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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2010년 11월 05일 (금) | 유영주/ 언론개혁시민연대 상임정책위원 info@ilemonde.com |
국가가 아니다
2008년 3월 26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 스타디움에서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남북 경기가 열렸다. 원래 이 경기는 홈어웨이 규정에 따라 평양에서 열리기로 돼 있었다. 1990년 10월 11일 평양 능라도경기장에서 펼친 남북통일축구대회 이후 18년 만의 일이었다. 남북 축구시합이 예정된 평양이 아닌 상하이에서 열리게 된 이유는 국기와 국가 문제 때문이었다. 국제축구연맹(FIFA)의 월드컵 예선 규정은 “참가국 국기를 경기장에 게양하고 선수들이 입장한 뒤 국가를 연주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북은 평양에서 태극기 게양과 애국가 연주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시합은 제3국인 중국에서 열렸다. 축구시합 한 달 전에 미국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평양 공연에서 미국 국가를 연주하고 북의 텔레비전이 생중계한 점과도 구별된다. 북은 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비근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2007년 10월 남북 정상회담 때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제2별항의 정상회담 정례화 문제를 의논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의 정례화를 제안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친척 집에 갈 때 정례적으로 가느냐. 수시로 놀러 가는 것이다. 국가 간 관계에서는 정례적이지만 북남 관계에서는 맞지 않다”고 응대했다. ‘우리 민족’, ‘아랫집·윗집’을 의미하는 호의적 취지의 답변이면서 동시에 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북은 지난 9월 28일 조선노동당 당대표자회를 열고 일부 규약을 수정했다. 당대표자회는 당 규약의 당면 목적인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 과업을 완수하는 데 있다”를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 민주주의 혁명의 과업을 수행하는 데 있다”로 개정했다. 또한 “조선노동당은 남조선에서 미 제국주의 침략군대를 몰아내고 식민지 통치를 청산하며”를 “조선노동당은 남조선에서 미제 침략무력을 몰아내고 온갖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끝장내며”로 수정했다. 가장 큰 변화는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민주주의 혁명’으로 바꾸고 ‘식민지 통치’를 삭제한 점이다. 그런데 한(조선)반도를 의미하는 ‘전국적 범위’는 건드리지 않았다. 남쪽을 민주주의 혁명의 대상으로 두고 외세의 지배와 간섭에 맞서야 한다는 전통의 의지는 바뀌지 않았다.
남도 다르지 않다. 남은 헌법 총강 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라는 영토 조항과, 제4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라는 한반도 통일 구상을 갖고 있다. 한반도 통일에서 북이 전국적 범위의 ‘민주주의 혁명’을 호명하듯 남도 마찬가지의 범위에 대해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의 확립’을 호명하고 있다. 분단 이래 남과 북은 서로 결이 다른 국가와 체제를 구축해오는 동안 남이 북을, 북이 남을 온전한 하나의 국가로 인정한 적은 없었다. 통일 방안에서도 북은 반외세 자주화 노선에 기반을 둔 ‘연방제 통일’ 방안을, 남은 분단 논리에 기초한 ‘남북연합 통일’ 방안을 통일의 상으로 제시해왔다. 말하자면 북과 남에서 분단 고착 세력의 지배력이 유지되고 분단 체제가 강화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관계
1992년 2월 19일 남과 북은 ‘남북 사이의 화해 및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해 발효시켰다. 기본합의서는 남북 화해, 남북 불가침, 남북 교류협력 등의 내용을 담았다. 제3국의 개입 없이 남북 당국이 자주적으로 공개적인 협의를 거쳐 채택해 발효시킨 공식 합의서라는 데 의의가 있었다. 기본합의서 1장 1조는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로 정리됐으며, 남북관계에 대해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인식하고 “평화통일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에서 채택한 6·15 선언은 상호 체제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미래지향적으로 의기투합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6·15 선언 제2항(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나가기로 했다)은 두 통일 방안의 공통분모를 확인한 역사적인 조항이었다. 남북 화해의 물결을 타고 상대방의 통일 방안을 상호 통일 지향적으로 해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1992년에 채택된 ‘남북교류협력 부속합의서’와 마찬가지로 2005년 입법화된 ‘남북관계발전법’ 역시 남북관계를 국가 간 관계가 아니라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관계로 놓고 제정됐다.
2006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때 한-미 양국은 원산지 분야에서 국가 간 무역통상 문제를 다루었다. 한-미 FTA 원산지 분야 협상의 세 가지 전제 조건은 △한반도 비핵화 진전 △남북한 관계에 미치는 영향 △노동·환경 기준 충족이었다. 2·13 합의 조치 완료, 핵 불능화와 테러 지원국 및 적성국 교역법 해제 조치가 이루어진다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셈이었다. 한국 협상단은 개성공단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연장’이라는 정치적 측면과, ‘개성공단을 포함한 북 생산 제품의 대외 수출길 확보’라는 경제적 측면에서 원산지 인정을 주장했다. 반면, 미국 협상단은 적대적 대북정책의 연장 측면과 전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협상 카드로서 원산지 불인정을 주장했다. 협상은 정치적 차원에서 매듭됐다. 한-미 FTA가 발효되고 ‘한반도 역외가공지역(OPZ) 위원회’가 가동되면 한-미 FTA의 연장 위에서 전개되는 남북경협은 남북 FTA의 의미를 갖는다. 당시 일각에서는 경제협력강화약정(CEPA)을 제기했고, 정부는 적극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남북기본합의서의 ‘교류협력에 관한 부속합의서’를 토대로 남북 간 상품 교역, 서비스 교역, 무역·투자관리화 조치 등을 단계적으로 자유화하는 것을 골격으로 하는 한편, 부속합의서에 무관세 제도를 규정했다. 사실상 남북 FTA를 의미했다.
남과 북은 2007년 10·4 정상 선언과 이어진 남북 총리회담을 거치면서 남북 연합의 골격을 구성하는 단계-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부총리급),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추진위원회(장관급), 사회문화교류협력추진위원회(장관급) 등 3개 위원회 신설과 국방장관회담 및 남북적십자회담(차관급)의 운영- 로 발전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참여정부는 ‘동북아경제공동체구상’을 제시하고 추진했다. 참여정부의 경제공동체는 북이 강조하는 민족경제의 범위를 넘어 동북아 시장을 대상으로 했다. 이 경제공동체의 개념은 FTA·환율·에너지·물류 등 역내 공동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 협의 및 공조 단계로서 ‘동북아경제협력체’와, 통화 통합 등 실질적인 단일 시장 형성과 거시경제 및 대외경제 정책 등에서 공동 정책을 수행하는 단계로서 ‘동북아경제공동체’로 구분된다. 이에 따르면 실현 가능하고 용이한 사업부터 추진하는 단계적 접근 원칙, 다양한 협력사업과 FTA를 동시에 추진하는 동시병행 원칙, 동북아경제협력을 통해 북의 개혁·개방을 유도하는 남북경협과의 연계를 추진 원칙으로 했다. 시기적으로는 2006~2007년 경제협력의 제도적 기반 조성, 2단계(2008~2012년) 경제협력 본격화, 3단계(2013년 이후) 동북아경제공동체 이행기로 설정했다. 참여정부는 한-중-일 FTA 또는 ‘아세안+3’ 등 동아시아 경제 통합 문제도 이 기간에 더 구체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참여정부는 북에 대해 경제적으로 무역통상 대상으로서 국가로 간주하고, 체제와 제도에서는 남북 연합을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경제적으로 FTA에 준하는 남북경협의 확대를 통해 경제공동체를 구상했고, 정치적으로는 ‘낮은 수준의 연방제=남북 연합’이라는 6·15 선언을 계승·발전시키는 노선을 견지했다. 그러나 정권이 교체되면서 이 구상은 굴절 또는 유보됐다.
이명박 정부는 6·15 선언과 10·4 선언의 맥락을 계승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 첫해 3월에 2008년 남북관계 발전 실행 계획과 통일정책 추진 4대 원칙(실용과 생산성, 원칙(비핵화, 남북 대화)에 철저한 유연한 접근, 국민 합의, 국제협력과 남북협력의 조화)을 제시했다. 북핵 해결을 전제로 한 대북 접근 맥락은 그 자체로 대결적인 성격을 띠었고, 남북관계의 발전은 다시 굴절됐다. 이로 인해 교류와 협력, 또는 경제공동체 구상 같은 가치나 기획은 하위로 배치됐다. 다시 분단이라는 특수관계가 강조되는 정세가 형성됐다.
결이 다른 국가와 체제
남은 1980년대 이후부터 외환위기를 겪기까지 (종속적) 국가 독점 자본주의로의 발전 과정을 밟아왔다. 외환위기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축적 체제가 만들어졌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는 사회 전 부문에 걸쳐 시장민주주의를 관철하는 정책을 펼쳤고, 신자유주의 정치체제에 의한 시장민주주의의 강화는 신자유주의 축적 체제로서 FTA 체제를 구축했다. 손호철은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97년 체제로 변했고, 이명박 정부는 우경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경제)와 제한적 민주주의(정치)라는 97년의 특징을 갖기 때문에 97년 체제라고 주장했다. 심광현은 한-미 FTA를 경과하며 형성된 FTA 체제의 특징으로 초국적 자본의 주도하에 시장 논리가 민주주의를 압도하는 질서를 갖추었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신자유주의 경찰국가의 형태를 띠며 국가 장치의 친자본적 성격이 강화되는 모습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한편, 북은 수령 중심의 당-국가 융합 체제를 형성해왔다. 북에 대해 와다 하루키는 ‘국가사회주의의 기초 위에서 2차적으로 형성된 구조로서 김일성이 유격대 사령관이고 전 국민이 유격대원인 유격대 국가’로, 브루스 커밍스는 ‘사회주의적 조합주의 국가체제’로 정의했다. 이처럼 ‘우리식 사회주의’로 회자되는 북의 정치체제는 견해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당 우위의 당-국가 융합 체제로서 ‘국가사회주의체제’로 정의된다. 북은 수령제와 주체사상, 그리고 주체사상을 실현시키는 방도로서 혁명적 군중 노선을 관철해왔다. 북 정치체제는 북 인민에 대한 당-국가의 전일적 지배체제로서, 주체사상을 통한 인민의 이데올로기적 통합에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고, ‘수령-당-인민’의 수직적 동원 구조를 재생산해왔다. 옛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했음에도 북 체제가 유지될 수 있던 데는 수령제 수립과 함께 옛 계급사회 착취 폐기, 복지체제 수립, 혁명적 군중 노선 채택, 민족 자주성 확보 등이 배경이었다.
북이 다른 어떤 사회주의체제보다 당과 국가에 대한 인민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당 우위의 당-국가 융합체제는 위로부터의 국가 강화를 가져왔다. 따라서 북이 지난 시기 계급적 착취 폐기와 복지체제 수립 같은 주요한 사회주의적 조치와 함께 인민대중의 당-국가 융합체제로의 통합에 성공했음에도 ‘생산자의 자유로운 연합체’라는 사회주의 본래의 의미를 살리지는 못했다. 말하자면 ‘국가의 사회화’가 아니라 ‘사회의 국가화’가 전면적으로 관철되면서 국가의 인민대중 통제가 강화됐고, 인민대중은 자신에게서 분리된 국가와 국가로 전화한 당에 종속되는 관료적 사회주의체제의 발전에 봉사해온 것이다.
이처럼 남과 북은 분단을 배경으로 이질적인 국가와 체제를 구축해왔다. 오늘날 근대국가는 ‘자본제(Capitalist)-네이션(Nation)-스테이트(State)’가 결합된 삼위일체의 성격을 갖는다. 자본·네이션·국가는 봉건시대에는 도시·농업공동체·봉건국가(영주·왕·황제)로 구분됐다. 봉건체제를 붕괴시킨 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전반적 침투였다. 이 경제 과정은 정치적으로 절대주의 왕권국가라는 형태를 취함으로써만 실현됐다. 절대주의 왕권은 상인 계급과 결탁해 다수의 봉건국가를 무너뜨림으로써 폭력을 독점하고, 봉건적 지배인 이른바 ‘경제외적 지배’를 폐기했다. 이때 비로소 국가와 자본이 결합됐다. 남은 ‘자본의 지구화’(Globalization)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음으로써 자본제 우위의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결합을 강화해왔고, 북은 폐쇄적인 환경 속에 스테이트와 네이션이 강력하게 결합하는 방식으로서 자본·네이션·스테이트 체제를 형성해왔다. 가라타니 고진은 부르주아 혁명인 프랑스혁명에서 자유·평등·박애가 주창된 것처럼 자본·네이션·국가는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통합된다고 보고, “근대국가”는 ‘자본·네이션·스테이트’로 불러야 하며, 이것들은 상호 보완·보강한다”고 주장했다. 고진은 이것들이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해 계급적 대립으로 귀결된다면, 국민의 상호부조적 감정에 의한 해소와 국가에 의한 규제로서 부가 재분배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자본주의만을 타도하려고 한다면 국가주의 형태가 되거나 네이션의 감정에 걸려 실패하는데, 고진은 전자를 스탈린주의로, 후자는 파시즘으로 이어진다고 풀이했다. 물론 이를 남과 북에 바로 적용해, 북을 스탈린주의로 남을 파시즘으로 단정하는 것은 비록 그런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그렇다면 남을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북을 사회주의 생산양식으로 정의한다고 하자. 발터 베냐민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건 사회주의 생산양식이건 양쪽 모두 자연의 착취에 기반하고 있으며, 극도로 이기적인 경제체제라는 것을 예언자의 눈을 통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과학 기술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지점까지 혹은 거의 지배했다고 말할 수 있는 지점까지 성장했고, 오로지 이와 동등하게 강렬한 힘을 가진 사회적 권력의 테크놀로지만이 과학 기술의 횡포를 저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힘은 전체주의적 경직성을 낳을 위험이 있었다. 베냐민에 의하면 제멋대로이거나 완전한 통제이거나 둘 중 하나였으며, 둘 다 똑같이 위험했다. 이를 남과 북에 바로 적용해 남이 ‘제멋대로’고 북을 ‘완전한 통제’라고 단정하는 것 역시 비록 그런 경향이 있다손 치더라도 신중하게 접근할 일이다.
논쟁의 히스토리
카를 마르크스는 ‘혁명적 사회체제’에 대해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체”로서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연합체”로 정의했다. 발터 베냐민은 ‘인간화된 노동’에 대해 “자연을 착취하지 않는 노동은 자연 속에 잠재된 창조적 가능성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노동”으로 진정한 혁명 상황에서만 인간화된 노동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가라타니 고진은 “현재의 ‘자본-스테이션-스테이트’라는 결합체를 위로부터 억압하는 운동과 아래로부터의 호혜적 교환 양식을 구축해 극복하자”고 제안했다. 마이클 레보위츠는 볼리바르헌법에 주목하는 가운데 “자본의 성장 드라이브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부가 노동자 자신의 발전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보고 “자본에 대한 대안으로서 인간 발전, 인간 역량의 성장, 인간 능력의 확장을 통해 자신을 더 나은 세계의 당위로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다양한 지향은 인식론과 사회혁명 방법론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주적 국가, 인간화된 노동, 호혜적 교환 양식, 인간적 사회주의 등과 같은 대안적 미래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남과 북이 진보한다는 것, 즉 남의 발전과 북의 발전, 남북관계에서 분단 모순을 해결하는 ‘내생적 발전 경로’를 찾을 수 있다면 논쟁 지형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 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논쟁은 크게 월남이냐 월북이냐, 연방제냐 남북 연합이냐, 남삼각이냐 북삼각이냐, 냉전이냐 햇볕이냐로 구분됐다. 다만, 햇볕정책을 계승한 참여정부의 ‘경제공동체’ 추진은 한-미 FTA와 맞물려 남북 FTA와 동북아 경제공동체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논쟁 지형을 형성했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등을 골자로 한 10·4 정상 선언은 기존 양자택일의 논쟁을 경제협력에 기초한 통일의 방법론까지 확대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이런 논쟁은 때론 굴절과 왜곡을, 때론 급진적인 내용과 방식으로 남북관계의 발전에 기여했다. 다만 이들 논쟁은 분단을 전제한 상태에서 국가(정부)를 매개로 이루어졌으며, 정부가 통제하는 ‘창구 단일화’의 틀을 벗어나 구성되거나 재생산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분단 모순 해결, 통일 과제 해결은 항상 국가(정부)의 몫이었고, 남북관계 발전의 바로미터는 남북 정부의 화해 협력 의지에 따라 좌지우지됐다. 한편 운동 진영에서는 1980년대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해방론’(NLPDR)이냐 ‘선 혁명 후 통일’이냐의 뿌리 깊은 논쟁이 있었고, 2006년 핵 자위권 논쟁, 2007년 체제 논쟁, 2008년 종북주의 논쟁에 이어 최근에는 3대 세습 논쟁으로 이어졌다.
핵 자위권 논쟁은 지난 10월 북이 핵 시험을 단행한 직후 불거졌다. 클린턴 정부는 북의 핵 보유 자체를 불용했지만, 북은 핵 시험이 불가피한 자위적 조치며, 핵물질의 해외 이전을 하지 않고, 비핵화를 최종 목표로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민주노동당 내 일부는 북핵 용인론을 제기하며 사태의 1차 원인을 주로 미국으로 돌렸다. 그러나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을 비판하고 철회를 요구하는 것과 북의 핵 보유 자체를 정당화하는 것은 인과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비판받았다. 한편, 핵 시험 반대를 주장한 세력들은 사태의 1차적 책임이 북 정권과 지도부에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북의 정치적 행위이자 상징으로서 핵 보유 및 시험을 일반론 차원의 비핵화로 등치해 민족을 초월하는 문제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였다.
체제 논쟁은 민주노동당 내 경선 레이스를 펼치던 후보 간 정책 대결을 통해 구체화됐다. 노회찬은 ‘P+1 코리아구상’을 통해 2012년에 ‘2국가-2체제-2정부’ 형태를 띤 ‘코리아연합’을 주장했다. 코리아연합은 국제법상 두 개의 국가이나 하나의 국가를 준비하는 통일 1단계라고 설명했다. 권영길은 ‘연합연방통일공화국’ 수립을 위한 ‘3단계 남북공동조치’를 제기했다. 연합연방통일공화국은 ‘1국가-2체제-2정부’ 형태로, 연방헌법에 기초한 통일국가를 의미했다. 심상정은 ‘한반도평화경제공동체’를 제시하며 한반도 평화체제가 지향하는 통일국가는 ‘1국가-2체제-2정부’라고 정리했다. 민주노동당 내에서 전개된 체제 논쟁은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과 ‘동북아경제공동체구상’과 차별을 부각하는 식의 경향이 뚜렷했다. 권영길의 ‘연합연방통일공화국’이 연방제를 답습한 점을 제외하면 나머지 주장은 아이디어 수준에 머물렀다. 논쟁은 체제를 전망하는 거대 담론의 범주에서 구체적인 현실 세계로 내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긴장감 없이 싱겁게 끝났다. 통일이 분단된 두 개의 국가와 체제가 융합되는 과정에서 국가와 정부의 역할만을 놓고 접근한 데서 비롯된 한계이기도 했다.
17대 대선 직후에는 ‘종북주의’ 논란이 불거졌다. 종북주의라는 말은 민주노동당 내 논쟁의 산물이다. 당시까지는 ‘친북’, ‘연북’, ‘반북’과 같은 용어가 사용됐으나 이때부터 진영 내 종북주의가 본격적으로 쟁점이 되었다. 종북주의를 비판한 이른바 ‘평등파’는 자위적 핵무장 옹호론과 일심회 사건 등을 종북주의의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종북주의 논란은 당내 패권주의 문제와 맞물려 분당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남·북·남북관계 발전의 측면에서 종북주의 논쟁은 별다른 영감이나 감흥을 주지 않았다. 대중에게도 외면받았다.
이윽고 지난 10월 1일 <경향신문>이 ‘민노당은 3대 세습을 인정하겠다는 것인가’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하면서 이른바 ‘세습 논쟁’이 시작됐다. 2년 전 종북주의 논란이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패권주의와 어울려 불거졌다면, 세습 논쟁은 언론이 도화선이 되었다. <경향신문>과 <프레시안>, <미디어오늘> 등의 지면을 통해 확산된 세습 논쟁에는 상당히 많은 정치인과 오피니언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논쟁은 북의 세습을 비판할 것이냐 용인할 것이냐라는 프레임 안에서 가열되며, 종북주의 논쟁이 재연되는 양상을 띠었다.
논쟁의 와중에 세습 찬반의 프레임에서 한 걸음 물러나 분단에서 비롯된 문제에 거시적으로 접근하거나 진일보한 관점으로 살펴보는 사례들이 있었다. 최형익은 “한국의 진보운동이 불안정한 동북아 정세를 판단할 능력이 부재한 가운데 내부의 손쉬운 적 만들기가 ‘종북주의 딱지 붙이기’로 비화됐다”고 진단했다. 권순원은 “북을 외교 대상으로 볼 것인지 정치 대상으로 볼 것인지를 엄격하게 구분한 다음, 북을 독립된 정치체제로 간주해 외교적인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택광은 “북을 현실 사회주의로 규정하는 한편, 세습 비판은 정치 원칙 차원의 문제이며, 민족국가 단위로 정치가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서 민족주의는 더 이상 좌파적 상상력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스스로 ‘청년 알튀세리안’이라고 호명한 박가분은 “남북 민중 모두에게 분단만큼 큰 문제가 없는데, 이 문제에 관한 주체적 기획을 상실한 채 6자회담 따위의 기술 관료들한테 모든 논의를 맡긴 진보운동의 상태가 곧 ‘진보의 종언’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신기섭은 “북의 권력 세습으로 상징되는 정치·국가 체제 문제에 대해 민중의 정치 권리를 증진시키는 동시에 민중의 행복을 돕는 최선의 방안이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평가할 필요”를 제기했다. 오항녕은 ‘사람들이 권력을 부여 또는 위임하는 방식’에 대한 역사적·정치적 사유의 계기를 제공하고 “백마디 논평보다 인민의 삶에 얼마나 많은 리더십 부여 방식이 있는지”를 물음으로써 주목받았다.
내생적 발전 경로
남과 북이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관계라는 점은 거부할 수 없다. 남이 북을, 북이 남을 온전한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더라도 분단 모순에서 비롯된 특수관계의 형질이 일거에 변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논쟁 영역이 중요하다. 논쟁 영역에서는 현실 정치의 조건을 밀도 있게 고려하면서 사유와 실천의 계기를 확장해야 하고, 논쟁의 질적 전환을 위한 다양한 방편을 제시해야 한다. 특히 남·북·남북관계에 대한 사유와 논쟁의 영역에서 과거와는 다른 ‘내생적 발전 경로’를 제시할 수 있느냐 여부가 논쟁의 질적 비약을 이끌 수 있다.
가령 베네수엘라에서 내생적 발전 경로는 볼리바르헌법의 지위와 내용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볼리바르헌법에서 정치적 영역은 공적 업무의 운영을 형성·수행·통제하는 데 대한 민중의 참여가 개인과 집단, 그들의 완전한 발전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방식을 포괄한다. 경제적 영역은 자주관리, 공동경영, 금융적 성격의 것을 포함해 모든 형태의 협동조합·저축기금·공동체기업, 그리고 상호협력과 연대의 가치가 인도하는 다른 형태의 협회를 포괄한다. 정치적 영역이 경제적 영역에서 민주적·참여적 주체를 요구하는 사회, 주체로서 인간의 완전한 발전이 국가 정체성의 가치를 일부로 체현된 사회변혁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이때 볼리바르헌법은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핵심적 요소를 포함하는데,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요소의 공존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볼리바르헌법은 워싱턴 콘센서스 요소를 상당히 뒷받침하는 동시에, 민중이 권력의 대상이자 주체인 전복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결국 어느 요소가 승리할 것인지를 내생적 발전 경로의 궁극적인 문제로 인식한다. 그리고 현재진행형이다.
남·북·남북관계에서 ‘내생적 발전 경로’란 우선 남에서 남이, 북에서 북이 제각기 독특한 형태로 구축된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를 극복하는 다양한 계기를 발견하고 확장하는 데 있다. 남이 남의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북이 북의 한계를 극복하는 운동이 이루어지고, 호혜적 남북관계와 역내 평화와 인권을 실현하는 지역공동체 구상이 동시성을 갖도록 하는 사유 과제다.
아울러 남북관계에서 남북이 분단 모순과 분단 체제를 극복하려면, 국가(정부)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인민의 참여와 개입을 통한 전략 과제를 논쟁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남과 북을 온전한 하나의 국가로 간주하기를 거부하는 분단 고착 세력의 지배력이 유지되는 한, 국가(정부) 차원의 인위적 분단체제 극복은 요원하다. 따라서 희망은 남북 민중의 자주적인 참여와 개입으로 분단 모순을 해결하려 했던 단절된 운동의 전통을 복원하고, 또 논쟁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있다. 남북관계 발전에서 국가와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창구 단일화를 끊임없이 회의하고, 주민 참여를 통한 지역자치 권력 차원의 교류와 연대를 꾀하는 일, 그리고 남북 인민의 거주·이전의 자유를 위한 자유 왕래의 상상력을 사회화하는 실천이다. 이처럼 논쟁을 논리적으로 비약시킬 수 있다면, 분단체제를 통해 권력을 향유하고 재생산하는 현실 분단 고착 세력의 힘을 분산하는 데 기여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외세를 배격한 독립적인 역내 공동체 구상도 구체화할 수 있다. 아울러 이렇게 접근할 때야 비로소 진영 내 논쟁, 즉 핵자위권·체제·종북주의·세습 논쟁을 관통해온 이른바 자주파와 평등파의 낡은 논쟁 프레임도 형질전환할 계기를 포착할 수 있다.
글•유영주
진보전략회의 회원, 남북경협포럼 전문위원이며, ‘미디어행동’ 등에서 사회운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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