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2009-02
변 화(變化)
박병민목사(새터공동체)
해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바로 그 계절의 변화는 계속해서 되풀이된다. 춥지 않은 바로 어줍지 않은 겨울이 간다. 춥고 눈이 많이 와야 이듬해의 농사가 잘된다는데 겨울이 어정쩡하다. 분명하지 않고 흐릿한 겨울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더욱더 문제는 비나 혹은 눈이 오지 않는 것이 가을부터 겨울까지 계속 이어저서 여러 지역에서 농토뿐만 아니라 사람에게까지 메마름이 극심해져가고 있다. 그런 중에 한해가 가고 또 한 달이 더 지났다. 춥지 않아 달력이 전해주는 봄보다 봄기운이 더욱더 활갯짓을 하는 것 같다. 벌써 남녘들에서는 봄 농사 준비로 한해를 시작하는 분들이 테레비에서 비쳐진다. 아무쪼록 봄 농사를 앞에 두고 메마른 땅에 반가운 단비가 찾아주어 축축한 봄맞이가 되었으면 한다. 바다, 강, 내가의 물은 따뜻한 볕의 열기에 의하여 하늘로 증발하여 오르게 되고, 그 물기가 하늘의 찬 기운에 부딪히게 되면, 비가 되고, 눈이 되어 다시 땅으로 내리게 된다. 물은 흘러야 되고, 땅의 물은 위로 올라 아래로 다시 내리게 되는 순환(循環)을 계속해가는 것이 자연의 거스릴 수 없는 순리(順理)의 이치이다.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마련이다. 이스라엘의 지형은 북쪽은 사시사철 눈으로 덮여 있는 만년설(萬年雪)의 헬몬산이 자리하고 있다. 그 눈은 따뜻한 남쪽으로 요단강을 따라 녹아 내려간다. 흐르던 물은 중간의 넓은 갈릴리 호수에서 머물러 잠시 쉬다가 다시 밑의 사해바다를 향하여 흐르게 된다. 사해는 보통 바다보다 400여 미터 아래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물은 결국 그 곳에서는 더 이상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그러면서 서서히 증발해 간다고 한다. 그곳은 보통 바다의 다섯 배나 되는 짙은 염도로 인하여 다른 생물이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의 바다인 사해(死海)를 이룬다. 물이 아래로의 유수(流水)가 되지 못하면 썩을 수밖에 없다.사람도 마치한가지이다. 심장에서 시작된 혈액순환이 어느 곳에서 흐르지 않고 머무르게 되면 그곳의 피부는 서서히 썩게 된다. 살아있음은 늘 흘러야 되는 순환을 계속해서 되풀이해야 한다. 그것은 또한 늘 변화해야한다는 말이다.
교회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이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하여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사람으로 변하여 오신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 한다. 그것을 성육신(成肉身)이다. 혹은 육화(肉化), 아니면 도성인신(道成人神)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자기 비하(卑下)의 모습이다. 나는 이 사건을 같이 예배하는 어르신들에게 옛날에 무엇무엇이 어떻게 되어서 어떠했다더라는 그때 그 시절의 그 모습을 연상해서 알아들으시라고 하나님이 사람으로 둔갑(遁甲)을 했다고 말하기도하였다. 변화하면 부정적으로 이하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 전에는 후하고 늘 어울리기를 좋아하더니 이제 장가가더니 변했어” 그렇게 부정적으로 말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자고이래로 사람들은 궁여지책, 곧 막다른 처지에서의 돌파구로 생각다 못해 주위의 다른 여건들을 모색하는 변화를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 옛날 사람들은 그래서 토기그릇, 연장 따위의 기구(器具)를 만들게 되었다. 경제를 얘기하는 시골 의사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공자가 책의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읽었다는 주역(周易)은 그저 점치는 것만을 이야기 하는 책이 아니라, 주역은 경전으로 읽히는 주역인 경서(經書)와 바로 점을 치는 주역인 역서(易書)로 이루어져있는데, 주역을 한마디로 말하면 다음의 말이다라고 하였다. 그 말은 窮卽變 窮卽通 通卽久(궁즉변 궁즉통 통즉구)란다. 그것은 궁하고 막혀 어렵게 되어서 어떤 한계에 부딪히면 스스로 변하게 된다. 변하게 되면 바로 통하게 된다. 그렇게 통하므로 써 영원하게되리라. 사람들은 벽에 부딪혀서 안 된다고 할 때 변함으로써 진보해 왔다. 손에서 미끄러져 나가는 물고기를 만났을 때, 그것을 잡기위하여 사람들은 뾰족하고 날카로운 기구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를 구하기 위한 자구책(自救策)을 만들어왔다. 그러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도구를 만들어가며 변해왔고, 오늘도 사람들은 여러 가지의 물건들을 만들어가며 편리성을 추구해가고 있다. 그런데 반대로 이런 편리성이 과용됨으로 지구온난화 등의 해악이 안겨지고 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변화의 폐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의 바람직한 태도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5-11).” 하나님의 예수로의 비하(卑下)가 예수의 비상(飛上)을 가져다주었다. 이것이 바로 역설이고 변화의 바람직한 모색이다.
공 동 체 이 야 기
섬김의 영성
이성희목사(연동교회)
사회봉사를 뜻하는 ‘디아코니아’는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의 용어입니다. 디아코니아(diakonia)라는 말은 디아코네인(diakonein)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며 디아코니아를 수행하는 사람을 디아코노스(diakonos)라고 합니다. 성경에서의 디아코니아는 순수한 사랑을 가지고 남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며 교회가 성장하고 든든해지기 위한 모든 봉사를 디아코니아라 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일곱 사람은 디아코니아를 위해 세워진 일꾼들이었고(행 6:3) 이들의 섬김의 결과는 교회성장(행 6:7)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회봉사와 교회성장은 성경적 연관성을 가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디아코니아란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나 필수적인 덕목이요 사명이며 사람마다 다른 디아코니아를 가지고 있으며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살게 하신 것으로 우리의 피할 수 없는 과제이며 사명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세 가지를 지향하는데 상향(upreach)과 내향(inreach)과 외향(outreach)입니다. 상향은 교회의 첫째 목표이며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것은 예배이며 전달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내향은 보이는 교회의 모습이며 힘의 집결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훈계이며 축하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외향은 실제적 교회이며 동시에 교회의 사명입니다. 이것은 전도이며 돌봄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상향과 내향에는 상당한 관심을 가졌으나 외향은 상대적 무관심이었습니다. 특히 외향을 전도라고 한 것은 좁은 의미의 개인영혼구원이 아니라 사회를 돌보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대형교회들이 교회성장이라는 명제에 묶여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지나온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사회를 외면하였고 최근에는 그 대가로 사회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앤더슨(Leith Anderson)은 베이비붐 이전세대(Pre-Boomers), 베이비붐 세대(Baby Boomers) 그리고 베이비 거부 세대(Baby Busters)의 특징을 비교하면서 베이비붐 이전에에는선교와 기도, 성경공부에 관심을 가지던 교인들이 베이비붐 세대에는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베이비 거부 세대에에는 복지와 관련된 프로그램이나 봉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개혁주의는 전통적으로 사회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집니다. 칼뱅은 1541년에 교회의 법령(Ecclesiastical Ordinances)을 완성하고 이에 따라 목사, 장로, 집사, 교사의 네 직분을 제네바교회의 정치를 위하여 두었는데 집사의 직은 디아코니아를 위하여 전적으로 투입하였습니다. 그는 집사를 “교인들로부터 매일의 적선금과 대여금을 받아서 가난한자들을 위하여 저축하고 도와주는 목회의 업무를 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1550년대에 이르러 종교적 피난민이 제네바에 급증함에 따라 제네바는 디아코니아가 증가하게 되었고 새로운 사회복지 향상을 요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종합복지관을 설립된 것이 종합병원이었습니다. 칼뱅이 제네바에 오기 전에는 병원의 봉사자들이 시 직원이었으나, 온 이후로는 교회의 집사들이 병원의 봉사자들이었습니다. 병원은 환자뿐 아니라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노약자, 과부, 고아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관이라고 하였고 다양한 사회복지를 수행하는 기관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개혁주의의 디아코니아를 회복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교파나 교단 경쟁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된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우리의 사회에 대한 관심과 사회를 위한 목회 구조를 대 전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사회를 섬기는 것은 교회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섬김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섬김이란 교회의 생존 수단이며 존재 가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섬김이란 필수과목입니다. 성경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섬김은 성경적 삶 그자체이며 실천적 삶입니다. 디아코니아란 성경적 의미가 없이는 완성될 수 없으며 성경에 근거할 때 비로소 디아코니아입니다. 모든 섬김은 영성입니다.
(아가피아 트레스 디아스 소식. 2009년 봄. 이달의 영성)
공 동 체 소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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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터 공동체 가족
권희숙 채경일 주송례 진영택
김정화 박소웅 박정임 라홍채
최성재 최영애 정무래 박종만
박병민 진선미 박한솔 박진솔
* 여러 가지의 육신과 정신적 아픔 중에 있는 새터공동체 식구들의 건강한 몸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세요.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충전교회.김기홍.정무래.금산군자원봉사센타(최신현외3인).최영애.라홍채.박종만.진영택.최성재.김정화.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12인).연월순.양오석.동산교회(박영철).성룡건설산업(김상종).추부새마을금고(이상근).채윤기(박현실).향림원푸드뱅크.대전충남지방통계청.최선희.신영숙(백운길).진명구.공주원로원(김영윤).세광교회.향림원푸드뱅크.살림교회(박상용외9인).추부제일교회.진주문교회(정경은).신건태.금산주부클럽(5인).금산읍교회(김철우).수영교회.전주동성교회(이재군).대전성남교회.혜성교회남선교회(김영진.김문명).대전노회.대한적십자금산군추부봉사회(성삼순외5인).향림원푸드뱅크.금산군모란회(5인)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