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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과 다윗 Ⅱ (삼상 18:10-30)
영적적용 : 경건연습론
요약
성도는 하나님의 훈련소에 입소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경건훈련을
시행하신다. 그것은 자아처리, 성결, 겸손, 사랑 등의 훈련이다. 즉 악신에 들려
격동하는 사울은 자아의 격동을, 천부장은 영육간의 형통을, 첫 딸 메랍은 세상
정욕을 예표한다. 그리고 다윗이 찬송하다가 두 번 피함에서 복음에 서는 감사
훈련을, 철저히 지혜로 행함에서 경외가 의미하는 성결훈련을, 왕명을 자연스럽
게 거절함에서 겸손훈련을, 사울의 청을 받아들임에서 화목과 사랑의 훈련을
보여준다.
설명
본문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약 네 가지의 궤계가 나타나는데 영적으로는
경건훈련의 좋은 예표이다.
☆ 경건 훈련이란?
1. 자아를 부인하는 훈련이다.
10-11절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고로 ‥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1) 야료하는 사울 - 자아처리를 위해 드러냄의 상징이다.
2) 찬양과 피함 - 감사하며 복음에 설 때 이긴다.
2. 성결의 훈련이다.
14-15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
을 보고 그를 두려워 하였으나"
1) 천부장 미끼 - 영적인 형통의 상징이다.
2) 지혜로 행함 - 악을 미워하는 성결이 곧 지혜이다.
3. 겸손의 훈련이다.
17절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맹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1) 메랍 미끼 - 세상정욕의 상징이다.
2) 처지를 들어 사양함 - 겸손으로 이긴다.
4. 화목과 사랑의 훈련이다.
27절 "왕의 사위가 되고자 하니 사울이 그 딸 미갈을 아내로 주었더라"
1) 미갈 미끼 - 그러나 미갈이 다윗을 돕는다.
2) 목숨 걸고 폐백을 준비함 - 화목과 사랑으로 성장하라.
결론 - 경건이란 거룩한 두려움이다.
29절 "사울이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강해
오늘은 사울과 다윗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 다윗이 인기를 얻자 사울
이 시기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힘쓰지만 다윗을 요나단이 돕고 왕의 신하들이 인
정하고 백성들이 사랑과 지지를 보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신령한
의미에서 우리들이 점점 영성적으로 입혀져 감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왕자 요나
단과 신하들이 새로워지기 시작한 의지의 상징이라면 백성들은 마음의 생각을 가
리킵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대부분이 하나님 주권의 영 중심으로 기울어진 것입니
다.
그러자 본문을 보니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온갖 시도를 다합니다. 여기 사울은
다윗을 약 네 가지로 죽일 궤계를 꾸밉니다. 그것은 창으로 천부장으로 메랍으로
미갈로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지혜롭게 행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고 크게 두려워 하고 다윗의 평생 대적이 됩니다. 이러한 과정이 신령한 측면에
서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왕권이 수립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사울이 다윗을 두
려워 함은 두려워 할 줄 아는 경건의 좋은 예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야 할 몇 가지 훈련이 있습니다. 그 훈련이란 한 마디로 경건훈련
입니다.
그럼 경건 훈련이란 무엇입니까?
1. 나를 처리하는 훈련입니다.
10-11절에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울이 귀신에 들려 격노하고 헛소리하다가 다윗을 죽이려는 장면입
니다. 그 동안 잠잠했던 사울이 자기보다 백성들에게 더 환영받는 다윗을 발견하
고는 시기와 질투의 불이 끝없이 타올랐습니다. 이와 같이 악한 심령은 악신이 임
하기 좋은 터전입니다. 마치 돼지 떼에 귀신들이 들어간 이치입니다. 그리고 여기
야료했다란 '예언하다'라는 의미인데 이는 귀신에 들려 헛소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사울은 찬양으로 귀신을 물리치는 다윗을 두 번이나 창을 던져서 벽에 박
아 죽이려고 합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교훈은 영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내 안팎의 모든 악의 세
력이 더 발발하는 경향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를 처리하시기 위한 하나
님의 섭리인줄 알고 오히려 감사하며 이 자아처리 훈련을 잘 받아야 합니다. 우리
가 신앙생활하면서 괴롭고 눈물 흘릴 일이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
고 아주 잘 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
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
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4-36) 하셨
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진리인 것 같으나 이 말씀은 꼭 예수님 말씀이 아
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이것은 다 나의 자아를 처리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자아란 나를 뜻합니다. 그런데 자아와 죄성과는 다릅니다. 죄성은 십자가에 못박
힐 때 함께 못박힌 것이고 자아는 내가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성을 말
할 때는 과거형을 썼지만 자아를 말할 때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등의 현재형을
썼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이신데 내가 아
직도 주가 되어 있어 자행자지하니 처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것도 중요한 과정이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이제는 그 분의 뜻대로
내 인생을 살아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주가 되어 있는한 고통과 시련밖에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자아처리입니다.
그리고 여기 사울이 창을 던졌는데 창은 신체를 관통하여 죽게 하는 강한 무기
입니다. 더구나 벽에 박으려고 했고 그것도 두 번이나 시도했습니다. 이것은 화살
이 아닙니다. 화살은 인간의 사상 등 생각으로 침투하여 서서히 죽이지만 창은 육
신의 발악으로 그 힘이 강력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발악할 때는 우리의 믿음이 아
주 파괴된 듯하고 아예 멈춰 버리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여기 두 번 던진 것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두 번이란 점을 미루어 찌른 것으로 해석하기
도 합니다. 그 만큼 다윗은 사울 바로 곁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육신적인 시험은
다른 곳도 아닌 내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 격동하는 죄성의 시험을 피할 수 있
습니다. 그것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찬송했는데 자아를 죽이는 법
으로 감사와 찬송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죽는 것만큼 기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감사란 우러나야지 무슨 훈련이냐 감사훈련은 최면
술적인 자기 암시라고 비판합니다. 이 이론은 맞은 듯하면서도 틀린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감사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 대상에 들어갈 것이고 경건연
습이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훈련을 해보니까 유익이
많았다는 것이 저의 간증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
다. 그 때 나는 죽어져도 내 영성은 죽어지지 않고 강해짐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
다. 그래서 자아를 철저히 처리해야 하겠습니다.
2. 성결의 훈련입니다.
14-15절을 보면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
라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 하였으나" 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천부장을 삼아 다윗을 적군에 의해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물어서 지혜롭게 행했기 때문에 계속적으
로 승리했고 이것을 본 이스라엘과 유다는 그를 더욱 사랑했습니다. 다윗의 지혜
로 말미암아 결과는 사울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
사울이 다윗을 천부장으로 격상시킴은 한 편으로는 자기 위치의 일부를 내어줌으
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신령한 의미에서 영적생활의 순탄함을 암시하며 따
라서 이것은 성도에게 영적인 위기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블레셋으로 하
여금 다윗을 죽이도록 만들 듯 이러한 영적인 순탄함을 통하여 마귀의 교만함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의 놀라운 지혜를 발견합니다. 다윗은 실족하지 않고 철저히
지혜로 행하여 계속하여 승전에 승전을 거듭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과 유다
온 나라는 한결같이 다윗을 열열히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지혜란 영
적인 측면에서 감사하며 찬송하며 살아가는 성령 안의 생활이라고 했습니다. 시
111:10에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지혜는
내용은 같지만 앞의 지혜의 또 다른 면의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더 지혜롭게 행한 또 다른 측면이기 때문입니다. 잠8:13에 "여호와를 경외
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결의 훈련입니다. 성결의 훈련이란 순탄한 영적인 생활을 교만의
기회로 삼지 않고 자기를 죄악에서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천부장이란 상당한
재량권이 있는 장군입니다. 당시 블레셋 치하에 불과 수 천명에 불과한 이스라엘
군대에 천부장이면 대단한 위치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천부장과 같은 영적
인 권능을 받고 그 능력을 통해 먼저 자기의 덕 즉 신앙인격을 세우려는데 힘쓰
지 않고 대 여호와의 사자인 양 방종하다가 교만의 블레셋 사단 군대에게 당하여
교만죄로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철저히 죄악을 우리에게서 뽑아내는
성결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시편을 보시기 바랍니다. 시편의 초반부
는 다윗의 원수를 향한 저주의 기도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읽어도 은
혜가 되지 않고 그대로 생활에 적용하려 할 때 문제가 먾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좀 영성적인 눈으로 시편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원수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오늘도 대항하는 사단과 세속과 죄악과 비진리와 온갖 육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누구입니까? 객관적으로는 왕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이지만 주관적으로는
우리 속의 영성입니다. 이 관점에서 시편을 보시면 영성을 위하여 몸부림치는 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옴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하여 우
리도 영적인 몸부림을 할 때 원수의 세력이 물러가고 소멸되는 놀라운 성결을 경
험하게 될 것입니다.
3. 겸손의 훈련입니다.
17절에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맹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말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했습
니다.
이 번에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자기의 맏딸 메랍을 이용합니다. 이 번이 세
번째입니다. 그러면서 폐백 대신에 사울을 위하여 적과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라고
주문합니다. 그러나 폐백은 부당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골리앗을 죽였을 때 이
미 약속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왕의 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형식상 의중
을 묻는 것일뿐 사실상 명령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거부하면 왕에 대한 모독으로
인정됩니다. 그러니까 불가항력적이라고 할까요? 도저히 청을 거절할 수 없는 상
황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18-19절에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
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비의 집이 무엇이관대 내가 왕의 사
위가 되리이까 하였더니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훌랏 사람 아드
리엘에게 아내로 준 바 되었더라" 즉 극도의 겸손함으로 그의 청을 거절하고 위
기에서 벗어납니다.
그런데 여기 메랍은 요나단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도운 사랑의
사람이지만 메랍은 불행을 몰고 올 저주의 사람입니다. 그것은 그를 맞아들이면
더 험악한 전쟁에서 더 어려움을 당하게 되고, 또 가장 큰 문제는 그녀는 다윗을
사랑하지 않는 여자였습니다. 미갈은 다윗을 사랑했어도 메랍은 그렇지 않았습니
다. 절대로 다윗을 도울 여자가 아닙니다. 나중에 메랍이 이방족속인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주어져 요단강 서쪽 인근 므홀랏이라는 나라의 변방에서 살게 됩니
다. 그리고 나중에 그의 자식들 다섯이 기브온에게 임한 저주를 풀기 위하여 죽임
을 당합니다. 그러니까 무언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여자입니다.
그러니까 메랍은 세상정욕을 상징합니다. 세상정욕에 빠지면 험악한 시험에 던져
질 수밖에 없고, 세상은 결코 성도의 영혼을 사랑하는 법이 없이 없습니다. 그래
서 잠6:25에 "네 마음에 그 아름다운 색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
함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성도의 영혼을 잡으려고 세상정욕과 결혼하
라고 미혹합니다. 그녀의 정체는 이방족속인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과 결혼함으로
드러났습니다. 세상정욕은 이처럼 육체의 정욕과 하나가 됩니다. 둘은 불과 불나
비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또 그녀가 낳은 다섯 아들은 육체의 오각으로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아감을 뜻합니다. 이 세상에 드려진 마음을 회개해야 비오
지 않고 가뭄든 즉 영적 가뭄의 기브온의 저주가 해결됩니다. 삼하 21:10에 그들
을 높이 달고 나니 곡식베기 시작할부터 비가 쏟아집니다. 이는 십자가와 성령강
림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의 세상에 바쳐진 육신의 속성을 십
자가에 매달아야 하겠습니다. 또 그들이 새살림을 차린 나라 변방은 세상 가까이
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왜 건너온 그 곳 요단강을 다시 건너갑니까? 이처럼 메랍
은 세상정욕의 상징입니다. 이는 왕의 명령과 같이 그 세력이 얼마나 강하든지 만
국을 진노의 포도주로 도취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메랍에게 갔더라면
큰 어려움을 당할 뻔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렇게 막강하게 다가오는 메랍을 물리쳤습니다. 왕의 명령으로
다가오는 메랍을 무엇으로 물리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겸손이었습니다. 18절
에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비의
집이 무엇이관대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했습니다. 지금 사단은 우리의 신앙
을 죽이려고 세상의 정욕으로 온갖 미혹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우리
를 세상정욕의 메랍에게 장가보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잘 이겨집니까? 안 이겨집
니다. 그 세력이 막강하여 거의 불가항력적입니다. 사람의 심리는 세상 것에 백이
면 백 번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것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않으면 좋으
련만 그것이 안되니 고민입니다. 그래서 안되면 어쩔 수가 없는가보다 하며 체념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안되면 왜 안되는지 그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볼 때 이미 성도는 세상을 이긴 것으로 되어 있습
니다. 또 믿음을 가지면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공로로 다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요16:33, 요일5:4).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요
일5:4). 믿어도 안되는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왜 안됩니까? 그 이유를 알아야 합
니다. 그 이유는 겸손의 위치에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받아야 할 훈련이 바로 겸손훈련입니다. 교리적으로 이러한 죄성은 이미
십자가에서 못박힌 것입니다. 그런데 믿어도 안되니 문제입니다. 그러나 주의 공
로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적용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십자가
의 진리는 그 만큼 낮아져야 믿어집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내가 무엇입니까 또 시
편에서 다윗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한 것처럼 십자가의 자리까지 나를 낮
추고 낮추어 보십시오. 이상한 일은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 속에 와 닿아 마음을
점령하면서 세상이 이겨집니다. 여러분 사람을 볼 때 성도로 보이지 않고 이성으
로만 보인다면 얼마나 실망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겸손의 위치에 있으면 하수
와 같이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몰려와서 사람을 보아도 이성으로 보이지 않
고 형제 자매로 보입니다. 고난도 은혜로 보입니다. 그래서 약1:10과 같이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철저한 겸손훈련과 함께
겸손의 영을 간구하시기를 바랍니다.
4. 화목과 사랑의 훈련입니다.
20-30절입니다.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혹이 사울에게 고한지라 사
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사울이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그 동안 세 가지의 방법에 실패한 사울은 다시 작은 딸 미갈을 주어 다윗을 전
쟁터에 몰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 번에는 미갈을 아내로 받아들인
것은 사울과의 화목을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화목이란 대
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막9:50에 예수님께서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 마5:23에서는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
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셨습니다. 또 히12:14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했
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별로 달갑지 않았지만 화평을 위해서 순종합니다. 그러나 미갈을
데려 오려면 양피 백을 가져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블레셋 사람 백명을 죽
여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위험을 무릅쓰고 갑절로 이백을 바칩니다. 여기에 바
로 화목훈련의 원리가 나타납니다. 양피란 할례시에 나오는 것으로 원수의 양피를
가져오려면 죽여야 합니다. 이처럼 화목은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목제물로 죽으셨습니다. 또 갑절로 가져왔듯 오른 뺨을 치
면 왼 뺨까지 돌려 대며, 오리를 가자 하면 십리를 가 주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
옷까지도 주고, 원수라도 사랑하며 기도하여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사람을 원수로 만들면 안됩니다. 참고 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는
모자랍니다. 갑절로 사랑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은인으로 만들 때 그들은 나의
인간 방패가 되어 성전을 성곽이 둘러 보호한 것 같이 보호합니다. 그럴 때 그 무
엇이 두려우며 무엇을 해내지 못하겠습니까? 예수님도 그랬기에 아무도 손대지
못했습니다. 다윗도 그렇게 한 결과 미갈을 얻었는데 미갈이 다윗을 얼마나 사랑
했는지 마치 백만 대군을 얻은 것 같이 다윗을 철저히 보호하여 주었습니다. 그런
데 미갈이 누구입니까? 그 이름이 '미가엘'입니다. 미갈과 미가엘은 같은 이름이요
그 의미도 동일합니다. 미가엘은 하나님의 천군장입니다. 미갈은 저주를 받아서
그랬지만 미카엘 천사와 같이 일생 자식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여러 면에서 미카
엘 천사와 흡사한지 모르겠습니다.
29절을 보면 그래서 사울이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 했더라고 했습니다. 그냥
두려워함도 두려움인데 더욱 더욱이니 얼마나 큰 두려움인지 상상하시기 바랍니
다. 다윗이 두려워 수 백명의 호위병들을 대기시키고 밤 잠을 설칠 정도였을 것입
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왕자가 돕고 공주가 도우니 왕이 어떻게 하겠습니
까? 이처럼 블레셋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화목과 사랑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 걸면
하나님이 도우시고 사람이 돕고 원수도 돕고 천지만물까지 나를 돕는 기적이 나
타납니다. 이 사랑은 먼저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랑이요(엡3:17-19) 다음은 사
랑으로 변화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장성한 자의 모양이요(고전13:11) 믿
음의 최고봉입니다(벧1:7). 엡4:15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
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교훈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지혜
네 번째가 보여주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수와 화목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영적 성숙을 위하여 자나깨나 힘써야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경건이란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비롯되는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29절에 "사울이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했
습니다.
그래서 히12:28-29에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
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
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했습니다. 사울처럼 지존방자하던 우리의 마음이 이제
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악을 인해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최후의 방어진은 경건입니다. 내 마음의 세포 하나까지라도 모두 죄악을 동의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 두려운 줄 아는 신앙이 우리를 지켜 줍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두렵고 지옥이 두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하나님 두려운 마음은 극단적
인 상황만이 아니라 평소의 삶에도 큰 영적인 부요를 가져다줍니다. 그 때부터 에
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대 경건훈련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성을 입히시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는 정금같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
기 위하여 하나님의 훈련소에 있습니다. 우리 환경의 모든 것을 우연으로 생각하
면 그 만큼 늦어집니다. 우리는 상황을 훈련임을 깨닫고 자아처리와 성결, 겸손과
화목의 훈련을 잘 받아 하나님의 귀한 성도들로 나타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