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6일 서울 삼성동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지하에 전에 없던 긴 줄이 생겼다. '디저트계의 피카소'라는 프랑스 제과명장 피에르 에르메의 이름을 내건 국내 첫 매장 앞이었다. 개당 4000원인 마카롱을 사려고 150여명이 기다렸다. 개업한 이날 하루 매출은 4000만원이었다.
맛도 패션이다. 경기를 타고 유행을 따른다. 4000원짜리 한입 간식을 사려고 줄을 서는 풍경은 지난 10년간 급속도로 변모해온 대한민국 음식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IMF의 여진이 남아 있던 2000년대 초반만 해도 2000원이면 속이 든든해지는 저가 메뉴가 주도했다. 2005년 발간을 시작한 레스토랑 가이드 '블루리본'은 이달 10주년 기념판을 낼 예정이다. 10년 전 서문에는 '언젠가는 이탈리아 음식을 대중적으로 즐길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고 씌어 있다. 이제는 가정집에서 라면 끓이듯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는다. 혀끝의 권력은 불과 10년 사이 소수에서 대중으로 빠르게 옮겨왔다.
◇10년 변모의 상징, 스파게티10년 역사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태리 식당의 변모다. 이태리식은 한때 고급 서양식이었다. 2006년에는 고급 정찬의 상징인 프랑스식을 밀어낼 정도로 성장했다. 고급 서양식을 먹고는 싶은데 거추장스러운 격식은 싫은 이들이 보다 친근한 이태리식으로 옮겨갔다. 쉐라톤워커힐호텔은 20년간 운영한 프랑스 식당 '세라돈'을 닫고 이태리 식당 '델 비노'를 열기도 했다. 레스토랑 가이드인 '다이어리R'의 분류도 이태리식의 득세를 보여준다. 조리법 분류가 확실하고 추천 등급 이상을 받은 전국 식당 4800곳 중 프랑스식이 73곳, 이태리식이 261곳으로 3배 이상 많았다.
무겁고 복잡한 프랑스식 소스보다는 올리브, 토마토, 크림소스로 활용이 다양한 이태리식이 개업하기도 쉬웠다. 이태리 식당은 우후죽순으로 늘며 2009년 정점을 찍었다가 저가 프랜차이즈가 난립하며 정체기를 맞았다. 최근에는 고급 정식부터 1만원 이하 저가 메뉴까지 가장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 식문화 지형도 흔들어2008년은 식문화의 지형도를 뒤흔든 해다. 국민 소득 2만달러 시대가 만개하며 양보다 질을 따지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아메리카노의 전국시대가 이 무렵 시작됐다. 스타벅스가 국내 1호 매장을 연 지 햇수로 10년 만에, 가루를 타 먹는 커피가 아니라 원두로 뽑아먹는 에스프레소를 전 국민이 일상적으로 마시게 됐다.
대중화 뒤엔 반드시 고급화 바람이 분다. 흔한 아메리카노에 만족하지 못한 소비자들이 직접 손으로 내려먹는 핸드드립 커피에 빠졌다. 곳곳에 강좌도 개설돼 인기를 끌었다. 지난해부터는 미국 뉴욕의 스페셜티(specialty) 커피가 소개됐다. 쉽게 말해 고급 원두를 쓰는 커피다.
소득이 높아지면서 건강식, 유기농 음식에 대한 욕구가 높아졌다. 고기만 찾던 이들이 해산물을 찾으면서 시푸드 뷔페 식당이 영토를 넓혔다. 고기 중에서는 소고기, 그중에서도 한우를 주로 파는 정육식당이 생겼다. 2008년 5월 광우병 파동 여파였다. 고가(高價)의 한우를 믿고 먹으려는 손님이 몰렸다.
◇스타 요리사의 등장, 미식의 업그레이드 이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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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요리사의 탄생은 미식 문화의 도약에 크게 일조했다. 첫 주자는 에드워드 권(권영민)이다. 2007년 두바이의 7성급 호텔이라는 버즈 알 아랍의 총괄조리사로 국내에 소개됐다. 화려한 이력에 뛰어난 대중 친화력으로 인기를 끌면서 '요리사도 뜰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겼다. 식당 이름이 아니라 요리사 이름을 믿고 찾아가는 이들이 많아졌다. 뚜또베네 등 청담동 이태리 식당의 인기를 주도한 박찬일, 압구정동 고급 한식당 '정식당'의 임정식 등이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미국 요리학교인 CIA나 프랑스 코르동블루에서 배운 이들이 잇따라 귀국하면서 엘리트 요리사의 시대를 열었다. 임정식씨는 미국 뉴욕에 '정식'이라는 레스토랑을 열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미슐랭가이드의 별 2개를 받는 저력으로 한국 요리사의 실력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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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의 상승과 추락마시는 술도 뜨고 진다. 극적인 상징이 막걸리다. 2008년 정부가 치고 나선 것이 한식 세계화다. 2017년까지 한식을 세계 5대 음식으로 키우겠다고 한식재단을 설립하고 대통령 부인이 요리책도 냈다. 한식을 먹자니 술도 어울려야 했다. 1960년대까지 국민주였으나 소주에 밀리고 와인에 치였던 막걸리가 부각됐다. 유산균이 많아 건강에 좋다고 웰빙 음식으로도 소개되며 연간 70%대의 높은 성장률을 과시했다.
막걸리의 부상은 와인 인기에 대한 반동도 작용했다. 국민소득이 늘면서 고급 식문화에 대한 갈증이 와인으로 쏠렸다. '이 맛은 해 질 녘 하늘에 끝없이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서 느끼는 신의 목소리와 같다'는 식의 추상적이고 감각적인 수사로 와인의 맛을 묘사하던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이 수십만권 팔려나갔다. 점차 부담을 느끼던 대중이 돌아서면서 일시에 막걸리로 몰렸다. 부담감은 해소됐으나 입맛을 충족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막걸리 열풍은 3년을 못 넘겼다. 2011년을 정점으로 3년째 출하량이 곤두박질 치고 있다.
◇미식의 리더, 호텔에서 백화점으로
2000년대 중반까지도 맛의 최전선을 가늠하려면 호텔로 가야 했다. 해외 최신 유행도 호텔이 앞장서 들여왔다. 최근에는 백화점이 미식의 리더로 부상했다. 먼저 나선 것은 갤러리아백화점이다. 2012년 10월 식품 편집매장인 고메이494를 개장하며 스타 요리사의 메뉴를 한자리에 불러모았다. 햄버거, 갈비 등 분야별 최고 맛집을 유치해 크게 성공하자 다른 백화점도 잇따라 식품관을 재단장했다.
불황 때 적은 지출로 만족감을 느끼려는 '작은 사치(small luxury)'를 반영하는 것이 화장품 중 립스틱, 음식으로는 디저트다. 백화점 식품관을 영토로 디저트가 미식계의 소황제로 등극했다. 한입 거리가 미식계를 장악했다고 하면 의아할 수 있다. 결론은 숫자가 말한다. 벨기에 초콜릿 고디바의 백화점 매장 월평균 매출은 3억원, 일본 오사카의 롤케이크 몽슈슈는 5억원이다. 백화점 해외 명품 패딩 점퍼의 월 매출이 4억~5억원인 점에 비춰보면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바다 건너온 해외 명품의 느낌도 원하지만 푸근한 음식도 먹고 싶다. 그래서 뜬 것이 단팥빵과 고로케다.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인기가 폭발한 '서울연인'의 단팥빵, 압구정과 명동의 고로케전문점들은 '수제' '즉석' 열풍을 타고 매일 수백 개씩 팔려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