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칼럼] (87) 1세기로 다시 돌아가자 / 윌리엄 그림 신부
교회가 맞닥뜨렸던 첫 번째 큰 위기는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예상하지 않았던 일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관한 지침이나 조언을 하지 않으셨다.
이 문제는 사도행전에 나온다.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사도 6,1) 이는 그저 음식 배급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사도행전과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는 다양한 국면의 딜레마가 표현돼 있고, 심지어 복음서에도 소급돼 소개되기도 했다.
문제는 ‘그리스계 유다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였다. 그리스계 유다인들로 생긴 문제는 그저 언어의 문제가 아니었다. 로마제국 시대 그리스어는 공통어였고, 그리스계 유다인의 존재는 더 넓은 세상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스며드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교회는 더 넓은 세상에 답해야 했다.
이들을 배제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유다인이 아닌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올 때 할례를 할 것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해 바오로 사도를 분노케 한 이들이 바로 이 길을 따랐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선 그리스식 삶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그의 반응을 알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가 할례주의자들에게 굽실댄다고 비난하고 “여러분을 선동하는 자들은 차라리 스스로 거세라도 하면 좋겠습니다”(갈라 5,12)라고 말했다.
이 문제 외에도 바오로의 입장은 교회 안에서 일반적이 됐다. 신약성경도 그리스어로 쓰였다. 교회는 더 넓은 세상의 언어를 받아들이는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갔다. 교회는 바깥세상의 사목방법과 삶의 양식도 받아들였다. 성령께서 인도하심을 믿은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히 새로운 사목방법을 고안해 냈고, 이는 부제직으로 진화했다.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은 성령께서 함께 계시며 자신들을 이해하고 인도해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하며 변화했다. 이들은 과거에 집착하기보다 미래를 만들어냈다.
물론, 그리스계 유다인 과부들의 등장이 교회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 새로운 사회적·문화적·정치적 현실의 마지막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들 과부들의 등장 이후 가장 큰 문제는 세계화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15세기 포르투갈 항해사들이 아프리카를 넘어 아시아로 향하는 여정에서, 그리고 대서양을 넘어 거대한 두 개의 대륙이 있다는 사실에서 교회는 신학적 도전을 받아야만 했다.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었던 이들의 구원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 격변이 일었고 교회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는 바로 인쇄술이었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됐다. 생각을 탐구하고 교환하는 일이 일반적인 것이 됐다. 고대 언어를 읽을 수 없던 이들에게 닫혀 있던 성경이 모국어를 읽을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 열리게 됐다.
성경과 서적 등은 사람들을 ‘그리스계 유다인 과부’로 만들었다. 새로운 현실을 껴안은 교회의 일부는 개신교인이 됐다. 가톨릭교회도 이 기술을 받아들였지만, 신기술이 불러온 새로운 현실은 거부했다. 여전히 전례에서는 라틴어가 쓰였으며, 교회의 신학과 통치는 여전히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다.
할례주의자는 여전히 남아 있다. 초기교회에서 여성이 부제직을 수행했느냐의 문제가 한 예다. 이들은 1세기 때 교회가 여성 부제직을 수행했다면 21세기에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인다. 다른 말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사목에 새로운 방식을 접목했을 때에만 현대 그리스도인들도 그 결과에 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2000여 년 전의 상황에 대한 응답이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유효할까? 우리는 새로운 현실과 맞닥뜨리고 있다. 여성이 사회에서 남성과 점점 더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되고 있는 것이다. 「구텐베르크 은하계」(Gutenberg Galaxy)를 넘어 소통이 이뤄지는 세계화된 시대다. 과학과 교회의 많은 가르침은 절대로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 평행우주를 달리는 것 같다. 오늘날 절대로 바뀌지 않는 진실은 모든 것이 바뀐다는 것이다.
우리는 1세기 그리스도인에게 새로운 상상을 가능케 한 같은 성령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선조들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은 이들이 어떻게 새로운 세상의 급습에 대처했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 창조적으로 확신을 갖고 변화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응답이 아니라 그들의 대담성을 따라야 할 것이다.
윌리엄 그림 신부 (메리놀 외방전교회)
메리놀 외방전교회 사제로서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 주교회의가 발행하는 주간 가톨릭신문 편집주간을 지내기도 했다. 현재는 아시아가톨릭뉴스(UCAN) 발행인으로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