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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조체 문장은 발제자 의견 *
<포럼에세이스트 2015.8.2 발제>
이번 발제하는 글은 시 장르 중 하나인 서술시의 정의와 분류 및 그 변화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서술시’라는 단어를 ‘서사수필’ 바꾸면 서사수필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서사수필 이론과 근접해 있다. 이에 서사수필에서 아니, 우리 수필에서는 어떤 부분이 더 강조되어야 하는지, 또한 방법론적으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해볼 필요가 있다.
김준오 유고집 『현대시와 장르비평』 중
불확실성과 서술시의 변화
è 모든 문학에는 서정성 즉, 감정과 정서가 녹아 있어야 한다. 소설과 수필도 마찬가지다. 특히 서정성이 강조되는 시(詩) 장르에서는 과거 오랫동안 개인의 감정과 정서와 리듬과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서정시가 본류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간의 경과와 그 인과 및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서사구조가 서정시에 이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존 서정시는 문학성을 이유로 서사구조를 배척하며 경시하는 풍조까지 생겨났다.
수필계에서도 유사하다. 일상을 떠나 산과 강과 같은 자연이나 동물, 사물, 물건 등 특정 대상에 대한 작가의 감상을 읊은 서정수필이 주류를 이룬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소위 서정수필만으로는 수필계는 존재하지 못한다. 다수의 수필가가 이미 일상의 삶의 이야기를 소재로 수필을 쓰고 있다. 시간의 연속성, 원인과 결과, 이야기 구조로 된 서사수필이 수필의 대중화를 선도한다. 그러나 아직도 수필계 일각에서는 서사구조의 수필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즉, 마치 서정성이 강한 수필이 문학성이 높다는 식의 편견이다. 이러한 편견은 더 이상 성립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1. 왜 서술시인가
서술시(narrative poem)란 사건이나 행위를 서술한 시를 가리킨다. 대화, 서술, 묘사는 문학의 대표적 문체들이다. 문체를 기준으로 시 장르에서는 크게 서술시와 묘사시로 분류된다.
l 서술시 → 삶의 과정과 삶의 조건을 다룬다
l 묘사시 → 감각적 대상과 그 특질을 다룬다. 움직임이나 변화나 시간과 관계없이 대상을 표현.
그러나 묘사시가 순수하게 묘사만으로 되어 있지 않듯이 서술시도 순수하게 서술만으로 되어 있지 않다. 두 문체 중 어느 것이 우세하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è 어느 한 수필작품에서도 서정적인 면과 서사적인 면이 혼재된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서술시가 70년대에 와서 크게 주목받게 된 이유는 서술시가 민중시의 불가피한 시 형태이면서 시의 리얼리즘을 획득하는 결정적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2. 서술시와 리얼리즘
70년대 서술시로써 민중시를 주류화한 계기는 신경림의 「농무」 계열의 작품이다.
온 집안에 퀴퀴한 돼지 비린내
사무실패들이 이장집 사랑방에서
중톳을 잡아 날궃이를 벌인 덕에
우리들 한산 인부는 헛간에 죽치고
개평 돼지비계를 새우젓에 찍는다
끝발나던 금광시절 요릿집 얘기 끝에
음담패설로 신바람이 나다가도
벌써 여니레째 바닥난 주머니
작업복과 뼈속까지 스미는 곰팡내
술이 얼근히 오르면 가마니짝 위에서
국수내기 나이롱뻥을 치고는
비닐 우산으로 머리를 가리고
텅 빈 공사장엘 올라가 본다. --- 신경림, 「장마」 중에서
사물의 감각적 이미지도, 인간 내면 풍경도 없다. 극적 사건이나 서사구조도 없지만, 장면들이 변두리 인간들의 갖가지 행위로 점철되어 있어서 서사적 흥미를 느낀다.
è 이상은의 「안녕, 춘자고모」, 「감자탕 집에서」도 이와 비슷
화자도 변두리 인간들의 위에서 또는 밖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변두리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화자의 시점은 인간적이면서 삶의 세계에 보다 밀착된 미시성(微視性)을 띠고 있다. 화자는 자기의 주관적 감정을 직접적으로 투영하지 않고, 독자에게 장면들을 객관적으로 보고하는 중립적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서술시의 미학적 장점은 산문소설에 등가되는 리얼리티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 서술시는 행위나 사건을 묘사함으로써 삶의 장면들을 리얼하게 반영하여 서사적 흥미와 삶 자체의 관심을 융합시킨다. 서술시는 원래 리얼리즘과 관련되어 있다.
è 서사수필에서도 리얼리티는 생명이다.
서술시의 리얼리즘 분류는 다음과 같다.
A. 시인의 전기적 체험에 근거한 주관적 현실성 à 사적
B. 정치적 사회적 동기에 근거한 객관적 현실성 à 공적
A 시인의 전기적 체험에 근거한 주관적 현실성 사례
러시 아워에 비좁은 지하철을 타고
오랜만에 발도 한 번 밟히고
돌아와 저녁을 짓는다
창밖에 어둠이 밀려와 쌓인다 - 황동규, 「뉴욕장마」
이 일상시는 한 소시민의 평범한 일상적 삶을 긍정적인 인생관에 의해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시 쓰기의 동기가 극히 개인적이고 무엇보다도 자전적이다.
è 서정수필을 제외한 대부분의 수필이 이에 해당한다. 본인의 신변이나 가족, 주변사람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므로 서사수필의 범주에 들지만 자칫 문학성이 결여될 위험이 있다.
B 정치적 사회적 동기에 근거한 객관적 현실성 사례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그 아이 혼혈아인
엄마를 닮아 얼굴만 희었던
그 아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연애를 하고
퇴학을 맞아 고아원을 뛰쳐 나가더니
지금도 기억할까 그때 교내 웅변 대회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 마디 말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
일곱 살 때 원장의 姓을 받아 비로서 李가든가 金가든가
朴이면 어떻고 브라운이면 또 어떻고 그 말이
아직도 늦은 밤 내 귀갓길을 때린다
기교도 없이 새소리도 없이 가라고
내 詩를 때린다 우리 모두 태어나 욕된 세상을
--- 김명인, 「동두천(東豆川)」중에서
기지촌의 혼혈아가 겪어야 했던 비극적 삶을 제재로 한 점에서 이 민중시는 사회역사적
동기에서 쓰여진 객관적 현실성의 범주에 든다. 리얼리즘 시의 등장인물이 일반적으로
하층민이지만 장르에 관계없이 진정한 리얼리즘이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고 못 박는
마르크시스트의 관점과는 달리 시의 리얼리즘이 계급적으로 한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è 특히 계급투쟁의 강도가 약해진 21세기에는 더더욱 그렇다.
정치적 사회적 동기에 근거한 수필 쓰기
è 시와 소설계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정치 사회적인 글 들이 쏟아져 나오며, 문학의 사회참여이슈로 상당한 논쟁과정을 거쳤고, 이제는 이러한 이슈가 더 이상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필계에서는 오랫동안 음풍농월과 신변잡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선비의 문학입네 하며 사회의 아픔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 참여적 문학의 어려움이 또 다른 이유로 존재한다. 과거 유신독재체제
와 1980년 신군부통치 하에서는 저항해야 할 분명한 대상이 있었고, 문학에서도 민주주의
와 인권 등 쟁취해야 할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또한 노동자 농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저곡
가 저임금 정책으로 민초들의 삶은 생존을 위협받으며, 문학에서 민중들의 삶을 다룬 작품
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21세기에는 더 이상 군부통치나 반민주적 정권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또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경제적으로 생존은 위협받지 않는다. 그러나 IMF사태 후 미국에 의해 강제 주입된 신자유주의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시장 자율기능을 강화하여 강자독식 구조를 만들었고, 그 결과 경제적 양극화와 불평등 및 빈익빈부익부가 극도로 심화되었다. IMF가 내건 4대 이행 조건 중 하나인 노동시장의 유연성에 의해 해고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게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 중산층이 붕괴되고, 청년실업율이 높아지며 3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포기)가 출현하였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임금노동자 사이의 격차도 심각하게 벌어져 중소기업 미혼 사원들은 결혼조차 쉽지 않게 되었다. 계층이동의 유일한 통로였던 교육도 가진 자들이 독식하는 구조로 변모되어,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돈이 많으면 → 일류대 합격할 가능성이 높고 → 일류대 나오면 대기업이나 공기업 등 고임금 기업에 취직하여 부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과거에는 정권이 재계를 잡고 있었다면, 지금은 재벌 권력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는 과거처럼 분명하게 눈에 보이는 대상이 불분명하고 공격점도 분산되어 있다. 문학에 있어서 과거와 달리 정치 사회적 동기에 근거한 글을 쓰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민주주의와 인권, 민중, 생존권 등 주로 정치적 이슈에 한정되어 폭이 좁
았다면 지금은 소재의 폭이 상당히 넓어졌다. 또한 과거 철권 통치하에서 작가 자신 신변
의 위협 때문에 다루기 어려웠던 사건들도 이제는 가능하여 역사의 진실을 알릴 수 있다.
경제 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 비정규직, 해고, 청년실업, 계층이동 단절, 정부의 무능 부패,
지역갈등, 재벌문제, 남북문제, 고령화 사회의 노인문제, SNS문제점 등 인간에 대한 문명의
역습 문제, 환경 문제, 2만불 시대의 소외계층 문제, 저출산 문제 등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
문학에서 다룰 수 있다.
수필계에서는 <에세이스트>를 중심으로 사회적 이슈를 소재로 한 글들이 소개되고 있다.
멀리는 해방 후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 희생된 여순사건과 근래 최대 참사인 세월호 사건
을 다른 작품에서부터 해고문제와 SNS를 소재로 한 글도 등장한다.
그러면 과연 사회적 문제를 소재로 수필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글은 자칫 칼
럼이 될 수 있다. 칼럼이 아니라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문제를 내 이야기로 만들
어야 한다. 사회적 현상과 문제점 및 해결 방향을 제시한다면 칼럼이 되겠지만, 그 문제점
으로 인해 내가 어떤 영향을 받았고, 내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을 이야기할 때 비로
서 문학이 된다. 질곡의 현대사 속에서 우리는 권력에 의해 많은 사건을 언급조차 하지 못
한 적이 있었다. 이런 특정 사건에 대해 글을 쓸 때, 작가는 자신이 비록 경험하지 못했더
라도 그 사건에 자신을 투입하여 사건 속 구성원의 하나가 되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말
해야 한다. 3자적 입장에서 사건의 fact만 나열하면 문학이 될 수 없다.
또한 문제의 바깥에서 국외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3자적 입장을 취한다면 ‘나의 이야기’
가 아니므로 글의 감동이 떨어지고, 연민이나 동정으로 흘러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할 수
있다. 이를 위한 필수 요건으로, 작가는 쓰고자 하는 사회적 문제와 그 분야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전문적 지식과 fact를 갖추어야 한다. 개인사나 가정사에 대하여는 전문성이 필요
치 않고 타인도 그 내막을 모르므로 fact 검증의 중요성이 덜 할지 모르나, 사회적 문제점
을 소재로 쓸 때에 fact에서 빗겨가면 글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문제 해결의 방향까지 제시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작품 사례를 들어본다.
è 에세이스트 61호 문제작가 박제완 특집 중 「노란리본」
기자인 화자가 세월호 안산합동분향소 취재를 마치고 다시 들어가 조문하며 느낀 감상을 그린 작품. 비록 화자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냈지만, 밖에서 바라보는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라, 희생자들 또래의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로써 희생자 부모 속에 들어가 아픔을 함께하고 있다.
<국화 한 송이를 받아들고 조문객들 사이에 섰다. 마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투표를 하러 가는 기분이었다. 조문객들 대부분은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분향소를 찾았다. 가족도 아니고 지인도 아니었다. 그저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딸과 아들을 키우고 있는 아버지 어머니들이었고, 형제자매들이었다. 어떻게 이런 비극이 있을 수 있을까. 가슴이 있는 사람은 모두 울어야 했고, 마음이 있는 사람은 모두 고개를 숙여야 했다. 조문의 순서가 다가오면서 영정들과 점점 가까워졌다. 아이들의 모습은 점점 더 선명해졌고 슬픔도 분명해졌다. 울어야 했다. 울어야 했다.>
- 「노란 리본」 부분
è 에세이스트 55호 문제작가 안규수 특집 중 「손가락 총」
화자의 어린 시절 여순사건으로 큰 어려움을 겪은 화자 가족의 이야기를 이념에 치우침 없이 써 내려간 작품.
<이튿날 아침, 아버지는 대문 두들기는 소리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대문 밖에는 붉은 완장을 찬 낯선 청년들이 서 있었고 그들은 대문을 여는 아버지를 다짜고짜 연행했다.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가 끌려간 곳은 읍내 초등학교 운동장이었는데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끌려와 있었다. (중략) 거기서 붉은 완장을 찬 젊은이들에게 ‘손가락 총’을 당하면 곧바로 끌려 나갔다. 사람의 손가락이 바로 총구멍이었다. 끌려 나간 사람들은 한 사람씩 교단 위에 세워졌다. 곧 이어 인민재판이 시작되고 간부인 듯한 사람이 이름을 호명하면서 죄목을 열거했다.
“이 사람은 인민을 수탈한 인민의 적이요, 처단해야 하오.”
이렇게 운동장이 떠나갈 듯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면, 기다렸다는 듯 앞자리에 포진한 몇 사람이 옳소, 옳소 하면서 박수치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한 사람을 처리하는데 3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선고가 모두 끝나자 사람들은 곧바로 굴비 엮듯 묶여져 소화다리(부용교)로 끌려가 그 길로 모조리 총살당했다. (중략) 그러나 이번에는 진압에 성공한 토벌군과 경찰들에 의해 똑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경찰들은 반군에 가담한 자들과 죄 없는 그들의 가족을 죽였고, 자의든 타의든 부역했다는 죄목만 붙으면 누구든 가차없이 처단했다. (중략)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 작은매형이 감기몸살로 집에서 가료하다가 산사람들에게 붙들려갔다. 매형은 하동 사람으로 우리 집에서 머슴 살다가 작은 누이와 눈이 맞아 데릴사위로 살고 있었다. 그날 밤 그들은 매형을 뒷산 재 몬당 소나무 밑으로 끌고가, 인민재판을 열어 사형선고를 내렸다. (중략) 산사람들은 양민들을 처형한 후 돌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아버지는 소등처럼 길고 둥그런 능선을 따라 수십 기가 널려 있는 그 많은 돌무덤을 일일이 헤쳐보고 다시 쌓길 무려 한 달여 만에 매형의 유골을 찾아 냈다. 이미 시신은 육탈이 되어버린 뒤였지만 썩다 남은 옷가지와 금니 두 개가 증거였다. 그때부터 작은누나가 이상해졌다. 먼 산만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리다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었고 집을 뛰쳐나가 산을 헤집고 다녔다. (중략) 3년여를 그렇게 앓던 누나는 스물여섯의 젊은 나이에 어린 딸을 두고 기어이 남편 곁으로 갔다. (중략) 근대사의 격랑 한가운데에서 아버지가 감당해야 했던 삶의 질곡은 참으로 가파르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세월이 갈수록 아버지의 탄식은 체념 어린 침묵으로 변해갔고, 그 불모한 시대의 울분을 장강대하의 술로 달랬다. 고통이 형벌이고 저주인 기억, 아버지는 술로 그 기억을 몰아내려 안간힘을 다하셨으리라. 오직 침묵과 체념만이 그나마 남은 가족을 지키고 당신의 목숨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셨지 싶다. “놈한테 신세지지 말고, 척隻(원수) 지지 말어.”
- 「손가락 총」 부분
è 에세이스트 52호 문제작가 정아경 특집 중 「통유리 속의 삶」
개인의 일상이 발가벗겨지고, 획일화 되고 표준화 된 도시 속에서의 삶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칼질한 작품.
<도시의 삶이란 거대한 통유리창 속의 삶이다. 거의가 다 계절과 무관하게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실내에 앉아 반복되는 작업을 한다. 아파트의 삶은 더욱 그렇다. 아파트는 사생활보호가 잘 된다는 장점은 있지만 생활의 고유성을 포기해야 하는 공간구조이다. 소파가 놓인 맞은편에 벽걸이 TV가 걸리고, 안방, 욕실의 위치도 모두 같다. 창조적 가구 배치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평수가 넓지 않을수록 선택의 여지는 없다. (중략) 거대한 아파트 숲을 투시하는 상상을 해본다. 마치 X-ray를 찍듯 앙상하게 드러난 골조에 행동패턴이 똑같은 움직임이 보인다. 같은 위치의 식탁에서 비슷한 메뉴의 식사를 하고, 같은 위치의 소파에 앉아 비슷한 TV프로그램을 보며 낄낄 웃다가 같은 위치에 놓인 침대 위에서 비슷한 체위로 사랑을 한다. (중략) 정상적인 삶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정상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정상적이라는 미명하에 우리는 정해진 룰에 자신을 맞추느라 정작 우리 자신을 소외시켜야 한다. (중략) 지난 주말, 친정에 다녀왔다. 작렬하는 태양아래서 고추를 땄다. 포대에 고추가 차기도 전에 땀으로 옷을 적시고, 바르고 나간 선크림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맨얼굴로 하늘을 봤다. 하늘은 맑았다. (중략) 그곳은 삼십년 전, 나의 감옥이었다. 산중턱 그 고추밭에 서서 먼 신작로를 바라보며 얼마나 탈출하고 싶었던가. 지금은 그곳이 나의 해방구다>
「통유리 속의 삶」 부분
è 에세이스트 54호 조성현의 「두려움」
갑상선 세침건사를 받으며 목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을 느낀 화자는 자신이 직장인 시절 겪은 해고의 두려움과 퇴직 후 자영업을 하며 느끼는 또 다른 목 잘릴 두려움에 대해 토로한다
<살면서 뭐가 두려울까? 남자들에게는 직장에서 목이 잘릴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가 아닐지 싶다. 혼자 산다면야 조금 다르지만 처자식 거느리고 사는 가장에게는 밥벌이가 식구들의 명줄인데, 이게 떨어져 나갈지 모르는 상황에 부닥치면 가장 큰 두려움을 느낀다. 등에서 솟아나온 땀이 등허리 가운데 홈으로 모여 아래로 흐를 때 느끼는 공포감이 그것이다. (중략) 인사권자인 상사의 부당한 꾸지람 앞에서 논리적 항변은 물론 기분 상한 표정도 짓지 못하고, 두 손 모아 공송히 “예, 예”한 적이 어디 한 두번인가. 심지어 꾸지람이 끝나갈 때쯤 “잘 알겠습니다” 라며 상사의 분위기를 살펴 비굴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목이 달아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중략) 목 잘릴 두려움은 직장에서만 느낄까? 회사 그만두고 자영업을 하다 보니 여기서도 목이 잘릴까 두렵다. 사회적으로 상대적 약자인 개인 사업자에게 매상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개인 몫이다. 잘못되면 개인의 노력 부족 때문이란다. 정말 그럴까. 나도 월말 결산을 하며 매상이 줄고 지출이 늘 때면 답답하다.> - 「두려움」 부분
è 조선일보 2015.6.24 에세이 코너/ 조성현의 「요물단지 SNS(원제 텔레스크린)」 : 소통에 목마른 현대인이 자신이 감시 당하는 줄 알면서도 SNS에 접속하여 자기를 드러내는 현상을 화자 자신의 행동을 통해 알림.
<가슴 한 쪽에 약간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청년실업이 커다란 사회문제다. 내 자식이 대학 졸업할 때가 가까워 오는데, 그동안 정치에 관해 트위터에 올린 내 글을 어느 누구든 읽었을 것이다. 혹시나 아들이 지원하는 회사의 채용 담당자나 책임자들이 나와 생각이 다를 경우, 기우이겠지만 아들 녀석의 취업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지 걱정이 들었다. 이미 이 사회는 내가 보지 않더라도 촘촘하게 그물이 쳐 있어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세상 정치에 관한 의견을 올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트위터를 멀리하게 되었다. (중략) 현대인은 70년 전의 조지오웰의 머리를 뛰어넘어 자기 스스로를 감시하게 한다. 경쟁 속에 사는 대중은 늘 소통에 목말라 한다. 그래서 자기를 일부러 드러내어 인정받고 싶어 한다. 자신의 속과 내장이 고스란히 노출되는지 알면서도 SNS에 글을 올리고 또 올린다. 젊은 사람이 지하철에서 노인에게 행패를 부리는 장면이 스마트폰에 찍혀 인터넷상에 돌기 시작하면, 가해자의 신상은 소위 네티즌 수사대라는 인터넷 전문가들에 의해 세세히 공개된다. 그런데 가해자가 그동안 SNS나 인터넷상에서 어떠한 활동도 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의 신상은 공개되기 어려울 것이다. 나를 포함한 누구도 자칫 실수 한 번에 모든 정보가 공개되어 자신의 삶이 무너질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부나비처럼 사람들은 꾸역꾸역 SNS의 그물로 다가간다. 나 또한 그간의 생각을 망각하고 무의식적으로 SNS에 접속하여 오늘도 손가락을 바삐 움직인다.>
- 「요물단지 SNS (원제: 텔레스크린)」 부분
서술시 경시 또는 경시 풍조
서정시만 진정한 시라는, 서정시 특권화하는 태도의 산물
배경에는 엘리트주의 즉, 대중적 형식을 혐오하는 계급적 편견.
è 과거 수필은 선비문학이라고 스스로 높임
è <당시의 수필동네의 분위기가 그랬다. 평문에선 작가의 이름마저 함부로 부를 수 없었다. 선생님이거나, 그것이 거추장스러우면 님이라 했다. 나도 첫 번째 월평에서 작가를 ∼님이라고 불렀다. ∼님께서는 어쩌고저쩌고하시고…>
-- 수필 속의 <나>는 실제의 <나>가 아냐 / 김종완
è 언어의 투명성이 서사 장르에 관여되고, 언어의 불투명성, 모호성이 서정 장르와 관련된다는 사고
서술시의 문체는 수사적 비유보다 일상인의 평이하고 단순한 회화체가 우세하다. 평이한
일상 언어로서의 서술시는 사실 대중적 성격을 띤다.
è 수필의 대중성과 연관된 내용
è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è 묘사와 비유가 넘쳐야 재대로 된 수필이라는 고정관념
è 음풍농월
3. 불확실성과 새로운 서사구조
서사 구조로 본 두 유형
A. 전통 서사구조를 준수한 서술시: 사건을 시간순서대로, 인과관계로 배열하여 논리성과 완결된 줄거리를 갖춘 것을 의미
è 수필에서는 어느 특정인의 생애를 그릴 때 주로 사용한다
B. 전통 서사 구조를 해체한 서술시
특정 연대기에 상응하는, 의미심장한 시사적(時事的) 사건이 제시되지 않고 그 대신 일상적인 삶의 파편들이 나열되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간과해버릴 우리의 일상성을 갑자기 심상치 않은 상황처럼 낯설게 하고 있다.
è 개인사 또는 가족사를 주제로 한 대부분의 수필은 일상적 삶의 파편들이다. 소설은 픽션이므로 지구를 멸망시키는 대 사건도 만들 수 있으나, 사람들의 일상사에서는 소설과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 일생에 한 건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수필 소재는 별로 대단할 것 없는 우리의 일상성이다. 이것을 문학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심상치 않은 상황처럼 낯설게’해야 한다. 즉,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볼 때 작가 자신의 독특하고 새로운 시선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일상 잡사를 소개하는 정도로는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독자는 남의 이런 잡사에 아무 관심이 없다. 작가 사유에서 녹아 나오는 작가만의 감각과 의식, 일상사의 재해석 등으로 일상적 삶의 파편들을 심상치 않게 해야 한다.
사례)
è 에세이스트 62호 중편 민혜의 「그해 6월, 나는」
죽음은 당사자와 가족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큰 사건이지만, 이 지구상에 수 많은 사람이 천수를 누리다가 또는 질병이나 사고로 죽는다. 배우자의 갑작스런 죽음도 일반적으로 그리 특이할 것 없다. 그러나 작가는 객관적으로 특이할 것 없는 사건을 심상치 않은 사건으로 만들어 독자에게 강한 충격을 준다.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서 온 몸에 링거 줄을 주렁주렁 매달고 고통 받다 죽어간다. 자기 생을 마감하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웰다잉도 좋지만 폼나게 죽는 폼다잉도 중요하다. 인간의 존엄사 문제를 기존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
전통 서사 구조를 해체한 서술시의 두 유형
a. 사실적 서술시 : 수필에서는 다수의 글이 해당
b. 추상적 서술시 : 일부 수필에서 나타남
첫댓글 북도 잘 치고, 장구도 잘 치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