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사용하는 인위적인 색채는 모두 자연에서 본 따온 것이다. 하늘 빛깔은 다채롭다. 그러나 가장 고운 가을 하늘의 청명한 푸른빛만이 하늘색으로 선택되었다. 여성들의 손가락에서 빛나는 진주반지를 본뜬 진줏빛, 병색이 완연한 얼굴을 치자 빛에 비교하기도 한다. 금은보석을 흉내 낸 것은 금빛이나 은빛이다.
밤길의 교통사고 예방을 위한 방편으로 의복이나 신발, 차량, 심지어 전선주까지 부착된 것은 야광빛이다. 그것은 반딧불이나 각종 야광충들이 뿜어내는 형광체를 모방한 것이다. 자연의 색채가 존재함으로 지구는 아름답고, 사람들은 그 빛깔을 닮고 싶어서 자연과 유사한 인위적인 색채를 만들어낸다.
나는 어둠 직전, 서녘 하늘을 아낌없이 불태우는 황홀한 노을빛을 좋아한다. 노을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귀소 본능을 일깨워준다. 새들이 둥지로 향하는 저녁 하늘에 붉게 물든 노을은 이미 멀리 와 있는 추억에 대한 그리움의 빛깔이다. 또한 수평선 위에 하늘인 듯, 바다인 듯, 끝없이 펼쳐진 푸른 물빛 또한 좋아한다. 바다는 마을로, 도시로, 세계로 끊임없이 흐르기에 먼 곳을 지향하는 희망의 빛깔이다.
나는 이슬에 젖은 분홍 장미를 좋아하고, 보랏빛 나팔꽃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 꽃을 피우는 기본 바탕색인 싱그러운 초록빛을 더욱 좋아한다.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빛깔은 하얀색이다. 빨강이나 초록, 보라 같은 강렬한 색채는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도 화려함의 본질은 버릴 수가 없다. 거기에 비해 하얀색은 무슨 꽃으로 피어나느냐, 어떠한 의복으로 만들어지냐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진다. 백합이나 백장미는 고결하고 품위 있는 귀족의 꽃이다. 하얀 들국화나 하얀 코스모스는 가련한 서민의 꽃이다.
의복도 마찬가지이다. 레이스가 풍성한 하얀 드레스는 호화스럽게 보이는 반면 하얀 니트류나 교복은 단정해 보인다. 하얀색은 담는 그릇에 따라 달라지는 물같이 변신을 거듭하는 신비의 색채이다.
깨끗하게 살라는 의미일까. 어른들은 갓 태어난 아기에게 최초의 의복으로 하얀 배냇저고리를 입힌다. 포플린 기저귀도 하얀색이다. 햇빛이 가득한 날, 빨랫줄에서 바람을 맞으며 일렁이는 순백의 기저귀를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설렌다.
어느 사형수가 말했다던가. 기저귀가 널린 풍경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시한부 인생인 사형수가 동경한 곳은 산동네이거나 후미진 변두리의 월세방일지도 모른다.
자유로이 하늘을 나는 새들의 날갯짓 같은 기저귀의 나부낌, 그는 수없이 허술한 오두막을 지켜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검은 그림자와 철장 밖 세상의 눈부신 기저귀. 그가 창살 안에서 마지막으로 본 기저귀는 세상의 모든 행복이 함축된 진실한 메시지였던 것이다.
아기의 하얀 기저귀는 가정의 평화를 알리는 깃발이다. 아기의 백일, 돌상 차리기에 가장 중요한 음식은 백설기 떡이요, 목에 걸어주는 것은 하얀 무명실이다. 그것은 아기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신성한 의식이다. 그처럼 인간의 탄생은 온통 하얀색의 축복을 받는다.
여자들은 일생에 단 한 번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는다. 웨딩드레스는 처녀에게 순결의 증표이며, 한 남자만을 사랑하겠다는 언약의 옷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 단 한 번의 약속을 깨고 하루아침에 남남이 돼 버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생이별보다 가슴 아픈 것은 사별이다. 여인들은 사랑하던 사람이 죽으면 하얀 소복을 입는다. 소복은 여인들에게 정조의 약속이며 구속의 옷이다. 그 옛날 지아비를 잃은 수많은 여인들이 걸쳤던 소복은 너무 깨끗해서 오히려 서러운 아름다움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백발로 변해간다. 죽음 뒤에는 하얀 베옷으로 입혀져 흙으로 돌아간다. 망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상주는 하얀 상복을 입고, 하얀 국화를 영전에 바친다. 결국 삶과 죽음은 하얀색으로 시작되어 하얀색으로 끝나는 동질의 것이다. 경조사에 쓰이는 광목 차일도 하얀색이다. 민들레나 갈대 등의 식물도 하얀 포자를 쓰고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니, 결국 삶과 죽음은 불순물이 첨가되지 않은 백지상태와 같은 것이다.
세상에서 최초로 존재하던 색이 있다면 하얀색이 아닐까. 안개, 구름, 파도의 결정체도 하얀색이다. 나는 인위적인 하얀색도 좋아하지만 그 순도(純度) 높은 자연적인 하얀색을 더욱 좋아한다. 그리고 모든 언어와 그림이 창조되기 직전 노트나 도화지의 가능성을 좋아한다. 어느 빛깔의 외두에도 배색이 무난한 나의 하얀 실크 블라우스를 좋아한다. 하얀색은 어느 색과도 타협을 잘하는 색채이다. 그러나 다른 색과의 대비에서 결코 위축되거나 밀려나지 않는 뚜렷한 개성을 갖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하얀 옷을 즐겨 입었다. 세제 류가 미비하던 시벌, 하얀 옷을 장만하려면 번거로운 절차가 뒤따랐다. 옥양목 옷 한 벌을 세탁하기 위해 복잡한 노동을 했던 우리 어머니들의 바지런함을 좋아한다. 백색 옷을 입고 심신을 가다듬었을 조상들의 멋스러움을 좋아한다. 현대인들은 하얀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현란하게 나염된 옷을 입고 검은 머리, 새치 머리카락을 취향에 맞게 염색한다. 생활용품도 예외일 수는 없다. 젊은이들은 개성을 위해, 노인들은 젊음을 위해, 컬러 제품의 선택을 주저하지 않는다. 컬러 의상, 컬러 문구, 컬러 화장품, 휘황찬란한 오색등, 무지갯빛 희망....... 이러다가 하얀새개이 희귀종이 돼버리는 것은 아닐까.
채소의 색채는 다양하지만 사람들은 그에 만족치 않고 컬러 감자, 컬러 쌀 등을 만들어 내고 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속살이 붉은 감자, 파란 쌀은 가히 예술품이다. 그러나 모조품에 불과한 변종의 인공색채가 오히려 자연의 색채를 파괴한다. 본연의 색채를 찾기 위해 일일이 사전을 들여다보는 시대가 오지 않을 거라는 장담은 못할 것이다. 이제 창조는 조물주의 것만은 아니다. 자연 그대로 두고 싶은 것이 주위에 너무 많아 아쉬운 현실이다.
오늘도 도시는 원색으로 활기차게 움직인다. 내 삶도 보조를 맞추듯 여러 가지 화려한 허욕의 빛깔로 채색되어 간다. 지금껏 큰 죄 짓지 않고 살아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다스릴 수 없는 많은 욕망의 빛깔이 내 안에 있어 끊임없이 유혹하곤 한다. 유아기 때 하얀 강보에 쌓여 자랐던 내가 이제는 크레파스 한 갑의 색채만큼 다면성을 지닌 여인이 된 것이다. 아직도 내 마음속 어딘가 순수라는 하얀 여백은 남아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