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여고생, 아가씨
김진미
아이스께끼
그대로 얼음이 된 여중생의
초록 치마는 허공에 펄럭였다
숨었다, 난.
타깃이 되지 않기 위해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기어코 우릴 찾아낸 바바리 맨의 잔인한 웃음 앞에
안경을 벗고 눈앞의 세상을 지웠다
보이지 않으면 안전할 거란
착각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뒀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스폰서. 돈 많아”
내 얼굴에 달린 두 귀가 너무도 부끄러워
얼어붙은 내 몸, 메마른 내 목은
그 순간 그렇게 멈춰버렸다
무기력한 지성의 공간에서도
무지한 손이 소름 끼치게 유린할 때
“부탁이야. 그냥 조용히 넘어가 줘. 제…발…”
울부짖어대는 친구의 곡 같은 울음 속에서
시한폭탄이 되려 했던 나의 안전핀은
그대로 부러지고 기억에서 굳어졌다.
그리고 날아온 미국
아빠 또래 외국인 아저씨의 느끼한 시선은
날 불쾌하게 만들었다
예쁘단다
설마 내가 잘못 들은 걸 거야
담백하다 못해 쓸쓸한 나의 위로도
그가 내 친구 남편이라는 사실
유명 대학교수란 사실
모임에서 한자리한단 사실
그 모든 게 나를 다시 멈추게 했다
그냥 나만 사라지면.
나는 평범한 여자 사람이다
그 평범함이 침묵이란 이름으로
매번 나를 가둬버렸다.
그 누구도 견디기 버거웠을
수치의 무게에 짓눌려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젠 말하리라.
고개를 떨구지 않으리라.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치리라.
모르는 것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죄일 수 있다고
눈 감지 마라.
목소리 내라.
너는 소중하다.
누구도 너를 그렇게 대할 수 없다.
그것이 너를 지켜줄 방패가 되길
간절히 바라며.
카페 게시글
⊙.....시애틀문학 수상작품
제18회 시애틀문학신인문학상 시 부문 가작 김진미 <소녀, 여고생, 아가씨>
박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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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3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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