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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계의 만능 재주꾼 작은 거인, 가수 김수철을 아시나요?
이름 : 김수철
직업 : 가수, 연주인, 작곡 작사가, 영화음악감독, 연극인 등
생년월일 : 1957. 4. 7.
1957년 4월 7일에 철물점 주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소싯적 장충중과 용산공고를 다니며 TV에서 신중현의 노래와 기타 연주를 보면서 음악에 눈을 떴고, 광운공대 통신공학과 시절인 1997년에 KBS라디오 프로 < 젊음의 찬가>에서 '퀘스천"이란 밴드 멤버로 데뷔해 이듬해 '작은거인'이라는 밴드의 프론트맨으로 활동했으나, 1983년에 멤버들이 여러 사정으로 떠나고 집안에서도 음악에 대한 반대로 김수철 본인의 대학원 진학 등 사정으로 고별 앨범의 형식으로 솔로1집을 냈다.
솔로 1집에 수록되었던 '못다 핀 꽃 한 송이', '별리', '내일'등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이듬해 가수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젊음 그대', '나도야 간다' 등 2,3집 수록곡들이 대박을 잇달아 터뜨리면서 8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떠올랐다. 당시는 가왕 조용필의 시대로 가수왕 독점이 후배들에게 못할 짓이라서 가수왕 은퇴 선언을 한 1996년 이전까지 반짝 인기로나마 조용필보다 우위에 섰던 가수 중 하나이다.
김수철은 국악의 현대화 퓨전에 엄청난 공헌을 하였다. 국악계의 명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몇 년동안 정식으로 배웠다. 그런 노력의 산물이 바로 '황천길'과 '불림소리'음반 이다. 이런 활동의 연장선으로 판소리 영화 서편제의 영화음악을 담당하였고, 이 외에도 태백산맥 등 수많은 영화 음악 작업을 했다.
기타 실력도 뛰어나고 국악과 음악을 접목시키거나 최근 가수들과 콜라보도 하는 등 실험적인 음악성에 국내 최초의 원맨 밴드를 했다. 해외에서도 인정도 받고 있는 80년대 대한민국의 대표 가수지만 조용필과 함께 활동하였기에 그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다.
[출처] 국내가수 - 김수철|작성자 baekseon3
한국이 낳은 천재 뮤지션. '작사-작곡-편곡-프로듀싱-연주-노래' 혼자서 다 할 수 있는 작은 거인 '김수철', 1980년대에 1집 앨범과 2집 앨범이 대박 났는데 '5.18 민주화 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곡 '못다핀 꽃한송이'로 당대 가수왕 수상하기도 했었다.(내용이 좀 상징적이라 그런가, 다행히 그 시기에 '금지곡' 안 된 듯)
1980년대가 최전성기였던 가수 김수철은 뛰어난 연주 실력의 '기타리스트'로도 유명하며, 그 시기에 본인 앨범 '전 곡'을 혼자 '노래' 부르고 '연주'까지 다 할 수 있었을 정도로 음악적 역량이 뛰어난 '싱어송라이터'로 알려져 있다.
<나도야 간다> <젊은 그대> <못다 핀 꽃 한송이> <내일> <별리> <정신차려> <왜 모르시나> & 유명한 TV 만화(날아라 슈퍼보드) 주제가 <치키치키 차카차카> 등이 김수철 히트곡인데, 그 중 가장 대박곡은 <못다핀 꽃 한송이>라 할 수 있다.
"밤새 새소리에, 지쳐 버린~ 한 잎마저, 떨어지려나~" "먼 곳에 계셨어도, 피우리라~ 못다 핀 꽃 한 송이, 피우리라~!" '노래' 후 '연주곡' 이어지는데, 왠지 먹먹함
저 바다 건너 옆동네, X-Japan(엑스재팬)이란 그룹 내에서 대다수의 곡을 '작사/작곡/편곡'하고 무대에서 '피아노'와 '드럼'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던 리더 '요시키'는 쨉도 안될 정도로(노래는 '토시'가 부르니까.. 기타도 다른 사람~) 한국의 '김수철'은 '작사/작곡/편곡'+'모든 악기 연주'에 '노래'까지 소화 가능한 만능 뮤지션이었는데, 1~2집 앨범 대박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렇게 큰 돈을 벌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 때는 '계약 맺은 회사(레코드사?)'가 큰 재미를 봤던 시절로... 어쨌든, 기본적인 역량이 큰 뮤지션이었 터라 '김수철'은 이후 <86 아시안 게임 & 88 올림픽> 음악 감독으로 활약하기도 했었다. 훗날 <엑스포 음악 & 월드컵 음악> 뿐 아니라 <영화 음악> 작업도 했다고 한다. '천년학'으로 대표되는 1993년 영화 <서편제> O.S.T가 김수철 작품이며, 이 국악 앨범은 100만장 넘는 판매고를 올린 걸로 알려져 있다.(영화 O.S.T 치곤 대박 흥행)
'가수' 김수철이 한 때는 '영화 배우'로 활약한 적도 있다. 배창호 감독의 1984년작 <고래 사냥>에 캐스팅 되면서... 당시 '김수철'은 영화 <고래 사냥> 주인공 '병태' 역을 연기했을 뿐 아니라, 이 영화의 '음악 감독'으로도 활약하였다. 김수철 2집 앨범에 실린 <나도야 간다>가 영화 <고래 사냥> 주제가이다. 송골매 히트곡 <모두 다 사랑하리>도 김수철 '작곡'의 노래이다. 개인적으로, 김수철 히트곡 중 세대를 초월한 명곡 <못다 핀 꽃한송이>와 더불어 <내일>이란 곡 특히 좋아한다.
김수철 히트곡 중 <젊은 그대>는 스포츠 경기장 '응원가'로 워낙에 유명하고, TV 만화 '날아라 슈퍼보드' 주제가인 <치키치키 차카차카>도 세대를 초월하여 무척 유명한 노래가 아닐까 싶다.
[출처: https://prorok.tistory.com/1414 타라 월드 - 이야기 풍경 3.7]
가수 김수철/ 재주많은 작은 거인 / 1983.02
"노래를 한만큼 작곡한지도 오래 됐어요. 고 2 때부터 기타를 배우면서 노래를 부르고 작곡도 했지요. 그때가 75년도인데 행복 별리 야속한 사람 등 7곡 정도 만들었고 그중에서 야속한 사람은 대학생 들 사이에 꽤 알려진 곡이기도 하다.
노래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 재주꾼으로 알려진 김수철 말하는 대로 일찍부터 개안하여 75년 말부터 그룹 활동을 시작 올해로 경력 9년을 맞는 나이 어린 베테랑이다. 이런 그가 우리에겐 첫 선을 보인 것은 전 TBC 주최 제 1회 대학 축제 경연대회에서였다. 이때 그룹 명 작은 거인으로 참가 일곱빛깔 무지개를 불러 지금 송골매가 누리는 정도에 인기를 얻기로 했었다.
"스타가 되겠다는 욕심은 없어요. 그래서 주위에선 대중성이 없는 음악을 한다고도 말하지요.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히트에 연연하지 않고 내 나름대로 음악을 하는 중에 대중과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가 부른 곡 또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그가 만들고 다른 사람이 부른 곡 중에서 인기가 도로를 달리고 있는 것이 많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송골매를 인기 정상까지 올려놓은 ‘모두 다 사랑하리’이다. 1978년부터 대학축제 와 방송국에서 자주 만나 알게 되어 음악에 관한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모두 다 사랑하리도 그렇고 세곡이 원래 모습은 리듬 앤 블루스 뿐이에요. 일곱 일곱 빛깔 무지개로 사람들에겐 하드록 계열로 알려 줘 왔죠. 하지만 제 감성의 주소가 50에서 60 년대 복고조거든요"
그의 별명이 재주꾼인데 그가 뉴버드 라는 소형 영화 동호인 그룹의 멤버로써 영화제작에 일면목을 보여 주는데 이유가 있다 이 그룹은 탈 이라는 작품으로 프랑스 청소년 영화제 출품 국내 예선을 통과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심사 중에 있으며 이외에도 지난 2년간 5작품을 만들어 놓고 있는 중이다.
"영화에 손을 된 것은 영화음악을 공부하기 위해서였어요. 몇 곡 중에 '어둠의 세계' '새야 ' 등이 있었고 영화 탈의 배경음악인 탈은 가야금과 뮤직을 조화시킨 장송곡이죠. 이 작품의 무거운 분위기가 인상에 깊이 남습니다"
80년 광운공대 통신과 졸업 78년 대학축제 경연대회 그룹 부문 대상을 받은 이래 82년 국제가요제 입상까지 꾸준한 저력을 보이고 있다
[출처] 가수 김수철/ 재주많은 작은 거인 / 1983.02|작성자 카르페디엠
[서평] 작은 거인 김수철의 음악이야기
하룻 밤 사이 시간을 두고 책 한 권을 읽어냈다. 참 오랜만에 경험하는 독서 시간이었다. [작은 거인 김수철의 음악이야기]를 읽고 난 후 내가 알고 지낸 '김수철'이 아닌 대한민국 역사에 남을 명인 '김수철'을 알게 되었다. 사실 집에 있었다면 좀 어려운 책 읽기 시간의 경험이다. 김수철 선생님과의 인연은 벌써 12년 전으로 기억된다. 당시 국내 예술가들을 재조명하는 EBS 다큐멘터리 '시대의 초상 - 김수철'편 촬영이었다. 가수로만 알려져 있던 전설 김수철 선생님은 겸손하시고 소박하셨다.
마침 촬영을 마치고 대학원 강의가 잡혀있었는데 식사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삼각김밥]으로 식사를 때우신다. 삼각김밥을 잘 벗겨내는 꿀팁 전수와 한 번에 3-4개까지 먹는다는 솔직함 덕분에 촬영내내 기분이 좋았다. 당시 촬영에서 오선지에 악보를 넣는 영상을 촬영했는데 실제로 다큐멘터리에 사용해 보라고 간략한 음악을 작곡해 주신 기억이 생생하다. (실제로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2007년 김수철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 리허설 중
작은 거인 김수철의 음악이야기에서는 약 40년간 가수이자 작곡가인 김수철의 모든 음악, 영화, 기획자의 삶이 녹아 있다. 우리가 알던 작은 거인 김수철보다 더 깊고, 세밀한 내용을 알게 된다. 자신의 신념을 앨범으로 만들어 낸 것.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에 뒤쳐지지 않은 음악성과 음악들은 물론 가수가 본업이 아닌 작곡가, 음악인으로 한 평생을 살아 온 그의 음악적 철학을 알 수 있게 된다.
띄엄띄엄 알고 있었던 내용을 깊이 있게 느끼고, 이해하면서 놀란 점도 있었고, 안타까운 점도 있었다. 재밌는 이야기들도 많았고, 그가 후배들을 위해 치열하게 싸워왔던 음악적 철학이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그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따라서 삶에 대한 방향과 목적성을 얻기 쉽지 않다. 어떤 길을 어떻게 걷고 있는지, 그렇게 걸어왔던 시간들에 대한 감회나 감정을 건조하게 들여다 볼 수 있을 뿐이다.
2007년 김수철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 리허설 중
김수철은 가수에서 머무르지 않았다. 국악을 위해 그 누구보다 노력했고, 국악 문화와 잘못된 점을 수정하고 발전시키려 많은 노력을 했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았고, 돈을 위한 음악도 하지 않은 시대의 명인이다. 위대한 가수를 넘어서 대한민국의 굵직한 행사의 음악감독을 맡고, 지휘하면서 대한민국을 위한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음악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방식이 그러하다. 맡은 일을 끝까지 완벽하게 해내고, 특권을 누리거나 사욕에 휩쌓이지 않았다. 그래서 평판이 유지되고, 후배들이 존경하는 가수로 남아 있는 것이다. 단지 가수 김수철의 삶을 살아왔다면 그가 오래도록 기억되긴 어려울 것이다. 가수로도 한 때 잘나가는 영향을 펼쳤지만 현재 그를 기억하고, 존경하는 것은 그의 음악 철학과 가치가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작은 거인 김수철의 음악이야기 - 바로가기 - http://www.yes24.com/24/goods/56884576
[출처: http://ipad.pe.kr/2096 사진 위를 걷다.]
가수왕열전 - 김수철
김수철은 84년 조용필의 아성을 여지없이 허물어버린 또하나의 거인이었습니다. 80년 이전 조용필이 `작은 거인’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려졌는데, 이 별명은 84년 김수철이 승계했습니다. 공식적으로 밝힌 신장이 조용필 166, 김수철160, 여기에 이들과 함께 80년대 초중반을 풍미했던 전영록까지 모두 자그마한 체구였으니 이 시기는 `작은 거인’들의 시대였나 봅니다. 김수철 이전에도 이용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조용필에게 과감히 도전하긴 했으나, 김수철과 이용은 `본질적’으로 다른 인물입니다.(이용을 폄하하는 건 아닙니다. 이용은 김수철 이후에 기회가 되면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김수철은 마치 도자기를 굽는 옛 도공, 또는 깊은 산속에서 무예를 닦는 도인처럼 음악을 갈고 닦고, 새로운 음과 리듬을 창조해낸 인물입니다.
김수철은 그룹 딥 퍼플의 리드기타인 리치 블랙모어에 반해 록에 빠져든 중학시절부터 우리 국악에 심취해 연거푸 대곡을 만들어내는 지금까지, 록과 국악을 넘나드는 진정한 `소리꾼’이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조용필도 마찬가지 입니다만,(조용필은 국악을 가요에 접목시키거나 국악을 가요화한 시도에서 머물렀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조용필의 음악적 탐구가 워낙 여러 분야에 걸쳐있어 더 깊이 못 들어갔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김수철은 조용필보다 국악분야에 더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김수철이 처음 음악을 시작한 것은 국악이 아닌 양악, 그중에서도 록, 그중에서도 하드록이었습니다. 1972년 중학 2학년때 김수철은 어쿠스틱 기타를 처음 잡습니다. 평생을 안고 살아갈 `음악’과의 첫 운명적 악수였습니다. 그는 불과 6개월 뒤 일렉트릭 기타로 옮겨갑니다. 지미 핸드릭스, 딥 퍼플과 레인보우의 리치 블랙모어,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 등이 아마도 그의 스승이었을 겁니다.
김수철은 이 시기에 하루 10시간 이상씩 기타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밤에는 자기 방에서 불을 끄고 기타줄에 종이를 끼워 소리를 죽여 연습했다고 합니다. 기타에 미쳤던 것이죠. 허영만의 만화 <고독한 기타맨>이 연상되는 대목입니다.
저는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룬 이른바 `천재’라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들에게서 느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남다른 `재능’이 있다기보다는 그 분야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그들을 지금의 그 자리에 이끈 더 큰 원인이었다는 것을.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예를 들자면, 어렸을 때 그는 처음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피아노에 별 취미를 못 느껴 매번 피아노 위에 엎드려 자고, 연습도 안해 꾸중듣고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정경화에게 바이올린을 안겨주었는데, 이때부터 정경화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습니다. 그는 바이올린을 끼고 살았고, 그 오묘한 바이올린 소리에 매료돼 시키지도 않은 연습을 어린애가 하루종일 한 것입니다.
김수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은 어마어마한 노력을 하는데, 그 노력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그냥 빠져든다는 것입니다. 집중력의 차이가 엄청나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노력’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 `재미’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야구선수 선동렬도 야구가 재미있어서 하다보니,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고, 글씨로 유명한 그 옛날 중국의 왕희지도 어린 시절 워낙 글쓰기를 좋아해 집안의 연못이 모두 검게 물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몇 년전 연거푸 히트작을 낸 20대 초반의 게임 프로그래머를 취재한 적이 있는데, 그는 하루 2~3시간 잠을 잔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견디냐’고 했더니, `게임을 하고 게임 프로그램을 쫓아가다보면, 오늘은 잠 좀 자야지 하고 생각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밤을 꼬박 새게 된다’고 했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재미’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않는다(不狂不及)는 옛말도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기타를 손에 잡은 이듬해 중학 3년때부터 김수철은 작곡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중학생 3인조 하드록 밴드 `파이어 폭스’를 결성합니다. 80년대부터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기 시작한 스쿨밴드의 원조격이라고 해야할까요?
고교시절을 거치면서 김수철은 사실상 60~70년대의 록버전들을 거의 스터디했습니다. 그리고 김수철은 광운대에 진학합니다. 77학번이니, 이 해에 역시 광운대에 진학한 이문세와 동기동창인 셈입니다.
그리고 대학 2학년이던 78년 김수철을 `김수철’로 만든 4인조 록밴드 `작은거인’을 결성합니다. `작은 거인’은 당시 각 대학에서 쟁쟁한 실력을 갖춘 젊은이들로 결성되었는데, 김수철은 리드기타와 보컬을 맡았습니다. 이들은 겨울방학 내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합숙훈련을 합니다. 난로 하나 없었을 차가운 스튜디오를 젊은 `열정’ 하나로 채워나갔겠죠?
그리고 이 해 전국 대학축제 경연대회에서 작은거인은 그 유명한 <일곱색깔 무지개>로 그룹부문 대상을 수상합니다. 김수철이 처음 세상에 나서는 첫 발걸음입니다.
이듬해인 79년 김수철은 첫 음반도 냅니다. 대부분 김수철의 학창시절을 이끌었던 하드록 류로 채워졌지만, 85년 무렵에 히트한 포크 발라드풍 <내일>도 이 음반에 수록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81년에 나온 2집은 하드 록 외에 재즈 록, 소울재즈 풍이 가미돼 이 시기 김수철은 하드 록을 넘어 재즈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던 게 아닌가 추측됩니다.(요즘엔 잘 모르겠습니다만, 원래 팝음악을 처음 들으면 이지리스닝 계열의 스탠다드 팝(아바, 비지스 등)에서 그다음 록 발라드(저니, REO 스피드웨건 등의 일부 노래) 등을 빠르게 거친 뒤, 프로그레시브 록(퀸 등)에 잠시 머물다가 하드록(롤링스톤즈, 딥 퍼플 등)으로 귀착되는 게 일반적인데,(90년대 이후에는 헤비메탈을 더 추가해야 되겠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재즈, 그리고 블루스로 넘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이 순서를 그대로 따라갔지만, 재즈로 넘어가려는 시기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음악듣기에서 멀어져 가 재즈를 제대로 접하지 못한 게 다 커버린(더 이상 음악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 지금 많은 아쉬움으로 남아있습니다.
어쨌든 이 2집에서 김수철은 84년 영화 <고래사냥>의 주제가인 <별리>를 내놓습니다.
81~83년 이 무렵 김수철은 MBC 영 일레븐의 고정게스트였습니다. 저는 이 시기 김수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운드에서 워낙 차이가 나는 서양 본토 록음악에 심취한 탓에 한국의 록이라는 게 거저 `아이들 흉내내기’처럼 우습게 보였던(최소한 85년 들국화 이전까진) 자만심 또는 사대사상(?)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알록달록한 야구모자에 검은 뿔테안경, 그리고 핑클퍼머 머리에 짧은 줄무늬 9부 바지(때론 아이들처럼 멜빵 달린)를 입고 나온 그 패션부터 너무 맘에 안 들었습니다. 그리고 `비가 개면 나타나는~ ‘으로 시작되는 그 가사도 너무 한심하게 보였습니다. 가성도 아니고 그저 목에서 쥐어짜내는 듯한 보컬도 맘에 안 들었고. 무엇보다 기타를 메고 무대 위에서 양쪽으로 무릎을 꺾어 폴짝폴짝 뛰는 춤이 가장 싫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영 일레븐>(이택림이 MC였습니다. 여자 MC는 매번 바꼈고)을 보다가도 막판 무렵 김수철이 나오면 채널을 돌려 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김수철씨에게 많이 죄송스럽네요. 김수철에 대한 진가를 제가 제대로 알게된 건 84년 <고래사냥>에서 들은 <별리>부터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80년대 초반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던 프로그램 두 편을 소개합니다. <영 일레븐>과 <젊음의 행진>. MBC와 KBS에서 각각 시작한 두 프로그램은 지난 81년 거의 동시에 문을 열었습니다.
초반에는 이택림이 진행하는 <영 일레븐>이 앞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80년 중후반 혜성처럼 나타난 서세원의 영향이 컸습니다. 서세원은 프로그램 말미에 등장하면 스스로 꽃종이를 자기 머리 위로 마구 뿌리면서 등장했습니다. `스타’는 `스스로 타락한 자’라는 유행어를 만들기도 했고. 고영수, 장고웅 이후 끊어졌던 스탠딩 개그를 새로운 차원에서 발전시켜 나갔던 겁니다. 서세원의 스타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는 없습니다. 어쨌든 서세원이 나타나기만 하면 방청석은 포복절도했습니다.
여기에 나중에는 최병서, 박세민, 이홍렬 등이 동참했습니다. 최병서와 이홍렬은 <영 일레븐>을 통해 빛을 본 케이스인데, 최병서는 이때부터 성대모사의 달인으로 나왔고, 이홍렬은 `00극장’(이름이 잘 기억이 안 나네요)을 진행하면서 인기를 끌었는데 개그맨 몇 명이서 무언극을 하면 이홍렬이 변사처럼 나레이션과 대사를 속사포처럼 코믹하게 쏟아내곤 했습니다. 과거 자료화면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당시의 이홍렬은 장발에 깡마른데다 안경을 쓰지 않은 눈이 양옆으로 찢어져 상당히 날카롭게 보입니다. 적당히 살이 올라 마음씨 좋은 아저씨 분위기를 풍기는 지금의 이미지와는 차이가 많습니다. 박세민을 빼놓을 수 없죠. ‘냉장고를 녹이는 남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박세민은 특히 팝송을 한글로 풀어내는 놀라운 재주(?, 팝송을 수백번씩 들으며 아이디어를 발굴해 내려 애썼다고 하더군요)를 가졌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몇 토막을 들라면, 올리비아 뉴튼 존의 ‘If not for you’를 ‘기분 나빠요~’로, 의 후렴구 ‘Let me here body talk’는 ‘냄비 위에 밥이 타~’로. 신기한 건 박세민의 설명이 끝난 뒤, 다시 틀어주는 노래를 들으면 정말 그렇 게 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MBC의 이 프로그램 맞상대는 송승환, 김현주(김현주 전에는 왕영은)가 진행하는 <젊음의 행진>이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영 11>은 수요일 저녁 8시, <젊음의 행진>은 일요일 저녁 7시 등으로 시간대가 다른 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10대 후반~20대 초반(아마도 저 같은 10대 시청자들이 훨씬 많았을 겁니다) 치열한 접전을 벌였습니다. 초반에는 오락프로그램이 탁월한 MBC의 <영 11>이 앞서 나갔지만, <영 11>이 서세원 등 일부 연기자 개인에 초점을 맞춘 반면 <젊음의 행진>은 특정 인물보다 전반적인 구성 자체를 강화시켜 나간 덕분에 나중에는 <젊음의 행진>이 훨씬 앞서나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젊음의 행진>에는 허슬 댄싱을 보여주던 대학생 댄싱팀 ‘짝궁들’을 모으기도 했죠.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잘 생기고 예쁜 형, 누나들이 나와 활기찬 댄싱을 보여줄 땐 나도 흥겨워하긴 했습니다.
당시 송승환, 김현주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지금의 20대 초반이라면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아역배우 출신이었던 송승환은 고교시절엔 드라마 <여로>를 거쳐, 대학, 군을 거쳐 80년대 초반에는 전영록과 함께 청소년들의 밤을 책임지는 인물이었습니다. 화려한 전영록보다 오히려 수수한 송승환이 더 인기를 끌었는데, 송승환은 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오프닝송 ‘시바의 여왕’ 멜로디가 그립네요)로 발판을 굳힌 뒤, TV MC로도 진출한 거죠. 오버하지 않는 순탄한 진행과 상대방을 배려하는 인간미가 MC 송승환의 매력이었습니다.(그러나 송승환의 시대는 편안하면서도 좀더 임팩트 강한, 이문세가 85년 <별이 빛나는 밤에>를 통해 등장하면서 막을 내리긴 했습니다)
또 한명. 지금도 간간히 드라마에 나오는 김현주가 있었습니다. 80년대 초반 김현주를 요즘처럼 ‘추억의 가요’를 들려주는 조금은 퇴색한 듯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나’ 처럼으로만 상상하면 안 됩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현주는 발랄했고 생기가 넘쳐났습니다. 부드러운 대학생 누나 같으면서도 때로는 철부지 여동생 같은 모순적인 이미지가 중첩되면서 김현주는 드라마와 MC 양쪽을 넘나들었습니다. 김현주의 시대는 85년 무렵 김현주의 차분한 이미지에 야무진 이미지를 더한 김희애가 드라마 <여심>으로 데뷔하면서 자연스럽게 막을 내렸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당시로선 송승환 김현주 등 두 젊은 스타들이 이끄는 <젊음의 행진>은 인기스타보다는 신인들을 등용해 키우려는 성향이 강했습니다. 그리고 신인들도 이곳에 나오기만 하면 방청석에선 최대한 환호해줬구요. 그러나 <젊음의행진>을 이끄는 자이언트들은 바로 송골매였죠. 늘 프로그램 마지막을 장식하는 송골매는 <젊음의 행진>의 이미지를 상대적으로 <영 11>보다 더 강렬하게 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송골매의 카리스마가 김수철 밴드를 훨씬 압도하던 시기였으니까요.
하지만 송골매의 <모두 다 사랑하리>를 김수철이 작곡해 줬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둘의 관계는 살벌한 라이벌이라기보다는 정이 통하는 친구 관계였던 것 같습니다. <젊음의 행진>의 송골매는 특히 `배철수의 감전사건’으로 유명하죠. 83년 무렵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젊음의 행진>에서 리더기타를 치던 배철수가 갑자기 쓰러져 난리가 난거죠. 다음날 교실에선 “배철수가 죽었네, 살았네” 한창 왁자지껄했답니다.
오늘 이야기가 너무 바깥으로 빠지네요. 김수철은 나중에 80년대 중후반을 풍미하게 되는 이런 개그맨을 쏟아낸 <영 일레븐>의 초창기 고정멤버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김수철은 일부 매니아층만을 확보했을 뿐, 대중성은 별로 없었습니다.
김수철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건 솔로로 전향한 뒤인 84년 초 다분히 통속적인 발라드 리듬의 <못다핀 꽃 한송이>부터였습니다. 이때 김수철이 솔로로 전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멤버들이 대학을 졸업하면서 안정된 직장을 찾거나 군입대 등으로 모두 다 떠나버려 김수철만 덩그러니 남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김수철의 당혹감과 좌절감이 어떠했을까요? 게다가 집안의 반대도 더욱 심해져 김수철 본인도 그렇게 사랑하던 음악에서 손을 뗄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습니다. 결국 그룹 해체, 그리고 건국대 행정대학원 진학 등. 그리고 그는 마지막 음반으로 생각하고 만든 <고별 기념음반>을 발표합니다. 그게 바로 <못다핀 꽃 한송이>가 수록된 솔로 1집입니다. 그리고 대중들의 환호가 (사실 이전까지 김수철에게는 그리 큰 대중의 환호가 없었습니다) 결국 떠나려는 그를 붙잡은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접하고 나니, 김수철이 그때 만든 노래의 제목에 `못다핀 꽃 한송이’로 이름붙일 때의 그 아픈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김수철 인생의 최고 황금기(대중적 입장에서)는 바로 84~86년이었습니다. 김수철 1집은 <못다핀 꽃 한송이> 외에도 <별리>, <정녕 그대를>, <내일> 등등. 김수철은 1집 발표 직후, 배창호 감독의 영화 <고래사냥>에 이미숙과 함께 출연하면서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때 부른 주제가 <나도야 간다>는 2집 음반에 실려 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합니다. 실로 84년은 김수철의 해였던거죠?
글이 너무 길어져 오늘은 변죽만 울리다 끝을 맺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번 글에서는 김수철의 전성시대인 84년부터 그의 음악을 다시 한 번 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2003. 12.29(월) 권 태 호 올림 ho@hani.co.kr
[출처 : 아듀 네이버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oqkdvo&logNo=4001006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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