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38> 서장 (書狀)
이랑중(李郞中)에 대한 답서
도, 찾지 않으면 있고 찾으면 없는 것
"지식인이 이 도(道)를 배움에는 총명하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너무 총명함을 근심해야 하며, 지견(知見) 없음을 근심하지 말고 지견이 너무 많은 것을 근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늘 8식(識) 속에서 발을 내딛을 뿐, 발 아래의 쾌활하고 자재(自在)한 소식에는 어둡습니다. 삿된 견해 가운데에서도 좀 나은 것은 보고·듣고·느끼고·아는 것을 자기라고 이해하고 다만 볼 뿐이라거나 다만 들을 뿐이라는 것을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못한 것은 의식을 이리 저리 헤아려서 선문(禪門)으로 여기고 입술을 놀려서 현묘(玄妙)함을 논하며, 더 심하게는 발광하기에까지 이르러 말을 아끼지 않고 인도말로 중국말로 이것 저것을 따지는 것입니다. 가장 못한 것은 묵묵히 비추며 말 없이 텅비고 고요하게 하여 귀신굴 속에 머물러 궁극의 안락을 구하는 것입니다."
도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잘못된 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3가지를 말할 수 있다. 하나는 감각과 지각(知覺)을 관찰하고 파악하여 도를 알려고 하는 것이고, 하나는 이치를 연구하고 이해하여 도를 알려고 하는 것이고, 하나는 감각과 알음알이를 딱 끊어버린 텅 비고 고요한 곳에서 비추어봄으로써 도를 알려고 하는 것이다.
감각과 지각을 관찰하고 파악하여 도를 알려고 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본체는 모양 없는 하나이지만 그 작용은 다양하여 눈·귀 등 6개의 지각기관을 통하여 보고·듣고·냄새 맡고·맛 보고·촉감을 느끼고·생각한다는 말을 믿는다.
또 마음의 작용은 눈에 있으면 본다 하고, 입에 있으면 말한다 하고, 손에 있으면 잡는다 하고, 발에 있으면 걷는다 한다는 말을 믿는다. 그리하여 보고 들을 때에는 다만 보고 듣기만 하고, 느낄 때에는 다만 느끼기만 하고, 말할 때에는 다만 말하기만 하고, 행동할 때에는 다만 행동하기만 함으로써 마음의 작용을 파악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것은 견해로서는 그럴듯하지만 사실은 의식을 앞세우고 의식의 흐름에 집착하여 도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고 듣는 것에 막히고 느낌에 막히고 생각과 몸의 움직임에 막히게 된다. 요컨대 의식에 막히게 되는 것이다. 의식에 막혀 있으므로,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느낌도 없고 생각도 없고 행동도 없는 때에는 도가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물어보면, 그만 당황해서 이리저리 헤아리며 온갖 견해를 따라다닌다.
이치를 연구하고 이해하여 도를 알려고 하는 사람은, 많은 경전과 어록을 섭렵하고 세밀하게 그 뜻과 이치를 연구함으로써 그 내용을 이해하는 몇 가지 원리를 터득한다. 그리하여 그 원리를 가지고 어떤 말에나 행동에나 모두 적용하여 이것도 같은 원리로군 하고 만족해 한다.
이것은 마치 제멋대로 만든 저울을 가지고 온갖 물건의 무게를 재면서 이것은 얼마고 저것은 얼마구나 하면서 스스로 만족해 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사량분별이라는 저울로서 세상을 달아볼 줄만 알 뿐, 도는 어떤 저울로도 달 수 없는 것임을 모르고 있다.
감각과 알음알이를 딱 끊어버린 텅 비고 고요한 곳에서 비추어봄으로써 도를 알려고 하는 것은, 소위 도를 닦고 명상을 하고 참선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빠져들어가는 삿된 길이다. 이들은 감각과 의식과 알음알이는 도가 아니라 마음을 어지럽히는 더러운 먼지요 티끌이라고 여겨서, 도를 하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이것들을 깨끗이 쓸어 버린 텅 비고 고요한 속에서 마음을 주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 역시 분별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어지럽고 고요하고 더럽고 깨끗함을 나누어서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리기 때문이다.
도는 감각이나 느낌이나 생각과 몸의 움직임이나 이치의 합당함이나 이 모든 것을 깨끗이 비워버린 공허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도는 찾지 않으면 모든 곳에 있지만 찾으려고 하면 어디에도 있지 않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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