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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 박가네 여인들 (“움굴골 사람들” 중 친족여인들 부분만 발췌)
<우리 동네 사람들 5 – 어머니>
가심이 답답혀
흙벽에 못 박혔던 달력처럼
어머니는 주르르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허리에 손을 넣어 본 당집 할아범
가라앉았어
그리곤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집어넣은 내 손에는
미끈 유년의 코가 묻어났다.
복 많은 분이셨지
낮게 목소리를 까는 당숙
어머니,
구들장에 박혔던 고개를 들자
해어진 창구멍에
찢긴 하늘 하나 떠 있었다.
<우리 동네 사람들 6 - 누이야 누이야 >
그 날 참다 못해 아버지가 소리쳤다.
기집애가 무슨 공부를 한다고
담요 뒤집어쓰고 며칠째 저 지럴이여 지럴이
나도 학교 가고 싶단 말이예요
이 년아 여자는 배울수록 팔자만 드세지는거여
그래두 저어, 요즘은 여자두
넌 두 눈 초롱초롱한 남동생두 안 보이냐
제사공장에 자리 알아 놨으니 낼부터 나가
그 날 이후 털목도리를 감고 뚝방길을 오갔다.
이 돈 갖다 공책 사, 니만 믿는다
누나두 힘들쟎여
공장일이야 뭐 남들두 다 허는데
티셔츠도 잘 맞는구나, 아이 우리 막둥이 예쁘지
<우리 동네 사람들 7 - 만길이네는 늘 환하다>
만길이 할머니는 오늘도 죽지 않았다.
유관순 누나 때 태어나서 입 하나 덜자고
스무 살도 못 되어 농사꾼 장씨한테 시집와서
셋째아들 낳고 부기가 덜 빠진 채 피난 보따리를 쌌다고
고상한 야글 다하면 책이 몇 권이라면서도
나만 그런 게 아니라며 늘 웃던 그 할머니가
눈을 치켜뜨고 이 년들이 사람 굶게 죽인다고
밥 먹고도 또 밥 달라고 소리친 지 벌써 10년
여전히 밥 많이 먹고 똥 많이 눈단다.
간병하던 며느리 저 세상으로 먼저 가고
이젠 손주며느리도 쓰러질 판이다.
“정말 고래심줄보다 더 질긴 게 목심줄이여”
만길이는 이따금 마주치면 혀를 찬다.
망길이 맹길이하지만 그도 벌써 환갑 진갑 다 지난 할애비이다.
만길이네 할머니 방은 늘 환하다.
할머니는 늘 불을 켜 놓으라 한단다.
저승사자가 올까봐 무서워서라고도 하고
저승사자가 못 찾아 올까봐 그런다고도 하는데
암튼 만길이네는 오늘도 해가 지지 않는다.
<우리 동네 사람들 13 – 큰작은 댁 할머니 >
울 동네 응달마을서 유명했다던 울 할아버지 4형제
호랑이 같은 증조 할배의 지휘 통솔 아래
돌담을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모여 살며
모다 바지런하여 큰살림을 일궜던 우리 댁내
내가 태어났을 땐 할아버지들은 다 돌아가시고
할머니들만 두 분 살아계셨었다.
아버지의 작은댁 엄마 나의 큰작은댁 할머니
그 할머니는 둘째집의 주인이셨다.
딸만 넷을 둔 당숙네는 경찰간부로 늘 외지를 떠돌고
딸들만 할머니와 함께 살았었다.
세상에 맛없는 음식이 없고
세상에 못난 사람이 없고
세상에 불행한 일이 없었던
긍정의 대명사 큰작은댁 할머니
코를 질질 흘리는 나에게
천하제일의 미남이 웬일이냐며
새 저고리 고름으로 닦아 주시고
밥 먹다가 내가 오줌 마렵다 하면
복지개를 들이대고 오줌을 받아
도련님 오줌은 약이라며 눈을 씼던 할머니
어느 날 나를 데리고 남의 집 회갑잔치에 갔다가
할머니들과 크게 싸우고 돌아 온 큰작은댁 할머니
싸운 이유는 그 집 할머니가 나를 보고
“얘 원래 이렇게 생겼어요?”라고 물었던 때문.
멀쩡한 애에게 무슨 말이냐고
할머니는 오래 씩씩대며 내 편을 들어 주셨었지.
어느 덧 나도 퇴직하고보니 모두 60년 전의 이야기가 되었다.
지금도 옥수수를 수확할 때 조금 덜 익은 옥수수를 보면
“이것 큰작은댁 할머니용이야”라며
치아 안 좋았던 할머니용을 따로 챙겨두고 싶지만
이젠 그 옥수수를 내가 먹어야 하는 현실이 구슬프다.
<우리 동네 사람들 14 – 셋째집 할머니 >
맏이는 출세해 도청있는 춘천에 가서 살고
둘째는 학교 다니다 6.25 의용군으로 잡혀가고
셋째는 입대하여 육군장교로 떠돌고
막내인 넷째 당숙과 시골에 살았던 할머니.
농촌에 사시면서도 농사일보다는
소설책 읽기가 취미셨던 셋째집 할머니
젊었을 때 한복 저고리를 잘 만들었다며
손끝이 유난히 야물었다는 셋째집 할머니.
그래서 그런지 같이 살던 넷째 용수아재는
왕골자리 멍석 삼태기 만들기의 달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집 손자들은
서울대학교 포항공대에 줄줄이 합격했었다.
농사일에 바쁜 아들며느리를 위해
늘 손자를 배에 올려 두고 누워서
육전소설을 소리내어 읽었던 할머니
조웅전에 유충렬전에 하루가 갔었다.
어쩌다 군인인 당숙이 찌프차를 타고 오면
동네 아이들이 몰려 들어 구경하곤 했었다.
그 아이들이 눈빛을 반짝이며 나에게 물었다.
“이 차 좀 만져봐도 돼?”
그럴 때 내 어깨도 으쓱했었다.
<우리 동네 사람들 15 – 도라무깡 할머니 >
진부 땅 몇 만 평을 팔아
우리 동네로 이사와 담박 부자로 산
새 재집의 여주인 도라무깡 할머니
그 집엔 늘 넉넉한 인심이 있었지.
제대로 먹지 못해 모두 빼빼 마른 동네서
유일한 비만녀 도라무깡 할머니
어려서 사탕도 얻어 먹고
좀 자라선 학교에 낼 납부금을
자주 취해 주었던 도라무깡 할머니
농고 다니던 그 집 아재는
고등학생 때부터 오토바이에 공기총을 메고
날 뒤에 태우고 꿩 사냥을 다니곤 했었지.
아들은 언젠가 철이 들어 돌아오게 돼 있다며
늘 믿었던 할머니 결국 효자 수발 받았지.
내 첫 월급 받은 날 엄마 속옷 사 드리고
두 번 째 월급 받아 엑스라지 속옷 사서
도라무깡 할머니에 곱게 싸서 보냈었지.
“할머니 아니었으면 저 졸업 못 했을 거예요.
할머니는 제 은행이었어요.”
라고 포장지에 메모 했었지.
<우리 동네 사람들 16 – 학우리 아재 >
살림 좋은 집 막내딸로 태어나
세 오빠의 사랑을 온 몸에 받고 자라
시집가기 전 한 일은 눈썹 뽑기 손톱 다듬기
얼굴 가꾸기가 전부였다는 내 고모 학우리 아재.
학동(鶴洞) 명문 한씨 집에 시집 가
새로 생긴 이름이 학우리 아재.
신랑이 주벽이 있고 생활력이 약해
울 아버지가 불러들여 옆집에서 살았지.
일 년 내 꾸준히 해야 하는 농사일이 싫어
고모부는 어느 해부터 깍젱이 장사를 시작했지.
담양 가서 용달차에 굵은 대를 싣고 와
가늘게 쪼개어 부엌 불에 달군 후
말뚝에 감아 휘어지게 만드는 대깍젱이.
소갈비도 긁어 모으고 마뎅이할 때 필수품이었으니
만드는 족족 오일장에서 팔려 나갔지.
문제는 거금 주고 대나무를 사 와서
장에다 하나씩 팔고나서 그 돈으로 주변에 술 사며
울아버지 표현대로 목돈 풀어 푼돈 만드니
술과 빚은 늘어나고 불화는 잦았지.
참다 못한 고종사촌들 하나 하나 가출하여
대구에 모여 억척 같이 살았다데.
고모부 술병으로 죽자 학우리 고모도
동네 곳곳에 빚만 남기고 밤차로 대구행.
10년 만에 밍크 입고 돌아온 우리의 학우리 고모
에어콘 장사로 큰 돈을 번 막내아들을 앞세우고
동네 집집마다 다니며 고모부가 진 빚을 갚았고
엎드려 절하며 용서를 빌었다지.
초년(初年)이 길(吉)하고 중년이 흉(凶)했고
말년이 다시 길한 팔자라는 학우리 고모
울아버지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학우리 고모.
지금은 친정인 박가네 선산 발치에
사연 많은 남편과 누워 마을 내려다 보며
다 갚았다 이것들아 외치고 있겠지.
<우리 동네 사람들 17 – 안동 김씨 울 엄마 >
아들 없는 부잣집 딸로 태어나
시집올 때 그 때로선 드문 오동나무 장롱과
비싼 반다지에 솜이불 네 채를 해 왔고
동네 가산(家山) 옆의 100평 짜리 깨밭까지 갖고 온
천성이 모질지 못한 착한 성품의 울 어머니.
김진숙이란 이름도 있었다고 하나
6.25 사변으로 면사무소가 불탔을 때
호적도 다 타버려 게으른 면서기가 동네 여자들
김씨 이씨 박씨로 분류할 때 그냥 김씨가
이름이 된 안동 김씨 울 엄마.
내 학교 다닐 때 어떤 선생님은
엄마 이름이 진짜 김씨야? 이것 뿐이야?
라고 따지듯 자꾸 물었을 때
우리 동네 엄마들은 도장 하나로 돌려 써요.
그러면서 그냥 웃고 말았었지요.
청량집 새댁 혹은 선균이 엄마면 됐지
이름이 뭔 소용이냐며 엄마도 같이 웃었었지요.
양자(養子) 들인 친정이 서서히 몰락할 때
냉정한 울 아버지 위로는커녕 비웃기만 할 때
어머니 가슴의 새까맣게 든 멍울의 크기
막내인 나는 그 가슴에 안겨본 느낌으로 알지요.
60년을 함께 살며 큰 소리 담 밖을 넘지 않았다고
모두들 금슬 좋게 해로했다고 칭찬하지만
그 공의 팔 할은 엄마의 것임을 나는 알지요.
봄에 아버지 돌아가신 후 6개월간 상막(喪幕)을 짓고
아침 저녁 뜨신 밥 공양하고 탈상 후
내 딸 돌날에 채워주려 은팔찌를 손에 쥔 채
집 나서다 가심이 답답하다며 쓰러져
남편 따라 잠자리처럼 가을하늘로 올라간 울 엄마.
하늘 가시기 며칠 전 내 낡은 포니를 타고
소원했던 오대산 적멸보궁에 다녀 온 뒤
니 덕에 호강했다며 내게 귓속말로 남긴 마지막 말은
깊은 밤 깨어 듣는 옆집 소 여랑소리가
시골 집에 혼자 남은 엄마에게는
저 절 처마 끝에 매달려있는 풍경처럼
그래도 위안이 된다는 말이었다네.
집만 하나 장만 한 뒤 엄마 챙기겠다고
엄마 생전 가락지 하나 못해 준 막내놈은
학원해서 첫 달에 번 삼백만원으로
장모 누나 아내에게 금으로 쌍가락지 해 주고
속으론 자기 엄마 생각하며 울었었지요.
3층집 산 뒤 집들이 날에 모두들 몰려와 축하할 때
기뻐해 줄 엄마아빠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람
고샅길에 숨어서 한참을 울었다지요.
그 놈은 지금도 책상 앞에 부모 사진 모셔 두고
엄마, 그 딸이 설 쇠면 이젠 서른 네 살이예요.
올해도 나지막하게 일러 준답니다.
<우리 동네 사람들 18 – 큰작은댁 둘째 당숙모 >
시집 온지 3년만에 육이오 난리통에
딸 하나 두고 내 오촌 당숙인 남편은
의용군으로 북으로 끌려가고
뱃속에 있던 유복자는 둘째딸로 태어났다지요.
나를 유난히 사랑한 둘째집 할머니인
큰작은댁 할머니의 생과부 둘째 며느리.
울아버지 우리집 뒤란 담을 헐어
그 집과 비상통로를 만들어 드렸었지요.
딸 둘을 키우면서 생활비가 부족해
그 수줍은 당숙모 장삿길에 나섰었지.
그나마 할 수 있던 장사는 여자상대 보해장사.
옷감을 머리에 이고 골목길을 헤매면서
보해있어요라고 나지막히 외쳤다지요.
장사 끝내고 읍내서 걸어 집에 오면
내가 저녁 밥 먹고 한잠 잔 뒤 깬 시간
울엄마 담 너머로 건너 온
꽁꽁 언 동서 손 잡아 아랫목에 앉히고
화로를 부젓가락으로 뒤집어 온기를 더하면
하얗게 긴 손을 뻗어 문지르셨지요.
질화로 위에 우리 식구 먹고 남은
시꺼멓게 그을린 된장국 냄비를 올리고
남은 밥 한 그릇을 넌지시 건네면
조곤조곤 얘기하며 찬밥을 꼭꼭 씹던 당숙모.
그걸 바라보며 자네 장백이 머리가 다 빠졌구먼
무릎 베고 있던 내 머리 대신 쓰다듬으며
고개 돌려 울 어머니 눈물 찍어내었지요 .
다행히도 딸 둘은 건강하게 자라
첫딸은 바늘로 콕콕 찌르며 공부해
춘천교대 나와 선생이 되었지요.
집에서 출근하는 첫딸 밥해 주며
손녀 셋을 박사 교사 중앙부처 간부로 키워내고
손녀들 효도 받을 여건이 되었을 때
느닷없이 찾아온 치매에 걸려
당숙모는 아픈 과거를 잊어버렸었지요.
얼마나 참고 살았으면 그리 됐을까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리 됐을까.
돌아가신 뒤 제사할 아들도 없고
같이 묻힐 남편도 생사를 몰라
당숙모는 홀로 강변에 하얗게 흩어졌지요.
<우리 동네 사람들 19 – 큰어머니 >
울진 삼척에 간첩들 떼거지로 나타났을 때
마을 어귀 검문하던 행토예비군이
- 누구냐? 라고 불심검분 했을 때
- 윤오자요. 라고 답해 처음 이름을 알게 되었던
큰어머니 윤오자 여사.
임계 부근 산골에서 자라다가
쌀밥 실컷 먹으려고 시집왔다고
겉으론 청량댁 안주인이었으나
속으로는 시커멓게 멍든 채
늘 큰아버지에게 무시당했던 큰어머니.
내 짐작에 울 할아버지 며느리 선택 기준은
아마도 출산력과 노동력이었던 듯.
허세 만발인 남편은 오입질 출입꾼으로
늘 친척집을 순례하며 내내 밖을 떠돌고
혼자 그 큰집 살림을 맡아 하고
개용(家用) 돈 마련을 위해
그 힘든 나무장사를 마다 않던 큰어머니.
머리에 또바리 얹어 장작을 한 짐 이고
허리에는 소갈비 한 뭉치 달고
십리 길을 실룩실룩 걸어 다니며
오일장에 다니던 큰어머니,
동무들과 학교 가던 내가 모른 척해도
전혀 괘념치 않았던 진정한 생활인.
내 어릴 때 새 여자 데리고 온 큰아버지에게
말대꾸했다가 얻어맞아 눈텡이 밤텡이 된 채
야밤에 우리집에 속옷 바람에 쫓겨와서도
태평스레 코를 골며 잘 자던 큰어머니.
그래서 그런지 80이 넘어 치매에 걸려
늘 배고프다 이 년들아 소리쳤다던 큰어머니.
밥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밥으로 만든 똥을
벽지에 풀 바르듯 발랐다는 큰어머니.
8사단에서 전사한 큰아들 덕분에
솔찮은 연금으로 죽을 때까지 벌었던 큰어머니
쉬쉬하는 소문에 들으니 돌아가신 뒤에도
여러 달 연금 받다 아주 가셨었다지요.
<우리 동네 사람들 23 – 넷째집 할머니 >
지독한 구두쇠로 살림을 일궜다는 울 증조 할아버지
오직 엄격함으로 자식들을 교육했다는 증조할아버지
아들 넷을 슬하에 두고 부족장 노릇을 했다지요.
큰아들은 한 집에 동쪽 담아래에 둘째할아버지
셋째는 길 건너집에 넷째는 밭 건너 집에 살았다지요.
큰할아버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울 아버지는
넷째 할아버지에게 엎혀 가며 함께 컸다지요.
부지런하게 살았으나 상처(喪妻)를 하고
딸 셋과 아들 둘을 위해 재취(再娶)했다지요.
내가 태어났을 때는 넷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해
어린 날 가면 대학생 막내당숙만 있었지요.
당숙은 새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에
시청 공무원이 되어 그 봅답에 응했지요.
그 당숙 장가간 뒤 할머니가 며느리에게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가를 자주 강조했다지요.
시어머니 갑질에 참다 못한 당숙은
홍제동에 새집을 사서 이사 가고
새할머니는 혼자 심복에서 살았지요.
부지런한 할머니 중학교 갓 입학한 나를 불러
옆방에 살게 하고 밥수발을 해 줬지요.
어느 날 할머니 화장실에서 나오다 쓰러져
누나와 내가 울며불며 외쳤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길을 떠나셨지요.
이미 임자있는 넷째 할아버지 옆에 눕지 못하고
백발이 성성한 친정 동생 조카들이 와서
내 눈물 속에 할머니를 모셔 가서
친정 어딘가에 무덤을 만들었다지요.
어린 내 마음에 낳은 정 키운 정에 대한
갖가지 생각을 심어주고 할머니는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졌지요.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있어야
큰소리도 치는 거라는 걸 알려 주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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