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귀천’ 이라는 시에도 쓰여 있듯이 이 세상은 소풍의 연속임이 분명하다. 일흔여덟의 큰언니가 매사를 소풍이라 여기며 기쁘게 앞장서시는걸 보면. 김밥과 떡 또는 사탕이나 초콜릿을 흔쾌히 준비하시는 것을 보면. 맞다.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슬플지라도, 인생은 소풍의 연속이다.
열여덟에 시집오셨던 어머니는 농사일과 대가족 집안일로 쉴 틈 없이 일을 하셨다. 구부정해진 등허리와 가뭄에 갈라진 논배미처럼 거질어진 손바닥이 증거였다. 늘그막에 서울 아들네 집에서 한가하게 지내시며 얼굴과 손이 다소 고와지기는 하였지만 어머니에게 편안하기만 한 날들은 아니었던 듯 싶다. 결국 고향집으로 되돌아가셨던, 고향 동탄면에 묻혔던 어머니는 그곳이 개발되면서 아버지와 함께 안성 양지바른 자리로 모셨다. 우리 형제들은 일 년에 두 번 그곳에 간다. 소풍을 간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소풍은 여럿이 어울려 가야 제 맛이다. 스님이신 큰오빠는 밤차로 강릉에서 오셨다. 큰언니는 한남동에서 버스를 타고 오셨다. 막내 사위이며 가장 젊은 그가 이번에도 운전을 맡았다. 익산에 둘째언니는 평택역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작은오빠는 한 동네다. 셋째 언니네는 형부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동행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꿩의 병아리처럼 알콩달콩 잘 살아간다고 어머니는 내내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언니네처럼 살면 된다고 나에게 누누이 당부하시고는 했는데.
소풍은 맛있는 게 다양해야 더 제 맛이다. 작은오빠가 초등학생일 때는 대부분 김밥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는데 우리 집보다 넉넉했던 옆집은 그래도 소풍날이면 계란을 삶아오고는 했단다. 그게 어찌나 먹고 싶었던지 오빠는 무조건 한 개를 덥석 집어 들었다는데. 다들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동안 몇 번 씹지도 않고 꿀꺽 삼켰더란다. 그 용기로 공군사관생도가 되셨을 것이다. 그 아들이 온다고 하면 집안은 음식 냄새로 잔치 분위기였다. 어머니의 장한 아들이었고 집안의 자랑이었다. 그 아들이 희귀한 병으로 하루하루 사투를 벌이는 동안 어머니는 그믐밤처럼 어둑한 얼굴이었다.
엄마표 김밥이 전부였던 시절은 가고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나는 운 좋게도 용돈을 조금씩 받았다. 언제였더라. 일원짜리 열개를 어머니께서 슬쩍 주머니에 넣어 주셨다. 그 당시 작은 고무풍선 열개가 일원이었다. 무얼 사먹을까 고민만 하다가, 혹 잃어버릴까봐 주머니 속을 수없이 만지작거리다가 풍선만 열 개를 사서는 돌아왔었다. 그런 내게 어머니는 칭찬을 듬뿍 안겨주셨다. 어머니에게는 무조건적인 막내 사랑이 있으셨다. 결국 남은 동전 아홉 개로 학교 앞 문방구를 제 집처럼 드나드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사실 부모님 기일을 잊지 않고 챙기는 사람은 작은오빠다. 큰오빠가 출가하면서부터 집안 대소사를 맡아오셨다. 몸이 불편해 지팡이에 의지하기는 하지만 활동량은 정상인을 능가한다. 딸인 우리가 혹 부모님 기일에 소극적일 때면 은근히 저기압으로 우리를 몰아 부치신다.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오빠의 말씀을 잘 새겨들어보면 바로 이 뜻을 품고 있다. 셋째는 나물 좀 해오고 막내는 밥 좀 해오고.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가 고분고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흥! 딸들이야 시댁 일이나 잘하면 되지 뭐 친정 일까지 해야 되나? 그 말이 목까지 차오르지만 입 밖으로 내뱉는 사람은 없다. 셋째언니는 오히려 고기까지 넉넉하게 준비해 오고는 했다.
칠남매 우애가 좋은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다. 성격이 다 다른데 어찌 불만이 없을까 만은 겉으로 내보이는 법은 없다. 암묵적인 배려이면서 이해다. 개인적인 성향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말하지 못한 불만들을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끼리 몰래 나눈다는 점이다. 만약에 막내인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니들끼리, 작은 오빠가 마음에 안 들면 자매들끼리 흉을 보며 깔깔거리는 식이다. 가끔 심술보가 남다른 내가 참지 못하고 화를 버럭 내고는 하는데, 아버지의 성깔을 닮았다. 칠남매들 중 제일 무서운 사람이 내가 되었다. ‘막내가 좋다면 다 좋은 거야’ 언니들이 즐겨 쓰는 농담이며 진담이다.
작은오빠는 언제나처럼 제수물품을 준비해오시고, 밥과 나물과 국과 고기를 이번에는 내가 준비하였다. 일흔다섯의 둘째언니는, 어머니와 아버지 일을 도우며 살았던 지극한 효성이 아직도 식지 않았는가. 익산에서 고소한 콩고물을 무친 쑥찰떡을 해서 기차를 타고 오셨다. 큰오빠와 내가 함께 들어야 하는 무게였다.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일이니 힘들지 않고 행복하다고 말씀을 하셨으나, 늘 고단하여 꺼칠했던 친정어머니를 뵙는 것 같아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큰오빠는 우렁차게 법문을 읽으셨다. 우리들은 절을 하였다. 생신날이 돌아올 때마다 자식들에게 부담이 되는 게 싫어서 훌쩍 여행을 다녀오시고는 했던 어머니 아버지, 어느 날 문득 아예 먼 곳으로 훌훌 떠나가시더니, 오늘 저어기 봄 햇살을 안고 환하게 돌아오신다. 언제나처럼 아버지께서 서너 발자국 앞장을 서셨다.
‘죽장 짚고 만고강산 유람할 제 풍월 실어 봉래산에 올라가니 삼신산이 어디메뇨 일봉래 이봉장 삼형장이 아니메뇨’ 아버지 십팔번 구수한 노랫소리 가까워 온다. ‘백설 같은 흰나비는 부모님 봉상을 입었는가 소복에 다 장곱례하구 종다리 봄으로 오락가락 얼씨구나 좋다 지화자 좋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어머니 노랫소리도 함께다. 너울너울 어머니 어깨춤이 바람결처럼 다가온다.
'어머니 아버지 좋아하시는 음식에 수저 올려 놓아라 막내야 '
묘소에 올 때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붉은 무늬 조끼를 고집스레 챙겨 입고 오시는 작은오빠의 말씀이시다. 예전의 어머니가 자식이 좋아하는 음식을 자식 앞으로 밀어주셨듯이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좋아하실 음식에 젓가락을 올려놓는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언니와 오빠와 함께하는 오늘은, 고향집 대청마루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로 돌아가는, 소풍이다. 고향 소풍이다.
첫댓글 이보다 더 아름다운 소풍 보기 힘든세상!
부러운맘 까지 드는 화목한 가정이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너네집도 만만치 않다는거 다 알거든
다 다 고마운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