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리역에는 약 9시30분 쯤에 도착하였다. 이 곳에서 6번 마을버스를 타면 동구릉으로 가게된다. 가는 길에 구리농수산물시장도 경유해서 갔다. 그 농수산물시장 앞에는 롯데마트가 있는데 필자가 1호차로 운전기사를 하던 시절에 돈 없는 군인이어서 자주갔던 맛집이기도 하다. 물론 공짜맛집이다. (시식 코너)
버스정류장의 모습이다. 버스의 정류장 안내방송에선 “국내 최대”라는 말을 강조하는 방송이 나왔다. 뭐 사실이 그러하니 별 할말은 없지만 살짝은 손과 발이 오그라드는 수식어였던 것 같다. 문화유적이 있는 버스정류장이어서 그런지 기와지붕 형식으로 만들어져있었다. 이런 저런 섬세함에 조금은 감탄 할 수 있었다. 입구에 레스토랑이 하나 있길래 답사가 끝나고 점심을 먹으러 가볼까 하였는데 해설사분의 악평으로 가지 않기로 하였다.
입구에 들어서니 동구릉의 전체적인 지도가 나왔다. 한눈에 봐도 정말 넓게 펼쳐진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저 지도를 보고 저 넓은 곳을 언제 다 돌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막상 탐방에 들어가보니 한기 한기의 능을 볼때마다 감탄을 하느라 시간가는줄도 모르고 다리가 아픈 것도 느끼지 못하였던 것 같다. 또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리는 기념물도 함께 세워져있었다. 참고로 성인 한명당 입장료는 1,000원이었고 사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선조들의 조화롭고 여백미넘치는 그 왕릉을 보는 데에는 1,000원짜리 한장은 아까운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요즘 과자값이 1,000원이 넘는 오늘날의 현실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질 뿐이었다.
먼저 동구릉에는 9기의 능이 있는게 간략한 소개는 다음과 같다.
동구릉에는 다음과 같이 모두 9개의 무덤이 있다.
1) 1대 태조(재위 1392-1398)의 건원릉(健元陵)
2) 5대 문종(재위 1450-1452)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顯陵)
3) 14대 선조(재위 1567-1608)과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穆陵)
4) 16대 인조(재위 1623-1649)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휘릉(徽陵)
5) 18대 현종(재위 1659-1674)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崇陵)
6) 20대 경종(재위 1720-1724)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惠陵)
7) 21대 영조(재위 1724-1776)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元陵)
8) 24대 헌종(재위 1834-1849)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景陵).
9) 추존 문조대왕(1809-1831)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綏陵)
[출처] 동구릉 답사기|작성자 김영한
먼저 이 곳에 들러 해설가의 설명을 들었다. 홈페이지에서 봤을땐 1시간반 정도 소요가 된다기에 왕릉 전체를 다 돌면서 하는 설명인줄 알았는데 이 역사문화관 안에 있는 시설만으로 설명하는데 1시간반정도가 소요되었다. 물론 여러가지 야사와 함께 유쾌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고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다. 이제 설명을 다 듣고 본격적으로 왕릉 탐험에 들어갔다.
모든 왕릉을 소개하기엔 너무 많기 때문에 여기서는 본인이 가장 인상깊게 보았던 능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현릉이다. 바로 하루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 이 곳에 간략한 이야기를 써 볼까 한다. 먼저 문종은 세종을 이어 즉위한 왕이다. 아버지를 닮아 아주 두뇌가 명석하였지만 몸이 매우 병약하여 하루에 12시간 이상을 누워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사가 급하기 때문에 첫번째 왕비를 급히 들였지만 외모에 매우 실망하여 전혀 찾지 않았다고 한다. 두번째 왕비 또한 마찬가지여서 후사를 가지지 못하였다. 세번째까지 그러다가 마지막 권전의 딸을 사모하여 후사를 가지게 되었는데 단종을 낳은 후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나 경기도 안산에 안장되었다. 비록 왕비로 격상이 되었지만 얼굴을 보지 못한 문종이 매우 안타까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종이 승하하고 이 곳에 묻힌 후 세조가 현덕왕후의 능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중종때 조광조의 도움으로 이 곳에 옮겨서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둘의 사랑이 사후에도 너무 애틋하여 심지도 않았는데 두 능의 사이에 소나무가 생겨서 사후세계에서 그 사랑을 키운게 아니냐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를 해설가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2]
저 사이가 바로 두 능의 사이인데 소나무가 자라있는 것을 볼 수 있다.
3. 닫는 글
능에 올라가서 자세한 사진을 찍어도 됐었는데 우리는 울타리를 보고 안되는 줄 알고 올라가보지 못하고 밑에서밖에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신기한 것은 멀리서 정말 자연과 조화롭게 어울려서 웅장한 모습을 보이던 왕릉이 언덕 바로 앞에 가면 전혀 그 위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것 또한 선조들의 지혜이리라 생각하였다. 그 자세한 이야기를 나중에 해설사분과 커피한잔 하면서 들을 수 있었다. 바로 사자성어 하나로 정리될 수 있었다.
‘燈下不明’[3]
등잔 밑이 어둡다는 이 사자성어를 통해서 멀리서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고 좀더 시야를 넓히기를 바라는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능의 구조가 아닌가 생각한다. 대학생활 마지막에 이런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되서 교수님께 너무 감사하다. 문화재를 직접 가서 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고 역사를 통해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