하게 믿는 야인도 있는데, 이러한 성식(聲息)을 어째서 보고 들어서 아뢰지 않는가. 경이 자세히 들어서 계달하고, 방수(防守)하는 일을 잠시라도 해이하게 하지 말아서 불우에 대비하라.”
** 세종 31년 8월 1일 (무신) 요동 변란에 대한 통사 이유덕의 보고로 양계의 방비에 대한 일을 의논케 하다. ........................
** 단종 1년 2월 15일 (임인) 달달 야선의 군사가 조선을 향해 떠났다는 보고를 듣고 대신들의 의논에 따라 방어케 하다
정조사(正朝使) 유익명(兪益明)이 통사(通事)를 먼저 보내어 아뢰기를, “달달(達達) 야선(也先)이 군사를 3로(三路)로 나누어, 1로는 조선을 향하여 떠났다.” ......................................... “평안도에는 대장(大將)을 보내고, 함길도에는 병조 낭관(兵曹郞官)을 보내어 절제사(節制使)와 관찰사에게 일러서 방어를 엄하게 하도록 함이 마땅합니다.” ...................
실록의 내용과 명사와 시기가 같다는 것과 명사에서 지금의 내용이 “토목보의 변”으로 등장하지만 실록에 버젓이 기록된 이 사실은 한국사에서는 오리무중인 것이다. 한반도로서는 감히 연결할 수가 없는 지리적 강역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실록의 내용으로 보아 오이라트가 있는 지역이 조선의 평안도와 함경도에 걸치는 지역인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곳이 지금의 천산산맥 북쪽 중가얼분지와 그 서북쪽인 자이산호 주위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실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대륙 조선사 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 서우성
........................................................................................................................................................................
명나라 영종 제위 시작때면...세종대왕땐데...?...하시겠으나 이징옥 절제사의 함길도 관리자(왕)으로 안평이 파견된 게 1438년으로 나옵니다..얼추 영종과 비슷합니다.
다음...이징옥장군에 대한 소개글입니다.
..........................................................................................................................................................................
이징옥(李澄玉)은 본관(本貫)이 인천(仁川)이며 호는 원봉(圓峰)시호는 충강(忠剛: 正祖15)으로써1399년에 태어나 1453년 서거 했다.
조부 이조판서 인천군 이만영( 李萬英)의 자 전생(全生) 세종 때 양산군봉 양산부원군의 둘째 아들이다.
형 석(澄石)아우 징규(澄珪)삼형제는 경남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부터 무용이
특출하였다
이징옥은 13세 때 서당에서 돌아오던 중 오십여 명의 도적 떼를 만나 삼형제 합세하여 모두 사로 잡아 마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 후 도적떼가 없어 마을이 평온하였다 한다.
14세 때 어머니는 어린 아들들의 성장 과정에서 놀라운 일들이 많아 걱정하시면서 하루는 어머니가 살아있는 멧돼지를 보고 싶다 하시자 징석과 징옥은 급히 산으로 올라가 높은 산 깊은 계곡을 헤매면서
형 징석은 그 날 멧돼지를 잡아 살아있는 놈을 끌고 올 수 없어 결국 죽여서 메고 돌아왔다.
징옥은 3일간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행여나 호사나 당했는지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태산같이 걱정을 하던 차에 징옥은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효심으로 큰 송아지만한 멧돼지를 사로잡아 칡넝쿨로 다리를 묶은 채 어깨에 메고 집 앞 마당에 내려 놓았다.
이를 본 어머니는 너는 장래 대장군이 될 것이라 하시자 어머니 저는 장차 대황제가 되겠습니다라는 그 시대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들의 대단한 포부를 들었다.
징옥은16세 때 호사나 호환으로 민폐가 극심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관가에서는 속수무책 이었다. 호사나 호환으로 인한 민폐를 막기 위해 김해 부사 정종을 찾아 청을 드렸으나 시골 소년이라며문전박대 하자 화가 난 징옥은 한걸음에 높은 산에 올라 대호를 잡아 관가에 들어서니 정종은 기겁을 한 채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 애원하였다.
징옥은 말하기를 호랑이를 잡아 민폐를 돌보지 않는 부사는 호랑이 밥이 되어 마땅하다며 굴복시켰다.
그 날 날이 저문 귀가길에 산 아랫마을에서 여인의 슬픈 울음 소리가 들려 찾아가 보니 여인의 남편이 호식당했다는 말에 대밭 속으로 달려가 포식을 하고 있는 대호를 단숨에 잡아 여인의 원수를 갚고 가죽을 팔아 장례를 잘 치르게 하였다. 사서 야사에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삼형제 이징석,이징옥,이징규는 무과에 장원급제 하였다.
소년 절제사 이징옥
이징옥은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태종16년(1416)에 부거책장(수비대장)역임,18세에 무과 친시,별시,장원급제하여 영북진 절제사,소년 절제사가 되었다.
소년 절제사 이징옥은 북방 천하에 무예를 과시하는 한편 그 후 경원 절제사,경원 병마절제사,회령 북진절제사,경상도 도절제사,평안도 도절제사,함길도 도절제사,지중추원사,판중추원사를 두루역임하였다.
태종16년에서 단종에 이르기까지 사군 육진 개척의 국토 방위의 임무에 전념하였다.
(세종실록)세종대왕께서는 삼장수를 낳아주신 부 전생에게 어주를 하사하며 삼형제에게 주연을 베풀어 주면서 경들이 남북으로 나라의 기둥이 되었으니 국태민안이라 또한 임금이 나랏일을 잘 다스릴 수 있었다 하시면서 만대에 그 공을 잊지 않으리라 하시었다.
사군 육진 개척의 공을 치하하다.
(문종실록)문종2년 사군 육진 개척에 용감히 위명을 떨친 공과 청렴결백의 숭고한 정신을 함양하고자 왕의 특령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당대 무신 제일의 從一品의 품계를 왕으로부터 하사 받았다.
이징옥은 여진족들이 고구려 후예 영토와 지도자를 잃고 명나라에 핍박 받고 살아가는 동족임을 인식하고 여진족과 친선 수렵 대회를 자주 개최하며 호랑이를 잡아 무릎을 꿇게 하여 무위를 과시하였다.
심지어 여진족들은 이징옥 장군이 나타나면 십 리 밖에서 하마하여 무릎을 꿇고 이사가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사군 육진 개척의 위업은 만주 땅 요동까지 이름을 떨쳤으며 여진족을 무위와 덕과 지혜로 승복시켰다. 이징옥 장군의 위풍과 무용에 감탄한 여진족은 신의 존재로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하였다.
계유정난과 이징옥의 대금제국
함길도 도절제사 재직시 1453년 계유정난을 맞아 수양이 소인배 무리들과 합세하여 왕권 야욕의 거사를 실행하면서 김종서 장군과 많은 충신을 주살하고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 장군이 크게 장애가 되므로 아무런 이유 없이 직위를 파직하였다.
파직당한 이징옥 장군은 문종 왕께서 국변이 없는 한 경을 부르지 않겠다는 어명을 상기하며 수양의 음모로 알고 후임 박호문을 군재에 의해 처형하고 불사이군이란 충절을 명심하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백성을 위해 수양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 기회에 여진족은 오랜 세월 동안 영토 수복권을 주장하고 그 곳을 떠나지 않고 부족 자치국의 존재성을 내적으로 유지하고 열망하던 영토 수복을 때를 맞춰 태양처럼 추앙하는 영도자 이징옥 장군을 황제에 추대하여 대국가 건설에 앞장서자며...
오부족 대표 건주여진 추장 누르하치의 조부 기오창까가 ... 주창 특사 김수산 부장 일행과 합의.... 대금황제국(大金皇帝國)을 건국, 영토를 만주 전역으로 선포하고 도읍을 오국성(五國城)에, 만주땅(혁도아랍),건주여진에 본거지를 정하고
대금제국황제(大金帝國皇帝)에 이징옥 장군을 추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징옥 장군은 나라 걱정을 하며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특사 김수산 부장 일행의 간곡한 청을 거절하게 되면 앞뒤로 적을 맞게 되는 중대한 귀로에서 난세로 판단, 하기로 결심하고
이징옥 장군은 많은 장정들의 대열 앞에 높이 서서 엄숙하게 우렁찬 목소리로 수양이 김종서 장군과 많은 충신들을 주살하고 백성을 버리니 우리는 두만강을 건너 큰 나라를 세워 사필귀정을 맹세하자 하며 대금제국(大金帝國)대금황제(大金皇帝)에 제위하였다.
민족의 한을 품고 만주 요동 땅을 기점으로 천하통일의 야망으로 대금제국(大金帝國)건국을 선포하였다. 대민족 건설에 대금제국의 깃발을 들고 대금제국 만세, 대금제국 만세 함성의 소리는 북방천지 만주 땅 요동을 진동시킨 장엄한 대금제국의 행렬이 오국성(五國城)입성 전야에 수양의 밀지를 받은 정종, 이행검의 흉계로 야습을 당해 백일몽으로 대금제국의 운명은 역사의 비극으로 일생과 같이 밤이슬로 막을 내렸다.
4군 6진 개척에 위명을 떨쳤으며 북방 국토 방위 수호에 일생동안 전념한 이징옥 장군의 공은 우리가재평가 해야 할 것이며 오천 년 역사상 황제로 추대된 단 한 사람이란 인물로서 누군가 '난, 자칭 황제'라 했던 왜곡된 역사는 바로잡아야 한다.
대금제국 건국은 민족 동질성 회복,민족사 재창출의 계기였으며 이념과 정신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충강공 이징옥 장군께서는 계룡산 동학사 숙모전과 영월 장능 단종 배식단 사우에 사육신과 더불어 충신으로 모셔 지난 역사를 되새겨 주고 있다.
................................................................................................................................................................................
다음은..."토목보의 변"입니다.
최두환 선생님의 귀하신 댓글도 있네여...^. .^
..................................................................................................................................................................................
[동아시아] 말값안준다고 황제를 포로로 잡다.[토목보와 북경수비전]
글쓴이 : 정육점 조회수 : 35707.12.11 11:14 http://cafe.daum.net/Europa/3L0P/159 1. 우왕좌왕하는 원정군
15세기, 명 제국과의 교역은 막대한 부를 낳았기 때문에, 몽골 고원의 패자인 오이라트 부(몽골 부족 중의 하나)의 에센은 명에 교역을 확대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정통(正統) 14년(1449년) 여름, 무역 교섭이 결렬되자 에센은 지배하에 있는 몽골 각 부족의 병마를 동원하였고, 4개의 경로를 통하여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명은 서녕후 송영(宋瑛)을 대동병마총독으로 임명하고, 증원군으로서 평향백 진회(陳懷), 부마도위 정원(井源)이 이끄는 3만 명의 병력을 대동(大同, 산서성 대동시)으로, 도독 왕귀(王貴), 오극근(吳克勤)이 이끄는 1만 5천명의 병력을 선부(宣府)로 파견하였다.
침공을 알리는 보고가 잇따르자, 명의 최고 실력자였던 사례태감(환관) 왕진(王振)은 정통제(正統帝, 朱祁鎭)에게 친정을 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병부상서 광야(鄺埜), 이부상서 왕직(王直) 등은 위험이 큰 친정을 중지할 것을 강하게 간언하였지만, 황제는 왕진의 의견에 따라 친정을 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친정을 위하여 50만 명이라고 일컬어지는 대군이 편성되었다. 왕진은 대군으로 위협하면 싸우는 일 없이 에센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에센 자신이 이끄는 오이라트의 주력은 대동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그 선봉대는 묘아장(猫兒庄)에서 참장 오호(吳浩)를 패사시켰다. 패전 소식을 들은 서녕후 송영은, 무진백 주 면(朱冕), 참장 석향(石享)과 함께 양화구(陽和口, 산서성 양고북)에서 에센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7월 15일, 명군은 군대를 감독하는 태감 곽경(郭敬)의 잘못된 지휘로 인해 대패하여, 송영, 주면은 전사하고 전 군이 거의 전멸하였다.
양화에서의 대패 소식을 듣고서도 왕진은 친정을 강행하였고, 7월 16일에 다수의 대신 및 차관 급의 고위 관료들을 포함하는 대군이 북경을 출발하였다. 종군하고 있던 병부상서 광야, 호부상서 왕좌(王左)는 원정을 중단할 것을 거듭 요청하였지만, 왕진은 이들의 의견을 듣지 않은 채 이들을 처벌하였다. 28일 원정군은 선부를 지나 양화에 도달하였다. 그 곳에서 왕진 이하의 장병들이 본 것은, 명군의 시체가 들판을 가득 뒤덮고 있는 광경이었다. 적군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를 알고서 겁에 질린 왕진은, 장성을 넘지 않은 채 서쪽으로 이동하여 대동으로 들어간 뒤, 북경으로 귀환하기로 결정하였다.
철수 경로에 대한 최초의 안은 적에게 추격당하기 전에 가능한 한 빨리 철수하기 위해, 울주(蔚州)에서 자형관(紫荊關)을 경유하여 북경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왕진의 고향이 울주였으므로, 왕진은 황제를 자택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처음에는 이 안에 찬성하였다. 하지만 고향의 한 해 수확이 대군의 행군에 의해 짓밟힐 것을 두려워한 왕진은, 철수 경로를 선부에서 거용관(居庸關)을 경유하여 북경으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변경하고 말았다.
2. 토목보의 변
8월 10일에 명군이 선부에 도착할 무렵, 에센의 군대는 명군의 후미를 쫓아가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명에서는 몽골 출신의 용장인 공순백 오극충(吳克忠), 도독 오극근(吳克勤) 형제를 파견하여 후위 부대로 삼았다. 오씨 형제는 분전하였지만, 에센의 군대를 격퇴하지 못한 채 전사하고 말았다. 게다가 기병 5만 명을 이끌고 후위 부대를 증원하러 가고 있었던 성국공 주용(朱勇), 영순백 설수(薛綬, 몽골 출신의 용장)의 군대는, 주용이 무모하게도 경솔히 진격하였기 때문에, 에센이 요아령(鷂兒嶺)에 배치시켜 둔 복병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고 말았다.
14일, 황제 일행은 토목보(土木堡, 하북성 회래 서북쪽 약 10Km 지점)로 들어갔다. 주력을 회래성(懷來城)에 배치하여 오이라트의 진격을 차단한다는 것이 명의 작전이었지만, 왕진은 치중(輜重) 천여 대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점을 이유로 들어 토목보에 머무르면서 치중을 기다리기로 결정하였다. 광야는 황제 일행을 안전한 거용관으로 먼저 보내는 안을 주장하였지만, 왕진은 「썩은 유학자가 어찌 군대의 일을 말하는가! 두 번 다시 허튼 소리를 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다!」라고 노성을 지르면서, 토목보 주둔을 강행하였다.
토목보에 군대를 주둔시킨 것은 완전한 실수였다. 명군은 그 곳에서 오이라트 군에 의해 느슨하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게다가 토목보에는 대군을 먹일 수 있을 만큼의 물이 없어서 우물을 6m 가까이 팠는데도 물이 나오지 않았고, 남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강은 이미 오이라트에 의해 제압되어, 명군은 갈증으로 고생하게 되었다.
15일, 에센은 사자를 파견하여 강화를 요청하였다. 명에서는 즉시 강화를 허가한다는 답서를 사자에게 주었다. 화평이 성립된 것으로 오해한 왕진은 전진 명령을 내렸지만 갈증과 피로에 지친 군대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대군은 대열을 흐트러뜨린 채 물을 찾아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채 2Km도 가지 못하였을 때 몽골 기병들이 나타나서 「갑옷을 벗고 무기를 버리는 자는 죽이지 않는다」라고 외치며 사방에서 습격을 가하였다. 명군은 조직적인 저항을 할 수 없었고, 저항하는 자는 화살에 맞아 고슴도치처럼 되어 죽었다. 황제는 친정군을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고자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말에서 내려 혼자 땅바닥 위에 앉은 채 포로가 되고 말았다. 왕진은 「썩은 유학자」만큼의 군사적인 식견도 없다는 점을 증명하고서 혼란 중에 죽게 되었다.
명군의 장병의 사상자는 수십 만 명에 달하였고, 고위 관료로서 사망한 자는 영국공 장보(張輔)를 필두로 하여 50명 이상에 달하였으며, 50만 대군은 소멸해 버렸다.
명군의 패인은 군사적인 재능이 없는 왕진이 총지휘를 맡아서 잘못된 작전 행동을 반복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당시 황제를 수행하고 있던 고위 관료 중의 한 명인 영국공 장보는, 비록 고령이었지만 당시 최고의 명장으로서 누구나 인정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장보는 예전부터 왕진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왕진은 그에게 지휘를 맡기는 건 고사하고 작전에도 전혀 참가시켜 주지 않았다.
또 하나의 패인은, 명군이 화기를 비밀 병기로 간주하여 병사들에게 화기 훈련을 충분히 시키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토목보에서는 화기가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않았고, 대량의 대포, 총, 화전(火箭)이 제대로 쓰이지도 않은 채 버려졌던 것이다.
3. 북경의 혼란
토목보에서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북경의 명 정부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오이라트의 대대적인 침공을 두려워한 나머지 남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는 자까지 나왔다. 이 때 「남천(南遷, 남경으로의 천도)을 말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경사(京師, 북경)는 천하의 근본이니 한 번 옮기게 되면 대사를 그르치게 된다」라고 말하면서 북경을 사수할 것을 강하게 주장한 이가, 바로 병부시랑(국방차관) 우겸(于謙)이었다. 감국 성왕(郕王), 황태후, 그리고 신하들 중 최고위인 이부상서 왕직이 사수에 찬성하였고, 이들은 일치하여 북경 방위의 총지휘를 우겸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역사에 만약(if)이란 금물이지만, 토목보 전투 직후 북경에는 10만 명을 밑도는 장병들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이때야말로 에센에게 있어서는 북경 침략의 최대의 호기였다. 하지만 에센은 북경이 아닌 변경의 요충지로 향하였고, 황제를 이용하여 그 곳들에 무혈 입성하고자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 곳을 지키는 장수들은 성문을 열지 않았고, 성문을 연 요충지는 없었다. 에센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였고, 우겸은 북경 방비를 재조직하기 위한 시간을 얻었던 것이다.
4. 북경 방위 체제의 재건
병부상서(국방대신)로 승진한 우겸은 우선 최대의 과제인 군대, 즉 경영(京營, 북경 주둔군)의 재건에 착수하였다. 북경·남경·하남의 비조군(備操軍), 산동과 남방 연안의 대(對) 왜구군, 강북 및 북경 각 부의 운량군(運糧軍, 군량 운송 부대) 등을 북경으로 집결시키고 훈련을 실시하였다. 등무칠(鄧茂七) 토벌에 임하고 있던 영양후 진무(陣懋)가 이끄는 군대도 불러들였다. 북경의 병력은 10만 명을 밑돌고 있었지만, 재건된 병력은 20만 명을 넘었다.
재건된 대군을 재무장시키는 데에는 많은 양의 무기가 필요하였다. 무기 생산을 관할하는 공부(工部)에서 증산에 임하는 한편, 남경에 저장되어 있던 무기의 3분의 2를 북경으로 보내도록 하였으며, 토목보 부근에 버려져 있던 무기를 회수하도록 하였다. 토목보에서 회수된 무기만 하더라도 투구 9,000개, 갑옷 5,000벌, 신창(神槍, 화창[火槍], 화염방사기) 11,000정, 신총(神銃, 화총[火銃]) 2만 정, 신전(神箭, 화전, 로켓 화살) 44만 개, 화포 800문에 달하였던 것이다. 기병에 대한 명군의 비장의 수단은 화기였고, 우겸은 북경에 대량의 화기를 긁어모아 두었다.
대군을 유지하기 위한 군량 확보도 필요하였다. 통주(通州)에는 경영에서 1년간 쓸 군량이 비축되어 있었기에, 이것을 북경으로 운송하도록 하였다.
토목의 변에서 다수의 고위 장수들과 관료들이 전사하여 지휘관이 부족한 상태였기에, 우겸은 도독 석향을 발탁하여 무청백으로 임명하여 경영의 지휘를 맡게 하는 등, 유능한 인물들을 다수 발탁하였다. 그 외에도 면직되어 있다거나 투옥되어 감금 중에 있는 장군들을 사면하여 재기용하기까지 하였다.
우겸은 당면 과제였던 북경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도독 손당(孫鏜), 위영(衛穎), 장월(張軏), 장의(張儀), 뇌통(雷通)을 북경의 성문을 지키는 요충지에 포진시켰다. 좌부도어사 양선(楊善), 급사중 왕(王)이 이들 각 부대를 지원하였고, 성 밖의 주민들은 성 안으로 피난시켰다. 북경의 수비를 단단히 할 뿐만 아니라, 우겸은 변경 방위망의 재건에도 나섰다. 대동은 곽등(郭登)을 총병관으로 삼아 군의 재건과 방위에 임하게 하였고, 선부는 양홍(楊洪)을 창평백으로 삼아 방위에 임하게 하였다. 북경의 침공 경로상에 위치하고 있는 거용관에는 병부원외랑 나통(羅通)을, 자형관에는 우부도어사 손상(孫祥)을 파견하여 방위의 강화에 임하게 하였다.
군을 재건하는 한편, 우겸은 다른 중신들과 도모하여 감국 주기옥(朱祁鈺)을 황제(경종[景宗] 경태제[景泰帝])로 옹립함으로써 인심의 안정을 꾀하였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효과도 있었다. 에센은 황제를 북경으로 보낸다는 것을 침략의 대의명분으로 삼고, 황제의 이름을 빌려 명의 방위 거점을 항복시킬 뿐만 아니라, 외교 교섭에서 비장의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황제의 즉위에 의해 정통제는 상황(上皇, 전 황제)이 되었기에, 그 가치가 크게 저하되었던 것이다.
5. 명군의 포진
10월에 에센은 오이라트에 항복한 태감(환관) 희영(喜寧)의 계책에 따라, 북경 진격의 의지를 굳혔다. 에센은 전군 약 20만 명을 셋으로 나누어, 2만 명을 고북구(古北口)로, 5만 명을 거용관으로 보냈으며, 스스로는 나머지 주력을 이끌고 자형관으로 향하였다(오이라트 군의 총 병력에 대하여는 사료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본고는 「중국고대전쟁전례선편」 제 3권 237쪽의 설을 따른다).
대동으로부터의 보고에 의해 오이라트의 침입을 알게 된 우겸은,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 22만 명의 장병들을 이끌고 북경의 9개의 성문 밖에 포진하였다.
부대 배치는 다음과 같다.
덕승문(德勝門) : 병부상서 우겸, 무청백 석향, 부총병 범광(范廣), 무흥(武興) 등
안정문(安定門) : 도독 도근(陶瑾)
동직문(同直門) : 광녕백 유안(劉安)
조양문(朝陽門) : 무진백 주영(朱瑛)
서직문(西直門) : 도독 유취(劉聚)
부성문(阜成門) : 진원후 고흥조(顧興祖)
정양문(正陽門) : 도지휘 이단(李端)
숭문문(崇文門) : 도독 유득신(劉得新)
선무문(宣武門) : 도지휘 양절(楊節)
그 외에 창의문(彰義門)에는 우첨도어사 왕횡(王竑)이 이끄는 도독 모복수(毛福壽), 고례(高禮)의 군대가 포진하였고, 북경성 안은 도독첨사 왕통(王通), 좌부도어사 양선, 병료급사중 정신(程信) 등이 지키고 있었다.
우겸은 성문을 닫아 장병들의 퇴로를 끊은 뒤, 전군을 사지에 두었다. 하지만 우겸은 안전한 성 안에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두에 서서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진(陣)에 임하여서 장교가 군대를 등지고 먼저 달아나거든 그 장교의 목을 베어라! 군대가 장교를 등지고 먼저 달아나거든 뒤따라오는 부대가 그들의 목을 베어라!」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로 인해 장병들은 필사의 각오를 다졌고 사기가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선부의 양홍을 필두로 하여 요동의 총병관, 산동, 산서, 하남, 섬서의 각 순무들에게 원군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시기의 북경성은 오늘날의 북경의 성 안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당시 북경성의 남쪽에는 금의 중도성(中都城)의 성벽이나 문이 남아 있어서 남쪽 외성(外城)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창의문이라는 것도 중도성의 성문이었다. 사료에는 「토산(土山)」이라는 표현이 보이지만, 이것은 고유의 지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 막 매몰되려고 하는 대도성(大都城) 혹은 중도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6.북경 전투
자형관을 비롯한 명의 저항 거점을 돌파한 오이라트의 주력은, 10월 11일에 북경 교외에 출현하여 서직문에서 덕승문에 걸쳐 포진하였고, 상황을 덕승문 밖에 두었다. 창의문 북쪽에서 최초의 전초전이 벌어졌다. 우첨도어사 왕횡의 지휘 아래에 있는 도독 모복수, 고례가 오이라트의 선봉과 접촉하여 이들을 격파하고 수백 명을 죽임으로써, 북경 전투의 최초의 교전은 명의 승리로 끝났다. 에센은 상황을 이용하여 우겸, 석향, 왕직 등 명의 수뇌부를 꾀어내어 붙잡으려고 하였지만, 우겸 등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13일은 화기에 불리한 비바람이 강하게 몰아치는 날이었다. 에센은 악천후를 틈타 공격을 개시하고자 하였고, 정찰 기병들을 풀어서 수비의 약점을 찾도록 하였다. 우겸은 덕승문 밖의 빈 집들에 복병들을 배치하였고, 기병들을 풀어 오이라트의 정찰대를 도발하여 자신의 함정으로 유인하도록 하였다. 유인책에 말려든 에센은 1만 명의 기병을 파견하여 덕승문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 곳의 빈 집들 안에 숨어 있던 복병들이 출격하였고, 신기영(神機營, 화기를 전문으로 하는 포병대)은 화기 사격을 개시하였다. 지붕 아래에서 비바람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던 화기는 예전과 다름없는 위력을 발휘하였다. 오이라트 군이 이러한 반격에 기가 꺾여 있을 때, 범광이 이끄는 기병이 돌격하여 오이라트 군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화기는 악천후에도 아랑곳없이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였고, 에센의 동생 우량타하이 등의 간부들을 포격으로 쓰러뜨리는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덕승문에서 패퇴한 에센은, 서직문으로 공격의 예봉을 돌렸다. 그 곳에 포진하고 있던 도독 손당은 분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병력에서 앞서는 적군에게 포위되어 버렸고, 성 안으로 퇴각하고자 하였다. 서쪽 성벽을 수비하고 있던 급사중 정신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성벽 위에서 오이라트 군에 대하여 화전과 포격을 퍼부어 성 밖의 명군을 지원하였다. 그 때 남쪽으로부터 모복수, 고례가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하였고, 뒤이어 북쪽으로부터 석향이 파견한 지원군이 도착하여 전투에 가담하였다. 형제는 역전되어 오이라트군은 패퇴하였다.
14일, 에센은 남서쪽의 창의문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창의문 부근의 수비에 관해 우겸은 모복수 등에게 명하여 기병의 행동을 방해하기 위해 길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도록 하였고, 요소요소에 화기를 배치해 두도록 하였다. 우겸은 부총병 무흥, 도독 왕경(王敬) 등을 파견하여 창의문 밖에 두어 오이라트 군에 맞서 싸우게 하였다. 명군은 서반(序盤), 신총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우위에 서 있었지만, 군의 감독을 맡아야 할 태감 약 100명이 전공을 탐내어 무모한 돌격을 감행하여 진이 혼란스러워졌고, 무흥이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등 형세가 역전되었다. 오이라트 군은 퇴각하는 명군을 토성(土城, 금의 중도성의 성벽)으로 몰아갔다. 그 근처에 사는 주민들이 이것을 보고, 지붕 위에서 오이라트 병사들에게 돌이나 벽돌 등을 던지면서 명군을 도와주었다. 이 때 왕이 모복수, 고례 등의 군대를 이끌고 전장이 나타나면서 전세는 다시금 역전되었고, 오이라트 군은 격퇴되었다.
연전연패란 에센에게는 예상 밖의 것이었다. 에센의 최대의 오산은, 약체였을 터인 명군이 병력, 사기, 지휘, 화력 등 모든 면에서 우수하였다는 점이다. 이 무렵 거용관을 노렸던 오이라트 군은, 화기의 위력과 나통의 교묘한 지휘로 인해 7일간의 전투에서 격퇴된 상태였다. 게다가 선부에서 출격한 창평백 양홍이 이끄는 2만 명의 군대를 필두로 하여, 각지에서 지원군이 북경을 향하여 접근하고 있었다. 기세가 오른 명의 주력과의 결전을 피하고 명의 지원군에 의해 퇴로가 끊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에센은 북경으로부터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15일 밤, 에센은 상황과 함께 몽골 고원으로 도주하였다. 첩자들로부터 이러한 움직임을 알게 된 우겸은, 그날 밤 오이라트 진영을 향하여 포병대를 집중시켰다. 지금까지 명군은 상황이 다칠까봐 두려워 감히 적진을 겨누지는 못하고 있었다. 적진을 때리는 명군의 집중 포화는 맹렬하였고, 1만여 명의 오이라트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명군이 북경 전투에서 사용한 대포의 수는 토목보에서 회수된 것만 하더라도 800문을 헤아렸고, 원래 북경에 배치되어 있던 것과 남경으로부터 수송된 것을 고려한다면 최소한 1,000문 이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리하여 5일간에 걸친 북경 전투는 명의 승리로 끝났다. 명군의 승리의 원인은 토목보 전투와는 대조적이어서, 우수하고 용감한 사령관의 지휘를 받았고, 단기간에 잘 훈련되었으며, 대량의 화기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전 토목의 변 이후 명군이 캐발리고나서도 계속 굴욕의 연속인줄 알았는데 의외의 활약도 했군요. 몽고고원을 재통일한 그 유명한 에센칸의 동생까지 골로 보내다니.역시 썩어도 준치인건가? 말은 본래 소리에 민감한 동물인데 명나라 화기의 펑! 쾅!하는 소리는 오이라트의 군마들에게는 쥐약이었을 듯.(임란 초기의 조총쇼크와 비슷할지도?)
이 글을...(0)
자은 참고 연대표 1449년 토목(土木)의 변. 오이라트 에센 한의 군대가 명나라를 침공, 영종(英宗)을 포로로 잡음. 1451년 원나라의 에센, 가한(可汗) 토크토브하를 죽임. 1453년 에센, 대원천성 대가한(大元天聖大可汗)으로 호칭. 1454년 에센 살해되자 오이라트는 쇠퇴하고, 타타르부(部)가 흥성. 1450년 북경포위와 외교실책은 에센의 몰락의 원인이 됩니다. 우리는 너무 중국입장에서 역사를 보고 있습니다. 몽골은 중국인이 만리장성 이남을 다시 빼앗았다고 해서 그것을 곧 제국의 ‘멸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영토가 축소된 것뿐이지요. 그리고, 많은 기록에서 보듯이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07.12.11 12:25
자은 저러면 뭐합니까. 명군은 또 발리는데.. 1501년 타타르의 다얀 한, 명군(明軍)을 무찌르고 오르도스에 침입. 1520년 타타르부(部)가 중국 산시성[陝西省] 다퉁[大同]을 침공 1548년 몽골의 알탄 한[汗]의 활약이 활발해져 다퉁[大同]을 침략 1550년 알타 한, 중국 베이징[北京]을 포위(庚戌의 변) 1569년 몽골의 알탄 한 티베트원정 시작 1571년 명(明)나라가 몽골의 알탄 한과 화해하고 순의왕(順義王)에 봉함... 이 다음은 여진 만주족차례..1550년에는 토곤 테무르가 쫓겨갔던 바로 그 고북구를 통해서 남하해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포위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이를 두고 ‘경술지변(庚戌之變)’이라고 부릅니다. 07.12.11 12:23
Clampshade 저 에센 조차도 대칸은 되지 못했던 건가요? 대카간이라...;; 청의 흥기 이전에 대칸이라 불린 자는 없었던 건가? 황금씨족의 단절? 하긴 북방유목민족사는 마이너 중의 마이너라... 07.12.11 14:35 자은 에센은 몽골 직계가 아니고, 거기에다 명에게 양보를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대칸이라 하고 나서 살해당했습니다.;.. 대가한이 대칸인듯 한데...;; 07.12.11 18:13
....................................................................................................................................................................
다음은...오일라트와 그 왕이라는"엔센"에 대한 글입니다. 대 제국 치곤 너무 자료가 빈약합니다.
...........................................................................................................................................................................
오이라트
요약 몽골 서부에 있던 몽골계 부족.
원어명 Oirāt
본문 12세기경 예니세이강(江) 상류 유역에서 반수렵 ·반목축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칭기즈칸에 정복당하여 4만 호(戶)로 편성되었다. 초로스 ·토르구트 ·호이트 ·호쇼트 등 많은 부족을 포함한다. 원조(元朝)에서는 우대를 받았으나 원나라가 멸망한 후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귀족들의 분립항쟁(分立抗爭)이 격화, 몽골 동부의 타타르[韃靼]가 쇠퇴함에 따라 세력을 확대하여 마흐무드 드곤 시대에는 외몽골[外蒙古]을 그들의 세력권으로 만들고 타타르를 내몽골로 몰아냈다. 드곤의 아들 에센 칸은 만주로부터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세력권을 형성하고 점차 중국의 북쪽 변방을 침입, 명나라 영종(英宗)을 사로잡는 등(土木의 變) 중국에서도 북로(北虜:북쪽의 오랑캐)와 오이라트는 가장 두려운 민족이었다.
에센 칸이 암살된 뒤 세력이 약화되기는 했으나 외몽골을 보유하였으며, 타타르의 다얀 칸의 내몽골 통일에 이어 알탄 칸의 침략을 받아 이르티시강(江) 상류로 쫓겨나 약 반세기 동안 숨어 살았다. 17세기에 들어와 초로스가(家)가 대두하고 갈단 때에는 오이라트를 통일하여 중가르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에게 토벌당하여 왕국은 붕괴되고 부족은 대량살륙당하였으며, 이리 장군(將軍) 밑에 소속된 번부(藩部)로 편성되었다.
에센
인명] 몽골 오이라트 부족의 장(?~1454). 중앙아시아로부터 동만주를 지배하고, 중국 명나라에 침입하여 영종을 포로로 하였으며, 후에 칸으로 즉위하였다.
....................................................................................................................................................................
위의 자료들을 바탕으로한...저의 결론(추론)입니다.
한마디로, 청나라(후금)의 초대 황제는...분명...이징옥장군입니다....이건 제 추리가 아니라...정사적 사실입니다. 이걸 기존 사학자들께서 왜 가볍게 대했는지...이해가 않 갑니다.
이징옥장군이 함길도절제사로 파견되신 이후...아니,그 이전부터도... 시베리아 초원의 흉로인... 여진족들은...이장군을 여진의 신같이 받들었으며...누르하치도 그 중 한 사람였습니다.
현제의 가증스런 역사는...누르하치의 타타르(달달)과...에센(야선)의 오이라트를 분리해서 취급하나... 원래가 전 여진의 황제를 "에선(야선)"이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선(엔센)은...이름이 아니라...흉로의 대 통합 선우란 뜻입니다.
이징옥이란 이름을 거명키 않기 위한 말장난인 겁니다.
이징옥은...수양을 치려다가...세 형제가 야습당해 죽습니다. 에센(야선)도 마찬가집니다...토목보의 변 이후...세 형제가 암살당합니다.
이징옥을이 죽인...수양이 파견한 박모씨는... 에센이 죽인...새로 임명된 여진부 왕인 겁니다.
에센(야선)은...야인(러시아)여진의 선우임을...야선이란 명칭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여진은...려딘으로 발음해야 고어와 가까우니...려딘은...료나라 딘...즉,요나라의 왕(대인)국이란 뜻입니다.
오이라트"는...오브강과 이르티시강 일대... 즉,압록강과...료수(이르티쉬)로서...상류는 원조 흑룡강이 있는 지대를 이릅니다. 여진의 수도가...오도(오이라트)요...흑룡강(이르티시상류)와 압록강(오브강)사이...두만강(투멘강)근처에 있단 겁니다. 흑수말갈의 전통적인 텁니다.
제가 전에 쓴...안평이 만주조선의 왕이다...란 글을에 꿰 맞추어... 명나라와 조선을 꿰 맞추어 봅니다.
세종대왕은...일찍부터 안평을 후계자로 꼽습니다...후계 수업으로...함길도(중앙아)의 제후자리를 줍니다. 큰 형 정종이 삐져...황위를 찬탈합니다.
안평이 막강 중앙아 여진의 기병을 이끈 함길도 절제사 이징옥을 데리고 정종을 칩니다. 이를...역사는...명황제가 사로잡혀...에센이 그를 볼모로 끌고 다니며 전쟁했다 둘래댓다 봅니다.
토목보의 변에선...문종이 잡히거나 죽은 겁니다.
안평대군은...단종으로 제위를 계승시키고...조정을 안정시키기 위한 여러 개혁을 합니다. 이징옥은...변란을 틈탄 야인들의 동요가 걱정되어... 함길도로 돌아 갑니다.
수양이 변을 이르킵니다.
안평을 숙청했다가...유배시켰다가...사사시킵니다...제 생각엔 목을 쳤을듯 합니다. 이 당시의 명황조의 내분 때는...형제끼리도 솥에 삶아 버리는 정도였으니...당연한 유추라 하겠습니다.
수양이 함길도 절제사를 비밀리에 교체하고...그 후임으로 박 아무개씨를 여진왕(안평대군 직위)으로 보냅니다. 이징옥에게 죽을께 뻔하니...황족을 않 보낸 겁니다.
이징옥이...자신의 우상인...김종서의 참변과...함길도왕(안평대군)의 참변에 분개해... 수양이 보낸 신임 총알받이성 함길도 왕을 처단하고...
이참에...자신의 어려서 부터의 황제의 꿈도 이룰 겸... 만주(함길도,현 중앙아&신장성 서쪽)의 여진과...오이라트 만주제족(러시아와 시베리아 전체 흉로족)등의 평상시의 염원을 받아들여... 누루하치의 추대형식으로...대금 황제로 즉위 합니다.
이게 후금(청나라)의 최초 발생 원인입니다.
아이신 길로 누루하치"란 엄청 긴 이름도... 결국...에센(야신)+함길+나라+황제란....이징옥의 후계 에센(야선)을 이르는 뜻 일 겁니다.
이징옥장군은...사사(실은 참수?)된 안평대군의 시신을 수습해... 혹여라도 거사 실패시...후에 다시 부관참시될 걸 염려해...함길도(우즈벡)의 리성계(티무르)의 능(우르아미르)에 비밀리에 합장시킵니다.
그걸 우즈벡인들이...울르그벡(세종대왕)의 시신이라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이징옥장군은... 수양의 사주로...여진부의 인사에게 암살당하고...현제들도 살해 당합니다.
이후...여진(노르만)은...중원 조선과는 웬수가 되어... 홍타시대에는...조선을 유린해 버립니다...내내 대륙족선의 내정에 간섭하다가...구한말의 양이들&왜노들의 침략에 대응키 위해...
현 하북성일대 북경에 도읍하고...조선은 한단에 도읍해...힘을 합쳐 보고... 조정에 반대하던 민란 봉기세력들과도 연합하여...왜세에 대항해 보지만...양이 연합국 8개국의 합동작전으로... 북경에서 청나라는 궤멸되며...
한단의 대한제국은...얌전히 한반도로 귀향을 옵니다.
너무 천기누설을 많이해서...뇌가 과부하가 걸렸습니다.
오늘은...요 정도만 합니다...ㅡ. .ㅡ
|
댓글 2인쇄 |스크랩(+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