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나는]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달라진다. 높아지는 온도만큼 옷차림은 가벼워졌다. 겨우내 맨 몸이던 앙상한 나무는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켜듯 두 팔을 벌린다. 뽀족하게 돋은 새싹은 금방 손톱만큼 자라고, 나무마다 본연의 이파리 모습을 보인다. 한낮의 햇살을 피해 발걸음을 옮긴다.
낮에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다가 저녁 무렵에 찾아가는 새로운 놀이터가 생겼다. 지난주부터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은 다른 이의 도움이 없어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다짐으로 지자체에서 주관하는 남성 요리 교실에 참가하게 되었다. 신청서에 올려져 있는 프로그램 안내문에 10회 석 달 과정으로 손맛을 느껴 보련다.
프로그램 신청 후 행여나 나에게 기회가 주어지기는 하는가 하는 기대 속에 며칠을 기다렸는데 마침내 대상자로 선정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앞치마와 행주를 준비하여 요리 학원으로 시간에 늦지 않도록 나오라는 내용이다. 약간의 재료비가 청구되었다. 지금까지 중년이 넘도록 살아오면서 요리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라면으로 한 끼를 해결할 정도였다. 아니 귀찮다는 이유로 해 보려는 생각조차 없었다. 어울리지 않는 호기심과 약간의 두려움이 겹친다.
지하철역을 나서 안내된 요리 학원을 찾아가는데 시작 시각이 가까워진다. 계단을 따라 2층 학원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직원의 안내로 등록 사인을 하는데 주방 기구가 비치된 조리실이 둘로 나뉘었는데 내가 있는 실에는 아직 도착한 사람이 없다. 먼저 자리를 잡은 사이 하나둘 신청자들이 모여든다. 젊은이와 나와 연배가 비슷한 또래도 보인다. 시간이 흘러 준비된 음식 재료를 옆에 두고 강사의 인사와 함께 조리 도구 사용법 설명이 이어진다.
주방에서 가장 흔하게 쓰는 부엌칼 잡는 법을 설명하는데 생소하다. 엄지손가락을 칼 옆면에 붙이고 검지와 나머지 손가락으로 자루를 감아쥐는 형태다. 이렇게 할 때 안전한 칼 사용으로 조리 시 칼날에 베이는 위험을 줄일 수 있단다. 조리 준비를 하느라 칼을 쓰다 보면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쥔 칼자루는 어설프기까지 했다. 마늘이나 양파를 썰 때와 다지는 요령도 배운다. 채소를 저미고 다질 때 엄지손가락을 도마 바닥에 둔각으로 붙여 지렛대로 삼고, 칼등에 검지와 나머지 손가락을 붙여 칼날을 옮겨가며 향신료 등을 잘게 만든다. 힘을 적게 들이고 원하는 만큼 알맞게 저미는 방법이다.
오늘 하는 첫 요리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부대찌개인데 요리 학원에서 준비된 재료를 물에 씻고 다듬어 칼로 알맞게 자른다. 햄과 비엔나소시지, 베이컨과 밀떡, 두부와 김치 등 채소가 가지런히 놓인다. 냄비에 다듬은 재료가 물을 잠기게 붓고 양파와 준비된 양념을 넣는다. 센 불로 가열을 하는 동안 계란말이를 시작한다. 인쇄물로 받은 조리 과정을 보면서 요리사를 따라 찌개를 만드는데 지시서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뒤죽박죽이다. 난생처음 시작해보는 요리, 칼질부터 예삿일이 아니다. 안내된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칼질도 습관대로, 손가락 전체로 칼 손잡이를 잡고 편한 대로 한다.
드디어 부대찌개 맛을 본다. 맛이야 당연히 최고다. 어떤 일류 요리사가 만든 것보다 입에 착착 감긴다. 가열을 충분히 하여 음식을 익힌 후 가스 불을 끄고 냄비 뚜껑을 열어 한 김을 날린다. 계란말이는 생각처럼 모양이 나오지 않는다. 한쪽이 찢어지고 울퉁불퉁하다. 강사가 만든 자연스러운 모양과 달리 터져버린 형태가 영락없는 초보자를 엿보게 한다. 모양새가 자연스럽게 나왔다면 준비해 간 그릇에 담아 식구들에게 자랑이라도 할 테지만 아니다 싶어 열기가 식기도 전에 자신의 입으로 들여보낸다. 미지근하게 식은 찌개는 집에서 가져온 그릇에 옮겨 담아 가방에 넣는다.
첫날 함께하는 남성 요리 시간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이전에 아무렇게나 조리 원칙도 없이 만들었던 음식과 달리 오늘은 요리법에 따라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었다. 내가 만든 음식을 맛나게 먹는 가족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지금까지는 아내의 음식 솜씨 덕을 봤다.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가족을 위한 먹거리 만드는 일을 열심히 하였다. 인공 조미료는 우리 집 부엌에서 아예 찾을 수 없다. 천연 재료를 활용하여 맛을 내고 신선한 식감으로 ‘보기 좋은 음식이 맛도 좋다’는 말처럼 가족을 아끼는 마음을 예쁜 그릇에 담아 식탁에 올린다.
아내의 고마움을 뒤늦게 느낀다. 음식 하나 만큼은 남에게 뒤지지 않고 맛깔스럽게 조리를 한다.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여 당신을 위해‘십 첩 반상’은 기본으로 올렸다며 기세가 여간 아니다. 아내를 아는 사람은 고개를 끄덕인다. 음식 잘하는 부인을 둬서 부럽다나. 아내에게 먹는 즐거움을 안겨줘 고맙다는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내가 음식을 만들어 보면서 그 정성을 알아간다.
요리 학원에서 처음으로 만든 보잘것없는 음식 하나가 가족을 생각하고 챙기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마다 인생에서 특별한 전환점이 있다.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면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달라졌음을 알게 된다. 긴 인생 여정에서 지금이 기회라는 사실이나, 어느 날 문득 그때가 내 인생에서 최고의 시기였다는 점을 되돌아본다. 오늘 준비한 재료가 온전한 음식이 되기까지 조리 과정은 천차만별이다. 그 결과 또한 다양하다. 같은 재료로 함께 만든 음식이, 만드는 사람이 누구 인가에 따라 맛이 달라지듯 인생의 모습도 다양한 결과로 나타난다.
남은 기간 새로운 음식을 만드는 일에 도전해 보려 한다. 봄과 함께 신선한 먹거리가 곳곳에 널려있다. 향긋한 돌 미나리와 머위 이파리를 뜯어 입맛을 돋우어야지. 지나온 인생길만큼이나 굴곡진 나날을 되돌아본다. 아직 즐겁게 다가올 내일은 가족에게 만들어 줄 음식을 만드는 정성으로 차곡차곡 채워 나가련다. 내가 즐거우면 주변 사람들을 함께 돌아보는 배려가 소홀하기 쉽다. 큰일보다 작은 것부터, 먼 곳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가족부터 챙겨 나가는 우리가 되어보자. 오늘 저녁은 가족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그동안의 이야기를 즐겁게 주고받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 아내와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고기 뭇국과 청국장을 끓여야겠다.
나는, 나는 야 가족과 함께하는 초보 요리사, 가족의 평가가 기다려진다. 내일도 건강한 식탁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무작정 재료를 사러 마트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