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과 기도와 명상은 다를까?
염불(念佛)은 그 의미는 부처를 상념하는 것이다.
물론 열심으로
부처를 상념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이 부처로 변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부처가 되지는 못해도 어느정도의 공덕은 있겠지요?
기도(祈禱)는 神에게 간절히 원하는 바를 고하고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행위입니다.
명상(瞑想)은 고요히 눈을 감고 내면을 향해서 상념에 잠기는 행위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단어의 뜻에는 약간 다름이 있지만
부처,하느님,내면등으로 다가가는 것은 비슷하다고 봅니다.
부처나. 하느님,또는 신이란? 대상이 내면에 있느냐?
외부에 있느냐?의 차이가 아닌가 합니다.
기도나 염불이나 명상의 궁극 목표는 대상에 닥아기 위함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위해서는 완전한 집중이 우선되어야 겠습니다.
집중은 禪定=三昧(사마디)에 들기 위한 행위라 하겠다.
삼매에 진입하지 못한 기도나 염불, 명상,참선은 아무른 효과가 없습니다.
어쩜, 약간의 공덕은 있겠습니다.
매일, 평생, 기도,염불,참선,명상을 한다 해도,
아주 오랫동안 긴 시간 수행을 해도 삼매에 들지 못하면 기도의 목표에 이르지 못합니다.
즉, 명상(기도, 염불,참선)의 효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선정에 들어간다는 것은 내면의 성품(신)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품은 神性,佛性,말씀,등 그 이외의 모든 것 을 포함합니다.
내면의 본성은
형상이지만 형상이 아니고
형상이 아니지만 형상인 또렷한 내면의 성품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명백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또렷하게 신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비몽사몽간에 스치는 장면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주 또렷하고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 영화를 본 것과 같고,
멋진 음악회에 가서 아주 아름다운 음률에 잠겼던 것과 같습니다.
영원토록 기억에 지위지지 않을 뿐 아니라 선정의 깊이에 따라 체험의 경험은 다양해 집니다.
명상속에서 내면의 경혐은 여러형태로 나타납니다.
명상과 선정을,
사랑하는 남녀로 비유하자면,
남녀의 사랑은 육체적 사랑이 함께하여 서로 육체적 관계를 갖이며 육체적인 쾌감을 느낄 때 비로소
인간적 사랑(정신적,육체적)이
완성에 가깝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명상과 선정의 관계도 이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명상에서 선정(사마디)에 이르면 어떤 때는 황홀과 희열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서의 황홀과 희열은 육제적인 쾌감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장좌불와의 명상한다고 해도 선정에 이르지 못하면 결국은 빈 깡통
(도로아미타불) 이라는 것입니다.
남녀의 사랑에 비유하면 짝사랑이라고 할까요?
마치 사랑하는 남여가 사랑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사랑만하고,
육체적 결합으로
완전한 육체적 쾌감을 느끼지 못한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습니다.
명상으로 선정에 진입하는 방법은 여러 길이 있겠지만,
정법안장(正法眼藏)에 길이 있습니다.
정법안장,
이말을 그대로 풀어보면
"정법은 눈에 감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바른 법(正法)은
그 눈(불상의 이마 한 가운데를 말한다.佛眼)에 숨어(藏)있다.는 말입니다.
불상의 이마 한가운데 보물이 있다고 누구나 들었을 것입니다.
그려면 기도던, 염불이던, 명상이던, 참선이던,
한번 시작해봅시다.
2019년 01월 24일
所其가, 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