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여류시인들이 꿈꾸는 파라다이스와 꿈의 색깔은 대체 무엇으로 무장된 것일까,
아마 모르긴 해도 씨줄과 날줄을 엮어 지극한 정성으로 쌓아올린 부양의 탑이리라.
이렇듯 섬세하고 고결한 언어의 노래가 햇살처럼 쏟아지는 오월이야말로 분명 축복 받은
계절임에 틀림없다.
참다운 문학정신을 추구해 온 정통 순수문예지 미래문학 여름호(회장:장춘득)를 통해 등단한
권덕운, 김은영, 김희순 세 시인의 시풍은 참신성과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한 존재론적 사유에
현실참여적 기치를 내건 당당한 위용으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일그러진 자화상은/낯 선 타인인 양/구석진 자리에 미욱한 둥지를 틀고//하얀 포말을 토악질해대는/
세탁기 안의 빨래/혼절한 기억 되새김하듯/그렇게 나를 직립으로 세우고 싶다//초점 잃은 눈길/
실 비듬 떨어지는 소리에/속죄처럼 숨을 죽이고/돌아갈 수 없는 길 앞에서/옹이진 가슴 끌어안으며/
이내 만선의 꿈에 부픈/회귀선의 닻을 한 마장쯤 올려 본다//살아가기 심심한 날/철없는 내 안의
아우성 소리/불길로 솟구치며 번쩍이던 눈/분출구를 잃어버린 휴화산 같던/그 날은 정녕 복원하지
못한다 해도,//창백한 그믐녘 어스름 달빛 아래/내 안의 항로 찾아 나선 길/그래, 속절없는 허무함이라
이름하자//거울 앞에 서 있는 날은/달빛 행군 동공 속에 심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저 미명의
어둠 불사르고/싱싱한 가지 쭉쭉 뻗어/짭짤한 빛이 되어 내리기를 소망하고 싶어라.(권덕운, <거울 앞에서> 전문)
"권덕운의 당선작은 대부분 실험정신에 입각한 작자의 치열한 창작정신이 곳곳마다 농밀하게
융해되어 감정의 촉수를 자극한다. 특히 "회귀선의 닻을 한 마장쯤 올려 보고"싶은 향기로운 중년의
맛깔스러움이 여유롭게 채색된 <거울 앞에서>나 <청거북을 보면서>는 자신의 겸허한 성찰적 자세와
대비적 사물의 양면적 응시를 통해 생명의 소중함과 존재가치를 부여하는 상징적 이미지와
심미안(審美眼)이 돋보였다. 작자자신이 강조하고자 하는 "생명의 씨알"은 곧 소실에 의한 창조의
부산물이며 영원함의 환치작업에 귀결되는 것이다."(심사평)
계절은 상실의 기억 저편에서/제 스스로 몸을 태워/길가 작은 웅덩이에/zip 파일로 압축된 여름을
물질하여/해풍에 풀어놓는다//붉은 장미꽃잎이/때 이른 여름비에 두들겨 맞아/객사하고 있을
때도 미동(微動)조차 않더니/하늘거리는 나비 더듬이에/사알짝/초록 여름 묻힐 준비 했나보다//
숨쉴 적마다/성급히 풀린 파일 하나/구멍 뚫린 폐 속에 바람으로 그물 친다/마침내/수액(樹液)으로
번지듯/콧구멍을 뚫고 나온 작은 여름 한 조각/풍선처럼 날아올라 어정거리다/화끈 달아오른 얼굴로/
싱겁게 늦은 봄 나무란다.(김은영, <유월> 전문)
"김은영의 다섯 작품을 대하면서 부단한 습작의 노고가 감지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존재론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직관과 사유의 깊이가 예사롭지 않고 시어를 다스리고 정제하는
연금술(鍊金術)이 아마추어로써 손색이 없다. 작품마다 녹아든 독특한 필치는 작가 자신이 산고의
진통 속에서 창출하고 구현해 낸 빛나는 전리품들이다.
특히 <유월>에서 "zip 파일로 압축된 여름을 물질하여/해풍에 풀어놓는다"식의 표현은 신선한
절창이다. <하월곡동 산 2번지>에서 소외된 철거민의 아픔과 애환을 현실참여적 측면에서 투시한
진지한 자세와 여타 작품에서 발현된 시적 재기는 가능성을 인정받기에 모자람이 없다."(심사평)
회음(誨淫)을 도모하던/눈썹 달이 고개를 쳐든 새벽녘//갈대 숲을 헤치고/네게로 달려가/꼿꼿하게
발기한 꿈들을 보았다//시속 200km/속도무제한의/아찔한 공황장애증//이 밤이 너무 짧다//낡은/
종점 표지판이/생경한 그림자가 되어/뚜벅뚜벅/혼잣말로 걸어온다//그래/눈부신 불륜이다.
(김희순, <초여름 밤의 꿈> 전문)
"김희순의 <한 여름밤의 꿈>을 대하고 상당한 시적 자질을 발견했다. 시를 언어의 함축과 축약에
의한 미적 감각의 창출로 정의할 때 작가 지망생들이 텍스트 본으로 삼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그만큼 시의 묘미를 어느 정도 알고 쓴 작품이다. 이렇듯 치열한 장인정신(匠人精神)이 작품 속에
배어날 때 비로소 "한 여름 밤의 꿈"들은 성취되지 않을까, 자의식의 발현과 존재론적 사유에서
깊이 있게 천착한 <피카소의 새>나 여타의 작품들도 눈에 들어오는 안정감과 세련미를 유지하고
있어 기꺼이 당선작으로 올린다."(심사평, 심사위원:장춘득, 최광림, 조남익, 지광현, 유준호, 임동각, 정연수)
시의 내용이나 심사평에서 보듯 시인들은 한결같이 고유한 자신의 색채를 드러내며 독특한 시의
텃밭을 일구고 있다. 세 시인 모두 중견작가인 청랑 최광림시인 팬-클럽 [시원] 문학회원으로
오랫동안 최시인의 문하에서 기량을 갈고 닦은 재원들이다. 기성시인에 필적해도 모자람이 없다는
호평을 받고있는 이들의 창조적 실험정신이 완성되어 한 편의 작품으로 생산될 때마다 이 척박한
땅에 꿈의 파라다이스는 성취될 것이다. <연인숙 기자>
(2004년 5월 30일자 토요신문 전면 특집기사)
[choikwanglim@yahoo.co.kr]
|
첫댓글 혹독한 채찍을 마다하지 않고 마침내 등단의 꿈을 성취한 권덕운, 김은영, 김희순 시인의 노고를 치하하며 초심을 항심으로 풍요로운 시전(詩田)을 일구어 문운이 날로 창천하기를 기원합니다. 더불어 초운(草雲) 권덕운, 난곡(蘭谷) 김은영, 산정(山頂) 김희순 시인에게 위의 아호(雅號)를 등단선물로 봉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