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10. 북경을 떠나며 - 중국불교의 旅路 ①
분열시대 뿌리내린 불교, 곳곳에 화려한 문화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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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왁사원지의 불탑> |
사진설명: 중국 신강성 호탄시 동북쪽 70㎞ 지점인 타클라마칸 사막 내에 있는 라왁사원지의 불탑은 서역불교의 흥망성쇠를 보여준다. 사막화가 진전돼 지금은 관리사무소에서 1시간 정도 걸어 들어 가야만 볼 수 있다. |
후한 명제 영평 10년(67)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대륙 곳곳에 어마어마한 자취를 남겼고,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불교는 지금도 13억 중국인들의 ‘정신적 고향’이자 ‘사상적 원천(源泉)’으로, 나아가 끝없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문화적.문학적 상수원’으로 남아있다. 물론 처음부터 불교가 중국인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아니다.
미국의 저명한 중국불교사가 아서 라이트(1913~1976)가 〈중국사와 불교(Buddhism in Chinese History)〉(1959)에서 중국불교를 크게 준비기(후한~316).정착기(316~589).독자적 성장기(589~763).전용기(763~20세기) 등 네 시기로 구분.설명한 것처럼, 불교도 초기엔 전래된 종교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불교가 대륙에 본격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양자강 이북과 이남의 ‘분열과 혼란’에 힘입은 바 크다. 서기 291년부터 시작된 ‘서진의 내란’(팔왕의 난. 291~306)을 계기로, 중국 내지와 주변 지역은 전대미문의 혼란에 휩싸인다.
오호십육국 시대(304~439)의 개막이 그것인데, 오호(五胡)란 한족(漢族) 입장에서 본 국외 다섯 민족을 - 흉노.갈.강.저.선비족 - 말한다. 팔왕의 난 당시 다섯 민족은 각 왕들의 용병으로 채용돼 중국 내지 이곳저곳에 터전을 잡았다.
불교, 오호십육국시대 본격적으로 확산.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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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탑사 석굴> |
사진설명: 하서주랑에 있는 장액의 마제사 석굴에서 5㎞ 떨어진 곳에 위치한 금탑사 석굴. 동.서 2개로 입구엔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
팔왕의 난 이전, 삼국시대 이래 흉노.저.강족들은 자신들의 근거지에서 끌려나와 중국 내로 옮겨졌다. 흉노는 지금의 태원에, 저족과 강족은 관중(關中)에 강제로 이주 당했다.
중국에 들어온 그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이어가야 했다. 그러다 팔왕의 난이 일어났다.
각 왕들은 자기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모았고, 이 와중에 흉노 등 오호(五胡) 세력들도 결집되기 시작했다.
성도왕 사마영 휘하 흉노족들은 유연(劉淵)을 중심으로 뭉쳤다. 사마영이 그에게 흉노 부락의 병사를 징발하는 임무를 맡겼던 것. 유연은 본래 흉노 우두머리 선우의 자손으로 그의 조상이 한나라 왕실과 통혼한 사실을 이유로 성을 ‘유(劉)’라 했다.
혼란이 격렬해짐에 따라 유연은 산서 지역을 근거로 흉노의 자립을 도모하겠다는 의지를 굳혔다. 결국 304년 10월 일찍이 남(南)선우의 근거지였던 이석(離石. 현재 산서성 이석시)을 수도로 ‘한왕(漢王)’이라 칭하고 ‘원희(元熙)’라 건원해 나라를 세웠다. 팔왕의 난이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국세는 급속히 신장됐다.
유연은 서진이 파견한 사마등을 격파해 하동 지역을 접수하고 308년 10월 포자(蒲子)에서 황제에 올랐다. 309년 1월 평양으로 천도했다, 310년 7월 그곳에서 병사했다.
유연이 죽은 뒤 약간의 혼란이 있었지만 311년 그의 아들 유총(劉聰)이 즉위했다. 유총은 일족인 유요(劉曜)와 갈족인 석륵(石勒)을 시켜 서진의 군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311년(영가 5) 5월 흉노군은 마침내 서진의 수도 낙양을 점령했다.
회제(284~313)와 황후 양씨는 생포돼 평양으로 압송됐다. 회제는 313년 1월 베풀어진 연회에 참석, 앞치마를 두르고 흉노 황제에게 술을 따랐다. 서진의 신하들은 방성대곡했다. 흉노는 그간 한족에게 당한 설움을 이런 식으로 되갚았다. ‘술 따르던 회제’를 희롱하는 데 지친 유총은 회제를 독살했는데, 일련의 사건을 중국학자들은 ‘영가연간(永嘉年間)의 상란(喪亂)’(307~312년에 일어난 슬픈 난리)으로 부른다.
낙양에서 겨우 도망친 사마업이 서진의 마지막 황제 민제(愍帝. 270~317)로 312년 4월27일 장안에서 등극했지만, 316년 장안으로 들이닥친 유요의 군대에 항복하고, 그 해 11월18일 민제는 한(漢) 황제 유총에게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렸다.
결국 민제도 회제 못지않은 치욕을 받고 317년 12월20일 18세의 나이로 살해된다. 삼국지에 나오는 사마의 중달(仲達)의 후손들이 세운 서진(265~316)은 역사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 오호십육국 시대를 배경으로 성립된 소설이 바로 〈후삼국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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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운강석굴의 이불병좌상. 다보여래와 석가여래가 함께 앉아 있는 이 모습은 운강석굴에 특히 많다. |
오호는 이후 중국 각 지에 독립 왕국을 건설했다. 유연이 세운 성한(成漢), 320년대의 전조(유요)와 후조(석륵), 350~360년대의 전연과 전진, 380년대 중기~390년대 중기의 후연과 후진, 410년대 말~420년대 중기의 북위와 하(夏)가 그것이다.
역사적으로 오호십육국은 304년 10월 이웅(李雄)과 유연이 각각 사천과 산서 일대에서 성도왕과 한왕을 칭한 해부터, 선비족 탁발씨의 북위가 화북을 통일한 439년까지의 135년에 걸친 시기를 말한다.
오호십육국 시기는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비난받고 부정되어야 할 시절”은 결코 아니다. 특히 중국불교 발전엔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불교가 중국 사회에 골고루 전파됐던 때였고,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질서,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회가 창조된 시기였다. 새로운 중국이 형성된 시기였다”고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한제 교수는 분석한다.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이 급속하게 불교로 기운 것이다.
특히 화북지역을 통치한 오호의 군주들은 불교를 열렬하게 숭상했다. 이민족들이 불교를 신봉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후조(後趙. 328~352) 무제 석호(石虎)와 왕도(王度)의 대화다.
불교도 수가 증가하자 재상 왕도가 335년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려, “불타는 외국의 신이기에 왕과 백성들에게 알맞은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후조의 백성들이 불타를 숭배하는 것을 금지시키자”고 요구했다. 무제 석호는 이에 대해 “짐과 짐의 백성들은 본래 이민족이기에 외국의 신인 불타야말로 숭배해야할 대상”이라며 “불타를 섬기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불교에 귀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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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북위 문성제 화평 원년(460)부터 본격적으로 개착된 운강석굴엔 5만1000여 위나 되는 불.보살님이 봉안돼 있는데, 사진은 운강석굴 제20굴 대불. |
“함께 외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불교가 대륙에 퍼진 것은 아니었다. 대륙인들에게 사상적 귀의처를 제공했기에 더욱 환영받았다.
분열과 혼란 속에, 한나라 이래 독존적 지위를 부여받았던 유가(儒家)학설은 ‘한족 지배계급’.‘일부 소수민족 지배계급’들에겐 이용됐지만, ‘제세(濟世)작용’에서의 무능함이 갈수록 드러나 ‘권위의 절대성’을 점차 상실했다. 반면 불교는 오히려 확산됐다.
혼란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안겨도 되는 사상적 귀의처를 제공했다. 계속되는 전쟁, 사회경제 기반의 파괴, 끊임없는 죽음 등은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에 커다란 손실을 입혔고, 사회 전반을 하나의 거대한 전쟁터로 만들었다.
“사회 최하층에 살던 사람들은 전쟁의 시달림을 받을 대로 받았고, 마치 끊임없이 흔들리는 거미줄 같은 신세가 됐으며, 어디 가서 하소연 할 수도 없는 상태”였고, “혼란이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귀의처를 찾도록 끊임없이 강요”(중국 황유복.진경부 교수)했다.
이 때 중국인들에게 제시된 불교철학, 특히 ‘업설과 선악응보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중요하다는 ‘불성사상’ 등은 대해(大海)에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항구처럼 여겨졌고, 뿌리내릴 수 있는 튼튼한 토양이었다.
재난이 일상화 된 방대한 땅에서 불교는 서민층에 ‘하나의 비옥한 정신적 장원’을 제공했다. 서민층에만 ‘장원’을 제공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배자들에게도 혼란은 역시 혼란이었다. 하루아침에 전쟁에서 죽음을 당하고, 궁정 안에서 일어난 반란에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왕족과 귀족들에게도 불교는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였다.
“백성들 속에서 깊은 발전의 토양을 발견한 불교는 지배층의 앙모와 수호를 받으며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불교는 화북지방을 석권했다. 전진의 부견왕, 후진의 요흥왕, 북량의 저거몽손왕, 후조의 석륵.석호왕 등은 모두 불법숭상(佛法崇尙)을 행복한 일로 간주했다.
업설.선악응보설 등은 중국인에게 사상적 귀의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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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평성(현 대동)에서 낙양으로 천도한 북위는 선무제 즉위와 더불어 강력한 불교후원정책을 실시했다. 용문석굴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영됐다. 사진은 당나라 때 조성된, 용문석굴의 중심인 봉선사동. |
혼란한 이 때에도 부처님 가르침을 펴고자 중국에 찾아오는 서역 스님들은 계속 늘어갔다.
<중국불교〉(민족사 펴냄)에 따르면 서진 이전까지 중국에 들어온 서역 출신 스님은 무려 23명이었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뒤 이어가며 중국에 찾아온 고승은 30명 이상이었다.
당시를 대표하는 서역 출신 스님이 불도징(쿠차 출신), 승가발징(간다라 출신), 담마난제(아프가니스탄 출신), 승가제바(간다라 출신), 구마라집(쿠차 출신), 불야다라(간다라 출신), 담체(사마르칸드 출신), 진제(인도 출신), 구나발타라(부남 출신), 월비수나(아프가니스탄 출신), 보리류지(북 인도 출신), 나련제려야사(파키스탄 스와트출신), 달마급다(남 인도 출신)스님 등이다.
대륙의 혼란은 양자강 이남이라고 피해가지는 않았다. 양자강 이북과 마찬가지로 강남도 혼란했고, 사상적으로 피폐해졌다. 불교는 자연스레 강남지방을 사상적.종교적으로 흡수했다. 다만 강북과 차이가 있다면, 튼튼한 전제왕권 대신 귀족연합체로 나라를 운영하다보니, 강북과 같은 ‘강력한 왕권불교’가 아닌 ‘귀족불교’로 성장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화북지방의 혼란을 통일한 북위(386~534)시대에도 강북의 흥불(興佛)은 이어졌고, 불교는 운강석굴과 용문석굴로 대표되는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며 대륙을 완전 석권했다. ‘불심천자(佛心天子)’ 양무제의 예에서 보듯, 강남에도 흥불의 시대가 계속됐다. 이러한 토양 위에 거대한 세계제국 수.당나라가 건국돼 대륙을 통일하자, 불교사상은 자연스레 ‘대륙의 주된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수.당대의 불교는 사상적.경제적으로 완전히 자립된 반석 위에서, ‘불광보조(佛光普照).법륜상전(法輪常轉).중생교화(衆生敎化)’라는 자신의 이상을 대륙에 마음대로 펼쳐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도전과 응전의식의 상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하기 힘든 퇴보’를 가져왔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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