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학교 보고서 이영주
나는 ‘귀농(歸農)’이란 말의 의미를 몰랐던 7년 전에 부모님을 따라 이곳, 봉화로 귀농해왔다.
어렸기 때문에, 시골로 내려오신 부모님의 뜻이나 이상은 알지 못했지만, 우리는 온가족의 손으로 직접 집도 짓고 농사도 지어 먹으면서 특별히 싫을 것 없이 생활했다.
나랑 동생들은 마을의 작은 학교를 다녔는데, 나는 재작년 지원했던 고등학교에서 떨어지고 아예 진학을 관두었다.
부모님께서 앞서 바라셨던 바였고 그 즈음 나 역시 그 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 중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울해진 것은 홈스쿨링을 결심하고 학교생활을 마무리 짓던 시점부터인 듯하다.
나름대로는 고등학교 문제가 인생에 있어서 첫 번째 큰 실패였고 그로 인해 낙담했었기 때문이다.
만족스러웠던 선후배 관계라든지 좋아했던 학교생활들이 불만에 차서 허황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홈스쿨링을 시작했다. 함께 생활하던 친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렀고 여행도 다녀왔다.
그렇게 반년이나 지났지만 내 마음은 침울하기만 했다.
내가 여행을 마쳐갈 때 즈음 여동생도 학교 문제로 부모님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 중이었다.
10월 초부터 ‘100일 학교’라는 기막힌 프로그램이 있는데 100일이라는 적지 않은 수업일수를 빼먹고 그곳에 참가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결국 동생은 눈앞에 닥친 중간고사를 피하기 위해 ‘100일 학교’에 입학해버렸다.
동생은 ‘100일 학교’ 생활을 의외로 재밌어했다.
엄마는 내게도 자꾸 ‘100일 학교’를 권하셨다. 내가 계속 싫다고만 하니까 두 번째 프로그램인 4박5일 간의 명상 수행만이라도 꼭 참가하라며, 내 상태의 심각성(?)에 대해서도 인식시켜주었다.
그렇게 자운선가라는 명상센터에서의 명상 수행을 신청하게 되었지만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변하고 싶은 의지도 없었다. 마치 미국 남북전쟁 후에도 해방되기를 거부했던 대다수의 흑인노예들처럼.
어두운 마음과 부정적 사고에게 길들여져서 그것들 없이 주체적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다만 명상은 최선을 다했다.
첫째로는 지불한 돈 몇 십만 원이 아까웠기 때문이고, 둘째로 빨리 진도를 나아가 이 수행이 얼마나 무의미한 짓인지 입증해보이겠다는 심보였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신기한 경험들을 맛보게 되었다.
첫 단계를 마쳤을 때는 머리를 프라이팬으로 맞은 것처럼 어찔어찔 했고 두 번째 단계 때는 몇 시간을 앉아만 있었는데도 다리가 저리거나 어깨가 뻐근하기는커녕 기분까지 상쾌했다.
자운선가의 명상법은 일종의 기억을 지우는 수행이었는데 나는 그 수행으로 놀랍게도 나조차 모르던 나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사건들이 지금 나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지,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이 어땠는지 말이다.
4박 5일 간, 수행하느라 꼬박 밤을 새기도 하고, 속상했던 기억들을 청산하면서 펑펑 울기도 하면서 수많은 마음의 변화를 겪었다.
수행 마지막 날, 절반 이상의 100일 학교 사람들이 세 번째 단계까지 통과했다.
나는 계획만큼 해내지 못했지만 자운선가를 나설 때는, 들어설 때보다 훨씬 마음이 가볍고 만족스러웠다.
우습게도, 처음 명상에 임했던 의도와 반대의 뜻 깊은 성과를 얻은 것이다.
결국은 나도 자운선가 프로그램과 연결해서 ‘100일 학교’에 편입해버리고 말았다.
엄마가 끝까지 원하셨고 나도 수행을 마치고나니까 생각이 조금 바뀌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 때 쓸데없는 고집으로 100일 학교와의 인연이 그대로 끊어졌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침울하게 지냈을 지도 모른다.
100일 학교는 자운선가에서 느낀 감정이나 좋은 기운이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나지 않도록, 나에게 끊임없이 배움을 실천하는 터가 되어줬다.
100일 학교 총 스무 가지의 프로그램 가운데 많은 부분이 봉화에서의 생활, 부모님이 실천하려고 노력해온 것들과 중복되어있었다.
첫 번째 프로그램인 ‘농사’는 말할 필요도 없이 현재 부모님의 생업이자 영원한 바람이었고, 장계에서 ‘생태 집 짓기’를 할 때 황토 흙을 치거나 나무를 깎아 문틀을 짜는 일도 봉화에 집을 지으며 봐온 것들이었다.
일주일 동안 발효 식품을 만들어보는 시간도 있었는데 김치를 담그고 메주를 쑤는 것 역시 겨울이면 늘 보던 엄마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작 부모님의 그러한 일들을 자진해서 도와드린 적이 없기에, 함부로 아는 척 할 수가 없었다.
참 이상했다.
집에서 마지못해 보태던 일손에 지나지 않던 일들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꼭 쉽지만은 않아도 내가, 또는 학생 한 명 한 명이 일의 주체로서 집 한 채(비록 100일 학교 기간 중에는 완성시키지 못했지만)를 짓고 메주를 쑤는 것이 새삼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뼈대가 세워진 9평짜리 집이, 또 반듯하게 모양을 내 새끼줄로 매달은 메주가 내 힘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이 마냥 뿌듯할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생태 집 짓기, 때 처음으로 배고픔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그야말로 배가 불러있었다.
전에는 끼니와 상관없이 항상 먹어댔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도록 일한 뒤에 먹는 밥이 꿀맛이라는 것도 배웠다~!
수연(隨然) 건강법 때나 만행(萬行) 때 비싸게 사먹은 밥보다 부실한 반찬과 먹은 장계 밥이 열 배 더 맛있었다.
아마도 100일 학교 학생이라면 누구나 그 점에 대하여 공감할 것이다.
100일 간의 배움을 총정리하고 그것을 가족친지들과 나누는 프로그램이었던 부산에서의 공연은 부쩍 성장한 나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100일 학교는 나에게 ‘현재에 살기’와 ‘타인의 눈에서 벗어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옛날의 내 특기가 나를 평가하는 기준을 타인에게 두고, 열등감을 느끼거나 잘못한 일을 회상하며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3시간 동안 풍물, 봉산탈춤, 직접 짠 마당극 등을 공연 하면서 나는 내가 드디어 못된 습관에서 벗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잘해내야 한다는 부담 대신, 나는 다른 치배들과 어우러져 신나게 장구를 치고, ‘얼~쑤!’ 소리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췄을 뿐이었다.
박자 놓치기도 허다했고 동작이 딱딱 맞지도 못했다.
하지만 관객(대다수가 100일 학교 사람들 가족이었다.) 분들도 한 명이 실수하면 실수하는 대로 그저 우리와 흥(興)을 나누어주셨다.
단순한 공연을 넘어서 나에겐 일 년 치 공부와도 같았다.
너무나 행복했다.
나는 100일 학교가 학교와 가족의 형태를 자연스럽게 결합시킨 특별한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100일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사소한 문제들로 부대끼기도 웃기도 했고, 많은 것을 공감하며 서로 간의 믿음이 형성되었다.
교장 선생님께서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다.
십 몇 년 사귄 사람일지라도 100일 학교와 농도가 다른 법이라고. 3년을 함께했던 중학교 선후배, 친구보다 100일의 인연이 더 끈끈한 것도 그러한 이유가 아닐까?
나는 형편과 개성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진짜 교육이라 믿는다.
100일 학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즉흥적이고 유동적이었다.
그로 인해서 실수도 잦았고 학생들의 불평도 들어야했지만, 나는 그것이 100일 학교의 멋이자 맛이라고 생각한다.
100일 학교 역시 많은 고비를 지나왔고, 더욱이 이번이 1기인 탓에 고생도 진탕 했다.
하지만, 죽을 만큼 힘들었던 일도 시간이 지나면 소중한 경험이 되는 것처럼, 지금 나는 그 고비들과 고생조차 참 고맙고 또 고맙다.
나에게 100일 학교 식구들이 그러하듯이, 나도 그들에게 어디서나, 그리고 언제까지나, 자랑스러운 도반이고 싶다. |
첫댓글 험~!! 고딩수준의 청소년의 사고로 쓴 글~대단합니다. 이 영주 학생은 인생전체 절반의 성공을 이미 거둔것 같습니다. 무궁한 발전을 빕니다. 그리하여 한국의 동량이 되시기를~~
공감가는 내용들이 너무많다 , -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