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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한 고택지 - 한국교회 최초의 수덕자 여기서 수계 정진하다 |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 322-5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구구로 239-6
홍유한, 그는 누구인가?
홍유한(洪儒漢, 1726-1785)은 본관이 풍산 홍씨(豊山 洪氏) 명문가의 16대손으로 서울 아현동에서 홍창보(洪昌輔)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미 8세경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백가제서(百家諸書)에 통달한 신동으로 전해진다. 그의 조부모는 손자의 장래를 위해 고향인 충청도 예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했고 16세 때인 1742년 그는 당시 유명한 실학자인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순암 안정복, 녹암 권일신, 복암 이기양 등과 함께 수학했다.
1750년경 성호 이익이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등 서학(西學)을 연구할 때 그의 제자들도 이 신학문과 종교 서적을 탐독하게 됐고 홍유한은 유교와 불교에서 발견하지 못한 진리를 여기에서 발견하고 천주교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것이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1784년, 이보다 30여 년 전에 이미 그는 천주교 신앙을 실천한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가 출발하기 전이라 비록 물로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가 천주교를 대하는 입장은 단순히 신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서학을 천지만물의 이치를 밝히는 종교적 요소를 받아들여 스스로 천주교 신앙생활을 시작한 첫 인물로 꼽히는 것이다.
삶의 방향을 정한 그는 1757년 예산 여사울로 내려가 1775년까지 18년간 홀로 신앙심을 연마했다. 예산 여사울은 나중 내포의 사도 이존창(홍낙민 집안에서 속량한 종의 아들이었음)이 신앙생활을 한 근거지였는데 역시 이존창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이 마을에서 수덕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친척과 지인이 많은 번잡한 예산을 떠나 1775년 더욱 조용한 곳을 찾아 경상도 소백산 아래 있는 순흥 고을 구고리(현재 영주군 단산면 구구리)로 옮겨 가서 10여년이나 기도와 묵상으로 만년을 보내다가 1785년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종 후 그의 시신은 문수산 자락에 있는 우곡리에 안장되었다.
홍유한 고택지의 현재
본래 구구리(九邱里)는 순흥부 동원면(順興府 東園面) 지역으로 마을 뒷산에 무학봉이 있는데 “학이 구고(九皐)에서 우니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는 시경(詩經)에 있는 구절을 따라 ‘구고’라 하였다 한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오현리, 이목리와 등영리, 상암리 각 일부를 병합해 ‘구구리((九邱里)’라 하여 영주군 단산면에 편입되었다.
천주교 신앙이 쳬계화된 오늘날에 입장에서 본다면 그의 수계 생활은 자못 웃음을 자아낼 만하지만 한편으로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주일을 몰라서 매월 7일째 되는 날을 주일(主日)로 정해 세속의 모든 일을 전폐하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참고로 요일 제도가 만들어진 것은 태양력을 쓰던 고대 로마시대였는데 당시는 신들의 이름을 빌어 표현했다. 우리나라에서 요일이 도입된 것은 물론 개화기 이후인데 명칭은 오행(水火金木土)에다 일월(日月) 추가하여 요일을 나타냈다. 그러기에 홍유한 당시에는 주일이라는 개념이 확립되기 이전이라 지키려 해도 지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칠극에서 터득한 덕행을 쌓기 위해 나아가 욕정을 금하여 30세 이후는 정절(貞節)의 덕을 실천했다. 그리고 단식과 금육도 언제 지켜야 할지를 몰라 평소에 아예 기름지고 맛좋은 음식은 피했다고 한다.
현재 구구리의 하이목 마을에 있는 홍유한 유택지에는 당시 그가 사용하던 대문이 남아 있는데, 그 위에 경종 4년(1724년) 홍유한의 조부인 홍중명(洪重明)이 하사받은 효자문 편액이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순교자 권일신과 서신 왕래하던 친필 서찰들이 후손에 의해 보존되어 오다가 현재는 천진암의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안동교구는 홍유한 선생의 신앙을 기리기 위해 1995년 5월 27일 교구 설정 25주년과 홍유한 선생 선종 210주년을 맞아 효자문 안마당에 홍유한 유적비를 건립하였다.
10시 40분 경 순례지 안내판이 있는 곳에 이르러 안내판 화살표를 따라 조금 들어가니 원두막 같은 간이 정자 쉼터가 하나 있고 그 안쪽에 비석이 하나 마당에 서 있다. 한쪽엔 기와 문간채가 있고 맞은편에는 민가인 듯한 집이 한 채 있다. 이것이 전부다.
홍유한 사적비
비석은 홍유한 유적비 앞면에는 韓國天主敎會最初修德者 豊山洪公儒漢先生遺跡址(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수덕자 풍산 홍공 유한 선생 유적지)라 기록되어 있고 옆과 뒷면에는 그의 생애를 상술하였다.
대문채
대문채는 홍유한이 기거할 당시 그가 사용하던 건물이다. 그 위에 경종 4년(1724년) 홍유한의 조부인 홍중명(洪重明)이 하사받은 효자문 편액이 지금도 걸려있다. 이 건물은 그동안 많이 낡은 것을 2014년에 전면 해체 복원하였다. 문간채가 이 정도면 당시 홍유한의 집은 상당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효자문 편액에 대한 내력은 안내문에 적혀 있다. 이에 의하면 홍중명은 고려말 국학직학을 지낸 풍산홍씨 시조 홍지경(洪之慶)의 14세손이다. 홍중명은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경종 4년(1724) 효자로 정려되고 영조2년 (1726) 사헌부 지평으로 증직되었는데 이때 효자 편액을 하사받았다. 이 편액을 홍중명의 손자 홍유한이 서울 아현동에서 예산으로 낙향할 때, 그리고 1775년 이곳 영주로 이사올 때 가져와서 대문채에 걸었던 것이다.
효자 홍중명(1654-1714)의 자는 중회로 부친은 통덕랑 만치이며 모친은 청주한씨로 세 살 때 부친을 여의고 모친의 훈계에 복종하고 자라서는 훌륭한 가르침을 받아 인품이 뛰어나고 행동이 독실했다. 어머니 모시기에 정성을 다했고 아버지 기일에는 종일토록 울었고 형을 공경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3년 간 시묘살이를 했으며 모진 추위에도 거처를 바꾸지 아니했다
뜰에는 절구 호박이 놓여있는데 마치 순교지의 형구와 같다. 비석 뒤의 사람도 살지 않는 듯한 민간 주택은 아직 교구에서 사들이지 못한 듯 방치되어 있다. 아마 다녀본 성지 중에서 가장 미정비는 물론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우곡성지로 출발.
우곡 성지 - 한국교회 최초의 수덕자 홍유한 선생 및 후손 순교자들 의 안식처 |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 151-2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시거리길 397
한국 천주교의 첫 수덕자 이곳에 잠들다
경상북도 봉화군 문수산(1206m) 골짜기 우곡리(愚谷里)에는 한국 교회 창립 이전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스스로 그 교리를 실천한 홍유한 선생의 묘가 있다.
농은(隴隱) 홍유한(洪儒漢, 1726-1785)은 서울 아현동에서 풍산홍씨 양반가문 홍창보(洪昌輔)의 아들로 태어났다. 풍산 홍씨(豊山 洪氏) 가문은 정조 임금의 모후인 혜경궁 홍씨의 친정 집안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여 이미 8, 9세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백가제서(百家諸書)에 통달하여 신동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16세 때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했다. 1750년 경부터 이익 선생의 제자들과 교유하며 함께 자연스럽게 서학(西學)에 접했다. 그는 서학 서적인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대전(七克大典) 등 읽고 유학이나 불교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오묘한 진리가 그 속에 숨어 있음을 간파했다.
깨달은 바가 남달리 컸던 홍유한은 그 가르침을 몸소 실천할 것을 결심하고 서울의 살림을 정리하여 1757년 충청도 예산 여사울(餘村)로 이주하여 18년간 칠극(七克)에 따른 천주교의 수계생활(守誡生活)에 정진하였다. 고요한 가운데 참 진리를 따라 살았던 그는 1775년 더 깊은 믿음을 위해 아는 사람이 많은 번잡한 곳을 피해 경상북도 소백산 밑 순흥 고을 구고리(현 영주군 단산면 구구리(九邱里)를 찾아 들어갔다.
다블뤼(Daveluy) 주교가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했듯이 홍유한은 천주교 서적을 읽고, 축일표도 기도서도 없었지만 매월 7 · 14 · 21 · 28일 등 7일째 되는 날을 주일(主日)로 정하고 세속의 모든 일을 접어두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또한 금식재(禁食齋)와 금육재(禁肉齋)를 지키는 정확한 날을 모르는 대신 언제나 가장 좋은 음식은 먹지 않는 것으로 규칙을 삼았다. 동시에 육욕을 금해 30세 이후에는 정절의 덕을 실천했다.
그가 이렇게 열심히 수덕생활을 실천하는 동안 정조 임금이 두 번이나 스승으로 모시려고 했으나 사양했다고 한다. 고행과 절식, 기도와 묵상으로 만년을 보낸 그는 1785년 3월 10일(음력 1월 30일)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그 해 4월 문수산 자락에 있는 우곡리에 안장되었다. 그곳이 바로 우곡 성지 이다.
홍유한이 뿌린 수덕의 씨앗이 맺은 결실
씨를 뿌리면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홍유한 선생은 정식으로 갈지도 않은 황무지 상태의 밭에 수덕의 씨앗을 뿌린 결과, 후손 중에서 13명이나 되는 순교자가 배출하여 신앙 가문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하겠다. 후손 순교자는 다음 도표와 같다.(순교지 홍보 책자에서)
위의 도표를 보면 홍유한의 후손 순교자 13명은 크게 두 가문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홍낙민 가문이고 둘째는 정조 임금의 외척 근친 홍정호 가문이다.
복자 홍낙민(루카, 서소문밖 순교)은 홍유한의 재종질로, 여사울 한 마을에서 살았던 재종 형제인 홍양한(洪亮漢)의 맏아들이다. 홍낙민의 작은아들과 며느리는 복자 홍재영(프로다시오, 전주 숲정이 순교)과 순교자 정소사(정낙현의 3녀, 숲정이 순교)이며, 이들 사이에 난 아들과 며느리가 순교자 홍봉주(토마스, 서소문밖 순교)와 복자 심소사(바르바라, 전주옥 순교)이다. 그리고 홍낙민의 큰아들 홍기영에게 난 두 아들이 성 홍병주(베드로,당고개 순교)와 성 홍영주(바오로, 당고개 순교)이다. 그러니 이들 성인은 홍낙민의 손자들인 것이다. 홍봉주의 아들이 순교자 홍아기(베드로)와 홍 베드로(전주 초록바위에서 순교)이다. 그러니 홍낙민 가문은 4대 순교자 가문인 것이다.
그리고 정조 임금 외가 가문으로는 홍탁보와 아내 이소사의 아들 순교자 홍정호(서소문 밖 순교)는 홍낙임의 재종숙이다. 그러므로 홍유한에게는 또 다른 재종질이 된다. 그리고 순교자 홍낙임(제주도 사약 순교)은 정조의 외숙, 곧 혜경궁 홍씨의 동생이다. 복자 강완숙(골롬바, 서소문밖 참수)는 홍씨가 18세손 홍지영의 후처이다. 그리고 홍지영의 전실 아들이 복자 홍필주(필립보)이다.
이들을 박해 순서로 보면 1801년 신유박해 때 홍유한 선생의 인척인 홍정호와 재종(再從) 조카인 홍낙민 루카(洪樂敏, 1751-1801년),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한국 최초의 여성회장으로 선교활동에 앞장섰던 강완숙 골룸바(姜完淑, 1761-1801년)와 그의 아들 홍필주 필립보(洪弼周, 1774-1801년),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 임금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洪樂任, 1741-1801년) 등 5명이 순교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는 홍낙민의 셋째 아들 홍재영 프로타시오(洪梓榮, 1780-1840년)가 전주에서 참수되었고, 그의 며느리 심조이 바르바라(沈召史, 1813-1839년)와 두 살 난 홍[아기] 베드로는 전주 감옥에서 옥사하였으며, 홍재영의 부인 정조이(丁召史)도 이때 순교한 것으로 문중에서 추정하고 있다. 또한 홍낙민의 손자인 홍병주 베드로(洪秉周, 1798-1840년)와 홍영주 바오로(洪永周, 1801-1840년) 형제가 서울 당고개에서 순교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홍재영의 아들인 홍봉주 토마스(洪鳳周, ?-1866년)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고, 그의 아들 홍 베드로는 1867년 가을 전주 초록바위에서 수장되었다.
이들 중에서도 홍유한과 홍낙민의 관계는 매우 각별하다. 1765년 당시 홍유한과 홍낙교 두 집안은 모두 여사울 한마을에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홍낙민 형제는 13세 때 부친이 세상을 뜨자 한마을에 살던 재당숙 홍유한의 훈도를 받고 자랐다. 그리고 두 집안이 여사울을 떠난 시기도 비슷했다. 1775년 홍유한이 경상도 순흥의 구고리로 이사하자, 홍낙민 또한 이듬해인 1776년에 충주로 거처를 옮겼다. 이 일을 두고 또 홍낙민은 홍유한의 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아! 소자가 부족하여 1763년에 아버님(홍양한)께서 세상을 뜨시니, 이때 소자는 성인이 되기 두 해 전이었습니다(13세). 다만 선생(홍유한)께서 사랑으로 길러주시고 정성스레 가르쳐 주시며, 부족하다 아니하시고 장차 성취가 있을 것으로 허락해주셨습니다. 소자가 오늘날 큰 허물을 면하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선생께서 내려주지 않으신 것이 없습니다. 아! 선생께서 소자를 자식처럼 보아주셨으니, 소자가 어찌 선생을 아버지처럼 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지 조성
안동교구는 1993년 우곡리에서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수덕자인 홍유한 선생의 묘를 발견하고 이듬해 성지개발위원회를 발족하여 1995년 묘지 축복식과 유적비를 건립하고 순차적으로 십자가의 길 등을 조성했다.
1998년 11월 15일에는 피정의 집과 사제관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2000년 10월 25일에는 청소년들의 신심 교육과 성지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해 청소년 수련원 겸 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고, 2005년 9월 25일에는 우곡 성지 성역화 10주년을 맞아 대형 십자가와 홍유한 선생 동상을 세워 축복식과 기념미사를 봉헌했다.
2009년 5월 29일 안동교구 설정 40주년을 맞아 13위 순교자들이 순교한 각 순교터의 흙을 담아 와서 가묘를 조성했다.
2014년 11월 1일에는 홍유한 선생의 수덕생활을 기억하고 본받기 위해 기존의 성당을 칠극 성당으로 명명했고, 성당 앞 계곡 건너편에 칠극의 길을 조성하여 2015년 9월 20일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 주례로 비석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11시 반쯤 우곡 성지에 도착. 비는 개이고 언제 폭우를 내려느냐는 듯 하늘은 군데군데 푸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단 며칠 장마를 겪어도 그리워지는 것은 하늘이다.
우곡 순례지 입구에는 성지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 바로 안쪽에 대형 십자고상과 그 앞에 선비 차람의 홍유한 동상이 있다. 동상 제명은 ‘한국천주교회 첫 수덕자 농은 홍유한(1726-1785)’이다.
홍유한 및 후손 순교자 묘역
안내도와 안내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먼저 홍유한 묘와 후손 순교자묘역으로 가기 위해 오른쪽 계곡을 건넌다. 다리 앞에 이르니 온통 계곡 물이 엄청나게 많은 유량으로 흐른다. 최치원의 시가 떠오른다.
계곡 물, 돌에 부딪쳐 포효하며 흘러내리니
사람 말소리 지척 간에도 알아듣기가 힘들구나.
세상의 시비(是非) 소리 귓전에 이를까봐
일부러 흐르는 물로 산을 에워싸 버렸네.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崔致遠 題伽倻山讀書堂)
10분이 채 안 되어서 후손 순교자묘가 나타난다. 입구에 형구 모양의 홍유한 후손 순교자 현양비가 있는데 뒷면에는 풍산홍씨 천주교 순교자 세계도(世系圖)가 있다. 그 내용은 대체로 앞서 소개한 대로다.
성지 조성 당시 홍유한 선생 후손들은 선조 순교자들을 현양하고자 했으나 유해를 찾을 길 없어 고심하다가 안동교구와 협의하여 선조인 홍유한 선생의 묘가 있는 우곡 성지에 13위 순교자들의 의묘(擬墓)(유해 없는 가묘)를 조성하여 모시기로 했다.
그래서 2009년 5월 29일 안동교구 설정 40주년을 맞아 13위 순교자들이 순교한 각 순교터의 흙을 담아 와서 의묘를 조성하고 그 앞에 현양비를 세웠다. 이로써 우곡리의 골짜기는 홍유한 선생과 그 후손 순교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후배 신앙인들에게 신앙의 참된 가치를 일깨워주는 거룩한 땅이 되었다.
묘지 이외에도 야외제대가 있다. 여기서 홍유한 묘까지는 오르막 십자가의 길인데 돌판으로 된 그리스 십자가형(적십자형)의 15처가 있다.
십자가의 길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14처에 올라 다 왔는가 했는데 부활 15처가 하나 더 남았다. 15처에 오르자 비로소 홍유한 선생의 묘소가 나타난다. 봉분과 묘비 뒤에 십자가가 선 단촐한 전통식 묘이다.
40-50분을 걸려 다시 처음 건넜던 다리를 건너서 계곡 안쪽으로 들어오면 왼쪽에 피정의 집이 있고 숲길로 이어진다. 주차장도 매우 크게 소형, 대형 차량이 따로 주차할 수 있도록 시설이 되어 있다. 조금 더 오르면 원두막 형태의 쉼터가 있고 곁에서 예수성심상이 순례객들을 환영하고 계신다.
피정의 집
오른쪽으로 청소년 야영장 가는 길이 있고 조금 더 오르면 왼쪽에 사제관이, 오른쪽으로는 칠극의 길이 나 있다.
칠극의 길
칠극(七克)은 칠극대전(七克大全)의 약칭으로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신부 판토하(Pantoja, 龐迪我, 1571∼1618)가 지은 책이다. 이 책은 죄악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뿌리와 이를 극복하는 일곱 가지 덕행을 다룬 일종의 수덕서(修德書)이다. 1614년에 중국 북경에서 7권으로 간행된 이래, 여러 번 판을 거듭하였고, 《천학초함(天學初函)》 총서에도 수록 되었으며, 이를 상 · 하 2권으로 요약하여 《칠극진훈(七克眞訓)》이라는 책명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馬竇)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함께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연구되었고, 남인 학자들을 천주교에 귀의케 하는 데 기여한 중요한 책 중의 하나이다.
죄악의 뿌리가 되는 오만, 질투, 분노, 음란, 인색, 식탐, 나태 등 칠죄종(七罪宗)과 더불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겸손, 인자, 인내, 정결, 베풂, 담박, 근면 등 일곱 가지덕행을 다음과 같이 차례로 소개하고 있다.
① 겸극오(謙克傲 - 겸손으로 오만함을 이겨 냄) - 복오(伏傲)
② 인극투(仁克妬 - 사랑으로 시기와 질투를이겨 냄) - 평투(平妬)
③ 사극린(捨克吝 -베푸는 마음으로 인색함을이겨 냄) - 해탐(解貪)
④인극로(忍克怒 - 인내심으로 분노를 이겨 냄) - 식분(熄忿)
⑤담극도(淡克도<號+食> - 담박한 생활로 탐욕을 이겨 냄) - 색도(塞饕)
⑥정극음(貞克淫 - 정결로 음욕을 이겨 냄) - 방음(防淫)
⑦ 근극태(勤克怠 - 부지런함으로 게으름을이겨 냄) - 책태(策怠)
칠극의 절목(節目)은 절차와 체계가 정연하고 비유가 적절하며, 유학의 극기복례(克己復禮)와 관련이 있어 유학자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천주교와 유교 사이에 윤리면에서 어느 정도 일치할 뿐 아니라, 때로는 천주교가 우월함을 은연중에 시사한다.
칠극의 길이란 7개의 큰 돌에다 하나하나 칠극을 새겨 세워놓은 공원길을 말한다. 제대와 십자가가 있어 야외 미사도 볼 수 있다.
1. 복오(伏傲) - 교만을 누름
교만은 분수에 넘치는 영화를 바라는 것으로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선행도 자기로부터 나오고, 자신의 공덕인 줄만 알고 남을 멸시하며 자신은 남과 다르다고 여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우고 겸손한 자세를 지녀야 한다.
2. 평투(平妬) - 질투를 가라앉힘
질투는 남이 잘되는 것을 미워하고 남이 잘못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질투는 교만의 친구이며 남의 잘못을 헐뜯고 남에게 재앙이 생기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겨내려면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3. 해탐(解貪) - 탐욕을 벗어남
탐욕은 욕심이 많고 인색하며 끝없이 재물을 탐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은 하늘과 땅위의 모득 것을 갖고 싶어 한다. 이런 탐욕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고 은덕을 베풀어야 한다.
4. 식분(熄忿) - 성냄을 가라앉힘
분노는 앙갚음하려는 마음이다. 사나운 말과 욕설, 다툼과 살상은 모두 분노에서 나온다. 이는 보복하고자 하는 데서 나오는 것으로 자기에게 반대하는 것을 모두 없애버리려는 그릇된 욕망이다.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분노를 억누르고 참을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한다.
5. 색도(塞饕) - 식탐을 막음
식탐이란 먹고 마시는 것을 즐김에 절도가 없는 것이다. 이는 이성적 판단이나 윤리적 자유를 상실케 하며 인간의 품위를 손상하게 한다. 탐을 내어 목고 마시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다. 이를 이겨내려면 절제하는 법을 배우고 길러야 한다.
6. 방음(防淫) - 음란을 막음
음란이란 색정에 빠져 이를 즐기면서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음욕은 세찬 감정의 불길이며 충고하는 말을 하면 성을 낸다. 이를 이겨내려면 항상 곧은 절개와 지조를 잃지 말아야 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참사랑을 실천하기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7. 책태(策怠) - 나태함을 채찍질함
게으름이란 선행과 덕행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인데 모든 욕망에 거리낌이 없으며 귀찮은 일을 견디어 내지 못하고 선행에 대한 확고한 자세가 없다. 이것을 이겨내려면 부지런히 일하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끝없이 채찍질을 해 주어야 한다.
칠극 성당
칠극 성당은 2000년 10월 25일에 건립된 성당을 2004년 이름을 바꾼 것이다. 입구에 성당 표지석과 칠극의 기도석이 서 있고 멀찌감치 산 밑에 성모상과 구유 촛불봉헌대가 있다.
성전 내부는 제대 뒷벽 왼쪽에 성 요셉 부자상이, 오른쪽엔 홍유한과 가족 순교자 소개 패널이 걸려 있고 제대 위에는 속에는 무엇인지 하얀 테이블보가 덮여 있다. 벽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줄지어 걸렸고 바닥에는 나지막한 목재 교우석이 두 줄로 배치되어 있다.
제대 뒤벽 맨 위에는 안동교구 사명선언문이라고 하여 목각판 하나가 걸렸다.
기쁘고 떳떳하게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서로 나누고 섬기면서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
밖에 나오니 마당에는 그리고 물레방아 같은 조경이 되어 있고 식당 건물도 갖추어져 있다.
낮 1시가 조금 못되어 우곡 성지 순례를 마쳤다. 이제 돌아오는 길만 남았다. 아침에 비가 그치고 날씨가 좋아 돌아오는 길에 영양 일월재에 있는 우련전 교우촌 터를 거쳐 오기로 했다. 한때 봉화에 몇년 간이나 다닌 적이 있어 길은 익숙하다. 간혹 초봄 해동기에 사태가 나서 길이 끊기기도 해서 폭우가 중에는 피해야 할 길이다.
우련전 교우촌 터
봉화에서 영양 방면으로 오는 중 봉화터널을 지나면 또 하나의 터널이 있는데 영양터널이다. 영양터널 직전에 우회전 하면 일월산 정상으로 올라가고 좌회전 하면 100여m 지점에 폐교 터가 하나가 나온다. 갈산초등학교 우련전 분교장이다. 바로 이곳이 조선 시대 귀양지이기도 했던 우련전(우련밭)이다. 마을은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에 1798년경에 충청도 면천 고을 솔뫼에 살던 김대건 신부의 종조부 김종한(안드레아)과 부근의 건사골에는 당시 예비신자인 이윤집 가정 등 몇몇 가정들이 살기 시작하였다. 을해박해가 일어난 1815년 4월 23일(음)에 김종한(안드레아) 일행은 안동 포졸들에게 잡혀 20개월 동안 감옥에서 ‘옥중 신앙공동체’로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16년 11월 1일(음) 대구 관덕정에서 7명이 순교하였다. 이후 교우촌은 폐촌이 되었다. 김종한 안드레아는 2014년 8월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124위 복자의 일원으로 시복되었다.
폐교장을 찾아드니 의외로 건물은 말짱하다. 창문이랑 볼때 새로지었거나 리모델링한 것 같다. 건물 밖에 성경 구절을 적은 안내판이 있는 걸로 보아 어느 교회의 수련관으로 사용한 듯하다.
교문 입구 쪽엔 학교의 폐교 내력을 기록한 교적비가 서 있다. 교적비에 의하면 우련전 분교장은 1964년 4월 26일 개교하여 졸업생 111명을 배출하고 1992년 3월1일 폐교되었다. 28년 간 111명이면 한 해에 4명꼴이다. 그래도 전교생은 24명이나 되니 요즘에도 이보다 작은 학교가 많다.
90년대 후반 이곳에 들러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할머니는 이곳에 학교가 있어 운동회까지 했다고 자랑을 했다. 그 할머니는 아직 살고 계실까? 지금 사신다면 90이 넘은 나이다. 사실 당시는 이곳이 순교자를 낸 교우촌이라는 사실도 몰랐었다.
이 우련전 교우촌 터에서 1.5km를 더 들어가면 예비신자로 순교한 이윤집이 설던 건사골 교우촌이 나온다. 하지만 오늘은 이 정도에게 그친다. 한번 때를 보아 을해박해시 경주부로 끌려왔던 청송 노래산 교우촌, 그리고 영양 석보 머루산 교우촌 터까지 한번 다녀 봤으면 싶다. 전국이 폭우 주의보를 내린 중에도 계획된 대로 일정을 소화한 것은 운전 봉사한 고 요셉 형제의 덕분으로 돌린다. 오후 5시 반 경에 성당에 도착했으니 순례를 시작한 후 가장 이른 시간이다. 아마도 가족들도 많이 걱정했으리라 짐작이 된다. 25차 순례를 마친다. (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