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총 5곳의 정착촌 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힘겹게 살고 있었다.
그동안 정착촌은 점진적으로 성장하였다.
자급자족과 잉여물 거래가 가능해진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하지만 주요 자원을 둘러싸고 정착촌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점점 강팍해지기 시작했다.
“죽여라! 빼앗아라!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다 필요 없어. 우리 식구, 우리 마을 사람만 먹고사는 게 중요해.”
주로 식수, 농경지, 소금, 밀가루 그리고 노동력 때문이었다.
문명사회가 모두 파괴된 탓에 지리산 사람들은 그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기 위해 습격과 약탈을 반복하는 등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평화마을 촌장이던 백일도는 죽었다.
이후, 촌장직은 그의 친구, 한기백이 물려받았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이곳은 한기백 소장이 운영하는 지리산 대체 연구소였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시작된 바람은 몇몇 능선을 돌아 이곳에도 휘몰아쳤다.
마을을 두르고 있는 산은 탄성을 자아낼 만큼 아름다웠다.
다만 오늘은 바람 때문에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마을은 해가 지고 어둑해지자 금세 조용해졌다. 이따금 개 짖는 소리와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마을을 돌아다닐 뿐, 마을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그때 율도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아저씨, 아니, 소장님!”
“응. 그래.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율도는 머쓱한 표정으로 아까 잡은 토끼를 내밀었다.
“이거.”
“이게 뭔데? 어랏! 이건 어제 말하던 토끼 아니야?”
“네, 소장님 몸보신을 위해 잡아 왔어요.”
율도의 말에 한 소장은 그거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 이놈이 쓸데없는 짓 했구나. 어쨌든 고맙다. 같이 먹게 내가 요리하렴?”
그러자 율도가 손사래 쳤다.
“아뇨. 이런 건 잡은 사람이 직접 요리한대요. 제가 할게요.”
율도가 수돗가가 뛰어가서 한 소장은 잠시 추억에 잠겼다.
‘어머니의 사랑도 받지 못하다 아버지까지 잃은 녀석의 심정은 어떠할꼬.’
난리 전, 율도의 아버지 백일도와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온 한기백 소장이었다.
사실, 그는 도시에서 대기업 환경연구원으로 근무했다.
그는 도시에 있을 때 쓰레기가 기회가 되고 자연이 영감과 혁신의 원천이 되며, 디지털과 자연이 만나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의 연구는 쓰레기 매립지를 발굴해 고형쓰레기의 에너지를 재활용하는 것이었다.
또한, 웨이브 팜(파도의 운동에너지를 이용한 발전), 플라스틱 나무, 녹색 화학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효율성과 경제성을 중시하는 기업의 생리에 맞지 않았다.
결국, 실망한 그는 백일도와 함께 지리산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건 대체에너지 발명과 사용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그는‘자전거 타기’로 필요한 전기를 얻었다.
또 풍력을 이용하여 에너지를 얻는 방법을 시도했다.
최근엔 풍차 원리를 이용하여 높은 고도에서 빙빙 도는 풍력 발전용 ‘연 발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때문에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하였다.
‘연 발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것만은 성공해야 해.’
연 발전’은 공기 중에 있는 물을 응결시키는 조롱박 모양의 물 수집기로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방법이었다.
이것만 해결되면 지리산 사람들 전체가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 소장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연구에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현재 자신이 맡은 촌장직을 다른 사람에 넘겨야 했다.
이제 자신은 연구에만 몰두하고 싶었다.
그런 회상에 젖어 있을 때, 율도가 토끼탕을 끓여 들어왔다.
“뭐야 한 마리가 아니잖아?”
“아저씨 드리라고 두 마리 잡아 왔어요.”
“기특하구나. 그래, 활로 잡았니?”
“네.”
한기백은 입맛이 없었다.
그래도 율도의 성의를 봐서 국물을 한 모금 입으로 넘겼다.
“맛나는구나.”
“에이, 국물만 먹지 말고 토실토실한 고기도 드세요. ”
율도가 토끼 뒷다리를 손으로 찢어 그에게 주었다.
하지만 한기백은 입맛만 다실뿐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율도야!”
“네, 아저씨, 아니 소장님,”
“넌 내가 지리산에 네 아버지와 들어와서 10년간 어떤 연구를 하는지 알지?”
“알다마다요. 우리 지리산 전체 주민을 위해 연 발전기를 연구하잖아요.”
“그래, 아니까 다행이다. 그래서 말인데,”
“…….”
“이제 난 우리 마을 촌장직을 수행하기엔 너무 병 들고 늙었단다.”
한기백이 입을 열자 율도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만 삼켰다.
“오늘부터 나는 오로지 이 연구에만 매진하고 싶으니 네가 촌장직을 맡아다오.”
한 소장의 말에 율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부탁이야. 제발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제가요? 아직 어린 제가 촌장을 한다고요?”
“그래, 넌 감당할 수 있어. 돌아가신 네 아버지가 하늘에서 도와주실 거야.”
휴우~.
“그리곤 넌 이제 결코, 어리지 않아. 이곳 청년들처럼 곧 장가갈 나이잖아.”
“하지만.”
율도는 최근 들어 그가 이런 문제로 계속 부탁한 걸 알고 있었다.
그동안 단번에 거절하진 않았지만 뭔가 내키지 않았다.
그런 율도에게 한기백은 대뜸 마을 촌장임을 증명하는 목도장을 냉큼 안겨주었다.
“내 말대로 해. 네가 허락해야 이 토끼탕을 맛있게 먹을 테야.”
그제야 할 수 없이 율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일주일 후 전체 마을 회의 때 율도는 촌장으로 추대되었다.
오늘은 율도의 취임식 날이었다.
이날은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백율도 만세! 평화 정착촌 촌장 만세!”
마을 사람들은 율도가 얼마나 착하고 용감한 줄 잘 알기에 진심으로 환영했다.
거기에 덧붙여 율도의 아버지, 마을의 교육자였던 백일도도 소환하였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지.”
“암, 당연히 한기백 선생 뒤로는 율도가 맡아야지.”
“맞아. 백일도 선생이 살아계셨을 때 얼마나 마을 위해 헌신했나?”
“아마 율도 촌장 역시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잘할 거야.”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율도의 촌장직 취임을 축하했다.
율도는 아버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마음을 굳게 먹었다.
최근 들어 북부 쪽 사람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었다.
또한 동부 쪽 부촌 사람들의 배타적인 태도도 문제였다.
심각한 위협이 되는 서부 쪽 좀비 마을 사람들의 퇴치와 방어도 관건이었다.
지난겨울, 실제로 굶주린 북부 사람들이 마을을 습격했다.
그래서 그동안 농사지었던 농작물을 빼앗겼다.
이 과정에서 다친 사람이 있었다.
얼른 그들을 동부 쪽 마을로 데려갔으나, 의사가 있었음에도 그들은 모른체했다.
또한, 이른 봄엔 남쪽 자웅동체 인간들이 어린 소녀가 납치하였다.
그들이 서쪽 좀비 마을을 습격하여 마을 사람 서넛이 물려 죽었다.
난리가 난지 10년이 넘었어도 각 정착촌의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건 그만큼 먹고살기가 팍팍하다는 증거였다.
‘내가 반드시 지리산 정착촌의 통일을 이룰 거야.’
이건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촌장으로 취임한 사흘 뒤, 율도는 마을 주변 순찰에 나섰다.
수확철을 앞두고 북부와 남서부 쪽 사람들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저기가 너무 허술하지 않아?”
“어디?”
“입구 쪽 울타리 말이야. 서둘러 정비해야겠어.”
평화마을은 계곡을 등에 지고 만든 마을이어서 뒤편은 안전했다.
또한, 좌우 측면은 숲이 울창하고 덩굴이 우거져서 천혜의 방어막이었다.
문제는 마을 입구였다.
바깥세상과 통하려면 누구나 입구를 이용했기 때문에 이곳을 정비해야 했다.
이곳은 몇 년 전부터 나무 울타리로 방어막으로 쳐두었다.
그런데도 번번이 뚫리는 게 이곳이었다.
율도는 이참에 입구 쪽 방어를 위해 성을 염두에 두었다.
성벽을 쌓을 순 없었다.
대신 입구 둘레를 파서 해자를 파고 다리를 설치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냈다.
“해자를 만들자고?”
마을 청년들은 율도가 말하는 해자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하긴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청년들이 중세 역사를 알 리가 만무했다.
“그래, 그 방법밖에 없어. 힘이 들어도 반드시 완성해야 해. ”
사실, 해자 만드는 건 한기백 소장의 제안이었다.
어릴 때 지리산에 들어와 바깥 문명에 문외한 율도였다.
그래서 한 소장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날 한 소장이 ‘해자’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니까 입구 쪽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물길을 내자는 말이네요. 그 위로 다리를 놓는다는 말씀이죠?”
비록 정규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율도의 머리 회전은 빨랐다.
이 모든 게 그의 아버지, 백일도의 생존 교육 덕분이었다.
“그래, 다리는 수동으로 제작하고 줄을 당겨서 들었다가 놓았다가 하면 돼. ”
“그런 후에는요?”
“물속엔 기름을 넣어두거나 아니면 뱀을 풀어두면 전쟁 시에 매우 유리하겠지?”
“알겠습니다. 소장님만 믿고 한번 만들어보겠습니다.”
율도의 제안에 청년들은 찬성했다.
이내 마을 사람들은 농사철임에도 대부분이 공사에 참여했다.
영차, 영차.
“서두르자! 그러지 않으면 북쪽, 남서쪽 놈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그래, 여름이 끝나기 전에 완성해야 해.”
청년들과 마을 사람들은 율도의 지휘하에 누구 하나 불평 없이 일했다.
마침내 해자는 그해 가을이 되기 전에 거의 완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