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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을 찾아가는 인생길
1959년 7월 5일(일), 전 본부교회.
누가복음 15:11-32
<기 도(Ⅰ)>
사망에서 허덕이던 저희들이 아버님이 그리워 이날 다시 모였사옵니다. 이제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에 머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의 몸 마음이 아버지의 것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는 무한한 수고를 개의치 아니하시고 시대 시대와 세기 세기를 거쳐오면서 우리 선조들과 동반하시기에 얼마나 애쓰셨사오며, 선조들의 가는 길을 개척해 주시기에 얼마나 수고로우셨사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의 선조들은 하늘의 수고의 공적을 유린하였사옵고, 염려의 심정을 품게 한 면목없는 모습들이었음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선조들이 저끄른 죄상이 천추의 한으로 남은 것을 알았사옵고, 한스러운 타락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6천년 동안 수많은 인류를 도탄 중에 몰아넣은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님의 심정을 배반하고 서럽게 했던 역사적인 선조들의 저끄러진 마음을 저희들이 다시 상속받을까봐 두렵사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은 한의 고개를 넘어야 하고 선조들이 남긴 한을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될 끝날에 처해 있는 저희들이오니, 이제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에 사로잡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저희의 몸이 아버지의 몸을 대신할 수 있는 영광의 한 시간을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누가 아버지의 심정에 화하여 눈물 흘리며 호소할 자가 있사오며, 아버지의 사정을 대신하여 싸울 자가 있사오리까?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은 많사옵고 움직이고 있는 인류의 형태는 많은 모양을 갖추고 있사오되, 아버지의 가슴에 품고 있는 사정과 심정을 놓고 의논의 상대가 될 수 있는 한 곳과 한 지역과 한 사람이 없어 슬픔과 탄식의 역사를 거듭해 오시는 아버지이신 것을 알고 있는 자가 적사옵니다. 이런 서글프고 분통한 아버지의 내적 심정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오니, 오늘 마음을 풀어 놓고 사정을 털어놓고 모든 것을 아버지 것으로 접붙일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저희의 일체를 용납치 않는 이 한 시간이 되옵고, 오로지 아버지와 접붙인 자리에서 즐길 수 있는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이 시간 충심으로 아버지 앞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날 불초한 모습들이 천정을 흠모하며 무릎을 연하였사옵니다. 저희의 불쌍한 사정을 아시는 나의 아버지, 처참한 환경에서 동반하여 싸워주신 아버지, 오늘 저희 마음을 모두어 아버지 앞에 부복하였사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저희는 아버님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되고 아버지 앞에 주관 당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서 저희의 정성과 심정을 다 들여 당신을 모시기 위하여 다년간 수고의 행로도 개의치 않고 나왔사옵고, 어렵고 한스러운 고빗길도 참고 넘어왔사옵니다.
이러한 길을 참아 나온 것은 아버지와의 인연의 역사를 남기기 위함이었사옵니다. 오늘 이 자리까지 나온 저희들, 아버지께서는 찾는 자를 무시하지 아니하셨고, 원수를 배척하지 않으셨사옵고, 구하는 자를 친구의 입장에 세우시기 위하여 수고하신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오늘 저희들은 마음을 다하여 구하고 싶사옵고, 정성을 다하여 찾고 싶사옵고, 모든 것을 다 드려 아버지와 인연 맺고 싶사오니 아버님, 긍휼히 보시옵소서. 구하는 바의 뜻을 이루어 주시옵고, 찾는 바의 뜻을 이루어 주시옵고, 문을 두드리는 사정을 들으시어서 이루어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부족한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고대하는 것이 있다 할진대는 아버지의 마음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한 시간을 갖는 것이옵니다. 그것이 저희의 전체 요구요, 저희의 전재산이며, 저희의 전생명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님, 이 시간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을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아버님, 저희들이 가야 할 생명의 일로를 세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까지 어려운 가운데서도 저희를 견디게 하셨사옵고, 핍박 중에도 참게 하였사오며, 쓰러지는 자리에서도 한을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역사하시며 붙들어 주시기에 수고하신 아버지이신 줄 아옵니다. 오늘 자기의 정성과 심정을 다시 한번 아버지 앞에 바치기 위하여 모인 당신의 아들딸들이 많사오니 아버지, 이들의 마음에 친히 운행하여 주셔야 되겠사옵니다. 이제 이들의 심정 위에 아버지께서 다시 운행해 주셔야 되겠고, 이들의 생명에 하늘의 생명이 접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심정에 사무친 원한을 품고 이제 원수를 대하여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될 끝날의 사명을 해야 할 때가 되었사오니, 아버지시여, 당신의 힘을 나타내 주시옵고, 생명의 권한을 가지고 나타나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 드리고자 할진대 사랑의 원칙을 갖추어 나아가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생명의 주체 앞에 나서서 원수를 맞아 싸울 수 있는 용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복귀된 동산에서 이 땅 위의 뭇 생명들이 그러한 자신을 바라보고 살아 나갈 수 있는 생명의 조건을 갖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날까지 믿노라 하였던 자신의 신앙을 회개할 수 있는 마음, 자신이 움직인 것을 놓고 반성하고 회개할 수 있는 마음, 자신이 바라보던 소망을 놓고 뉘우칠 수 있는 마음, 스스로가 찾고 있던 내적 심정을 비웃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아버지 것으로 전부를 인연 맺고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영광의 자리로 저희를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나의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삼천리반도를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 땅은 시대를 거쳐오면서 수많은 민족 앞에 유린당한 땅이요, 원수들에게 밟히던 땅이었사옵니다. 이 땅의 삼천만 민족은 피어린 역사의 한을 품고 있음을 저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이 민족의 심정 위에 당신의 심정이 연하게 하여 주시옵고, 이 민족의 사정 위에 당신의 사정이 연하게 하여 주시옵고, 이 민족이 소망하는 것이 당신이 소망하는 것과 연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저희로 하여금 한스러운 과거를 원망하는 자리에 머물지 말게 하여 주시옵고, 저희들 앞에 다가오는 하늘의 때를 맞기 위하여 염려하여 호소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이시여, 남겨진 천적인 역사가 있사와 수많은 민족을 대신하여 이 민족을 찾아오신 아버님의 발걸음이 탄식과 서러움으로 인해 돌려지는 날이 없게 하여 주셔서, 슬픔의 한을 남기는 이 땅이 되지 말고, 그러한 이 민족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잠들어 있는 27억 인류는 아버지께서 각자의 마음에 등불을 켜서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한때를 준비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이 인류를 깨우쳐야 할 사명이 저희에게 있사옵고, 인류의 복잡한 사정을 타개하여 새로운 이상천국을 건설해야 할 사명이, 복지 건설의 사명이 저희에게 있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의 이 불초불비하고 부족한 모습들이 무릎을 꿇고 황공하고 죄송한 마음에 어리어 있사오니, 이 시간 호소하는 심정을 통하여 천상의 놀라우신 은사를 내려 주시옵소서. 아버님이 현현하셔서 그러한 심정이 아닌 것은 일체 제거시키고 저희들의 모든 것을 아버지의 것으로 인연을 맺어 아버지께서 저희를 대하여 당신의 후계자라고 인정할 수 있는 이 시간 되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님, 서울에 남아 있는 식구들과 지방에서 모여든 식구들이 아버지 앞에 새로운 제단을 쌓고자 하여 모였사오니, 당신의 어린 아들딸들 긍휼히 보시옵소서. 권고하고 위로할 말씀이 많사오나 말하지 못하는 사정을 알게 하소서. 슬플 때도 하늘의 뜻을 위하여, 외로울 때도 이 한 뜻을 위하여, 핍박받을 때도 이 한 뜻을 위하여, 낙심할 때도 이 한 뜻을 위하여 이리 쫓기고 저리 몰리는 서러운 심정을 아버지 앞에 아뢸 수밖에 없는 사정을 가진 아들딸들이 이 자리에 모였사옵니다.
이날 마음을 털어놓고 아버님과 의논하고, 모든 사정을 아버님 앞에 털어놓고 타협할 수 있게 하옵소서. 어려웠던 사정을 아버지 앞에 다 풀어 놓고 아버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모습이 되어 ‘내 죽더라도 이 길을 위하여 하나의 깨끗한 제물이 되리다.’ 하고 다시 맹세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말로써만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정성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줄 아옵니다. 뜻에 사무쳐 하늘을 위하여 노래할 줄 아는 그 마음이 그립사옵고, 모든 것 다 잊어버리고 하늘을 위하여 정신없이 허덕이는 그 모습이 그립사옵니다. 그와 같은 그리움의 심정을 가지고 아버님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한 때와 한 자리가 있다 할진대 황공한 심정으로 머리 숙이고자 하오니, 저희들의 이 간절한 뜻과 간절한 심정을 아시어 이 시간 찾아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어떤 길을 지나가 보지 않은 사람은 그 길을 알 수 없고, 체험하지 않은 자의 말씀은 생명이 없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이 민족을 불쌍한 자리에 몰아넣는 것도 아버지의 불쌍한 사정을 알게 함이었음을 저희들은 아옵니다. 외로운 자리에 계시고 상심한 자리에 계실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사정을 알고 있사오며, 저희를 핍박의 자리에 내놓을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원통하고 통분한 사정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저희의 마음이 아버지의 것이 되게 아버지께서 저희의 마음에 찾아와 주시옵소서. 저희의 심정에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와 더불어 울 수 있는 하나의 모습들이 되기 원하여 이 자리까지 나왔사옵니다. 과거가 후회되는 것은 아버지를 안 연고요, 과거의 일이 원통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버지를 안 연고였사옵고, 저희에게 상심함이 있는 것도 하늘을 안 연고였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래도 저희를 취해야 하고 저래도 저희를 용납해야 하는 입장에 계시고, 저희는 복귀의 한을 남긴 그 역사를 원망해야 할 입장에 처해 있사옵니다. 이러한 자신임을 깨달아 오늘도 내일도 허덕임의 생활에서 그칠 줄 모르고 하늘만을 붙들고 나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께서는 그러한 저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 줄 아오니, 이 한 날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자신의 마음을 묶어 아버지 존전에 바쳐 드리는 생축의 제물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날 지방에 널리어 엎드려 호소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의 마음에 새로운 생명의 선물을 내려 주시옵고 그들을 황무지와 같은 곳에 보내어 생명의 등불을 켜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빛과 영광의 등불로 나타날 수 있는 경배의 한 시간으로 받아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각기 사정이 다를지라도 아버님의 역사로써 같은 사정을 갖게 하여 주시옵고, 심정이 다를지라도 아버지의 역사로써 같은 심정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 이 한 시간 운행하시어서 아버지 것 외에 모든 것을 제거하여 주시옵고, 삼위신이 기뻐하는 한 시간으로 갖추어 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Ⅱ)>
아버님, 저희가 아뢰기 전에 저희의 심정을 아시옵니다. 이 한 시간만은 아버지께서 친히 임재하시는 시간인 줄 알고 있사옵니다. 하늘이 저희의 모든 것을 주목하고 있는 시간인 것을 저희들이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수고로운 역사 과정을 거치신 아버님, 오늘 저희 목전에 나타나시어서 새로운 말씀으로 단장시켜 주시옵소서. 새로운 심정으로 저희들을 대하여 주시옵소서. 불충스러운 모든 것을 일소해 버리고 어린애와 같은 마음으로 저희의 모든 것을 이 한 시간 아버지 존전에 드리고자 하옵니다. 세상에서 물든 일체의 의식이나 주의나 관념을 아버지 앞에 내어 놓고 어린애와 같은 마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빚으시는 대로 다시 빚어질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갖추어 아버지 앞에 드리고자 하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삼위신이 운행하여 주시옵소서.
사탄적인 요소를 갖추어 가지고 하늘 앞에 반대적인 요소로 남아질 것은, 아버지, 일체 용납치 마시옵소서. 승리의 방패를 갖추어, 사탄이 침범하는 이 시간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
천군천사 옹위하는 가운데 환희의 심정으로 이 한 시간 경배드리는 이 자리가 전체의 생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하나의 복의 기관적인 제단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모든 것 맡기었사옵니다. 저희의 가진 모든 주의와 심정을 아버지 앞에 털어놓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저희의 모든 것이 아버지 것으로 바꾸어질 수 있는 이 한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니다. 아멘.
<기 도(Ⅲ)>
이 시간 고개 숙인 당신의 아들딸들, 긍휼히 보시옵소서. 여기에서 누가 지도자가 되며, 누가 하늘의 말씀을 대행하오리까? 이들은 아버님 외에 어느 누구도 나타나는 것을 원치 않고 있사오니, 아버님께서 친히 나타나시옵소서. 심정을 통하여 하늘을 체험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니 느끼려야 아니 느낄 수 없는 아버지의 사정을 체휼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회개하지 않으려야 회개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을 지니게 아버님께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사람 사람끼리 모이는 곳은 풀려다가 도리어 엉클어지는 일이 벌어지지만, 하늘을 중심삼고 모이는 곳은 마음에 응어리졌던 것이 풀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죄악의 종족으로 말미암아 엉클어졌던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풀어질 수 있는 탕감의 역사, 회개의 역사, 감동의 역사로 말미암아 저희 자신을 반성하고, 과거를 뉘우치며 새로운 날을 동경할 수 있는 사무친 마음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마음을 붙들어 자아를 다시 한번 회개할 수 있는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게 아버지, 이 시간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말씀을 전하고자 하오니 이 시간 모인 전체 위에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의 손길을 펴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의 마음이나 받는 자의 마음이 심정의 귀일점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저희들은 몸만의 행복을 고대하지 않사옵고 마음에만 취하여 사는 것도 원치 않사오며, 오직 심정을 걸어 놓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동산을 원하옵니다. 생활 가운데에서도 심정적인 인연의 한 조건이 각자의 심중 심중으로부터 폭발되어 심정 깊이 내재할 수 있는 인연이 맺어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시여,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지금까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딸들에게 전하여 준 말씀도 많사옵니다. 이 말씀을 중심삼고 규합하여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저희가 나아가야 할 길이오니 아버지, 함께하여 주시옵고 그 나아가는 길이 막히지 말게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아버님의 내적인 심정에 합당한 결실을 거두어들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면 받은 바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늘 앞에 후회를 남기는 아들딸들이 되지 않을까 두려움을 느끼는 자들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만민 위에 축복의 은사를 내려 주시옵소서. 뜻을 대신하여 심정을 붙안고 하늘 앞에 호소하며 숨은 제단을 쌓고 기도하는 아들딸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들에게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천상의 외로운 심정을 품고 허덕이고 있는 무리, 탕감적인 해원의 한 날을 바라고 있는 영계의 수많은 영인까지라도 저희와 관련이 있사오니 아버지시여, 그들의 일도 저희로 말미암아 좋은 결과로 나타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삼위신이 저희를 에워싸고 바라보며 고대하는 그 심정의 기준에 저희들이 부족하여 그 양을 채우지 못한 채 아버지를 부르지 말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제 양이 충족된 자리에서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기쁨의 모습들로서 이 시간 세워 주시옵소서. 그런 은사를 갖지 못하였을진대는 어린애와 같이 온유 겸손히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의 심정을 끌어당기는 아들딸이 될 수 있도록 이 한시간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이날 지방에 널려 있는 식구들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생명들이 하늘의 때를 염려하여 호소하고 있사오니 그들 앞에도 생명의 은사를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올 때에,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 씀>
여러분들과 같이 생각해 보려는 말씀의 제목은 ‘본향을 찾아가는 인생길’입니다. ‘본향을 찾아가는 인생길’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내용이 되겠습니다.
본향을 찾아가는 도상(途上)에 있는 인류
지금 이 세계의 인류는 평화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자유를 누리는 개인이 되어, 자유의 사회, 자유의 나라, 자유의 세계에서 살기를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평화가 없고, 내 마음에 자유가 없고서는 진정한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참다운 인생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다운 평화 속에서 참다운 자유를 구가하며 참다운 행복을 누리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신과 참다운 인생길을 걷고자 하는 이런 이념적인 조건을 비교해 볼 때 어떠한 입장에 있습니까? 여기에 상충적이냐 그렇지 않으면 상응적이냐를 분명히 밝혀야 할 때가 끝날이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오늘날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이구동성으로 이 세계는 평화의 세계가 못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부르짖고 있으나 심정에서 우러나 살 수 있는 자유스러운 환경이 못 되어 있음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우리 인간은 이념적으로 고대하는 행복의 자아가 못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나라는 것을, 이러한 우리라는 것을, 이러한 사회라는 것을, 이러한 세계라는 것을, 이렇게 걸어온 역사노정이라는 것을, 이렇게 걷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한다 할진대 우리 자체는 내가 즐거워할 수 있는 본향의 세계에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요, 내가 행복을 구가할 수 있는 본향의 동산에서 살고 있지 못하면, 내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고 주관할 수 있는 본연의 세계에서 살고 있지 못하다는 말에 어느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행복을 고대해야 되고 그러면서도 평화와 자유를 고대해야 하는, 우리의 심적인 움직임이 자기를 재촉하고 있고, 환경을 재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생활권 내(生活圈內)에서 잘 느낄 것입니다.
이렇게 내적으로 보나 외적으로 보나 우리 인류가 바라는 본향의 세계가 이뤄지지 않았고 인류가 그 세계에서 살지 못하고 있는 연고로, 오늘날 우리 인류는 본향을 찾아가는 길거리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인류라는 것을 우리는 밝히 알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잘난 사람도 본향을 찾기에 허덕이고 있고 못난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양을 갖추었다고 하는 존재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본향 길을 찾아 헤매는 역사적인 사조권 내(思潮圈內)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이 시간 느껴야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본향을 찾아가는 인생길’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본향으로 가는 길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지금까지 이 땅 위에 성현 혹은 현철들이 나와서 인생의 갈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렇게 가라’ 혹은 ‘이러한 주의에서 살라’ 하면서 어떤 방향성을 세워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철학이 지향하는 방향성도 있겠고, 어떤 주권자가 내세운 이념을 통한 길도 있겠고, 혹은 사회적인 윤리관을 통해서 가는 길도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외적인 세계를 끌어내어 여기에 영원한 이념을 연결시키려 하는 종교적인 방향성도 있겠습니다. 크게 보면 그러하겠고 작게는 ‘개인을 중심하고는 이렇게 가야 되고, 가정은 이렇게 가야 되고, 대인관계에서는 이렇게 해야 된다’ 하는 방향성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전체적이고 우주적인 이념이 지향하는 행복의 한때를 대비해서 움직이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지 못한다 할진대 그 모든 것은 천륜을 해명해 가지고 하늘의 뜻을 완전하게 세우는 그날에 가서는 반드시 천륜에 걸리는 입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가 가는 길, 윤리를 중심삼고 가는 길, 혹은 철학이 지향하는 진리의 길에서 행복의 세계를 소개할 수 있는 평화와 자유를 어떻게 찾아야 되겠는가? 사람의 심정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수천 년 전에 가졌던 심정이나 억천만 년 후에 나타나는 심정은 같습니다. 심정의 세계는 발전이 없는 거예요.
같은 기반에서 움직이는 심정을 이끌어내어 행복의 동산을 이룰 수 있는 세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회적인 기준, 행복감을 맛볼 수 있는 종교적인 의식, 이러한 것이 이 땅 위에는 없을 것인고? 만일에 없다고 단정 한다면 하나님은 어디로 가 계실 것인가? 그렇게 되면 그 하나님은 인류와 더불어 계실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질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를 붙들고 섭리하고 윤리와 도덕을 세워 선을 지향케 하는 천륜이 있다 할진대 하늘은 기필코 우리와 관계되고 인연되어진 모든 것을 해명하여 주는 것은 물론이며, 나아가 남녀 누구를 막론하고 이것을 심정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한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화하고 동하면서 이 행복이 우리의 행복이요, 이 평화가 우리의 평화요, 이 자유가 우리들의 자유라고 소리 높여 말할 수 있는 한때가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할진대 하나님도 어떤 위대한 사상가도 우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분석하게 될 때 안팎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의 실정을 헤아려보게 될 때에도 나타나는 사회의 조직이 있고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계획된 조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안팎으로 전개되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외적인 사정을 가지고 사는 동시에 내적인 사정을 가지고 사는 연고로 서로 안팎의 사정을 통하고, 같은 입장에서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그 환경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또 그 환경을 찾아 헤매는 것이 우리의 인생행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까지 역사 과정에서 수많은 성현 현철들이 왔다 갔지만 자기의 인생행로를 노래하면서 승리적인 하나의 표어를 세워 ‘만민이여! 이렇게 가라’ 하고 호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또 ‘나를 의지하고 내 심정과 더불어 내 사랑과 더불어 너는 이렇게 살라.’고 말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랑을 말하였으나 사랑을 중심한 행복관, 사랑을 중심한 평화관, 사랑을 중심한 자유이념에 대해서는 해명을 못하고 가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나를 믿으라, 나를 바라보고 오라.’고 하셨지만 자기의 심정을 털어놓고 ‘내 심정과 동하여 천정(天情)을 중심하고 노래하며 살자.’고는 못해 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적으로 수많은 선각자가 역사상에 왔다 갔을지라도 심정을 중심하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내용을 소개하지 못했고, 하늘의 심정과 통하는 자유와 평화의 세계관을 중심삼고 세계를 화동시킬 수 있는 기쁨의 내용을 소개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가 고대하는 곳은 어디일 것이뇨?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입니다. 본향의 세계, 즉 그곳에 간 후에는 영원히 돌아오고 싶지 않은 세계, 보고 또 보아도 싫지 않은 세계, 한번 느낀 감촉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세계, 웃음이 있다 할진대는 영원히 웃을 수 있는 세계, 그 세계에서 한 주인을 찾았다면 그 주인을 영원히 놓칠 수 없다 하는 세계, 그런 한 곳이 있어야만 합니다.
본향을 그리워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
그런 곳이 심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 개개인이 살 수 있는 곳이요, 그러한 본향이 인류역사의 종말시대에 소개되어야 할 곳입니다. 그렇지 못할진대 오늘날 이 세계는 수습하려 해도 수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소개할 수 있는 어떤 이념이나 주의를 논리적인 견지에서 세우지 않을 수 없는 때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는 본향의 세계, 본향의 땅, 본향의 형제, 본향의 가족, 본향의 친척, 본향의 동산이 그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들 중에서 ‘나는 그런 본향을 찾았노라.’고 장담할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본향을 찾아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구주로 오시어 ‘나를 따라오라.’ 하시며 그 길을 제시해 놓았지만, ‘나와 더불어 살자.’ 할 수 있는 본향의 동산을 이루어 놓고 살다 가지는 못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인류를 끌고 나오시지만 오늘날 이 자리에서 ‘나와 더불어 살자.’ 는 말씀을 못 하시고 ‘우리들이 바라는 본향의 동산에 가서 살자.’고 말씀 하시며 이러한 섭리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랬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그랬듯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오늘날 여러분 자체 자체도 마찬가지의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본향을 바라면서 허덕이며 걷고 있는 여러분, 그날을 맞아 즐거워해 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날을 맞이해서 나는 행복하다고 노래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날을 즐기셨느냐? 하나님도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날을 맞게 해주는 어떤 주의가 있느냐? 그것도 없습니다. 하늘도 즐기지 못했다는 거예요. 천지의 내용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지 운세를 이탈하여 살 수 없는 양심을 가진 인간은 공통적인 목표와 이념 밑에서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의 심정을 체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도 가면 갈수록 행복의 마음은 간절하나 행복 그 자체는 여러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마음으로 간절히 고대하며 발버둥쳐서 그 목적지에 당도해 온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것은 잡으려야 잡을 수 없는 먼 거리에서, 아득한 내용으로서 여러분의 마음세계를 비추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어차피 가야 할 과정적인 현상을 밟고 올라서 가지고 행복의 본향을 노래할 수 있는 개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만우주를 대해 나와 더불어 화동하고 나와 더불어 노래하며, 나와 더불어 행복하자 할 수 있는 그 한 날을 맞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역사의 목적이요, 어떤 종교가 있다 할진대 그 종교의 목적입니다. 또 창조주가 있다 할진대 그 창조주도 역시 그러한 목표 밑에서 인간을 내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섭리권 내를 벗어나지 못한 인간들인 고로 어떤 개인이라 할지라도 그 역시 마찬가지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다 같은 인생길을 가고 있는 이 마당에, 여러분, 잘났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 환경이 좋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 가진 세력이 당당하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것 가지고 인생의 갈 길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본향의 세계를 해결하지 못해요. 왜 그러냐? 오늘날 인류가 지향하는 그 방향성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해결되게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하늘이 이런 입장에서 섭리를 해 오셨다 할진대 도리적인 면이나 진리적인 면에서만 우리에게 방향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지 심정적인 면을 중심삼고 우리의 갈 방향을 가르쳐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심정적인 면에서, 실생활에서 실감할 수 있는 행복과, 생활하면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평화와 자유를 가르쳐 주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것들을 아득한 소망의 한 초점으로서 바라보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인 연고로 우리에게는 잘나나 못나나 슬프나 기쁘나 하루의 생활에서의 자유는 있을는지 모르고, 일년의 생활에서 감정의 자유는 있을는지 모르고, 또 일생에 있어서 생활적인 감정의 자유는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를 중심삼고 흐르고 있는 역사적인 심정과 생활과 이념과 관(觀)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은 그렇게 볼 것이며 또 그렇게 보아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한 것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을 보아도 불쌍하고 저 사람을 보아도 불쌍한 것입니다. 이 불쌍한 인류를 가로막고 불쌍한 자신들임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때가 왔습니다. 네 자신의 불쌍함을 탄식하라, 불쌍한 자체를 보고 울어야 하겠다, 하늘땅을 붙들고 울어야 하겠다, 내가 가는 발자취의 종단은 어떻게 될 것이뇨? 변천하는 환경의 결과가 어떠한 내용을 내포해 가지고 목적지에 도달할 것인가? 이런 문제를 해명해 주며 네 자신을 놓고 근심하라 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지도자가 나와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시대에 어떤 혁명적인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오는 과정에 있어서, 시대를 거치고 세기를 거쳐오면서 새로운 이념, 새로운 목표, 새로운 행복, 새로운 자유, 새롭다는 그 무엇을 가지고 나온 많은 사람들은 그 시대를 가로막고 불쌍한 자아를 해명해 주기 위하여 수고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당대에 영향을 미친 사명자요, 특정한 시기나 시대에 필요한 사명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새로운 세계적인 주의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세계 인류를 가로맡아 가지고 세계 인류의 본이 되어야 할 너희들이거늘, 너희가 갈 곳을 알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음을 슬퍼하라고 할 수 있는 어떤 무엇이 나와야만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오셔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때 택한 선민이라고 자랑하던 유대 백성들이 4천년이란 기나긴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선지자들의 은덕을 받들어 왔으면서도 고대했던 그 메시아가 나타난 것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보내 놓고서야 그가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러운 입장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구주라고 하는데 그는 당시의 인류 앞에 어떠한 구주가 되어야 했느뇨? ‘너희들의 슬픔을 내가 맡아 주마.’ 할 수 있는, 자신 있는 구주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맙고 감사한 말씀입니다. 그 한마디는 인류를 위한 위대한 선각자의 말씀이었습니다.
애달픈 심정을 가지고 초조한 모습으로 자기 자신을 해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청년 남녀가 있어 그 한마디의 말씀을 듣는다면, 손을 번쩍 들고 그 앞에 나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2천년 전에 오셔서 말씀하고 가신 예수님 고맙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말씀을 주신 하나님, 고맙습니다.’ 하게 될 것이며, 이 정신과 사조를 통하여 흘러나온 말씀을 대해서 고맙게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 세계를 맡을 수 있고, 이 민족을 맡을 수 있으며, 심정문제를 맡아 가지고 그 심정의 짐을 풀어 줄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있기에 예수님은 다시 온다는 말씀을 남기고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이루지 못한 것이 무엇이뇨? 인류의 모든 십자가의 짐을 도맡아 주기 위하여 오셨으나 인류의 심정적인 짐은 도맡아 주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전세계 인류는 심정적인 짐을 예수님 앞에 다시 맡기기 위하여 그날을 고대하면서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고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비참한 환경에 처한 내 자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또는 흘러가는 역사를 가로막고 너희의 슬픈 사정을 알라, 너희의 불쌍함을 알라, 너희의 애달픔을 알라, 너희는 이러이러해라 할 수 있는 어떠한 무엇이 나와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인생행로를 걷고 있기 때문에 가다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공포가 내재한 세계권 내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는 길의 목적지가 어디이뇨? 그 가는 길이 이러이러하다고 해명할 수 없는 생애노정을 걷고 있습니다. 무턱대고 끌려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다가 바위에 부딪치느냐 절벽에 떨어지느냐 하는 것을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되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속이 뒤집힐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40평생, 혹은 70, 80년의 생애노정을 걸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나는 행복을 찾았고 행복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이런 인생길을 돌파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두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분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은 자기의 이 불쌍한 사정을 연결시켜서 세계와 통할 수 있는 불쌍한 사정을 가진 분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또 자기에게 어떤 외로움이 있다 할진대 그 외로움이 세계와 더불어 연결될 뿐만 아니라 무엇인지 모르게 갑갑하고 클클함이 내 한 마음에 사무쳐 있다면 이 고달픈 심정이 이 세계와 더불어 연결될 수 있는 때로 찾아 들어가고 있으므로, 그 모든 것을 해명해 줄 수 있는 분, 즉 나의 불행과 나의 불쌍함과 나의 고독과 나의 한스러움을 맡아 줄 수 있는 분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내가 고대하는 그 이상의 세계를 소개해 줄 수 있는 분, 행복과 평화와 자유의 세계에서 영원히 느끼고 싶었던 심정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분, 그 심정이 영원성과 연관하여 존재세계의 어떠한 것과도 버젓이 행복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런 동기의 주체로서의 한 분을 만났다 할진대 그는 인생행로에 있어서 성공자일 것입니다.
슬픈 세상에서 그런 한시간을 느끼게 하고 체험할 수 있는 예수님이어야 되고 하나님이어야 된다는 것을, 나는 믿고,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안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걷고 있는 발자취를 거두어 어차피 거쳐야 할 한때를 넘어설 수 있는 비법을 가르쳐 주는 분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처한 사정을 거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망의 기준을 넘어서 사정을 통하고 심정을 수습할 수 있는 동시에 내용적인 면에서 그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이라야 안심하고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러한 심정의 이념을 갖추고 걸어가야 고달픈 인생행로에서 서러움에 부딪쳐도 그런 심정의 세계에서 느껴진 감정을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치고 때려도 더 강해지고 하늘을 배반하지 않을 수 있는 그 무엇, 심정의 인연으로 느껴지는 그 무엇이 있다 할진대 이는 지옥 밑창에 몰아넣을지라도 점령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곳이 기필코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여 섭리하시는 방향은 그 한 곳, 본연의 동산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섭리는 수많은 곡절의 노정을 거쳐서 그 한 기준을 세우게 되었고, 이것을 따라가야 하는 인간들도 역시 수많은 고통의 과정을 거쳐 가지고서야 그 한 기준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존재세계에 있어서 모든 존재물이 지향해야 할 하나의 기점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노정을 가야 하는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본향이라 하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연상합니까? 본향에는 반드시 자기가 사랑하는 부모가 있고, 사랑하는 마을이 있고, 사랑하는 집이 있고, 사랑하는 형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향을 떠나 멀리 외국에 가 있게 되면, 그 본향의 범위는 넓어져서 조국, 즉 나라까지 본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또 우주나 혹은 천주란 견지에서 보면, 이 세계가 나의 본향이 됩니다. 이렇게 바라보는 범위가 크면 클수록 그 본향의 범위도 비례적으로 커간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여러 가지 생활 과정에서 잘 느낄 것입니다.
우리들이 바라는 본향
그러면 우리들이 바라는 본향은 어떤 곳이뇨? 여러분이 어느 어느 곳이 내 고향이라고 하는 것처럼 그런 곳이 아닙니다. 본향, 마음의 본향, 그곳은 마음이 즐길 수 있는 내 심정의 안식처, 심정세계의 보금자리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 나오시는 것을 두고 구원섭리를 해 나오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나를 찾아 주고 인류를 찾아 준다 하면 나는 하나님께 ‘사정적인 조건보다도 심정적인 조건으로서 저를 찾아 주시옵소서.’라고 말하겠습니다. 그것은 왜냐? 사정은 천태만상이 될 수 있으되 심정은 오로지 하나의 조건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이 참다운 신앙관을 찾아 나가는 사람의 모습이 아닐 건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어디 있느뇨? 네 마음속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진정한 본향은 어디에 있느뇨? 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마음과 인연 맺을 수 있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으로 그 본향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느끼는 감정과 더불어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엉클어져 있기 때문에 그 본향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행로에 있어서 본연의 마음과 인연 맺어질 수 있는 본향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고, 본향의 동산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한 곳,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역사가 바라고 있는 참다운 행복의 동산은 이런 곳이라고 소개할 수 있고, 참다운 평화와 참다운 자유를 소개할 수 있는 그 본향에는 누가 계실 것인고? 생각해 보세요. 그 본향에는 누가 계실 것인가? 높고 크고 존엄하신 하나님이 그곳에 계실 것입니다. 또 우리가 고대하던 주님이 그 곳에 계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성신이 그 곳에 계실 것이며 역대 섭리사에 왔다 갔던 수많은 공신들이 그 곳에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또 세계의 어느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충신이 그 곳에 계실 것이며, 세계의 어느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효자 효녀 열녀들이 그 곳에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마음의 인연을 넓혀서 이념적인 것을 느끼지 못한다 할진대 여러분은 그 세계와 인연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의 인생길을 걷고 있는 불쌍한 인간들에게 수많은 성현들은 삼강오륜 등 인륜을 가르쳤고, 모세는 십계명을 소개하였으며, 나아가 수많은 도인들도 그런 일면을 개척하기 위하여 수고해 왔음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본향길을 가는 데 있어서 심전(心田; 마음 밭)을 계발할 수 있는 사명을 지니지 못한 도주(道主), 그런 종교, 그런 윤리, 그런 이념은 이 우주상에서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물러가지 않겠다고 해도 하나님이 물리치십니다.
여러분은 본향을 그리워하며 그 본향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나의 실체를 갖추어 아득한 피안의 본향을 바라보며 가고 있다 할진대 여러분은 그 노정의 어느 지점에든지간에 있을 것입니다. 지옥에서부터 천국 끝까지의 그 길은 어떤 길이뇨? 본향을 찾아가는 노정입니다. 본향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나이가 70, 80살이 되어 노숙해 가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 자체를 바라보게 될 때, 나는 본향의 동산과 얼마만큼의 거리에 있느냐 하는 것이 염려 중의 염려요, 근심 중의 근심일 것입니다. 그러면 본향은 어떠한 곳이뇨? 그 곳을 찾아온 자를 대하여 환희의 팔을 벌리고 맞아주는 그런 곳을 말합니다. 그 곳이 그립습니다.
여러분이 본향을 찾아가는 노정에서는 억울한 사정, 비통한 일, 혹은 분하여 참을 수 없는 입장에 서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향을 찾기 위하여 나선 몸이기에 그러한 사정은 필히 있어야 할 것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그 길에서 돌아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조들이 세워 놓은 역사적인 모든 위훈(偉勳)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인생길을 개척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도주들의 공적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기력이 쇠하기 전에 가야 할, 인생의 행로를 개척해야 할 우리입니다. 여기에 변하지 않는 늠름한 모습을 갖출 수 있는 심정과 마음의 중심을 가졌느냐, 이것이 오늘날 여러분 자체를 걸어 놓고 문답해야 할 중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지적하여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본향을 찾아가는 자가 가져야 할 태도
본향, 그곳에는 그리운 부모가 계시고, 그리운 형제가 있고, 그리운 산천이 있습니다. 우리가 본향을 그리워하여 찾아간다면 기뻐하지 않을 존재물이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 그곳을 찾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 ‘오늘 내 생활이 처량하구나.’ ‘오늘날 내 생활 행로가 비참하구나.’ 하는 것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본향을 찾아가는 노정이니 여기에 억울함이 있고 분함이 있고 눈물을 지으며 생사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할지라도, 본향을 생각하는 그 마음을 잊고 쓰러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모든 성현들이 본향을 찾아가는 길에서 마음과 이념의 세계를 방황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세계를 찾기 위하여 먼저 인간적인 사정도 다 저버리고 인간 세상에서 정으로 인연되었던 모든 환경까지도 다 끊어 버리고 허덕였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제해 놓고라도 하늘을 대신하여 걸었던 선지 성현들, 또한 이를 수습하여 본향을 찾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세우고 해결지으러 오셨던 메시아인 예수도 이 길을 가기 위해 허덕였습니다.
반대를 받아 밀려나던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반대와 핍박이 무서워서 고요한 산천을 찾아가서 기도의 시간을 가진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압정이 두려워서, 십자가의 길이 두려워서 가야 할 인생길에서 돌아서고자 했던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필히 가야 할 인생의 행로에서 어떠한 입장하에서도 가야 했고, 어떠한 불쌍한 처지에서도 가야겠다고 각오했던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본향의 심정을 느끼고 본향의 사정을 아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본향이 환영할 수 있는 주인공으로서의 행사를 대신해야 할 메시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본향이 그리워지면 그리워질수록, 그 마음세계에서 본향의 세계가 가깝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비참한 심정을 감수하여 나갔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어떤 원수가 있고 사탄이 있다 할진대 이 길을 찾아가는 노정에 최후의 격전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향길을 찾아가야 할 세계적인 새로운 이념세계에 당도한 민주 진영 앞에는 원치 않는 원수의 창검이 가로막을 것입니다. 이것이 막을지라도 민주 진영은 천지 운세의 방향에 맞춰 용감히 넘어가야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민주진영은 세계적인 용단을 내려야 되겠습니다. 일개 국가도 용단을 내려야 되겠고, 민족, 사회의 어떤 기구뿐만 아니라 일개인도 용단을 내려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본향길을 가는 데 있어서 자신을 가질 수 있는 모습을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하늘도 이런 사람을 요구하고 그런 가정, 그런 사회, 그런 국가, 그런 세계를 요구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바라고 있는 재림의 한 날이 온다고 합시다. 이상 하는 한 날이 온다고 합시다. 그 날은 어떠한 날일 것이뇨? 지치고 밀려 상처받은 다리를 끌고 천정(天情)을 찾기 위해 본향길을 허덕이며 찾아오는 그 모습을 보고 하늘은 어떻게 대해 줄 것인고?
여러분, 생각해 보았어요? 나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불쌍한 아버지가 웃으실 수 있는 그 한 시간이 보고 싶습니다. 내가 사모하고 붙들고 싶었던 그 심정을 아시고 나를 붙들고 울어 주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럴 때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인생길을 가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비참한 환경에서 상처를 입고 억울함을 당하고 분함을 당하는 사람, 그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하고 본향을 찾기 위하여 그러한 길을 걸어 나오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하늘은 그 사람을 붙들고 통곡할 것입니다.
취해서 살게 되어 있는 사람의 본질
우리는 본향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어차피 가야 할 운명의 노정, 가지 않으면 안 될 과정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 똑똑하고 잘났다고 장담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만민이여! 온 천주여! 내 말에 호응하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인생행로에서 본향을 찾아가는 발걸음을 어디로 돌려야 하겠느뇨? 참다운 사랑의 부모가 계시고, 참다운 사랑의 정적인 보금자리가 있는 곳입니다. 그곳이 우리가 머물 곳이요, 우리가 안식할 곳입니다. 또한 그곳이 행복과 희망이 넘치는 평화의 세계요, 자유의 동산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곳을 사모하는 마음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땅에 대한 분개의 마음이 커질 것입니다. 땅을 대하여 깨끗이 살아야 되겠다 할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적인 인물은 다 그렇게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도 잃어버린 부모를 찾기 위해서는 천리길도 멀지 않다 하고 달려가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만리길도 마다 않고 찾아가는 사람이 있거든, 본향의 동산을 찾아가는 여러분이 그만도 못하다면 반성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느 한 때, 어느 한 시간, 생애의 어느 한 기간에서 본향길을 찾아 헤맨 적이 있습니까? 그런 데에 무책임한 여러분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길에서 책임을 질 수 있고 그 길에 책임적인 생활의 한 부분을 남길 수 있어야 본향의 역사를 재창조하고, 본향의 섭리의 뜻을 세워 나오는 천륜 앞에 면목을 세우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간 선조들은 역사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고, 그렇게 간 도인들이 종교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들도 본향의 부모를 그리워하고, 본향의 산천을 그리워하고, 본향의 가정을 그리워하고, 본향의 세계를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때가 왔다는 거예요.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은 유물사관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본향을 꿈꾸고 있지마는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외적인 사정이 통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내적인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세계에서 만난 사람은 그 사람이 흑인이든 백인이든 황인이든 영원히 보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의 사람을 만나고 그런 자리의 사람을 찾았다 할진대 먹는 것을 초월하고 입는 것을 초월하여 취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상주의가 있다 할진대 그 주의를 통하여, 어떤 사상이 있다 할진대 그 사상을 통하여 어느 정도 취해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만들었느냐를 봐 가지고 그 주의나 사상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점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심정을 털어놓고 통곡할 수 있는 감정이 우러나오는 데 있습니다. 이 감정이 역사 노정에 있어서 기독교의 형태를 변경시켜 나왔습니다. 기독교가 변혁의 단계에 들어가려면 심정을 통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또 그가 변치 않는 가운데 움직일 수 있는 감정, 즉 기독주의가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상가가 하나의 사상에 취하여 자기의 생활 감정을 지배할 수 있고, 또 순간을 넘고 시간을 넘어 영원을 표준하고 움직일 수 있는 감정, 즉 기독주의가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상가가 하나의 사상에 취하여 자기의 생활 감정을 지배할 수 있고, 또 순간을 넘고 시간을 넘어 영원을 표준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을 찾았다면, 그는 행복한 자일 것입니다. 이는 천지 역사관에 있어서 합격자요, 천륜을 움직이는 천정관(天情觀)에 있어서 합격자일 것 입니다.
사람의 본질을 해부해 보면 취해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어떤 대학자가 있다 할진대 ‘오! 내가 이렇게 공부하여 이런 학자가 되겠다’ 하는 사람은 그렇게 못 됩니다. 못 돼요. 자기도 모르게 취해서 열심히 하다 보면 세계적인 대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야 합니다. 취하는 감정을 통하지 않고는 오늘날 기성의 내용 이상의 어떤 법칙이나 공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지도자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라 할진대 그는 어떤 주인공이었느냐? 인간의 사정에 취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과 역사적인 심정과 시대적인 심정과 미래적인 심정에 취하여 그 하나에만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에만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쫓기든, 몰리든, 죽이든 ‘아버지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했던 것입니다. 이런 태연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이런 사람은 기성관념, 혹은 그 시대의 이성적인 관념으로 바라볼 때는 미친 사람입니다, 미친 사람이에요.
인간이 찾고, 그리워하고, 만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이뇨? 심정으로 느낄 수 있는 세계, 그러한 행복, 그러한 평화, 그러한 자유를 소개해 주는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인생길을 가고 있는 우리에게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 그러한 방향성을 가리켜 주는 지도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참지도자일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 인생길을 가는 사람이 땅 위에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땅과 하늘, 우리의 이념과 현실은 상충된 면을 지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마음과 몸은 언제나 싸움의 대상이 되어 투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세계적인 이상세계를 찾아 나오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땅 위에 형성되어 있는 마음세계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거쳐 나오는 노정에 있어서 그는 편안한 생활을 해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위인들을 보십시오.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영계에 계시는 예수님도 불쌍한 분입니다. 영계에 가 계시되 땅을 붙들고 ‘아버지시여, 땅의 인간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는 불쌍한 분입니다. 어찌하여 예수님이 영광을 돌려드리는 분이 못되고 기도하는 분이 되셨는고? 땅 위에서 가야 할 인생길을 다 가지 못하고 다시 오셔야 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낙원에 가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놓고 자기 혼자 심정적으로는 취해 보았지만 인류와 더불어 취해 보지 못함이 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오시는 그날은 무엇이 다르뇨? 뜻을 중심삼고 인류가 자기의 심정과 더불어 하늘 대하여 취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다릅니다. 이것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사정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이 마음세계에 있어서 그런 면을 찾아보았습니까? ‘나는 공부를 많이 했고 나는 아는 것이 많아! 이만하면 어디 가든지 막힐 것이 없고, 선생이라는 소리를 듣고 혹은 스승의 위신을 세울 수 있다.’고 자인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큰소리하지 마십시오.
또 여러분 가운데 ‘나는 배운 것이 없고 무식하고 형편없는 모습’이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인생행로에 있어서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잘나고 못난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인간이 심정을 기반으로 하여 움직이는 것은 다 같습니다. 대통령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일개 노동자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다 같습니다. 오히려 말단에 있는 사람이 처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하여 부족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더 강합니다. 그 자식이나 아내를 대하여 부모의 사명을 못하니 미안하고, 남편의 사명을 못하니 미안하다는 마음이라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로라하는 사람은 ‘내 할 것 다하고 있는데….’ 합니다.
심정적으로 볼 때 어느 것이 더 높겠습니까? 오히려 말단에 있는 사람들이 더 높을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행로에 있어서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런 면에서 여러분은 그 인연과 더불어, 본연의 심정과 더불어 취하여서 ‘감사합니다’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항상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항상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옆길로 가게 될까봐 그러신 것입니다. 낮이나 밤이나 뜻길을 자신 있게 왕래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기도가 필요 없습니다. 기도가 필요 없어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고 감람산을 찾아가 외로운 심정을 하늘 앞에 호소한 것은 무엇 때문이뇨? 그가 이 땅에 오시어 보내신 바의 심정을 중심삼고 인류와 더불어 동하면서 서로 기쁨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들 겟세마네 동산을 찾아가 하늘 앞에 호소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웬 말이에요?
하늘 편에 가까운 사람
본향을 찾아가는 인생행로에 있어서 자신을 가진 자가 있습니까? 자신을 갖고 심정적으로 취해 갈 줄 아는 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이요, 하나님이 있다면 심판날에 이런 사람을 호출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생행로에서 자신을 갖고 취해서 간 사람은 역사가 옹호해 줍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갖고 하나님의 뜻에 취해 살다가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민족적으로도 그 민족의 운명과 가야 할 방향을 알고 자신이 그 책임을 다하기에 취해서 죽음의 길을 불사하고 넘어간 사람들을 충신이요, 열사라 하였습니다. 역사의 흐름이 이런 움직임을 통해서 흐른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진대 천정을 찾아 나가는 노정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내 마음에서 그리워하는 심정이 우러나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지식이 많고 갖춘 것이 많아서 기세가 당당하다 할지라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새로운 무엇을 지향하는 이 마음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상적인 감정을 내포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간절히 고대하고 그런 감정에 취해서 말을 해야만 오늘날 어떤 주의, 어떤 사상이라도 이끌 수 있지,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 앞에 지도자가 있다면, 그는 어떤 사람일 것인고? 인생행로에 있어서 자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 자신은 인간 앞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피조만상 앞에서도 자신을 가지고 자체를 세워 하나님의 심정에 취해서 나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심정에 취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누구든지 그 앞에 가서 기대어 쉬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갖춘 인격자가 있다 할진대 누구든지 숭배하고 싶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연의 심정의 발로는 그런 길을 통해야 할 운명에 있는 것을 감지하기 때문에 그 길이 필히 가야 할 노정임을 알고 마음은 언제나 그것을 지향하여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또한 자랑하지 마십시오.
같은 인생행로에서 처참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불쌍한 사정을 알고, 우리의 동족이 인생행로에서 쓰러지는 것을 보고 통곡하는 사람은 하늘편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형제들이 인생행로에서 낙오자가 되는 것을 볼 때에 ‘너는 언제 올 것이냐’ 하며 마음 졸이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심정의 지도자일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그러한 지도자를, 양들은 그러한 목자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을 대하여 울었습니다. ‘나에게로 오라.’ 하시며 눈물지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대하여 탄식하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눅 13:34) 하시며 자신의 서글픈 심정을 토로하셨습니다.
인생노정의 성공자
오늘날 이 민족을 품고자 하는 청년 남녀가 있습니까? 민족이 나아갈 길을 개척하여 어떠한 목적지에 접근시켜 주고자 하는 사명을 갖고 그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이 민족이 허덕이는 실상을 바라보고, 예수님이 하늘 대하여 호소하며 흘린 눈물이 그 민족을 받들어 오늘날까지 역사적인 인연을 연결시켜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예수님과 같이 이 민족을 위하여 하늘 대해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역사적인 사조도 그러하거니와 앞으로의 민족의 전망도 그러합니다. 천리적인 한때를 바라보고 있는 인류인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할진대 그런 과정에서 허덕이고 있는 우리라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나가는 인생행로에서 자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 자신과 더불어 소망의 본향을 그리워하는 심정에 사무쳐 달음질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산아 가리어라, 바다야 가로막아라, 원수야 나타나라, 내 갈 길을 누가 막겠느냐?’ 할 것입니다. 핍박의 바람이 불어와도 한때일 것이며, 시험의 화살이 날아와도 한때일 것이며,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와도 한때일 것으로 알고, 그 한때를 넘기 위해 달리는 사람, 더 큰 한때를 찾기 위하여 자기의 작은 생애의 한 때를 잊고 뛰어 나갈 줄 아는 사람이라 할진대 그는 인생노정에 있어서 성공자입니다. 그럴 거 아니에요?
아까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걷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우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왜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셨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좋아서 돌이키신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길을 찾아 나오면서도 본향의 뜻을 생각하는 예수의 심정, 본향의 부모를 염려하며 효성을 다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그 심정, 그것을 대하는 하늘이 뼛골이 녹아나는 순간이었기에 얼굴을 돌리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럴 거 아니에요?
그런 예수, 그의 심정의 귀일점이 천지를 통할 수 있는 기준에 섰기 때문에 사망선을 헤치고 부활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심정이 동하지 않고는 사망의 세계를 박차고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없고 승리의 왕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그런 분을 모셔야겠다고 생각할진대 우리는 허덕여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감정, 그러한 심정에 연하여 취할 수 있는 일편의 생활내용을 갖지 못하였다 할진대 우리는 허덕여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역사노정의 수많은 선조들도 허덕였고, 역사를 지배해 나온 하나님도 허덕여 나왔거늘, 우리가 어찌 움직이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런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편안한 자리에서 모든 것이 갖춰질 수 있는 하늘의 섭리라면 그런 말이 쓸데없을 것 아니에요?
고달픈 인생길을 가다 보니, 자기 딴에는 목표가 바른 길인 줄 알고 걸었는데 반대의 걸음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서러움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바라는 방향은 이러한 것인데 탕자의 모습이 되어 반대 방향으로 가 가지고 유린당하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부모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자식의 모습을 보고 있는 부모가 있다 할진대 그 부모는 통곡할 것입니다.
인간을 바른 길로 돌려잡기 위한 하나님의 수고
오늘날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을 중심삼고 나아가는 방향, 인간들이 가고 있는 방향은 하늘이 지향하는 방향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이러한 인간들을 돌려잡기 위해 이들이 가는 길을 가로막은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세워 가정적인 기준을 세우고 가정의 올바른 이념을 찾으려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은 인류를 전멸시키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그릇된 모든 것을 가로막고 하늘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노아가정을 이끌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함의 실수로 그 가정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떠했습니까? 본향을 찾기 위해 이끌어낸 노아도 불쌍하였거니와 고국산천 갈대아 우르를 떠나 축복의 땅인 가나안을 찾기 위하여 헤매던 아브라함도 불쌍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야곱,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본연의 민족을 회복하기 위하여 모세를 애급에서 광야의 황무지로 내몰던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모세의 생활보다도 더 심절하고 더 분하고 더 통곡에 사무쳐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몰아내신 하나님의 심정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어느 누가 그런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습니까? 그리고 민족을 지도하던 모세가 하나님의 심정에 취하여 변하지 않고 나갔던들 반석을 두 번 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늘의 심정을 통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일신이 오히려 민족의 갈 길을 막았던 원통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본연의 가정을 찾기 위하여 하늘이 몰아냈던 노아도 그러했고, 축복의 땅을 세우기 위하여 몰아냈던 아브라함도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향 땅을 그리워하던 야곱은 어떠했습니까? 애급에서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자기의 뼈를 고향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습니다. 고향 땅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그랬겠어요? 자기가 죽게 되더라도 원수의 땅에는 그 시체가 썩어 흘러내리는 물까지도 남겨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선민의 긍지, 선민의 감정을 소중하게 느꼈던 야곱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다시 모세를 보십시오. 본연의 민족을 찾기 위하여 모세를 몰아냈던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그로 말미암아 민족을 거느리고 살고 싶으셨겠는가? 그러나 그 뜻을 모세는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온 인류에게 본향의 가정을 찾고 산천을 찾아 그 땅에 민족을 세우고 국가를 세워 세계를 회복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세움 받은 사람들이 받들지 못하고 실패해 나온다 할지라도 그 뜻은 뜻대로 더 큰 범위를 갖추는 조건적인 인연을 맺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본연의 민족을 찾으려 했던 하나님의 뜻은 연장되더라도 하늘은 이것을 수습하고 본연의 국가를 세우기 위하여 메시아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민족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주도하실 수 있는 국가 형태를 갖추어 천적인 주권을 이 땅 위에 세워 드리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그런데 민족의 책임자로 오셨던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대했습니까? 그를 중심삼고 하나의 본연의 국가를 건설하고 사탄들을 향해 행군하는 천군이 되어야 하고, 하늘의 정병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생이별입니다. 생이별이에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선조, 신앙의 선조들은 무엇이 잘났다고 자랑할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였던 것은 선민의 도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야 했던 길은 그런 길이 아닙니다. 생이별의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 백성들이 예수님과 심정적인 통합을 이루었더라면
이 땅 위에는 예수의 생죽음의 한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 지금까지 인간을 심정적인 이념으로 대해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유대 백성들이 세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때를 바라보는 심정적인 연고입니다. 이러한 유대 백성들이 천적인 목표를 바라보고 나오는 사람들을 움직여 심정적 통합을 이루었더라면, 그로부터 이 땅 위에 하나의 우주관적인 내용을 갖추고 인간의 심정에 충격을 일으킬 수 있는 어떤 주의가 나왔을 것이요, 그렇게 되면 유대 백성들을 통한 하나의 세계는 반드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려던 그 본향의 나라는 어디 갔느뇨? 어디 갔어요? 그 민족이 살 수 있는 가나안 땅은 어디 갔느뇨? 그 본향은 어느 갔는고? 아브라함이 축복받고 하늘 앞에 제사 지내던 그 땅, 그 성전은 어디 갔는고? 하나님이 직접 주관할 수 있었던 아담, 택하였던 노아와 방주 안에 있었던 그의 가족은 어디 갔는고? 우리들이 살 하늘의 안식처 될 수 있는 그 본향의 세계는 없습니다, 없어요. 그러기에 성경에도 고아와 같고 과부와 같은 우리라고 하였습니다.
김삿갓 같은 사람은 방랑객이 되어 삼천리강산을 유리고객하면서도 훌륭했어요. 훌륭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여러분도 인생행로에 있어서 그 가는 모습이 처량할지라도 우주를 노래할 수 있는 감정이 하늘과 더불어, 만물 만상과 더불어, 그 흐르는 심정이 천정과 더불어 짝할 수 있는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내가 그런 사람을 만났더라면 거지 깡통을 들고 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지성을 다해 그를 모셨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서러움의 역사를 되풀이하였고, 스스로 매고 때리고 자멸하는 입장을 거듭하여 왔습니다. 노아 때에도 그러하였고, 아브라함, 모세, 예수님 때에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역사의 종말시대에 있어서 인간의 운명을 해결하고 인간이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고 생명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이 때, 하나님은 어떠한 곳으로 인류를 몰아낼 것인고? 예수님 시대에는 본향의 나라를 찾기 위하여 인류를 몰아내었으나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향의 세계를 위하여 몰아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찾아야 할 본향의 세계, 그 세계를 세우고 지배하기 위하여 만왕의 왕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우리들이 고대하는 주님입니다. 인생행로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본향의 나라를 찾기 위해 끌리고 끌려 죽는 자가 있다면 그 나라가 세워질 때 충신이요 공신으로서 남아질 것이며, 하늘의 세움을 받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에 과거에 바울도 자기의 모든 사회적인 권위를 저버리고 혈혈단신으로 처참한 죽음의 길까지 갔던 것입니다. 그는 한때가 올 것을 자신 있게 알았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한때가 올 것을 자신 있게 알았기에 그럴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도 그런 한때가 올 것을 자신 있게 아시기에 오늘날 이런 섭리를 해 나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길을 가야 할 인생이라는 것을 아는 여러분은 자신 있게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자신 있습니까? 자신 있어요?
본연의 이상동산
우리가 가야 할 곳이 노아가 찾던 본향의 가정이요, 아브라함이 찾던 본향의 땅이요, 모세가 찾던 본향의 민족이요, 예수님이 찾던 본향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이루어 나오고 있는 것도 본향의 세계이거늘, 여러분은 그 세계와 여러분의 감정이 동할 수 있는 인연을 맺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 할진대 여러분에게는 인류역사의 낙오자의 인을 받을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본향의 세계가 그립습니다. 노아의 방주도 그립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2대 진영은 암초에 부딪칠 순간에 당도하고 있고, 생사의 판결을 지어야 할 어려운 국면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선악의 출발이 하나의 기점을 통하여 되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원리를 통하여 배우고 있습니다. 선악이 하나님을 놓고 시발되었으니 그 해결도 하나님을 놓고 되어야 하는 것이 철칙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면 잃어버린 곳에 가서 찾아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본연의 동산은 이상동산입니다. 유무상통하는 세계였고 형제의 감정이 만우주 어느 곳에든지 통할 수 있는 세계였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민족적인 감정, 혹은 국가의 어떤 주권적 차이를 가지고 논의할 수 있는 이상과 주의의 세계가 아닙니다. 민족의 차별, 혹은 국가의 주권 등 그러한 모든 것을 넘어서서 논의하는 세계, 인간의 경제적인 사정이라든가 문화라든가 하는 조건의 차이를 가지고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심정을 가지고 논의하는 세계였습니다.
어떤 가정에 형님이 있고 동생이 있는데, 그 형님은 대통령이요 동생은 노동자라고 한다면, 형님이 동생에게 ‘야 이 녀석아, 너는 노동자니 우리집에 들어와서 노동이나 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다운 형님이라 할진대 그 동생이 자기와 같지 못한 것을 한하면서, 높여 주고 싶은 심정이 동하는 것이 참다운 형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가정적인 이념, 본향의 집을 그리워하시기 때문에 만 인류도 그러한 본향집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가 기필코 가야 할 운명의 역사적인 해명점이요, 인간적인 해명점이요, 섭리적인 해명점이라 할진대 그 관점과 기준은 나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 차이가 크다면 우리는 대성통곡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불쌍한 저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아무것도 몰랐사옵니다. 역사의 흐름을 몰랐고, 역사가 지향하는 섭리의 방향과 목적을 몰랐고, 인생행로가 엉클어져 있음을 몰랐습니다. 혹은 선지선열, 역대 선조들의 고충과 역사적인 그 내적 심정을 몰랐습니다. 또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의 가신 길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나오신 길도 몰랐습니다. 몰랐던 죄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안다고 하는 입장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데 몰랐사오니 더욱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인간은 무조건 그래야 합니다, 무조건. 그래서 종교에서는 ‘교만은 원수라.’고 하였습니다. ‘교만하지 말라. 네가 나오지 말라, 네가 네가 원수다.’ 하였습니다. 왜냐? 나는 그와 같이 빚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심정으로 가만히 눈을 들어 자신을 다시 바라보니 끔찍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역사적인 심정을 갖고 하늘과 더불어 무엇인가 느끼는 감정에 접하게 될 때 끔찍한 것을 느낍니다. 역사적인 비애, 비운의 장막들이 막혀 있는 것을 바라볼 때 몸이 진저리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비 고비를 참고 나오시는 아버지요, 그런 고비 고비에 부딪치어 죽어가면서도 그 나라 그 세계가 그리워, 그 세계의 자유를 찾기 위하여, 행복을 찾기 위하여, 평화를 찾기 위하여 싸워 나왔던 선지선열들인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됩니다. 오늘의 나, 오늘의 우리, 오늘의 통일교회가 반대받는 것쯤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가야 할 이 길을 개척해야 되겠다는 확고한 신념 밑에서 ‘핍박이야 올 테면 와라.’ 하는 배포를 가져야겠습니다. 예수께서도 가룟 유다 일당 앞에 나타나게 될 때 늠름한 모습으로 나감으로써 이 모습에 그 일당은 머리를 숙였던 것입니다. ‘올 테면 와라.’ 하는 일면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것도 심정으로는 왕래할 수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어떤 악당이 있어서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막으려 하더라도 막을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떤 의식적인 영감에 의해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인, 자연적인 감정에서 느낄 수 있는 자리가 있다 할진대 여기에는 사탄이 아무리 침범하려 해도 침범하지 못합니다. 훼방했다가는 사탄이 큰일 난다는 거예요. 사탄이 녹아난다는 거예요. 인생행로에서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천국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못다 하신 말씀
우리는 본향을 찾아가는 인생행로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더 첨부해야 할 말씀은 ‘나는 사랑이요’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예수님은 빼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하나님이여, 나는 사랑이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을 가진 사람, 하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왔다 할진대 그를 두고 ‘야, 이 녀석아 너는 이 땅에서 하늘을 배반한 자다.’ 하며 심판대에 올려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들딸들이 땅 위에 많이 나오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높이 보는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신자들은 인생행로에서 거친 파도 속을 더듬어 살피고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하늘을 찾고 찾아 헤매다가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내 몸을 맡길 수 있는 곳, 내 마음을 맡길 수 있는 곳, 내 심정을 맡길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합니다. 본연의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만물의 주인공이라 할진대 만물은 그를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고? 모든 만물은 아담을 대해 ‘어서 내 주인이 돼 주시옵소서.’라고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기에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하나님!’ 하는가? 하나님은 모든 것이 ‘내 주인 돼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입장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상적인 주관을 받을 수 있어요?
오늘날 인류는 ‘저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드리고자 하오니 하나님이시여, 주인이 돼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역사, 그럴 수 있는 섭리, 그럴 수 있는 내용의 인격을 세웠다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여러분이 그런 분을 땅 위에서 만났다면 ‘내 몸을, 내 마음을, 내 심정을 당신이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내 주인이 되어 주시옵소서.’ 해야 만물도 그를 고대하던 주인으로 모시려는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존재가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있고 싶고 살고 싶고 가고 싶은 곳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의 여러분이 진리를 통해 가지고 몸이 그렇게 되고 마음이 그렇게 되고 심정이 그렇게 되면 세상이 아무리 반대하여도 이 진리가 세계를 지배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진리는 세계를 지배하고도 남을 거예요.
이제 여러분이 있고 싶은 곳, 살고 싶은 곳,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그런 곳이 본연의 자리일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식구와 식구들은 형제입니다. 안 보면 보고 싶고, 상처를 입고 있으면 그 상처를 붙들고 울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우러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래야 됩니다. 우리 식구 중 누가 상처를 받게 되면 가슴이 메어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우리의 본향집은 어떠한 곳이뇨? 아버지께서 나를 붙들고 울어 줄 수 있는 곳입니다. 주님께서도 같이 우실 수 있는 자리입니다. 심정의 인연을 한 부분도 빼지 않고 동반자의 입장, 친구의 입장에서, 혹은 신랑의 입장에서 대해 주시려는 하늘이라는 말씀, 고맙고 황송한 말씀입니다.
불초한 것을 모시고 주님이 울어 주시다니, 아버지께서 그러시다니 황공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내 인생행로에서 상처받은 모든 일체를 잊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려야 할 수 없이 큰 아버지의 사랑을 노래하는 감정이 앞서야 합니다. 그래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학기초에 처음으로 타향에 온 학생들은 학기말이 되면 고향이 그리워질 것입니다. 그 마음이 순수하고 본연의 심정이라면, 자기가 갖은 고생을 다하고 고향에 돌아가서 어머니와 형제들의 손을 붙들고 눈물지으면서 자기의 지나온 사정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을 새워 가며 털어놓을 수 있는 그 자리, 그 마을, 그 산천을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복귀의 한을 풀지 못한 우리, 우리에게 인생행로를 걷는 과정에 있어서 ‘오, 주여! 아버지여! 하는 순간에 온 천지만물이 기쁜 가운데에 옳소이다, 할렐루야!’ 하고 환호를 할 수 있는 순간이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 분에게는 그런 순간이 있어야만 됩니다. 있어야만 되는 거예요. 그것이 없다 할진대 하늘이 서러운 입장에, 불쌍한 자리에 놓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행복한 자는 붙들고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자식이 좋다는 것은 무엇이뇨? 부모가 어려울 때, 부모가 눈물지을 때 같이 울어 주기 때문에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또 부모가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픔도 같이하고 기쁨도 같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자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친구 중심삼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나를 위하여 죽을 때 울어 주고 슬플 때 같이 울어 주기 힘듭니다. 그럴 수 있는 분은 부모입니다. 하늘은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의 나아갈 도의 이념을 책임진 지도자, 혹은 교단적인 책임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양들을 위하여 울어줄 줄 알고 통곡하며 불쌍한 마음을 가질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양들이 자기들의 모든 사정을 그 지도자 앞에 털어놓고 그로 말미암아 희로애락의 감정이 풍부해질 때 그 사람들은 참된 목자를 만난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늘이기 때문에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인생행로에서 고달픈 몸으로 승리적인 하나의 내용을 가지고 나타나게 될 때, 역사적인 모든 성현 현철 그리고 하늘이 환희하면서 맞아줄 수 있는 한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그 날을 영광스럽게 맞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날을 감사히 여기고, 그날에 자신들의 모든 허물을 잊어버릴 수 있고, 그날에 고대하던 소원을 다 이룰 수 있기를 바라고 나가야겠습니다. 그렇게 가는 사람이 오늘날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임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 도>
아버님, 오라 하신 길이 어렵지 않은 줄 알고 나섰더니 어렵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기쁨의 길인 줄 알았는데 가다 보니 눈물의 고비 고비임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저희에게 슬픔이 있다 할진대 아버지를 붙들고 슬퍼하고 싶습니다. 인간들을 붙들고 슬퍼하다가는 낙망하기 쉬운 사실을 알았사옵고, 사람을 믿고 나가다가는 상처받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변치 않는 분은 아버님이었사옵니다. 아버님을 붙들고 울던 시간이 얼마나 행복스런 시간이었기에 예수님도 아버님을 붙들고 우시기 위한 길을 찾았겠습니까?
오늘 여기에 모인 통일의 식구는 교파가 문제가 아니옵고 어떤 형태가 문제가 아니옵니다. 아버님을 붙들고 올 줄 아는 사람들, 인생행로가 서글프고 외롭기에 인류 앞에 예수를 세워 먼저 이 길을 개척하게 하신 아버지의 심정을 알고 아버지를 위해 울어줄 줄 아는 참다운 아들이 되기를, 딸이 되기를 원하고 있사옵니다.
저희가 서럽다 하기 전에 먼저 모진 매를 맞으며, 모진 핍박을 받으며, 모든 억울함을 당하는 하늘이 계신 것을 알았을진대 어찌 하늘 앞에 자기를 변명할 수 있겠사옵니까? 하늘 앞에는 자기를 중심하고 슬퍼할 조건이 없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오늘 여기에 처한 당신의 아들딸들,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본향을 찾아가는 행로가 불쌍한 것이요, 비운이요, 불행하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아버님, 저희가 자신을 붙들고 울기 전에 아버님이 먼저 우셨고, 저희가 맞기 전에 아버님이 먼저 맞으신 것을 알았사옵고, 저희가 당하기 전에 아버님이 당하신 것을 알았사옵고, 저희가 아프기 전에 아버지께서 먼저 아프신 것을 알았사옵고, 저희가 쓰러지기 전에 아버님이 먼저 쓰러지셨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것을 알고 하늘을 향해 말없이 가고 또 가고도 부족한 자신인 것을 발견하면서 하늘 앞에 머리 숙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아들딸들을 하늘은 얼마나 고대하였사옵니까?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저희의 심정에 그런 감정이 동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나라를 대할 때, 세계를 대할 때, 하늘을 대할 때 그런 감정이 동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감정이 동해야만 개인으로부터 전체 세계적인 이념권까지 자신 있는 믿음을 가졌다 할 수 있으며, 자신의 이념을 세우기 위한 최고의 심정을 가진 하늘의 입장이 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이와 같은 환경의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저희의 마음을 일으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옵니다.
오늘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가야 할 인생행로에서 서글퍼했던 자신을 비판하고, 행복에 취해 살 수 있고, 또 나의 한 몸을 하늘과 인연맺음을 높이 평가하면서 머리 숙여 아버지의 영광을 드높일 수 있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모든 것을 맡기었사오니, 이들의 생명과 이들의 전체 생활, 이들이 지닌 모든 이념에 이르기까지 아버님의 심정에 어긋남이 없도록 주장하여 주시옵고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올 때,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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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형님 대감사 꾸벅요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