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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1-7 (다니엘이 본 이상)
성경본문 : 다니엘 7: 1-7
1.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2.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4.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5.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에게 말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으며
6.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
7.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네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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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김봉수 목사
여러분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실 것이고, 우리는 그 나라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꿈, 그 비전을 얼마나 생각하면서 살아가십니까? 어떤 분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현대 그리스도인들 중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젼보다는, 이 땅에서 어떻게 더 풍요롭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꿈을 더 많이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꿈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장차 이루어질 주님 나라의 비전을 이야기하면 요셉의 꿈을 비판했던 요셉의 형들처럼 꿈쟁이 정도로 몰아버립니다.
1969년 암스트롱을 비롯한 우주 항공사들이 달에 착륙했을 때 뉴욕타임즈는 사과문을 실었습니다. 그것은 46년 전인 1920년 1월13일자 사설에 한 로켓트 연구가를 어리석은 꿈을 꾸는 황량한 인간으로 비판하였기 때문입니다.
메사츄세스에 고다드(Robert Goddard)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워체스터 마을에서 문젯거리였습니다. 로케트를 실험한다고 폭음을 내고 냄새를 너무나 풍겨서 동네 개들까지 싫어했다고 합니다. 동네에서 그러한 고다드를 내쫓으려고 소송을 제기했을 때, 뉴욕타임즈는 그 고다드를 가리켜 <달에 착륙하겠다고 망상을 하는 어리석은 자>라고 비판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로버트 고다드는 로케트에 필요한 액체 연료를 발견하여 로케트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한 사람입니다. 그는 단순히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는 비행기 정도가 아니라 달에 갈 수 있는 미래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꿈을 꾸는 자라고 뉴욕타임즈가 비난한 지 반세기가 안되어서 그의 꿈은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젼을 가지고 비젼을 말할 때 굉장히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현실주의자들, 세상이 잔머리 굴리는데만 익숙한 자들은 그 비젼을 가진 자에게 망상을 한다고 말합니다.다니엘의 경우를 보면 우리가 압니다.
다니엘 2장에서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면서 다니엘은 장차 이루어갈 메시야 왕국을 설명합니다. 금머리로 상징된 바벨론이 망하고 계속 일어날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께서 주신 비젼을 설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다니엘 7장도 역시 네 가지 종류의 짐승들로 나타나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세상의 역사, 곧 바벨론이 망하고 일어날 나라들에 대한 묘사가 비젼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1절에서 볼 수 있듯이 다니엘은 벨사살 원년에 이 비젼을 봅니다. 바벨론이 망한다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할 일입니까? 모두들 다니엘을 가리켜 꿈꾸는 자, 꿈쟁이, 망상을 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비꼬았던 것처럼 요셉은 꿈쟁이가 아니라 비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니엘 역시 비전의 사람입니다. 비젼의 사람들의 큰 특징은 현실을 보고 낙심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요셉의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형들에 의해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갈 때에도, 노예의 삶과 감옥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결코 비전의 사람 요셉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벨사살이 등극하면서 어지럽습니다. 그러나 비전의 사람 다니엘 그는 결코 낙심하지 않고 벨사살 앞에서도 아주 담대하게 <당신의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참 아름다운 비전을 가지고 사셨던 분을 성경에서 만나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같이 눅13:33을 찾아봅시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말을 어떤 바리새인들이 전해줍니다. 그러자 주님은 하실 사역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3절에서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비전을 가진 자의 특징입니다. 분명한 비전을 가지신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낙심치 않고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당신의 갈 길을 가신 것입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오늘 여러분들이 먼저 주님이 주시는 비젼을 가지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부터 살펴볼 다니엘 7장 이후는 바로 비젼의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세상 나라가 바뀌고 바뀌어도 주님의 백성들, 곧 주님의 나라는 왕성해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비젼의 내용입니다.
여러분들이 먼저 비전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주님의 몸된 교회, 주의 백성들을 흔들려고 사탄이 발악을 해도 주님의 몸된 교회, 주의 백성들은 더욱 든든히 서 갈 것이라는 분명한 비전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렇게 비전을 가진 사람은 우리 주님의 뒤를 따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하는 자세, 아주 담대한 자세를 취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제 무엇보다도 먼저 여러분들에게 그런 주님나라의 비전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다니엘과 그 비전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1.다니엘은 비전을 기록하고 진술합니다.
여러분 혹시 꿈을 꾸고 난 후에 그 꿈을 기록해 놓는 분이 있습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꿈을 꾸고 난 뒤에 그 꿈을 노트에 계속 기록해 놓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혹시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비전 속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꿈속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다니엘은 그런 헛된 꿈을 기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1절에서 보는 것처럼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것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록으로 어떤 것을 남긴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입니다. 제가 만난 사람 중에 아주 무서운 기록을 남기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가면 상대방이 한 말들을 시간까지 기록해서 노트에 남겨 둡니다. 그리고 그 기록해 둔 것을 보고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당신이 이렇게 말했다>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주 분명합니다만, 그런 사람 앞에서는 농담이라고 잘못했다가는 나중에 큰 코 다치는, 전혀 인간적으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저는 가장 좋은 기록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던진 말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얼마나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을 하나님이 주신 그 비전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질 수 있는 아주 좋은 기록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다가 유레카 상황에 이르도록 하는 그 귀중한 말씀들, 가슴이 벅차 오르도록 하는 그 귀중한 말씀들을 기록해 놓는 것은 참 유익할 것입니다. 또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의 가슴을 파고드는 그 귀중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기록해 놓는 것도 아주 유익할 것입니다. 저는 약20년 전에 신학교에 다닐 때에 설교를 들으면서 기록해 두었던 노트를 얼마 전 읽으면서 다시금 깊은 감동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교회의 비젼으로 제가 4가지를 발표했습니다만, 저는 교회를 위해, 특별히 교회의 비젼을 놓고, 성경 전체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우리 교회에 합당한 비젼을 달라고 기도하는 가운데, 약 한 달간 기도하다가 어느 날 새벽에 마음에 주신 비젼을 기록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중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들을 기록해 두는 것은 참 중요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기록하는 삶의 모습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다니엘은 그 하나님이 주신 비젼을 기록하여 두고 살아가는 가운데 어느 날 벽에 글씨가 나타난 왕궁에서 벨사살이 부르는 부름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담대히 하나님의 통치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분명하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좋은 기록의 습관을 남기십시오. 특별히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에 대한 기록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언어는 그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말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1절 마지막 부분에 그 하나님께 받은 비전을 진술하는 다니엘의 모습을 봅니다. KJV 역시 이 부분을 통해 다니엘이 그 이상을 기록하고 그것을 말했다고 표현합니다. 여러분이 사람에게 들은 말들을 전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비전들을 늘 나누는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조금 전에 소개한 어떤 사람처럼 사람들이 말한 것들을 시간까지 기록하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들을 기록에 옮기고 늘 묵상하고 그것을 이웃에게 말하고 살아가는 비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하늘의 네 바람이 바다를 향해 몰려 부는 것을 봅니다.
2-3절을 봅니다.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기 다르니>
우리가 다음 주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여기 큰 짐승 넷은 세상의 국가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세상 국가들의 이름, 크기, 국가의 정책, 통치의 방법들이 다 각각 다양하게 다르지만 그것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하늘의 네 바람이 바다로 몰려 불고 그 바다에서 짐승 넷이 나오는 것입니다. 새로운 국가 새로운 왕이 나오는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하늘에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어저께가 박정희 전대통령 추모일인 10.26이었는데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서 박정희를 그리워했다는 말을 뉴스를 통해 듣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세상 사람들의 보통 취하는 모습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옛 왕들을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옛 왕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왕의 필요성, 새로운 국가의 필요성을 따라 세우시기 때문입니다.이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전 우주에 하나님의 섭리가 미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국가, 왕은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이 말이 국가가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데도 무조건 순복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유교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요순시대나 그리워하는 사상이 우리에게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전진해 나가는 종교입니다. 미래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다니엘은 당시의 왕이 아무리 강력한 왕이든 혹은 무너지는 왕이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던 것입니다.이렇게 분명한 비전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강력한 왕이 통치하더라도 그 왕에게 전적으로 기대를 걸고 자신을 맡기지도 않고, 아무리 악한 왕일지라도 낙심하고 주저앉지도 않는 살아가게 됩니다. 다니엘서는 다니엘의 일생을 기록하는 다니엘의 전기도 아니요, 바벨론 포로 당시의 유대인들의 역사를 기록한 책도 아닙니다.
다니엘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한 그 구속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열강의 군주들과 열국의 역사와 자연의 힘을 그 지혜와 권능으로 어떻게 다스리고 조종하시는 지를 계시하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 곧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지혜와 권능으로 어떻게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지를 바라보면서, 어떤 왕에게도 푹 빠져서 치우치지도 않고, 악한 왕들을 보면서 낙심하지도 않는 비전의 사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3.큰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온 것을 봅니다.
스튜오트 올리오트는 <이 바다는 인류를 가리킨다>고 말했습니다. 천정웅 교수님은 이 바다를 계17;11에 근거하여 세상을 상징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무튼 이 세상에서 혹은 인류가운데 국가가 등장합니다. 바벨론도 메대와 바사도 헬라도 로마도 다 인류가운데 혹은 세상 가운데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올라온 나라를 가리켜 큰 짐승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단2장에서는 느부갓네살의 꿈에서 그 국가들이 큰 우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 보여진 이상에서는 그 나라들이 짐승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느부갓네살에게는 거대한 신상으로 다니엘에게는 짐승으로 나타난 것은 우리에게 의미를 줍니다. 사람들에게는 막강한 힘을 행사하던 제국이나 제국의 왕들이 두려워서 굴복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을 거듭하면서 한 나라가 세워지고 또 사라지는 식의, 힘으로 상징되는 그 왕국은 짐승의 이미지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사람들은 힘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랑하는 그 힘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야수의 본능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정치에 관한 뉴스, 세상의 권력과 재력을 쥔 자들의 모습은, 힘 기르기와 힘 자랑이 전체 다입니다.
그 까짓 권력의 힘을 조금 더 가졌다고, 물질의 힘을 조금 더 가졌다고, 목에 힘을 주는 것이 이 세상 나라의 모습입니다. 꼭 짐승 같은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짐승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비전의 사람들입니다. 비젼을 본 사람 다니엘은 단순히 힘 기르기하고 힘 자랑하기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만일 다니엘이 그곳에서 힘 기르기를 힘썼다면 어떻게 희생을 당했을지, 혹은 얼마나 큰 힘을 행사하고 살았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비젼의 사람으로서 짐승처럼 사는 자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결 론
여러분들에게 그런 주님나라의 비전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은혜가 있어서, 우리 주님처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하는 자세로 살기를 바라며,
하나님이 주신 말씀들을 기록에 옮기고 늘 묵상하고 그것을 이웃에게 말하고 살아가는 비전의 사람들이 되고,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 곧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지혜와 권능으로 어떻게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지를 바라보면서, 어떤 왕에게도 푹 빠져서 치우치지도 않고,
악한 왕들을 보면서 낙심하지도 않는 비젼의 사람으로 살며, 비젼의 사람으로서 짐승처럼 사는 자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은혜가 있도록 다같이 기도합시다.
출처: 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