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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강 그리스 철학의 정확성, 이를 벗어난 지속.
시간관념의 역사(Histoire de l’idée de temps)
-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2-1903)
- 리끼에(Camille Riquier, 1974-) 편집, PUF, 2016, pp. 87-101(P. 395).
벩송은 학위 논문 DI에서는 점(단위)의 성립을 다루는 피타고라스의 수의 성립에서 단위에 대해 먼저 다룬다.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의 있음과 없음의 존재에서 존재의 부동성을 주장한 제논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플라톤의 추상화의 형식을 다룬다. 여기 시간관념의 역사에서는 4강까지 단위 성립으로서 수학적(산술학과 기하학)을 다루었고, 이 단위의 토대인 공간을 다루면서, 운동자체를 무시한 엘레아학파를 다루었다. 시간 또는 지속의 문제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편에서 다루어질 것이라 한다. 여기에서 영원과 시간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 티마이오스편은 그리스 사상이라기보다 이집트의 천문학과 책력에서 유래한 것은 아닐까?
소크라테스의 고뇌를 거쳐서 플라톤에 이르러서야 영혼(지속)을 다루어야 한다는 사유에 접어들 것이다. 왜 플라톤에서일까? 들뢰즈는 언어와 연관하여 아낙시만드로스에로 올라가는 데 말이다. 그런데 이오이나 학파의 아페이론과 푸뉴마(pneuma, 공기 또는 정령)에 대해서는 근거 또는 이유를 다룰 만한 조각글들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일 것 같다. 들뢰즈가 특별하게 다룬 ‘기원전 587년’(신바빌론이 유대왕국 파괴)에는, 입말의 전승보다 쓴글로 된 언어의 흔적을 더 많이 다룰 수 있을 것이고, 게다가 집단체계로서 유일신앙 종교에서 언어 체계가 자리 잡는 시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시기에서 전쟁과 더불어 포로가 되고, 지배 또는 억압 받아서 안 된다는 생각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 시대에도 그리스 연합군이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샤와 전쟁에서 이겼지만, 같은 반도에 살면서도 체제의 상이함으로아테네동맹과 스파르타 동맹 사이에 펠로포네소스 전쟁이 있었고, 이 전쟁으로 승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나라가 다 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제우스 등 12신앙으로는 동질성의 확보가 잘 안 되는 경우에, 인간으로서 ‘이뭣꼬’를 고민했을 것이다.
이뭣꼬의 기원과 원인에 대한 고민은 대상의 정의보다 ‘과정과 생성’을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 왜 플라톤은 여러 작품을 쓰고 나서 늦게서야 티마이오스를 쓰면서 지속(영혼)에 대해 숙고했을까? 나이? 즉 성숙해야만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아테네의 멸망뿐만이 아니라, 반도 안에 여러 도시국가들의 소멸을 예참(선지자로서)하지 않았을까? 마케도니아의 발흥으로.
‘이뭣꼬’에서 8천만의 흐름을 성찰한다면, 남과 북은 둘로 쪼개져서 제국주의의 수탈 속에 있기보다, 다양체로서 성립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좋을 것인데, 통치+훈육의 시대를 중첩하여 매크로(AI, 인공지능)의 통제시대에 인민이 어떻게 예참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54UKD)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철학에서 시간을 다루었을까? 시간을 다루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제논의 네 가지 논증은 운동을 부정하는 추론이었다. 그 운동의 부정은 시간의 부정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벩송은 보고 있다. 운동의 부정은 공간을 무한히 자를 수 있다는 것인데, 그 추론에서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이 자를 수 없는 실재성이라는 점을 구해낸다. 운동은 공간 속의 궤적이 아니라, 분할할 수 없는 어떤 움직임(운동, 지속)이라는 것이다. 이 움직임과 같은 어떤 지속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내면에 깔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철학은 이런 문제를 놓치지 않고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해결의 노력을 계속해서 해왔다는 점에서, 정확성과 엄밀성을 찾으려 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런 점이 서양철학이 과학과 더불어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운동의 실재성에 대한 논쟁은 르네상스 이래로 상대성 운동, 등속도 운동, 가속도 운동의 논의를 거치면서, 자연을 대상으로 다루면서도, 자연의 내재성의 권능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자연을 분석하는 기능보다 자연이 실행하는 능력[권능]쪽으로 선회하는 사유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생명체에서 유전에 의한 연속성의 문제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긴 역사를 지닌 실재성에 대한 논의가, 발단에는 제논의 운동성의 부정성에 있다고 벩송이 대담에서 공언한 적이 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DI)은 제논이 운동성 부정이 착각임을 밝히면서 논문이 풀렸다고 한다. 즉 날고 있는 화살의 잘려진 화살의 상태도 운동중이다. 화살의 정지된 점은 없다. 착각이다. 이 착각을 밝히면서 DI 2장에서 근대의 등속도와 가속도까지를 다룬다.
“이번” 강의에서 벩송은 시간 지속의 발단을 제논으로 잡고, 구체적으로 시간을 논의한 철학자는 플라톤이며, 티마이오스를 다룰 것이다. 서양철학사는 시간을 먼저 다루기보다, 운동의 실재성을, 그러고 나서 시간의 실재성을 다루고, - 2천5백년의 긴 세월을 거쳐 – 19세기의 심리학의 도래와 논쟁에서, 그러한 실재성이 의식의 상태의 실재성이라는 점을 착안하고, 나아가 생명의 실재성이 경험적이며 구체적이고 절대적이며, 직관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는 새로운 방법의 창안으로 이어질 것이다. (55LMI)
*** 내용 중에서 ***
§05. 1903년 1월 9일 회기(Séance) 87-101
입문으로 행했던 몇 강의에서 기호 일반에 대한 본성(la nature)과 성격(le caractère)을 연구하기를 시도했다. 그리고 지난해 강의의 요약으로 시간, 지속이 기호의 표현에 적어도 알맞다는 것이라는 것을 제시하기를 시도했다. (87)
‘사유하다’는 단어의 습관적 의미에서 몇몇 개념들로부터, 기호들로부터 시작하는데 있고, 그리고 기호들을 가지고 실재성 앞으로 가는데 있다. (87)
그러나 운동, 시간, 지속은 반대 절차에서 이다. .. [반대적 절차란] 내부적 노력에 의해, 의식에 의해 사람들은 시간으로부터 개념들로이행할 수 있다. 그러나 파악한다. 시간으로부터 개 .. 개념으로부터 시간에서 이행에는 어떠한 수단도 없다. (87)
이러한 관점에서 시간은 분석할 수 없는 것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88)
그리스 철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생성(le devenir), 지속(la duree)의 관점을 채택했다. .. 이것은 무용하지 않을 것이나 – 여기서는 괄호 안에 둔다 – 그리스 문화가 극소수의 입문자[초심자]에게 제한되어 가는 순간에 있다. (88) [벩송이 내재성을 파악한 것은 심리학적 탐구보다 먼저 그리스철학이 원인 또는 이유의 탐구에 있었다는 점에서 출발하였다. 들뢰즈도 그러하다. 박홍규도 플라톤에서 원인론(aitiologie)과 우주발생론(cosmogonie)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그리스어 아르케를 기원 또는 원인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정확성(la précision)의 발명자들이다. (88)
그 정확성은 정신의 필수불가결한 성질, 본질적인 성질이 아니다. ... 정확성(la précision) 대 거의(à peu près, 어림잡아)가 있는데 ... 정확성, 이것은 발명되지 않을 수 도 있었다. 그것은 역사적 우발사고이다. (88)
형상 속에 완전하고 충만한 개입은 무엇보다 정확성을 탐구한다.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 정신의 특징적 윤곽이다. 그러한 것은 도처에서 볼 수 있고, 그리스 인들은 우선 그들의 문학 속에서도 남겼다. .. 영국 문학이든 독일 문학이든 서양 문학은 고전문학들에 의해 매우 많은 영감을 받았으며, 헬레니즘 문화의 직접적 유산들이다. (88-89)
이런 문학(영, 독)의 문학들은 그리스문학과 라틴문학으로 구별될 수 있을 것 같다. .. 형식은 절대적으로 지적된 내용을 갖지 않는다. 작가는 독자에게 내용을 채워주기를 호소한다.
헬레니즘의 그리고 고저주의의 본질은 관념과 형식 사이의 충전작업(adéquation, 일치)이다. ... 그것은 충실성, 진지성(la sincérité)이며, 어느 면에서는 형식 속에 쟁여져 있는 관념들의 완전한 전시(l’étalage)이다. (89)
라틴계 인들은 정확성을 발명하지 않았다. ... 완전한 정확성, 완전한 적합성은 그리스인들의 발명이다. (89-90)
그러한 것이 그리스 문학에서 또 그리스 과학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증명을 발명했다. 그들은 수학적 증명의 진실할 발명가들이다. (90)
이집트인들은 경험적 수단들[측지술]에 의해 기하학 명제를 얻었다. 그것은 아마도 경험의 일반화였다. 거기에는 증명이 없다. 증명은 그리스의 발명품이다. (90) [유클리드 기하학이 이집트 천문학과 측량술에서 왔다고들 한다. 그런데 헬레니즘(프톨레마이스 왕조)에서 기하학 원론이 정립되는 것은 그리스인들의 사유에서 이다. 이점에서 논리학과 순수 기하학이 비슷한 시기에 정립되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인류가 기원전 3세기 정도에서 지성이 체계를 세웠다고 할 수 있다. ]
증명은 매우 특수한 어떤 것이다. 그것은 긴 연속성을 따라서 변이들, 정지들, 부동의 장소들을 모으고 선택한 어떤 것이다. 이렇게 얻어진 정태적 몇몇 관계들을 연구한다. .. 엄격함과 정확함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인들이 발명했던 것이다. (90-91)
나는 정확성이 중요한 성질이라고 말해왔다. 그것은 가끔 결함이 있고, 메달에는 그 이면이 있다. ... 생성하고 진화하는 그러한 모든 것은 그리스 정신에서 거의 완전하게 벗어나있었다. 이런 점이 그리스 문학에서 또한 그리스 과학에서 매우 잘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 인들이 알 수 없었던 것으로 영혼의 상태들이 있다. .. 근대인들의 목가적 시를 살찌우는 부분들을 그리스 인들은 잘 표현하지 못했다. 단어로 표현할 수 없고 암시할 수 없는 영혼의 상태들을 그리스인들은 옆으로 젖혀놓았다. (91)
나는 말하곤 했는데, 그리스 과학[학문]에서는 볼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정태적 과학이며 매우 정확한 과학이다. 그 과학은 이는 증명의 엄격한 틀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체계적으로 빼버렸다. 그 그리스인이 아르키메데스(Archimède, 전287-212)이다. (91)
아르키메데스는 역학[정역학]의 발명자.. 동력학은 [증명에서 제외되었다.] 그렇다고 동력학이 부정확하다는 것은 아니다. (91) [17세기 후반에 미적분과 더불어 동력학이 발달할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오늘날 적분이라는 것을 제외했다. 적용에 어렵기 때문이다. 정확성을 거부하는 것이었고, 증명의 절대적 엄격성을 거부하는 것으로 여겨 그런 관념[실재성]을 버렸다. ... 그리스 철학의 외적 연구에 의해서 표현할 수 있는 것, 말(le mot)로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철학에서 말의 역사는 기원적으로 본질적으로 말투(la parole)를 의미한다. (92) [그리스 과학은 외적 연구이고... 형이상학(철학)은 순수 사유, 즉 내적 변화와 과정을 다루는 학문이다. 이 형이상학적 사유에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상향하는 길과 하향하는 길, 전자는 정신[영혼]의 탐색의 길이고 후자는 과학의 엄격한 적용의 길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르키메데스...로 이르는 수학에서 적용의 길이 있었는데, 아르키메데스로 끝나고, 로마 제국이 명령체계로 바뀔 것이다. 여기에 크리스트교가 심판(판단)으로 걸터앉아서 간다.(54UKC)]
로고스(λόγος)는 말투이다. 그리고 로고스(λόγος)는 증명이다. 이리하여 증명은 수학적 증명을 지칭한다. .. 로고스(λόγος), 그것은 정의(définition)이며(92) .. 스토아학파에서 로고스(λόγος)는 설명하는 것이고, 또한 삶을 일어나게 하는 것(causer), 씨앗의 근거(la raison, 이유)이며, 발생적 근거이다. (92-93) [스토아의 로고스와 분석가의 로고스는 전혀 반대방향의 사유이다. 소크라테스를 탐구하는 입장에서 두 계열의 차이가 있다. 후자에는 라베송(Ravaison, 1813-1900)과 푸이예(Fouillée, 1838-1912)이 있고, 그리고 벩송이 주목했다.]
플로티노스의 철학에서 로고스(λόγος)[누스 νοῦς]는 제일 첫째 항이다. 지난 해에 출발해야 했던 것은 이 개념{notion}이다 ..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성적 이유(la raison génératrice, 기원 근원)이다. (93) [플로티노스와 달리 크리스트교 성립에서 로고스는 질서와 명령이다.]
플로티노스에서 로고스(λόγος)는 마치 배우의 역할과 같은 것이라 한다. .. 감겨져 있는 것을 풀어내는(déroulement) 것이다. 실재성의 본질적인 두 측면이 있다. 표현할 수 있는 것과 표현할 수 없는 것, ... 그리스인들에게서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사유로 고려하지 않는다. (93)
완전한 표현을 허용할 수 있는 것만이 실재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정식화 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관념론[존재론]의 첫 출현에서부터 이다. .. 엘레아학파, 파르메니데스에서 로고스(λόγος)는 실재성을 착각(l’illusion)으로 구별하는 데 사용된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로고스(λόγος)의 사용에서 두 단어를, 즉 ‘사유하다(penser)와 말하다(parler)’를 붙여서 쓴다. . (93)
만일 이러하다면, 초기부터, 즉 그리스 관념론의 첫 출현부터, 완전한 표현을 허용할 수 있는 것만이 실재적이라고 하는 이런 생각을 발견하는 것이 놀라운가? 엘레아학파의 철학.. 크세노파네스(Xénophane, 전580경-485).. 파르메니데스(Parménide, 전540경-450)를 거치면서, 단편들을 통해서 우리는 로고스가 실재성과 착각을 구별하는데 쓰인다는 것을 안다. .. 그는 로고스에 의해 무엇을 이해했던가? 그의 단편들 속에서 우리는 “사유하다와 말하다”의 두 단어를 -생각할 수 없는 것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 여러 번 접합하여 사용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93-94)
우리는 로고스(λόγος)가 실재적인 것과 착각적인 것을 분리하는 것으로 지적되었다는 것을 안다. / 따라서 출발점은 실재적이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착각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거것이다. (94)
진리의 기준은 ‘있는 것’ 또는‘있지 않은 것’이다. [있지 않은 것은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있는 것, 그것은 실재적이고, 진실하며, 완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94) [모순율]
모순 원리, .. 있는 것과있지 않는 것의 중간은 없다. (94) [배중율] - [박홍규는 서양철학이 모순의 해결하는 노력이라 한다. - 모순, 불합리, 궁지(aporie)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 원리는 두 가지 귀결을 끌어낸다. 우리는 둘째만을 검토할 것이다. 첫째는 다양성[다수성]은 생각할 수 없고, 알 수 없고, 현존하지 않는다. 전체는 하나다. 파르메니데스의 결론이었다.
[둘째] 더욱 흥미롭고, 첫째와 다른 형식이 근저[심층]에 있다. 알 수 없는 일종의 변화와 일종의 생성이 있다는 것이다. (94) [파르메니데스는 표현할 수 있는 것, 즉 (현전에서) 있는 것만을 검토한다. - 배중율로 쫒겨난 ‘없다’를 그 속에 ‘무엇인가 있다’로 읽는(느끼고 생각하고, 일어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국은 ‘없는 것’이 아니라 ‘음(陰)’이 동한다고하고 또한 양의 교대라는 관점이 있다. 그래서 인민은 사회론과 도덕론으로서 왕조변역(變易)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 아닐까? 변역의 세상에서 음(陰)이 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사당에 모시면서, 다음에 양이 음으로 교대되기를 기다리면서. (55MKA)]
만일 사람들이 사물이 ‘있다 또는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생성은 없고 아무것도 생성되지 않는다. 왜? 논리의 배타적 고려와 언어 조건들의 배타적 고려를 하지 않기에는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94) [배타적 고려, 즉 배중률의 사용은 생성과 변화가 없다. 달리 말하기, 되기, 용출선의 분출은 항상 소중하다.]
이것에서 저것으로 이행, 그것은 있는 것과 있지 않는 어떤 것의 이행이다. 사실 말하자면 그것은 사물이 아니다. 사물을 말하게 되자마자, 사물을 고정시킨다. (95)
나는 더욱 분명하게 설명한다. 만일 사람들이 실재성의 관점에 스스로 위치한다면, 만일 사람들이 실재성을 그것이 그 자체로 있는 그대로 고려한다면, 실재성은 무엇보다 이전(une transition), 이행(un passage), 운동(un mouvement) 이기에, 그때 생성(le devenir), 변화(le changement)는 개념 속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95)
나(B)는 예를 들건데, 주어와 술어 각각은 실사들(des substantifs)이며, 이것이 더 분명할 것이다. (95) [내가 창조적 진화 4장에서 문장 상으로 실사는 형용사로 되어 있으나 명사, 형용사, 동사도 실사로 읽어야 한다고 했다가, 질문 받은 적이 있었다. 벩송은 1903년에 주어도 술어도 실사라고 하지. 내말이 맞지. (54UKC)]
완전히 만들어진(tout fait) 인간은 없다. 실재적으로 현존하는 것, 그것은 진화이며, 생성이며, 어린이로부터 어른으로 진화(l’évolution)이다. (95) [완전히 만들어진 자연이 없듯이, 완전히 만들어진 신이 없기에, 온갖 이름의 신들이 있고 온갖 종교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신들을 다이모니아(복수)라고 말했다는 설이 있다. - 어디서 읽었는데 어딘지 기억없음]
따라서 모든 것은 분명하다. 만일 우리가 실재성 자체로서 운동으로부터 그리고 생성으로부터 출발한다면, 논리적 난점들은 쉽게 감당되어 진다. (95-96)
그러나 그리스인들의 관점이 그러한 대로 사람들이 어린이, 어른 등등의 항목들로 출발한다고 가정하면, 그러나(mais)그때 실재성은 완전히 만들어진 것이다. (96)[그러나 논리적으로도 어린애와 어른은 별개이다. 둘이 동시일 수 없다. 따라서 어린애로부터 어른으로 진화(변화)는 논리적이지 않다. 무모순은 어린애와 어른이 ‘따로’이다. - 상식도 그렇게 생각한다. 논리라는 것이 상식의 결과론이다.]
이것이[어린애로부터 어른으로, 가능한 논리적 이행은 없다] 파르메니데스가 말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단순히 이것만을 사물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사물은 있는 것은 있고, 다른 것은 없다. (95)
[파르메니데스의] 단편들 속에서 시간과 지속에 관해 명시적인 것을 우리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가 시간과 지속에 관한 극히 흥미있고 정확한 어떤 것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것은 플라톤에게서 이다. (97) [사실은 소크라테스이겠지만, 소크라테스에게는 문헌이 없다.]
우리가 시간에 대한 명시적 이론을 갖지 못하더라도, 이유[근거]들에 대한 암묵적 지표를 파르메니데스에게서가 아니라 제논에게서 갖는다. 그 이유 때문에 시간, 계속은 필연적으로 착각이다(illusoire). (97) [제논의 운동의 부정 논법은 일반인들이 운동(시간)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난해에 [제논의] 이런 논증들을 연구했다.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킬레스와 거북의 논쟁이다. ... 이행은 우발사고(un accident)이라는 것이다. 즉 제논의 모든 논증은 이점에 수렴한다. .. 날고 있는 화살의 논증은 우리의 관점에서 가장 교육적이다. (97)
사람들이 화살을 연속적인 여러 점들로 고려하면, 화살의 궤적의 점들 각각에서 화살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설상 화살이 궤적의 각점에서 그것자체와 동일한 공간을 자르고있기 때문이다. (97)
따라서 화살은 부동적이고, 왜냐하면 그것의 궤적의 점들 각각에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화살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98)
a에서 b로 가기 위해 어떤 순간에 놓여 있는 화살의 예를 들어보자. 만일 내가 궤적의 불가분의 순간에 화살을 고려한다면, 화살은 부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움직이기 위해 계속되는 여러 순간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한 순간 만을 고려하고 따라서 매 순간에 부동이라 하며, 그리고 화살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운동성은 착각(l‘illusion)이 된다. (98)
이런 논증의 토대는 어떤 토대인가? 우리는 앞선 강의에서 이것을 표현적으로 말했다. .. 화살은 a에서 b로 어떤 공간을 거쳐서 간다. .. 제논의 추론은 화살이 지나간 궤적을, 즉 자리들을 가지고 추론한다. .. 매순간에 운동은 부동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 가설 상으로, 점은 움직이지 않는 공간의 점이다. 화살은 매순간에 움직이지 않고, 운동은 부동성으로 이루어진다. (98)
그러나 진실은, 화살은 궤적의 점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화살은 결코 거기에(그 점에) 있지 않다. (98) [무한히 자르는 점이 있다고 하면, 그 작은 점에는 화살이 있을 수도 없기 때문에 착각이다. 빛의 속도로 인간의 여행을 이야기하는 것이 착각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생명체는 빛의 입자처럼 운동하면 생명체가 파괴된다. 말하자면 영혼은 지속하는 것이지, 공간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제논은 완전히 자기 가설의 논리 속에 있다. (99) [먼저 정한 부동성에 빠져있다. 즉 공간이 먼저 있다고 여기는 것은 악순환(cercle vicieux)이다.]
이런 논증은 분할법(la Dichotomie, 이분법)의 논증에서도 동일하다. .. 이런 궤변(소피즘)의 해결은 매우 간단단하다. (99)
실재성에서 a에서 b로 움직임, 그것은 구체적인 어떤 것이고, 그러한 것은 공간ab 를 단번에 관통하는 화살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공간ab를 가로지르는 걷는 자일 수 있다. (99) [운동의 분할 불가능성을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다. 분할하면 사실상 정지에서 정지 사이를 운동이라 부르는 것이고, 운동은 연속이며 지속이다.]
아킬레스와 거북이 경주의 궤변에서도 또한 동일한 것이다. (100)
제논의 논증들 중에서 화살의 논증 다음으로 가장 교육적인 것은 경기장 논증(l‘argument du Stade)일 것이다. (100)
그림(100)
a _____________________ b
<- c___________________d
e__________________f ->
ab에서 보면 양쪽으로 움직이는 cd와 ef는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그러데 cd와 ef가 겹치는 순간부터 cd는 ef에 두 배의 속도처럼 움직인다. 제논에게서는 같은 운동이 다른 운동으로 보이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100-101) [예전에 양문흠의 제논에 대한 논의를 들은 적 있었다. 현재 나로서는 제논의 무한분할로서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 그런데 논의할 수 없다에 막혀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은 철학적(형이상학적) 문제거리로 남아 아페이론이 되었을 것으로 상상해 본다. 그 어떤 것이 생각될 수도 말할 수도 없지만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근거)도 없지 않으냐는 사유가 형이상학의 기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벩송이 제논을 비판했지만, 제논이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을 착안하면 새로운 문제제기가 나올 수 있음을 착안했으리라. 잘라서 설명(해명)할 수 없는 것이 생각될 수는 없을까? 데카르트에서 무한에 대한 사유는 그 어떤 것이 있다고 해야 한다는 점에서 출발했다고 보면, 데카르트도 신에 무한이라기보다 자연 자체의 무한에 대해 인정해야 학문의 통일성(운동총량의 보존법칙) 나올 수 있다고 여겼으리라. 그 무한한 전체가 흐름(운동)이라고 벩송은 주장하고 싶고, 흐름을 직관할 수 있는 것은 영혼이라 여겼을 것이다. (55LMI)]
다음 강의에서 우리는 철학사 속에서 첫째 시간이론을 다룰 것이다. .. 플라톤의 티마이오스편인데, 플라톤 철학의 한 부분을 밝혀준다. 그의 철학은 생성을 다루고, 신화들에 의해서 설명된다. (101)
(lu, 54UKD) (8:07, 55LMI) (8:28, 55M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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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 크세노파네스(Xénophane, Ξενοφάνης 기원전 580경-485) 신=존재(l'Etre) 콜로폰(Colophon) 출신 [소크라테스 탄생이전의 인물이다]
540경 파르메니데스(Parménide, Παρμενίδης/ Parmenídês, 기원전 540-450) 존재가 있다(L'Etre est). 152구절이 남아있는 자연에 관하여(Περί Φύσεως, De la nature(poème en vers), 여기서 진리(la vérité, ἀλήθεια)와 의견(l'opinion, δόξα)을 구분한다.
- Parménide écrit que « l'Étant est » (τ΄ἐὸν ἔμμεναι, fragment 6) et Gorgias, lui, « dit qu'il n'est rien » (Οὐκ εἶναί φησιν οὐδέν, § 1).
480 제논(Zénon Ζήνων /Zếnôn,기원전 480[490]-420경) 변증법(상대부정을 통한 자기긍정)의 발명자 [소크라테스보다 10살[20살]많다. 소씨가 한 수 배웠을 확률이 있다]
427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 Aristoclès 427-347; 80살) 플라톤이란 ‘어깨가 넓음’을 의미한다. 이데아의 철학자. (출생시 소크라테스 나이 42살이었고) [그리고 그가 18년 후에 배울 수 있을 있었다면, 소크라테스 나이 60살이었으며 10여년을 따라다니며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287 아르키메데스(Archimède de Syracuse, Ἀρχιμήδης, 전287-212) 시실리 출신, 그리스 과학자, 물리학자, 수학자, 기술자[발명가] 역학의 발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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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플로티노스(Plotin, Πλωτῖνος; lat.. Plotinus 204-270) 이집트 리코폴리스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 엔네아데스(Les Ennéades, Ἐννεάδες, 254-270). 그는 세계에 대한 이해로서 세 가지 기저(trois « hypostases »)를 깨닫게 되었다. 일자(L'Un, ἐν), 지성(L'Intelligence, l'Intellect, νουϛ), 영혼 (L'Âme, ψυχη) [이말로 보면 중간에 점으로서 일자, 상층의 지성, 심층의 영혼이다. / 학설상 일자에서 누스로 그리고 영혼으로 연결되면 누스는 자연자체가 된다.]
1815 르누비에(Charles Bernard Renouvier, 1815-1903) 프랑스 철학자. 이상시간(« uchronie »)을 창안했다. 칸트주의, 실증주의, 정신주의를 종합하려는 신-비판주의를 창안했다. 일반비판의 시론(Essais de critique générale, 1854)(재판, 1859, 3판과 4판 1864, 사후 1912)
1835 에블랑(François Evellin, 1835-1910) 프랑스 철학자. 무한과 양(Infini et quantité, étude sur le concept de l'infini en philosophie et dans les sciences, 1880)(refonte : 1891)
1843 딴네리(Paul Tannery, 1843-1904) 프랑스 과학사가. 그리스 과학사를 위하여(Pour l'histoire de la science hellène, 1887)
1846 리야르(Louis Liard, 1846-1917) 프랑스 철학자, 행정가. 고등사범에서 공부, 철학으로 교수자격, 보르도 대학 교수. 공교육 장관, 파리 아카데미 부총장. « L’organisation des universités françaises », Revue Internationale de l’enseignement, 1897
[베라르(Alexandre Bérard, 1859-1923) 프랑스 변호사, 정치가, 상원의원. 급진좌파.]
1871 보렐(Émile Borel, 1871-1956) 프랑스 수학자. 함수이론과 확률론 전문가.
1876 베라르(Léon Bérard, 1876-1960) 프랑스 변호사, 정치가. 1919년 공교육과 예술 교육 장관(ministre de l'Instruction publique et des Beaux-arts en 1919), 중등 6과정에서부터 라틴어 의무화.
1974 리끼에(Camille Riquier, 1974-) 프랑스 철학자, “시간관념의 역사” 편집, PUF, 2016, P. 395. 벩송의 고고학: 시간과 형이상학(Archéologie de Bergson: Temps et métaphysique, 2009)(PUF, 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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