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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몽유록(夢遊錄){관란유고}
世有元子虛者慷慨士也氣宇磊落不容於世屢抱羅隱之恨難堪原憲之貧朝出耕夜歸讀古人書穿壁囊螢無所不爲嘗閱史至歷代危亡運移勢去處則未嘗不掩卷流涕若身處其時汲汲焉見其垂亡而力不能扶者也仲秋之夕隨月披覽夜闌神疲倚榻而睡身忽輕擧縹緲悠揚泠然若御風而登飄然若羽化而仙止一江岸則長流逶迤群山糾紛時夜將半萬籟俱寂月色如晝波光若練鴻鳴蘆葉露滴楓林悄然擧目如有千載不平之氣乃劃然長嘯浪吟一絶曰恨入長江咽不流荻花楓葉泠颼颼分明認是長沙岸月白英靈何處遊徘徊顧眄之際忽聞跫音自遠而至有頃蘆花深處閃出一介好男子幅巾野服神淸眉秀凜凜有首陽之遺風來揖於前曰子虛來何遲吾王奉邀子虛疑山精水魅愕然無以應然其形貌俊邁擧止閒雅不覺暗暗稱奇乃肩隨而行百餘步許有亭突兀臨江上有一人凭欄而坐衣冠一如王者又有五人侍側都是世間人豪儀貌堂堂神彩揚揚胸藏叩馬蹈海之義腹蘊擎天捧日之忠眞所謂托六尺之孤寄百里之命者也見子虛至皆出迎子虛不與五人爲禮入謁王前反走而立以待坐定跪於席末子虛之上則幅巾者也其上五人相次而坐矣子虛莫能測甚不自安王曰夙聞蘭香深慕薄雲良宵邂逅無相訝也子虛乃避席而謝坐已定相與論古今興亡亹亹不厭幅巾者噓噫而言曰堯舜禹湯之後孤(狐)媚取禪者藉焉以臣伐君者名焉千載滔滔卒莫之救咄咄四君永爲嗃(嚆)矢言未旣王乃正色曰惡是何言也有四君之聖而處四君之時則可無四君之聖而非四君之時則不可四君者豈有罪哉顧藉而名之者非也幅巾者拜手稽首謝曰中心不平不自知言之過於憤也王曰辭佳客在座不須閒論他事月白風淸如此良夜何乃解錦袍賖酒於江村酒數行王乃持杯哽咽顧謂六人曰卿等盍各言志以敍幽冤乎六人曰王庸作歌臣等賡焉王乃愀然正襟悲不自勝乃歌曰江波咽咽兮流無窮我懷長長兮與爾同生爲千乘死作孤魂新是僞主帝乃陽尊故國人民盡收楚籍六七臣同魂庶有托今夕何夕共上江樓波聲月色使我心愁悲歌一曲天地悠悠歌罷五人各詠一絶第一座者吟曰深恨才非可托孤國移君辱更損軀如今俯仰慙天地悔不當年早自圖第二座者吟曰受命先朝荷寵隆臨危肯惜隕微躬可憐死去名猶烈取義成仁父子同第三座者吟曰壯節寧爲爵祿淫金章猶抱採薇心殘軀一死何須說痛哭當年帝在郴第四座者吟曰微臣自有膽輪囷那忍偸生見喪淪將死一詩言也善可能慙愧二心人第五座者吟曰哀哀當日竟何如死耳寧論身後譽最是千秋難洗恥集賢曾草賞功書幅巾者乃搔頭而長吟曰擧目山河異昔時新亭共作楚囚悲心驚興廢肝腸裂憤切忠邪涕泗垂栗里淸風元亮老首陽寒月伯夷飢一篇野史堪傳後千秋應爲善惡師吟訖屬子虛子虛元來慷慨人也乃捫淚悲吟曰往事凭誰問荒山土一丘恨深精衛死魂斷杜鵑愁故國何時返江樓此日遊悲涼歌數闋殘月荻花秋吟斷滿座皆凄然泣下無何一箇雄豪士身長過人英勇絶倫面如重棗目若明星文山之義仲子之淸威風凜然令人起敬入謁王前顧謂五人曰哀哀腐儒不足與成事也乃拔釰起舞悲歌慷慨聲若巨鍾其歌曰風蕭蕭兮木落寒波撫釰長嘯兮星斗闌于生全忠孝死作毅魂襟懷何似一輪明月嗟不可與慮始腐儒誰責歌未闋月黑雲愁雨泣風凄疾雷一聲皆倏然而散子虛亦驚悟乃一夢也子虛之友梅月居士聞而痛之曰大抵自古昔以來主暗臣昏卒至傾覆者多矣今觀其主想必賢明之主也其六人者皆亦忠義之臣也安有以如此等臣輔如此等主而若是其慘酷者乎嗚呼勢使然也則不可不歸之於天福善禍淫非天道耶夫不可歸之於天則冥然寞然此理難詳宇宙悠悠徒增志士之恨耳以詩和之曰萬古悲涼意長天一鳥過寒煙鎖銅雀秋草沒章華咄咄唐虞遠紛紛湯武多月明湘水闊愁聽竹枝歌
{先生嘗於夢中陪端廟與六臣及崔煙村遊於江上作詩賡和覺而起感文以記之名曰夢遊錄蓋寓言也深矣先生之前後著述親傅諸火而惟獨歎世夢遊二簡幸得免焉自堯舜以下至非也}
{九十一字旣爲前刊所缺而今因莊陵誌記入然未能的知故偏書字行以俟更考}
세상에 원자허(1)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비분강개한 선비인데 능력은 남달리 뛰어났지만 세상에는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은 몹시 가난하였다.
벼슬 운이 없는 것은 옛날 중국 오대(2) 때 나은(3)과 비슷하였고 집안이 가난한 것은 송나라(4) 때 원헌(5) 정도 되었는데, 나은은 과거에 열 번이나 낙방하였지만 이름 높은 시인이었고, 원헌은 공자의 손자이지만 집안이 너무나 가난한 어려운 선비였다.
자허는 비운의 쓰라림과 가난의 슬픔을 함께 겪어야 했지만 낮에는 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밤에는 집에 돌아와 옛날 성현들이 지은 글을 읽었다.
워낙 가난한지라 불을 켤 기름이 없어 바람벽을 뚫어 이웃집 불빛에 책을 비추어 보기도 하고 반딧불을 잡아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어 책 위에 놓고 글을 읽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로 시험해 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젊었을 때부터 역사책을 좋아하였는데 책을 읽다가 역대 왕조가 망하여 그 나라 운명이 다하고 나라의 힘이 꺾이는 대목에 이르면 언제나 책을 덮고 그 위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는데 과거의 비통했던 역사가 오늘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불우하고 힘없는 사람 때문에 그리 된 것으로 느껴지곤 하였기 때문이다.
가을도 깊어 가는 어느 날 저녁 자허는 달빛 속에서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밤이 퍽 이슥해지고 몸이 노곤하여 책상에 한 팔을 얹고 기대어 있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그는 갑자기 몸이 가벼워진 것 같더니 어느새 너울너울 하늘로 날아올랐다.
마치 온몸이 찬바람에 휘말려 치솟아 올라가는 듯 하고 날개가 달린 신선으로 변한 것 같기도 하더니 이윽고 몸이 어떤 강가 언덕에 내려앉았다.
긴 강물은 굽이굽이 돌아 흐르고 사방에는 산봉우리가 우뚝우뚝 솟아 있는데 밤이 이미 깊었는지라 삼라만상은 깊이 잠들어 있고 오직 달빛만 대낮처럼 밝아 강물은 비단처럼 고왔으며 적막한 고요 속에서 봉황새 소리와 갈잎 흔들리는 소리만 찬이슬이 단풍나무 숲에 떨어지는 듯하였다.
처량하고 슬프게 눈을 들어 바라보니 천년 동안 쌓인 모든 시름이 맺혀 있는 것 같아 한참 동안 휘파람을 불더니 곧이어 낭랑한 목소리로 시 한 구를 지어 읊었다.
원한이 긴 강에 들어 목이 메어 흐르지 못하는데
갈대꽃도 단풍잎도 찬바람에 우수수하고 우는구나
이곳은 분명히 장사(6)에 있는 언덕일 것이니
달 밝은 밤에 영령들이여 어디에서 노니는가
* 각주 --------------------------------
(1) 원자허(元子虛) : 생육신 관란(觀瀾) 원호(元昊)의 자(字). <몽유록>이 원호 저작이란 증거이다.
(2) 오대(五代) : 오대십국. 907년 당나라가 망한 뒤 중국에는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까지 5개 왕조와 서촉, 강남, 영남, 하동 등지를 나누어 차지한 10여 개 정권이 난립했는데 이것들을 모두 아울러서 “오대십국”이라고 부른다.
(3) 나은(羅隱) : 중국 오대(五代) 때 사람. 자 소간(昭諫), 호 강동생(江東生), 본명 횡(橫).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었고, 특히 시(詩)에 뛰어나 이름이 높았다.
(4) 송나라 :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 오대십국을 통일한 송나라(宋, 960~1279)와는 다르다.
(5) 원헌(原憲) : 자 자사(子思), 춘추시대 공자의 제자. 집안이 가난했지만 절의를 지키고, 안빈낙도의 생활을 했다.
(6) 장사(長沙) : 중국 호남성의 수도. 전국시대 초나라의 수도로 항적(項籍)과 미심(芈心) 사이의 역사의 배경이 되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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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읊으며 이리저리 거닐면서 한이 서린 눈길로 여기저기를 돌아보고 있을 때 홀연히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얼마 후 갈대꽃이 우거진 사이에서 잘생긴 사나이(7) 하나가 나타났다.
머리에는 복건(8)을 쓰고 몸에는 평복을 입고 있었는데 기상이 맑고, 얼굴이 수려하여, 옛날 수양산(9)에서 죽은 백이숙제(10)의 높은 절개를 물려받은 듯하였다.
그는 자허 앞에 이르러 허리를 굽혀 읍(11)을 하면서 말하기를 “자허는 왜 이리 늦으셨소? 우리 임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하였다.
자허는 그 사람이 산에서 나온 산귀신 이거나 물에서 나온 물귀신이 아닌가 하여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준수하고 행동 또한 단아한 것을 보고 자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으로 그를 칭찬하였다.
자허가 마침내 그의 뒤를 따라 100여 걸음 걸어가니 그 곳에는 정자 한 채가 우뚝 솟아 강을 굽어보고 있고, 그 위에 한 사람이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데 옷차림이 한 나라 임금의 옷차림과 같았다.
그 밖에 다섯 사람이 그를 모시고 있는데 모두 사대부 등 높은 벼슬아치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나 각각 차등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세상에서도 뛰어난 호걸들로 자못 풍모와 당당한 위엄이 있고, 정신과 풍채가 뜻을 이룬 만족한 빛을 얼굴과 행동으로 나타내고 있는 듯하였다.
가슴에는 고마(12)와 도해(13)의 기개를 품은 듯하고, 뱃속에는 하늘을 떠받치고 해를 받드는 뜻을 품고 있어서 참으로 “어린 임금을 부탁하고 나라의 운명을 맡길 만한”그런 인물들 이었다.
자허가 도착한 것을 보자 모두 정중히 나와서 맞이하였다.
자허는 다섯 사람과는 인사를 나누지 않고 임금 앞에 나아가 배알하고 물러나와 서 있다가 자리가 마련되기를 기다려 가장 끝자리에 꿇어앉았다.
자허 위에는 아까 자허를 데리고 온 그 복건을 쓴 사나이가 앉고, 그 위에는 다섯 사람이 각기 벼슬이 높은 순서대로 앉았다.(14)
자허는 자리에 앉아서도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자못 불안하기만 할 뿐이었다.
이윽고 왕이 “내가 경(卿)이 난초처럼 향기로운 지조를 가졌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속 깊이 그리워한지 이미 오래 되었소.
오늘 이 아름다운 밤에 우리가 서로 만났으니 그대는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 마시오.”라고 말하였다.
자허는 그제야 마음속 의심을 거두고 몸 둘 바를 몰라 자리에서 일어나 은혜에 감사하며 절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자리가 정해지자 그들은 고금을 통하여 나라가 흥하고 망한 일들을 흥미진진하게 토론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모두들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전혀 싫증을 내지 않았다.
복건 쓴 사람이 “휴우~”하고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여 말하였다.
옛날 요(堯)임금, 순(舜)임금이나 우왕, 탕왕이 나라를 주고받은 이후로 아첨하는 무리들이 나타나, 여우처럼 아양을 부려 임금 자리를 빼앗고도 선위를 빙자하였고 신하로서 임금을 치고서도 그것을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1000년 동안 그와 같은 풍조가 도도히 전해 내려 왔으니 마침내 구제할 길이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 네 임금이 그들의 효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몸을 고치고 바로 앉아서 얼굴빛을 바로잡고 말하였다.
아니오. 경(卿)은 이게 대체 무슨 말이오?
네 임금과 같은 성스러운 덕(德)을 가진 사람이 왕위를 물려받아 네 임금 시대와 같은 태평성대를 만들었다면 괜찮겠지만, 네 임금과 같은 성스러운 덕(德)이 없는 사람이 왕위를 가로채 네 임금 시대와 같은 태평성대를 만든 것이 아니라면 옳지 않은 것이니 네 임금에게 무슨 허물이 있겠소?
도리어 그것을 빙자하고 명분으로 삼는 자들이 잘못된 것이오.
그러자 복건을 쓴 사람이 손을 이마에 대고 머리를 조아리고 절하면서 사과의 말을 하였다.
속마음이 편안치 못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 지나치게 격분 되었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소.
오늘은 귀한 손님이 이 자리에 오셨는데 모쪼록 다른 일을 한가롭게 논하지 말아야 할 것이오.
달이 밝고 바람이 맑으니 이렇게 아름다운 밤을 어찌 그냥 보내겠소?
하고 비단 옷을 벗어주며 강촌에 사람을 보내 술을 사 오게 하였다.
술이 몇 잔 돌자 임금은 잔을 든 채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듯 흐느끼면서 여섯 사람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경들은 각기 자기의 뜻을 말하여 남몰래 마음속 깊이 품은 원한을 풀어 봄이 어떠할꼬?
여섯 사람이 대답하였다.
전하께옵서 먼저 노래를 지으시면 신들이 뒤를 이을까 합니다.
* 각주 --------------------------------
(7) 잘생긴 사나이 :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저자 원호(元昊)는 연촌을 흠모하였다.
(8) 복건(幅巾) : 도복(道服)을 입을 때 머리에 쓰는 건. 현재는 어린 사내아이가 돌날이나 명절에 씀.
(9) 수양산(首陽山) : 중국 주나라(周) 무왕(武王)이 은나라(殷) 주왕(紂王)을 멸망시키자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신하가 천자를 토벌한다.”고 반대하며 주나라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들어가 숨은 산.
(10) 백이숙제(伯夷叔齊) : 중국 고대 주나라(周)의 전설적 형제 성인.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殷) 주왕(紂王)을 토벌하자 신하가 천자를 토벌한다고 반대하며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먹고 지내다가 굶어 죽었다.
(11) 읍(揖) : 간단히 서서 올리는 인사. 두 손을 모아 가슴에 올리고 눈을 마주치며 약간 고개를 숙인다.
(12) 고마(叩馬) :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토벌 하려할 때 백이와 숙제가 그 말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간했다는 고사를 인용 한 것.
(13) 도해(蹈海) : 바다 가운데 몸을 잠근다는 뜻으로, 고결한 절조.
(14) 사육신과 연촌공 그리고 원호 사이의 벼슬 서열을 말해주는 것으로 복건자가 연촌이라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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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임금은 초연히 옷깃을 여미고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듯 노래를 불러 이르기를
강물은 흐느끼며 끝없이 흐르는데
나의 원한도 끝이 없으니 이 물과 같도다
살아서는 제후(임금)이었으나
죽어서는 외로운 혼백이 되었도다
신나라 왕망(15)은 거짓 임금이었고
의제(16)라는 지위는 거짓으로 높인 것일세
옛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초나라 항적(17)에게 바쳤다네
예닐곱 명 신하만이 함께하여
혼백이나마 겨우 의탁할 수 있겠네
오늘 저녁이 어떤 저녁인가
강가 정자에 함께 올랐구나
파도 소리와 물에 비친 달빛도
이내 가슴 수심으로 가득하게 만들고
슬픈 노래 한 가락에
천지는 아득하기만 하네
임금의 노래가 끝나자 다섯 사람이 각기 절구 한 수 씩을 읊었다. 첫째 자리에 앉은 사람이 먼저 읊기 시작하였다(18)
부끄럽다 이내 재주, 어린 임금을 받들지도 못하고
나라 잃고, 임금 욕 뵈고, 이 몸마저 버렸구나
지금 와서 천지를 둘러보니 부끄러울 뿐이로다
그 때 좀 더 일찍 도모하지 못한 한스러움이여
다음은 바로 두 번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읊었다(19)
먼저 임금의 고명을 받아 총애도 두터웠는데
나라 잃는 위태로움에 이 몸을 아낄 손가
가련하다 거사는 물거품 되었건만 이름만 드높구나
의를 취하고 인을 이룸은 부자가(20) 같도다
다음은 세 번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읊었다(21)
굳센 절개가 어찌 작위나 녹봉 때문에 더럽혀지랴
벼슬이 올라가도 고사리 캐어먹을 생각만 품고 있었네
이내 몸 한 번 죽음이야 어찌 말할 것 있으랴
그 때에 임금께서 침(22) 땅에 계신 것을 통곡하노라
다음은 네 번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읊었다(23)
미미한 몸일망정 담대한 마음은 있으니
어찌 살기 위해 패륜한 일 참겠는가
죽을 때 시 한 수는 그 말도 좋았거니
두 마음 품은 이를 부끄럽게 여기노라
다음은 다섯 번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읊었다(24)
슬프고 슬프도다. 그날 나의 뜻 어떠하였던고
죽으면 그뿐이거늘 죽은 후의 명예를 어찌 논하랴
천만년을 두고 씻기 어려운 가장 큰 부끄러운 일이라면
집현전에서 일찍이 포상하는 조서를 지은 일일세(25)
다음은 복건을 쓴 사람 차례라 그는 머리를 긁으면서 슬프게 읊었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산천은 옛날과 갔지 않는데
정자에서 모두들 초나라에 죄지은 사람같이 슬픈 얼굴 짖는구나
나라가 망하고 흥함에 마음이 놀라고 간장은 찢어지는데
신하의 충성스러움과 사악함에 통분하여 눈물이 절로 흐르네
율리(26)의 맑은 바람에 도연명(27)이 늙어가고
수양산 차가운 달빛 아래 백이는 굶주리네
<일편야사(28)>가 있어서 후세에 전하리니
누가 착하고 누가 악한지 가르치는 천년의 스승이 되리로다
* 각주 --------------------------------
(15) 왕망(王莽, BC45~AD23) : 중국 전한 말 신나라(新, 8∼24) 건국자. 권모술수로 처음 선양혁명을 일으켜 황제의 권력을 찬탈하였다.
(16) 의제(義帝) :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 왕 미심(芈心). 양치기를 항량(項梁)이 초나라 왕손이라 하여 데려다 왕으로 옹립하고, 항적(項籍)이 의제(義帝)로 높였다.
(17) 항적(項籍, BC232~BC202) : 중국 진(秦)나라 말기에 유방(劉邦)과 함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놓고 다툰 무장. 진을 멸망시킨 뒤 회왕(懐王)을 의제(義帝)로 올리고 스스로 초패왕(楚霸王)이라 했으나 유방에게 패배하여 자살했다.
(18) 박팽년(朴彭年)이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19) 성삼문(成三問)이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20) 병자사화 때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도 참가하여 처형되었다.
(21) 하위지(河緯地)가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22) 침(郴) : 항적(項籍)이 회왕(懷王)을 받들어 의제(義帝)라 일컫고 옮겨 간 초나라 수도.
(23) 이개(李塏)가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24) 유성원(柳誠源)이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25)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킨 후 집현전에 명해 정난공신 녹훈교서를 기초(起草)하도록 강요하자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도망쳐버렸는데 집현전 교리 유성원만이 혼자 남아 있다가 협박을 당해 기초를 하고는 집에 돌아와서 통곡했다고 한다.
(26) 율리(栗里) : 도연명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숨어 살던 곳.
(27) 도연명(陶淵明, 365~427) : 중국 동진말기 부터 남조의 송대 초기중국의 대표적 시인.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여 돌아가는 내용을 담은 <귀거래사>가 유명하다. 이 시를 지은 이는 도연명처럼 벼슬을 버리고 물러난 사람임을 밝히고 있는데 연촌공이 그에 해당한다.
(28) 일편야사(一篇野史) : 계유정난 직후에 연촌공이 지은 이야기 책. <일편야사>을 바탕으로 원호가 <몽유록>을 지었고,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 훗날 무오사화의 기폭제가 되었다. “원생몽유록 임제 저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편야사>가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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읊기가 끝나자 그는 자허에게 부탁 하였다.
자허는 원래 강개한 성품의 사람이라 눈물을 흘리면서 슬픈 목소리로 읊었다.
지나간 옛일을 누구에게 물어볼까
황량한 산에는 흙무더기뿐이로세
한이 깊은 정위(29)의 죽음이고
혼 끊어지는 두견새의 시름이라
고국에는 어느 때나 돌아가려나
정자에 올라 하루를 보내네
슬프게 불러 보는 몇 가락의 노래여
달은 지고 갈대꽃만 우수수 소리치네
노래가 끝나자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처량하고 슬프게 눈물을 흘렸다.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떤 기이한 사나이 하나가 정자에 올라왔는데 그는 범같이 씩씩한 무인으로 키가 크고 용맹스런 기상이 빼어나 보였다.
얼굴은 포갠 대추와 같고 눈은 샛별처럼 번쩍였다.
그는 옛날 문천상(30)의 정의로움과 진중자(31)의 맑음을 모두 가지고 있어서 그 늠름한 모습은 사람들에게 저절로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했다.
그 사람이 왕 앞에 나아가 인사를 드린 뒤 다섯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 하였다.
애달프도다. 썩은 선비들아. 그대들과 무슨 큰일을 꾸몄단 말인가?
하고는 곧 칼을 뽑아 들고 일어나서 춤을 추며 슬피 노래를 부르는데 그 마음은 강개하고 그 소리는 큰 종(鐘)을 울리는 듯싶었다.
그는 노래하기를(32)
소슬한 바람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물결은 찬데
칼을 가슴에 안고 휘파람 길게 부니 북두칠성은 기울었네
살아서 충성하고 죽어서는 굳센 영혼
흉금에 품은 뜻은 어찌 강에 비친 한 조각 둥근 달과 같겠는가
처음부터 잘못된 일 썩어빠진 선비들은 책망한들 무엇 하리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달빛은 구름에 가리어져 보이지 않고 비는 눈물처럼 내리고 바람도 서글프게 불어오는데 한바탕 천둥 번개가 요란하더니 일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았다.
자허도 역시 놀라 깨어 보니 모두 한바탕 꿈이었다.
자허의 친구 매월거사(33)가 꿈 이야기를 듣고 통분하게 생각하며 말하였다.
대개 예로부터 임금이 어둡고 신하가 혼미하면 마침내 나라를 뒤집어엎어 망하게 하는 자가 많았소.
그런데 지금 보니 그 임금은 생각하건대 분명히 현명한 군주이며 여섯 사람 신하들도 모두 또한 충성스러운 신하였구려.
어찌하여 이처럼 훌륭한 신하들이 이와 같이 어진 임금을 모셨으면서도 그렇게 참혹하게 패망하였단 말인가?
슬프다! 나라의 대세가 이렇게 만든 것인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때와 세력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이것을 하늘의 뜻으로 돌린다면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나쁜 사람에게 화를 주는 것이 하늘의 도리가 아니던가?
이것을 하늘의 뜻에 돌리지 않는다면 막막해서 그 진리를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이 누리는 끝이 없으니 뜻있는 이의 슬픔만을 돋울 뿐이로다.
이어서 시 한 수를 지었다.
만고에 싸인 슬픈 사연을 지니고
먼 하늘을 스쳐 날아가는 한 마리 새
찬 안개는 동작대(34)를 가리고
우거진 마른 풀은 장화궁(35)을 덮었네
슬프다! 요순시대 아득한 옛날이여
탕왕과 무왕의 이야기가 분분하구나
달 밝은 상수(36) 물은 넓으니
죽지가(37)를 시름겹게 듣노라
선생(원호)은 꿈속에서 단종을 배알하고 사육신 그리고 최 연촌과 함께 강 위에서 시를 지으면서 어울려 놀았는데 잠에서 깨어난 후 그 때의 느낌을 글로 적어 제목을 <몽유록(38)>이라고 지었으니 그 풍자를 통하여 전해주는 교훈이 깊다.
선생께서 지으신 많은 문헌을 모두 손수 불태워 버리셨는데 다행히도 오직 <탄세가>와 <몽유록> 두 건만은 피해를 면할 수 있었으니 요순 이래 처음이다.
91 글자는 모두 먼저 간행할 때는 수록되지 못하고 빠졌었는데 이번에 <장릉지(39)>에 수록된 것을 기회로 알 수 없는 부분도 있으므로 <장릉지>에 수록된 것을 참고하여 수록한다.(40)
* 각주 --------------------------------
(29) 정위(精衛) : <산해경>에 나오는 상상 속의 새.
(30) 문천상(文天祥, 1236~1282) : 송나라(남송)가 원나라에 항복하자 저항하다 체포되었고 쿠빌라이칸이 그의 재능을 아껴 몽고에 전향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31) 진중자(陳仲子) : 전국 시대 제나라(齊) 사람. 초나라 임금이 재상으로 삼으려 하자 아내와 함께 도망하여 살았다.
(32) 유응부(兪應孚)가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33) 김시습(金時習). “<원생몽유록> 임제 저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해월거사(海月居士) 황여일(黃汝一) 이라고 주장하지만 타당성이 없다.
(34) 동작대(銅雀臺) : 중국 한나라(漢) 말기(210)에, 조조(曹操)가 업(鄴)의 서북쪽에 지은 누대(樓臺). 구리로 만든 봉황으로 지붕 위를 장식한 데에서 생긴 말이다.
(35) 장화궁(章華宮) : 초나라(楚) 영왕(靈王)이 지었다는 별궁.
(36) 상수(湘水) : 중국 호남성의 수도 장사(長沙)에 있는 강.
(37) 죽지가(竹枝歌) : 가사의 한 형식. 서민들이 일상생활 중에 스스럼없이 흘러나오는 노래.
(38) 몽유록(夢遊錄) : 생육신 원호(元昊)가 연촌공이 지은 <일편야사>를 바탕으로 자신의 꿈 이야기를 빌어 지은 자전적 소설. 연촌공이 복건자(幅巾者)로 등장한다. 일설에는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육신전>을 읽고 감명 받아 지었다고 하지만 잘못 된 것이다.
(39) 장릉지(莊陵誌) : 권화(權和), 박경여(朴慶餘) 등이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왕위 피탈 후에 전개된 상황을 기록한 책.
(4) <관란유고 초간본>에는 91 글자가 누락되어 있는데, 훗날 장릉지를 참고하여 추가하였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관란유고 초간본>은 시중에 나도는 많은 이본들과는 달리 원호 가문에서 세전해온 진본이라는 물증으로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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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參考資料 원호선생 몽류록 , 임제 선생은 원생몽유록으로 기록
살펴보건대 이 글은 우언(寓言)이기 때문에 독자가 대부분 분명하게 분별하지 못한다. 그 다섯 사람이라고 한 것은 대개 사육신을 가리킨다. 첫째는 박공(朴公)이고, 둘째는 성공(成公)이고, 셋째는 하공(河公)이고, 넷째는 이공(李公)이고, 다섯째는 유공(柳公)이다. 그리고 ‘한 사나이’라고 한 사람은 유공(兪公)을 가리키고, 복건을 쓴 사람은 곧 선생을 이른다.
按此文是寓言。故讀者多未別白。其曰五人者。蓋指六臣。而第一朴公也。第二成公也。第三河公也。第四李公也。第五柳公也。其曰一介士者。指兪公。而幅巾者。則謂先生也。
임제가 원생몽유록을 지었다는 것입니까?
복건을 쓴 선생은 누구라는 말입니까?
상기의 자료에 우언 ( 寓言 ) 이라는 내용
우화5(寓話)(인격화한 동식물이나 기타 사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행동 속에 풍자와 교훈의 뜻을 나타내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