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바위꾼. 이항 선택을 내미는 자
2023 07 07
소서(小暑): 며칠 전 장대비로 능소화(凌霄花)가 도로 위로 흘렀다.
요듬 부쩍 이항대립의 이야기가 많이 돈다. 일반인들이 통상적으로 우리가 잘 살려면, 중국과 관계를 할 것인가 일본과 관계를 할 것인가? 사람들은 그거야 중국이지라고 한다. 먹거리와 삶의 터전 문제는 중국과 일본이 아니라 대륙과 해양인데 대륙이 맞지 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사람과 자연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으며, 우리의 터전은 한반도이다. 지구는 둥글고, 어느 지점도 다른 지점보다 중요하다고 할 때, 그 지점이 중심이 되고 다른 지점은 그 지점과 연관이 있으며, 거리상 배열되어 있다고들 한다. 이 연관은 거리가 아니라 삶의 양식에 따라 배치일 것이다. 들뢰즈의 사건의 철학에서, 푸꼬의 배치를 빌려서, 배치의 방식과 연결망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미로라고 부르고, 새로운 연결방식을 리좀이라 불렀다. 미로, 크레타섬을 미노사우로스가 있는 궁궐을 빠져 나오는 테세우스가 미로를 벗어나기 위해 들어올 때 풀어놓은 가는 실을 따라 나오듯이, 미로의 세상은 지혜의 실이 필요하다. 변역(變易)의 세상은 리좀의 배치에 따라 저항, 봉기, 항쟁, 혁명이 일어나는 데, 그 연결망이 아리아드네의 실만큼이나 끊어질 듯 말 듯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고 한다.
다른 부류들도 두 가지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를 제시한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윤똑똑의 이야기인 것 같은데, 이제는 한일전, 한일전에서 이겨야 한다고들 한다. 이런 둘 중에 하나 고르기는 중일을 갈래 고르기와는 전혀 다르다. 경계를 긋는 것이라. 한일전에서 당연히 우리나라사람은 우리나라고, 일본사람은 일본이지, 무엇이 문제인가? 나로서는 부일 또는 종일이라 써야 할 용어를, 요듬은 매국이라고 써야 할 용어를 친일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들의 사고에서 나왔다고 본다. 여러 번 이야기 하지만, 백선엽이나 박정희가 친일이 아니라 부일이거나 종일이지, 아무 때나 아무 곳에나 용어를 붙이는 것이 정의와 공정을 주장하는 자들이다. 기본이 안 되어 있어서이다. 정의는 두 갈래 사이의 선택이나, 둘 사이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사고의 틀은 외부의 자신의 영혼을 두는 자들이며, 즉 하늘나라에서 영혼이 왔다고 망상하는 자들이며, 이들의 사고의 극한에는 파라노이아로서 제국이 있다.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두 항목의 갈래가 있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갈 길에 갈림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두 갈래인지 수만 갈래인지는 그 사람들의 의도와 경향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삶의 기원과 과정은 다발, 무더기, 묶음이라 한다. 이런 다발에서 어느 것이 진행될지 비결정이기에, 벩송은 이런 나아감(운동과 시간)은 비결정이라고 한다. 비결정은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현재-미래의 과정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모른다고들 한다. 당연히. 사람들이 누구도 모른다고 하니, 안다는 이가 있다고 하면서, 그래도 신만이 안다고 할 때, 이런 신은 무식장이이거나 야바위꾼이다: 아무도 모르는 것을 안다고, 신만이 알고 아무에게도 가르쳐 줄 수 없다고, 신만이 알고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신만이 실행한다고, 그래서 신만이 “나는 안다”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모르지, 용용. 이런 사고의 이항에는 나와 타인(타자)의 문제가 있다. 두 갈래의 길, 또는 진행하는 과정에는 나와 타인이 아니라, 인간 종 또는 인류의 난문제와 연관이 있다는 점에서 동포애(코스모폴리탄) 또는 동지애의 문제이다. 그런데 평면을 갈라놓고, 이쪽과 저쪽을 편가르기 하는 주체와 객체의 이항대립은 나의 이익과 나의 관심에 따른 경계선의 안과 밖을 가르는 것이다. 이 편 가르기의 선택지를 내는 자들은 야바위꾼이거 사기꾼이다.
한일전이라니, 한미전은? 한중전, 한러전. 그 문제를 제기하는 자의 경계선의 어디에 있는가? 한국은 미국과 같이 있고 일본은 경계선 밖인가? 경계선으로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이런 추리의 방식은 근대의 양식에 의해 세계의 통일성을 주장한 것이다. 데카르트가 대표적으로 주체인 자아의 사유가 무한까지 사유할 수 있어서, 무한을 사유하는 주체가 세계의 무한을 알 수 있고, 그래서 세상을 알 수 있고, 그 사람들을 알 수 있고, 물체들을 알 수 있고, 신체도 알 수 있고, (좀 과정이지만) 모든 것을 알고서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 대신에, 무한을 경계로 그 안을 다 안다는 생각에서 세계의 통일성, 힘(운동력)의 통일성을 주장하고, 그렇게 배열을 한 것이다. 게다가 배열도 인간의 사고로 앞뒤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인수분해, 연산규칙)으로 세계를 계산해 냈다. 이런 사고의 완성된 배열이 좌표였다.
배열의 자유, 경계의 자유, 여기서 경계 밖의 노예인가? 악마인가, 그렇다. 데카르트에서는 경계 밖이 없다. 경계안을 아는 자가 모든 세상의 사물에 대한 자유이다. 아마도 윤석열 정부의 자유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 자유의 놀이, 양식의 추리에 의한 극한에 이르는 자유에 함정이 있다. 그 사고하는 자아는 세계 안에 있는가, 세상 밖에 있는가? 말하자면 영혼은 물질 밖에 있는가, 물질 안에 있는가? 데카르트도 영혼은 물질 바깥에 있다는 추리에서 세계의 통일성에 대한 자유로운 조작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자유로운 조작 속에, 영혼이 세계 안에 있다고 하면, 인간의 영혼도 조작 가능해야 한다. 다른 한편 영혼이 경계 밖에 있다면, 경계 밖에 있는 것은 노예와 개돼지, 또는 다이몬(악마)이 아닌가? 이항 대립을 선택지로 내미는 문제 제기자의 정의와 공정은 자기들은 경계 밖에 있으면서, 모든 사람은 경계 안에 있어야 한다는 추리적 사고에 젖어 있다. 이런 윤똑이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이원성을 믿었던 스콜라철학의 아류이며, 거슬러 올라가서 로마 제국이래로 참주(황제)에게 복속하며 이익을 챙기는 마름(성직자)의 사고였다는 것이다. 영혼을 팔아서 이익을 챙기는 마름은 언제나 경계 안에 있는 추리적 사고를 한다.
경계를 안과 밖을 선택하게 하는 자들의 추리는 사기다. 주식 시장에서 언제나 잃는 이가 있으면 따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투기심리가 전쟁을 부추기는 쪽에서 마찬가지이다. 전쟁은 위기이지만 기회라고 말하는 자는 야바위꾼이다. 진시황이 야바위 꾼(방사, 方士)의 책을 태웠다고 한다. 야바위의 극성은, 마치 영혼이 외부에서 왔다는 종교의 사기꾼과 요즘의 진리를 외부에 저장할 수 있다고 믿는 망상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돈, 돈에 미친자들이 미래에 대한 결정권을 경계의 선택이라고 하는 착란의 길을 가고 있다. 이를 파라노이아라 한다.
<한일전을 말하는 이들은 사기꾼이다. 이항을 제시하는 것은 이미 제국의 앞잡이이며 주구(走狗)이다. 이런 사기꾼이 다음 정치판에서도, 마치 전쟁에서도, 자기 이득을 찾으려 할 것이다. 다자와 관계 속에서 노력하는 인민 속에서 아제인간을 만나는 것이 레지스탕스이며 혁명이다. (56QMC)>
플라톤 이래로 정의는 지혜, 용기, 절제의 조화이다. 이 세 가지가 사회적 활동 인물들의 단순 분류로서 통치자, 군인, 생산자이지만, 이 부류들은 다발이며 리좀들이다. 이런 여러 갈래가 조화로울 때, 도시 국가의 정의이다. 요듬 표현으로 무지개(다섯, 열두)색이다. 이런 갈래들이 자기의 역량과 능력, 그리고 각 개인이 권능을 잘 발휘하는 것이 자유이다. 생명은 이항 대립이 아니라 여러 다발의 갈래가 자기 모습을 잘 드러내려는 노력이다. 이 노력이 자연 속에서 자기실현을 위한 저항, 봉기, 항거, 혁명으로 나타나나는 것이다. 야바위꾼이나 사기꾼의 이항 대립론에 에게 속지 말고, 새로운 빨강이 길, 노랑이 길, 파랑이길 등등의 다섯 길로 또는 열두 길로 가면서 조화를 잊지 않고 삶을 염두에 두면, 그 여러 갈래 길들이 이항 사고에도 저항하고 봉기하고 항쟁할 수 있으며, 새로운 조화를 이루는 장을 열 것이다.
노력을 통해 여기, 지금이다. (56RK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