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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過剩”은 “예정하거나 필요한 수량보다 많은 상태 또는 정해진 수량이나 필요보다 많이 공급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보수와 진보 진영 각각의 이념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육류, 우유, 유제품 등 단백질 공급이 넘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견, 경험과 관점 등을 서로 공유하는 소셜 미디어Social Media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습니다. 대학은 기본이고 대학원 졸업자들을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것들이 지나치게 많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공급되고 있습니다. 소비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극도의 피로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Ep1. 과잉 생각
한 가지 이상의 비타민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주의를 조금만 둘러봐도 관음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쾌락적인 요소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대는 과잉 생산되고, 과잉 공급되고, 과잉 소비되는 그야말로 과잉의 시대입니다. 생각도 역시 과잉 생산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를 끊임없이 되새깁니다. 후회합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일을 크게 여깁니다. 근심합니다. 걱정합니다. 사로잡힙니다. 근심과 걱정은 하루가 다르게 커집니다. 어떤 사람은 쉬지 않고 밀려드는 업무에 압도당합니다.
처리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졌음에도 뒤로 미룹니다. 어떤 사람은 말 한마디 때문에 관계가 깨질까봐 두려워합니다. 마음에 담고 있는 말을 쉽게 꺼내놓지 못합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생각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생각 과잉입니다. 완전히 매몰埋沒된 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부정적인 사고에 사로잡힙니다.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자신은 물론 지극히 평범한 현실까지 왜곡합니다. 지독한 자기부정에 빠집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망가뜨립니다. 그러면서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어느 날, 그는 어깨에서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포털Portal 검색을 하던 중 피부암의 일종일 수도 있다는 정보를 발견했습니다.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면서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불안해졌습니다. 건강에 대한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럴 수도 있다며,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상담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닌지, 공황장애는 아닌지 전전긍긍했습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관계가 전혀 없는 과거 경험까지 소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했습니다. 업무 효율이 떨어졌습니다. 인간관계까지 힘들어졌습니다.
일상을 망치는 경우가 잦아졌습니다. 이때, 뇌는 착각에 빠집니다. 무엇인가를 해결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생각의 크기를 키웁니다. 기분을 완전히 망쳐버리고, 마음은 조마조마 불안해지고, 사고는 부정적으로 치닫고, 삶은 힘겨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삶 전반적인 부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과잉 생각의 폐해弊害입니다. 분명 신중하게 생각해야합니다. 그렇지만 너무 많이 생각하게 되면 오히려 역효과를 부릅니다. 안타깝게도 과잉 생각은 복잡다단複雜多端한 현대 사회에 만연蔓延합니다. 심각한 독성을 함유含有하고 있습니다.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재대로 인지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앓고 있는 중한 병입니다. 쉽게 고치기 어려운 고질병입니다. 그Nick Trenton는 “생각 중독 : 불안과 후회를 끊어내고 오늘을 사는 법Stop Overthinking”이라는 자신의 책을 통해서 인생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는 생존 전략 다섯 가지 태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통제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갖지 못한 것이 아니라 가진 것에 집중한다.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집중한다.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에 집중한다.”입니다.
사도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빌4:6a)라고 외쳤습니다. 고해와 같이 힘겨운 인생을 살아내는 동안 마치 밀물처럼 쉬지 않고 밀려오는 문제들을 만났을 때 절대로 염려하지도, 초조해 하지도, 불필요한 관심을 쏟아 붓지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지도 말라고 외쳤습니다. 오히려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b-7)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구하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면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은 아무리 몸부림쳐서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할지라도, 완전히 죽었다 살아난다 할지라도 절대로 만들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 누릴 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 인간의 이해를 완전히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평강, 표면적이지 않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평강, 부족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평강이 마치 목숨을 걸고 왕의 안전을 책임지는 파수꾼처럼 저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줄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은 과소평가 됩니다. 작은 흙더미조차 큰 산으로 보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자신을 설득합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 때문에 속을 끓입니다. 반면,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문제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문제에 대한 가장 완벽한 해결책을 가지신 하나님을 구합니다. 마침내 문제로부터 건져주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생각의 과잉이 부르는 폐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Ep2. 과잉 자의식
실존주의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Søren Kierkegaard의 주장에 따르면,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나, 내가”라는 표현에 익숙합니다. “나, 내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과잉 자의식 상태입니다. 이들은 모든 일의 중심에 자신을 둡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들도 자신처럼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어쩌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해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자신만을 위한 은밀한 공간에 허락도 없이 함부로 침범해 들어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당황합니다. 불쾌해합니다. 불편해합니다. 민망합니다. 부끄러워합니다. 화를 냅니다.
회피합니다. 과잉 자의식은 점점 더 견고해집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여깁니다. 그러면서 자신과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찬 세상에 압도됩니다. 점점 더 두려워합니다. 한편,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저와 여러분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하여 친히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세상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아직 연약할 때 곧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면서 타락한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바를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을 때 사랑해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아직 죄인이었을 때 곧 전적 타락과 전적 부패로 인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가치가 전혀 없을 때 사랑해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아직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 곧 여전히 하나님에 대해서 적개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원수였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고는 절대로 살릴 수 없는 원수였을 때 사랑해 주셨습니다. 모진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물과 피를 다 흘리고 죽으실 정도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절대로 떠날 수 없으십니다. 버릴 수 없으십니다.
완전한 하나가 되어 저와 여러분 안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으십니다. 영원까지 함께 동행 할 수밖에 없으십니다. 당연히, 당신의 전부를 완전히 다 쏟아 부어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절대로 과잉 자의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는 당신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으로 충만합니다.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아낌없이 다 쏟아 부어서 진실하게 사랑을 해 본 사람은 무조건 과잉 자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절대로 “나, 내가, 나를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 당신, 그대를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 중심의 삶을 삽니다. 그것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할지라도,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내놓아야한다 할지라도 기꺼이 그렇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낸 삶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여전히 과잉 자의식 상태 곧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진실한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는 거부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진정한 의미의 성숙은 과잉 자의식으로부터 벗어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Ep3. 과잉 탐욕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성전 마당은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칠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각종 세금을 낼 수 있도록 돈을 바꿔주는 환전상들이 뒤섞인 채 북적거렸습니다. 당시, 희생 제물을 파는 상점은 모두 두 군데였습니다. 하나는 기드론 골짜기와 겟세마네 동산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공의회 소유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전 마당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 소유였습니다.
놀랍게도, 가장 거룩하다고 자처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목구멍까지 차 올라와 있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 팔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부당한 수입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종교가 물질 곧 맘몬Mammon과 손을 잡을 때, 은혜 안에서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값없이 선물로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생각만으로도 두렵고 떨리며 심장이 두근거리는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때마다 온갖 종류의 희생제물을 엄청나게 요구합니다. 인간의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평화가 아니라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지극히 세속적인 평화를 추구합니다. 스스로 평화를 통제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또 성도들은 하나님과 대척점에 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보다는 두려워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명예를 더럽히는 오독汚瀆입니다. 하나님 백성이라고 한다면 절대로 저지르지 말아야할 죄입니다. 인지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너무 쉽게 저지르고 있는 죄입니다. 오늘,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건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도, 천문학적인 재정을 운용하는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거룩한 성전에서 절대로 벌어지지 말아야할 광경을 목격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가늠조차 힘든 천문학적인 돈벌이가 벌어지는 현장에서 허연 이를 드러낸 채 희희낙락거리고 있던 장사치들을 성전에서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다 쫓아버리셨습니다. 환전상들의 돈을 흩어버리셨습니다. 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쉽게 주워 담을 수 있도록 쏟아버리셨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돈을 올려두었던 가판대를 엎어버리셨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상당히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비둘기를 팔고 있던 상인들에게는 “이것들을...치워라.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2:16)라고 외치셨습니다. 이는 성전이 기도하는 집 이상이라는 의미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표현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10:30a)라는 공식적인 자기 계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서 당신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똑같은 속성을 가진 존재라는 신적 현현顯現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당신을 통해서만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당황한 유대인들은 즉시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이라도 보여줄 수 있소?”(요2:18)라고 반발했습니다.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면 당장 그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2:19)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모진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겠다는 의미였습니다. 당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뿐인 성전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헤롯 성전은 B. C. 20 또는 19년경부터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도 여전히 완성하지 못한 채 지어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설령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돈벌이를 위한 그야말로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목구멍까지 올라와 있던 탐욕을 채우기에는 성전보다 좋은 수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날 발언을 신성 모독죄로 규정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고 몰아붙였습니다. 무지한 백성을 선동했습니다. 마침내,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편재Omnipresence라는 탁월한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 곧 언제나 계시고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성전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가둬버렸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b-5)라는 명령을 외면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렇게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아붙였던 그들은 못된 성정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성령과 지혜로 충만했던 스데반을 돌로 쳐죽었습니다. 과잉 탐욕에 사로잡힌 자들이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한 채 얼마나 끔찍한 범죄를 반복해서 저지르게 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일단 한 번 보게 되면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웅장하고, 화려하고, 아름답게 지어진 교회에서도 여전히 반복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죄입니다. 과잉過剩이 무조건 나쁘다고 단정을 지어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차라리 모자람이 나을 때도 있습니다.
“과잉 생각”은 현실은 물론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자신을 왜곡합니다. 끌어내립니다. 삶 전반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악순환을 부릅니다. “과잉 자의식”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합니다. “너”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과잉 탐욕”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마저도 많은 수단들 가운데 하나 정도로 여기게 만듭니다. 마침내 자신을 영원한 죽음과 저주와 지옥 불구덩이로 몰아붙일 수도 있습니다. 작가이면서 철학자인 그Osho Rajneesh의 우화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루는 총명하기로 유명했던 남자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제발 자신을 도와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이렇게 울상이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남자는 자신감을 잃어버렸다고 대답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사람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남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만큼이나 잘 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과잉 자의식이 부른 폐해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감 부족을 열등이나 실패 또는 좌절과 연관시킵니다. 그로 인해 자신에게 주어진 수없이 많은 발전의 기회를 놓칩니다. 과잉의 상태에서 반드시, 신속하게 빠져나와야합니다.
그들 부부는 농촌에서 성실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났습니다. 동쪽으로 12km정도 가다보면 큰 나무 한 그루가 나타날 텐데, 그 나무를 베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부부는 노인의 말대로 했습니다. 둥지에서 새 알 두 개를 얻었습니다. 하나에서 새끼 새가 나왔습니다. 다른 알을 까보면 금반지 하나가 나올 것인데, 소원을 빌게 되면 다 들어줄 것이라고 말하곤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부부는 어떤 소원을 빌면 좋을지 함께 의논했습니다. 그 시간이 너무 좋았습니다. 기뻤습니다. 마음은 벅찬 희망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원하던 것들은 열심히 일하다보면 얻을 수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금반지는 잘 보관해 두고 열심히 일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는 반지가 있어 든든했습니다. 희망이 넘쳤습니다. 기쁨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원하던 땅을 샀습니다. 논도 샀습니다. 소도 샀습니다. 집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다른 것은 하나도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저와 여러분보다 훨씬 잘 아십니다. 깊이 아십니다. 가장 이상적인 때가 이르게 되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과잉을 벗어난 만큼이 바로 성숙의 깊이입니다. 심리학자인 그Ernie J. Zelinski의 주장에 따르면, 저와 여러분이 염려하는 40%는 현실 속에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30%는 이미 일어났습니다. 22%는 지극히 사소합니다. 겨우 4% 정도만 저와 여러분의 힘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무려 96%는 염려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염려를 달고 살고 있다면 “램프 증후군Lamp Syndrome”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리학적인 용어로는 “과잉 근심 증후군”입니다. 의학적인 용어로는 “범 불안장애”입니다. 또 저와 여러분이 과거에 했었던 선택들은 모두 다 옳았습니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과연 어땠을까?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후회와 자책과 눈물이 앞을 가리게 만드는 선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의 선택들이 오늘의 저와 여러분을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도 저와 여러분의 선택들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인정해 주셨습니다. 기꺼이 허락해 주셨습니다. 선택들이 서로 합력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루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일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하게 될 선택들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고백하고 있는 믿음은 과연 적정適正한지, 자신과 다른 형태의 믿음은 무조건 거부할 정도로 과잉되어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적정한 믿음이 있고, 과잉 믿음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얼마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면한 모든 환경, 상황, 조건에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막5:36, 눅8:50)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적용합니다. 지나치게 강요합니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면 지체 없이 판단합니다. 왜 믿음이 없느냐고, 왜 믿음이 작으냐고 비난합니다. 과잉 믿음입니다.
사도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2:8)라고 외쳤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값없이 부어주십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값없이 허락해 주신 만큼만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크기를 판단하는 것은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의 믿음을 허락해 주신 하님을 판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지만 저와 여러분은 그렇지 못하다는 측면에서 볼 때, 돌이킬 수 없는 죄입니다.
누구에게도 자신과 똑같은 획일적인 믿음을 요구하지 말아야합니다. 지극히 편협한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완벽한 사유思惟의 소유자이신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나보다 너, 나보다 필요를 가지고 있는 이웃, 나보다 하나님을 먼저 위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무조건 하나님께 맡기기보다는 먼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무엇보다 누구의 믿음도 쉽게 판단하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악순환으로 몰아붙이는 과잉 생각과 과잉 자의식과 과잉 탐욕과 과잉 믿음으로부터 벗어나는 복된 삶, 오직 하나님 한 분만 허락해 주실 수 있는 완벽한 평강을 누리는 복된 삶,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을 만나게 된다 할지라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 한 분만 사랑하는 복된 삶, 하나님을 자신의 원함을 이루는 수단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목적으로 섬기는 복된 삶, 무엇보다 연약한 믿음을 가진 형제자매들과 함께 더불어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