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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5일 수요일
[김용호] [오전 8:32] 굿모닝입니다. 오늘도 힘차게 화이팅~!!!
[정진호] [오전 9:26] 1부를 오늘 틈나는 대로 올릴 텐데 초대교회에서도 성령세례의 중요성이 희석되어 가고 있다는 단서를 보았습니다. 성경에서는 사도들 당시는 성령세례가 아주 쉽게 이루어지는 걸 볼 수 있거든요. “너희가 성령세례를 받았느냐?” “못받았습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기도하면 즉시 성령이 임하고 그것이 방언하는 것으로 확인되구요. 그러던 것이 점차 그런 식으로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있더군요.
알렌크라이더의 "회심"에 나오는 내용을 발췌한 것인데 초대교회 때 엄격한 과정을 통해서 회심을 진짜 했는가를 확인한 후 침례식을 거행하거든요. 교리에 대한 동의(belief), 소속이 진짜 바뀌었는지(belonging), 진짜 삶의 변화가 있는지(behavier)를 면밀하게 확인하고 침례를 행하는데 침려식 때 침례를 행하고 기도하면서 이 사람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도록 기도하는 장면이 나와요.
사실 침례이후 어떻게 성령세례를 받게 되는가가 핵심인데 그 부분에 대한 문서나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성령이 임한다는 것이 성경의 장면과는 다르게 실제로 나타나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관심도 침례 때까지 인간의 노력과 역할에 치우치게 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어요. 성령세례는 침례식 때 기도문 안에 넣는 정도로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줄어든 것이 아닌가 유추해본 거지요.
침례식 때 사제가 침례 받는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그 말은 그 사제도 성령을 받는다는 것의 의미를 잘 모를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성령을 받아 새사람이 되었으면 그 정도로 끝낼 수는 없거든요. 사도바울을 보면 알 수 있듯이요.
그러니까 초대교회 때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의 주된 관심은 침례 받는 과정을 잘 통과해서 교회일원이 되는 것이지 그 이후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 이미 되어버린 시기인거지요.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으로 묘사했는데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도 무색케 된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짐작해 봅니다.
성경의 구원의 약속은 이신칭의만이 아니라 以信稱義 + 以受得義, 즉 믿음으로 일단 의롭다 칭함을 받고 성령을 받음으로 진짜 의롭게 된다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김용호] [오전 10:23] 예. 사도행전에 몇 곳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믿게 하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신칭의론자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말씀들이지요. 자기들의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주장인데 이 부분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믿음도 하나님이 주시고 그 다음 순서인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도 하나님이 주신다고 보면 간단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간의 책임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책임이 되어버리는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정진호] [오전 10:31]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는 인간의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보아야 하겠네요. 그런데 선택되지 않은 자가 자기 자유의지로 믿을 수 있는 것을 이신칭의론자는 구별을 못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자기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까지 모두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라고 하는 거니까요.
[김용호] [오전 10:33] 예. 구분하려 하면 이단이라고 떼를 쓰겠지요.
[정진호] [오전 10:34] 더 큰 문제는 어떤 경로로 믿든 그 믿은 결과가 죽어서 천국 간다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 신앙이 아르뱅주의로 변질되어서 이 땅에서 윤리적인 삶이 실종되었다는 것이 문제라는 건데 윤리적인 삶이 실종된 게 문제가 아니고 이 땅에서 제자로서의 삶, 사명이 실종된 게 문제의 본질이라고 보아야겠지요.
[김용호] [오전 10:38] 그렇습니다. 초대교회가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에서 이미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들 먼저 서로 예수님처럼 사랑하면서 살고, 그 삶을 세상에 퍼뜨리는 것이 핵심인데 사도들의 사망 이후 초대교회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온갖 기기묘묘한 모습의 기독교들이 생겨난 것이지요. 그런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한 다양한 신학도 따라서 생겨났구요. 생겨나다 생겨나다 결국 진보기독교까지 생겨났습니다. 이제 그만들 하고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증언에 따른 기독교로 수렴되어야겠지요.
[김용호] [오후 12:50] 그동안 우리가 믿음을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의 둘로 나누어 왔는데 아침에 집사님과 대화를 나누고 나서 셋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 자기 코일리아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믿는 믿음~ 잡신 신학을 기반으로 한 인간의 싸르크스가 주도하는 종교적 믿음
2.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서 복음의 약속을 깨닫고도 도망가지 않고 소망을 가지게 되는 믿음
3.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받고 드디어 신실하게 변화된 새로완 피조물이 가진 믿음, 즉 산 믿음
1의 경우는 사도 바울이 헤어지라고 했으니 육에 속한 크리스찬이라고도 볼 수 없고 괜히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자임.
2의 경우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육에 속한 크리스찬, 즉 어린 자임.
3의 경우가 큰 자임.
실제로 교회 안에는 위의 세 그룹이 섞여 있을 수 있으나 1의 사람은 못 견디고 나가게 되는 것이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임. 예수님도 푯대(소망)의 공유를 거부하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셨음.
사도들의 시대는 3의 사람들이 주도한 시대, 이후 초대교회는 한 동안 2의 사람들이 주도한 시대, 콘스탄틴 이후는 1의 사람들이 주도한 시대, 로마 국교화 이후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1의 사람들만 우글거리는 시대로 구분할 수 있음.
오늘날 다시 3의 사람들의 주도하에 1은 2가 되고, 2는 3이 되는 교회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고 봄.
[정진호] [오후 1:05] 1에서 2로 들어오려면 정확한 복음의 내용, 믿음의 내용을 알아야 하지요. 근데 그걸 알려주는 사람이 우리 말고는 아직 안보이네요.
[김용호] [오후 1:06] 바로 그렇습니다. 혼자 깨닫기는 어렵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감히 자신들을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부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진리를 전하는 것이 모든 과정의 첫 출발을 가능케 하는 것이니까요. 그게 없으면 잡신신학이 난무하고 1의 사람들만 우글거리게 되니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증인이 되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으로는 본이 되는 것이구요. 베드로 사도도 양무리의 본이 되라고 말씀했지요.
십자가의 파쎄마를 겪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받은 증거라고 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받지 않았다면 그 참혹한 파쎄마를 견디고 있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받고 있는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는 파쎄마를 겪고 나서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하자마자 사랑을 할 수 있는 신실함으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지리산으로 도망갔던 때가 기억나네요. 그 당시 약속에 대한 소망이 분명히 있었으나 그리스도의 피스티스가 충분히 임하지 않아 약속의 내용을 알고 소망하고 있었음에도 파쎄마를 견딜 수 없어 도망을 갔던 것입니다. 인간의 신념만으로는 십자가의 고난, 즉 자기가 부인되면서 겪게 되는 파쎄마를 견딜 수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2의 믿음만으로도 견뎌낼 수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으나 애굽왕의 위협이 예상되자 (실제로 위협을 당한 것도 아닌데) 아내를 넘겨줘버립니다. 약속의 후손을 낳게 되어있는 아내를 말이지요. 아들 이삭을 바친 것은 자기 생명이 아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처럼 인간의 믿음은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믿음일지라도 3의 믿음에 이르지 못하면 결코 삶까지 신실하게 바뀔 수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규정하는 것도 3의 믿음까지 약속으로 받은 것은 아니었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신약에 속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정진호] [오후 4:49] (아르뱅주의 1부 종교개혁의 폭풍전야)
저자는 현대판 면죄부가 남발하는 아르뱅주의가 한국교회의 윤리 실종의 원인이라는 분석을 하기 위해 "면제부" 라는 키워드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중세 때 면죄부가 왜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초대교회 때는 죄를 지은 사람이 공동체 앞에서 공개적인 공고백을 하면 교회가 용서를 선포했는데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제들에게 사적으로 시행하는 고해성사로 변질되었고 마지막 단계에서 면죄부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사제의 권한이 강화되고 공로신학이 발전되면서 공로의 창고에서 마음껏 꺼내 쓸 수 있는 것처럼 마법화되는 과정 끝에 면죄부가 탄생됩니다.
면죄부는 초대교회 때 선한 의도로 시작된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되어 면죄부까지 간 것으로 저자는 보고 있습니다. 이런 면죄부는 교회와 죄인 간에 이루어지는 은밀한 거래이며 거짓 확신을 제공하고 교회의 권위로 정당화 되었으며 진정한 참회를 막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 밀양을 통해서 오늘날 개신교 참회신학의 천박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만약 영화의 내용 같은 일이 실제 일어났다면 초대교회는 그리고 중세교회는 그리고 현대개신교회는 어떻게 처리했을까를 비교해 보여줌으로써 회심이 얼마나 간소화 되어가고 있나를 보여주는데 재미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남발하는 면죄부의 예로는 전병욱 목사와 어느 살인자의 구원의 확신을 보여주면서 이신칭의가 살인 면허로 전락한 실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전병욱 목사의 경우를 통해서 그 현상의 배후에 자리 잡은 썩은 신학을 보여줍니다.
전목사가 이런 말을 합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교회는 허물을 터는 곳이 아니에요.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허물을 씻어주는 곳이죠. 회개를 떠들면서 해요? 회개는 은밀히 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요. 심판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인간이 심판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있느냐는 말에서 죄의 평준화를 보게 됩니다. 이 말 안에 내포된 말은 너나 나나 똑같은 죄인 아니냐? 네가 나를 향해 고발할 권리를 누가 주었냐?
교회는 예수의 보혈로 허물을 씻어주는 곳이라는 말은 교회는 언제나 죄를 용서해주는 곳이지 정죄하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고 공로 없이 극단적으로 간소화된 개신교회의 참회신학의 절정을 보여준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회개는 은밀히 하나님 앞에서 한다는 말은 용서는 하나님의 주권이니 제3자가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주장입니다.
생활고 때문에 애 둘을 다리 밑으로 떨어뜨려 죽인 사람에 대한 설명도 나옵니다. 경찰이 취조를 합니다.
“왜 같이 안 죽었어요?”
"기독교인이라 자살은 못했습니다"
“기독교인이 죽이는 건 괜찮습니까?”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면죄부라고 하지만 너무 심하네요.
[김용호] [오후 5:31] 핵심을 찌르는군요. 좋습니다. 물론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 것이냐의 문제는 있지만 말입니다. 죄란 무엇인가의 문제지요. 그 진단에 따라 처방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일단 처방의 문제점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군요. 아르뱅주의가 최악의 처방이라는 것이구요.
[정진호] [오후 5:40] 초대교회처럼 엄격하게 회심을 긴 시간을 두고 확인하는 과정이 계속 이루어졌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인데 그 부분이 죄가 뭔지에 대해 감각이 없는 듯해요.
[김용호] [오후 5:41] 그렇게 보여집니다. 저자가 비인격자들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정진호] [오후 5:43] 죄가 뭔지에 대한 감각이 없으면 회개가 뭔지도 잘 알 수 없잖아요. 윤리적이지 못한 회개에 머물게 되지요.
[김용호] [오후 5:44] 그렇습니다. 주류 기독교도 신실함을 이야기 하지만 결국 윤리도덕 앞에서 신실함이라는 구도를 못 벗어납니다. 교회우상주의 앞에서의 신실함이거나요.
[정진호] [오후 5:45] 초대교회에서 선포되는 죄 사함이나 지금 교회에서 이신칭의나 사실 다르지 않은 거지요. 그 과정이 까다로우냐 간단하냐의 차이일 뿐이지요. 저자의 그런 한계가 느껴졌어요.
[김용호] [오후 5:45] 예. 그렇습니다. 결국 쩨다카와 미쉬파트가 무엇이냐의 문제가 핵심인데 사도들 사후에 바로 혼란이 온 것으로 보입니다. 헬라 철학이 점령을 해버린 것이지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사도 바울이 명료하게 규정했으나 사랑이 무엇이냐에서 또 혼란이 오는 거지요. 정말 징그럽습니다. 인간의 선악관~~
집사님이 정확하게 보신 대로 우리가 부수어야 하는 산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지부동 철옹성~
[정진호] [오후 5:51]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구원론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는 저자의 결론에서 희망의 불씨에 조그만 숨을 불어넣게 됩니다.
[김용호] [오후 5:52] 신광은 목사가 뭔가 낌새를 챈 것은 아닐까 여전히 기대하게 되네요. 영민한 사람이 책도 읽을 만큼 읽었으니 대단히 혼란스러우리라 기대를 갖게 되는 거지요.
[정진호] [오후 5:55] 얼마 전 뉴조에 창세기에 관한 글을 올린 적이 있었던 거 기억하시죠?
[김용호] [오후 5:56]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놓으신 이유를 쓴 글이요?
[정진호] [오후 5:56] 네. 그 정도 아는거 보면 옆에서 누가 몇 마디 더 해주면 금방 감을 잡을 거 같았거든요. 하나님이 우리와 교류를 허락하신다면 좋겠네요. 그 분이 우리와 연합한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건데요.
[김용호] [오후 6:00] 저도 당당에 글을 올릴 때마다 신광은 목사가 읽기를 기대한답니다. 우리에게서 진행되는 주제들을 신 목사가 논문으로 줄줄 써내면 얼마나 좋겠어요. 저는 칼럼 쓰고 신 목사는 논문 쓰고 우리 모두가 삶으로 입증하고.
[정진호] [오후 6:05] 우리와 합류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를 사례연구로 해서 논문을 쓰라고 권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네요. 우리를 좀 신학적으로 평가해 달라구요.
[김용호] [오후 6:07] 재세례파 연구 같은 것 그만하고~^^
[정진호] [오후 6:07] 네. 우리를 연구할 사람은 당신 밖에 없다.
[정진호] [오후 9:12] 2부 칼뱅주의 개요, 3부 아르미니우스 개요, 4부 한국 교회의 면죄부 아르뱅주의는 신학적인 내용이니 하나의 도표로 만들어서 한꺼번에 비교 평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5부 제3의 길을 찾아서와 6부 새로운 구원론을 위한 제언이 사실상 중요한 부분입니다.
[김용호] [오후 9:13]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