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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코로나19의 하나님 뜻>의 줄거리:
유럽과 미국 등에서 들려오는 코로나19 소식이 이제 한국 내의 우려 상황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이유로 전세계 예배당 모임이 중단 되는 사례는 기독교 역사상 처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확진자들의 쾌유를 간절히 빌고 방역에 최선을 다하는 일에 힘을 모으는 중에도 가장 궁금한 것은 이 사태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코로나19의 하나님 뜻
(마태복음 28:5~15)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코로나19의 하나님 뜻>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코로나19의 하나님 뜻’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사들 또한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고 말하며 갈릴리로 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갈릴리가 가진 의미에 집중하여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과 우리나라가 코로나19 사태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 등지에서는 남의 일처럼 여겨지고 있었지만 이미 바이러스는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현재는 미국의 확진자수가 10만 명을 넘어섰고 이탈리아에서는 사망자가 무서우리만치 늘어나고 있습니다. 유럽 전체가 코로나19로 인해 두려움에 휩싸였고 특히 미국에서는 사재기가 횡횡하고 있습니다. 같은 아시아인 일본에서도 사재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국민들은 침착하게 이 사태를 극복해나가고 있는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한편 기독교 역사상으로도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예배당 모임이 중단되거나 중단해야 될 위기를 맞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역사상 유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이 사태가 정말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 사태가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는 점이 또한 안타깝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나름대로 방역체계와 시민의식이 정착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적인 기준에서보자면 여전히 코로나19에 대한 대비는 미흡하게 느껴집니다. 우리나라가 진정된다고 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기에 문제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외국에서 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또한 우리나라에서 나가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만 괜찮다고 섬처럼 갇혀있을 수는 없기에 범세계적인 극복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코로나19 확진자들의 빠른 쾌유와 사태 진정을 위해, 복건복지를 담당하고 있는 의료진과 공무원들의 건강이 지켜질 수 있기를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코로나19 사태에서 비롯된 신앙적 의미 또한 발견할 수 있어야합니다.
최근에 미국에 사시는 분과 통화를 했습니다. 영화관과 같은 시설은 무기한 영업중지가 되었고 마트에서도 바이러스 전파와 혼란을 막기 위해 몇 사람씩만 입장이 허용되기에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한다고 합니다. 예배당 모임 또한 당연히 중단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태 속에서도 예배당 모임을 고집하는 곳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든 예배당 모임을 지속해야 되는가에 대한 갈등은 누구나 느꼈을 것입니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사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아래에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물며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역사상 유래 없는 사태이기에 결코 하나님의 주권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미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사태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뜻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배당 모임을 신성시했습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목회자들이 예배는 절대로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고 의미를 부여해왔습니다. 그런데 현 시점에서 누구의 탄압에 의한 것도 아닌데 전 세계적으로 예배당 모임은 중단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 대해 궁극적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아래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물론이고 마귀 사탄까지도 도구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갈릴리로 가라’는 짧은 말씀 안에 그 대답이 담겨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찾아왔던 여자들 즉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에게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에 앞서 천사 또한 예수님이 이미 부활하셨음을 알리며 갈릴리로 가서 예수님과 만날 것을 요청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러한 요청은 처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 사건을 예고하실 때에도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26장 32절에서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33~34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토록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계신 것일까요? 저는 기도하면서 말씀을 준비하는 중에 바로 이 말씀이 지금 코로나19를 맞이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로나19를 통해 전 세계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들을 향해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인 의미에서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동행은 갈릴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행은 십자가에 달려죽으신 예수님께 등을 돌림으로써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3년의 예수님과의 동행은 실제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상태에서 이루어졌던 반쪽짜리 동행이었던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이 마음으로 걸으셨던 길은 제자들과는 목적지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길은 십자가를 향하고 계셨습니다. 인간이 맞이하게 되는 육체의 죽음을 거쳐서 무덤에 묻히시고 부활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한편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하고는 있었지만 마음이 걸었던 길은 예수님과 달랐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걸었던 길은 모든 인간이 맞이하게 되는 육체의 죽음 이전까지로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바랐던 조국의 독립이나 다윗 왕국의 재현과 같은 일들은 어디까지나 육체의 죽음이라는 경계선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무덤에 묻히심과 부활의 길은 제자들에게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이나 동고동락했지만 한 번도 같은 길을 가지는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언제나 죽음 이전에 존재하던 목표에만 마음을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체의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을 목표로 하고 계셨습니다.
예를 들어 인천공항에서 출발해 미국에 가고자 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미국 서부의 LA로 가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미국 동부의 뉴욕으로 가려고 합니다. 이 때에 뉴욕으로 가는 사람은 일단 LA로 간 다음에 다시 뉴욕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인천공항에서 서로 다른 비행기를 타고 출발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차이도 이와 같았습니다. 죽음 이후를 목표로 하신 예수님과 죽음 안쪽에 머무르기를 바랐던 제자들의 마음가짐은 같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다가 십자가 사건을 경계로 떨어져나가게 된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그러한 모습이었을지언정 애초에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과 동행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죽음 이후에 있을 부활을 향하셨던 예수님과 죽음 안쪽에서 세상에 대한 소원과 바람을 가졌던 제자들의 마음가짐은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이로부터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 또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생애의 출발지였던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말씀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여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무덤에 묻히셨음을 아는 제자들에게 부활이 전파될 때에 비로소 새로운 길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셨다면 유월절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던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을 만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이유는 그곳이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갈릴리에서 시작되었던 예수님의 3년간의 공생애 기간은 진정한 의미의 동행은 아니었습니다. 그 갈릴리로 다시 부르심은 진짜 동행을 위한 출발을 시작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나는 장소요 동행이 시작되는 장소였습니다.
인천공항에서 LA에 도착하였다가 다시 뉴욕으로 가면 됩니다. 그러나 인천공항에서 LA로 가는 비행기와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는 애초에 달랐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비행기 표를 새로 끊듯이 우리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갈릴리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예수님과 동일하게 십자가의 죽으심과 무덤에 묻히심과 부활하심을 목표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예배가 중단된 상황에서 우리는 제자들과 같은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태는 예수님과의 새로운 동행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사태는 신앙적 메시지를 발견하고 마음가짐을 다시 시작하라는 예수님의 요청과 명령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해봅니다. ‘갈릴리로 가라’는 예수님이 분부하신 말씀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3년 동안을 몸으로만 함께하던 반쪽짜리 동행을 해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는 달리 십자가의 죽으심과 무덤에 묻히심과 부활하심을 목표로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활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제안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의 죽으심과 무덤을 지나 부활의 구간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므로 그 길을 함께 가는 진정한 동행을 다시 시작하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즉 몸으로 시작했던 반쪽짜리 동행에서 이제는 마음으로 함께하는 온전한 동행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알려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 예수님과의 새로운 동행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십자가 사건 이전의 예수님과의 동행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능력에서 시작하여 죽음 이전까지만 뻗어있던 길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의 동행을 붙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통해 이 세상에서 소원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제자들의 세상에 대한 소원도 죽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동행은 죽음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기적에서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난 동행이 이제부터는 십자가 죽음의 자리에서부터 다시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는 동안에는 예수님과의 진정한 동행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코로나19 사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어도 육체의 죽음까지만 뻗어있는 길에서 이루어진 예배였다면 그것은 온전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소원들로 마음을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그러했듯이 우리 또한 착각 속에서 예수님과 동행해왔던 것입니다. 예배가 중단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새로운 출발을 결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세상 밖으로 나가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의 동행 또한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세상 밖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경계를 통해 세상 바깥으로 나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갈릴리에서의 만남은 결코 육체의 죽음 안에 있는 마음가짐을 가지고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여전히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얻고자하고 이루고자 갈망하는 마음으로는 예수님과의 동행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부활이전의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예수님과 동행하지 못했던 제자들의 상태를 답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돈 문제나 건강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세요.”라고 전도하는 것은 결코 “예수님의 능력으로 돈 문제와 건강 문제를 해결하세요.”라는 의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돈 문제와 건강 문제에 대해 죽으세요.”라는 의미가 담겨야만 합니다. 전도는 세상 문제를 해결해주는 희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이 세상을 십자가에서 등지고 떠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동행이기 때문입니다. 돈 문제나 건강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삶의 모든 문제에 이러한 마음가짐은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전도로는 결코 예수님과 동행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인들에게 돈을 주며 거짓을 말하게 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세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을 지속한다면 이들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무덤에 묻히심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동안 이 길을 가렸습니다. 십자가 죽음이전에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모습만을 강조하며 우리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가짐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동행을 결정했던 제자들의 마음가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동행은 온전할 수 없는 반쪽짜리 동행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동행 같지 않은 동행을 예배당에 모일 때마다 반복해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당에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자녀와의 관계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어야만 했습니다.
마음에 배우자를 담은 상태에서는 예수님과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배우자가 좋든 싫든 배우자를 담은 마음상태를 십자가에서 죽여야만 예수님과의 동행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새롭게 제자들과의 만남을 시작하시고자 하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갈릴리로 가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배우자와 자녀를 대하기 전에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과 동행하기 위해 갈릴리로 가야만 합니다. 갈릴리로 간다는 것은 십자가를 출발점으로 삼아 예수님과 동행을 시작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배우자를 담은 마음상태를 십자가에서 죽입니다. 죽은 마음은 무덤에 들어간 것처럼 반응하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지정의와 언행의 스위치를 끄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고 승천하고 보좌 우편까지 이어진 길을 따라 하나님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배당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시작해서 무덤을 거쳐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이르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보좌 우편까지 이르게 되면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내가 마음을 드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채워지셨기에 예수님 안에 들어간 우리의 마음에도 하나님이 들어오시게 됩니다. 그럴 때에 나의 지정의와 언행은 하나님의 주권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지정의와 언행을 장갑삼아 배우자나 자녀와 관계해 나가실 것입니다. 이제 비로소 공생애 때의 예수님과 같이 나도 나의 공생애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배당의 모임을 신성시해왔습니다. 번듯한 예배당을 지어놓고 그 안에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는 것을 중시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 전도를 강조했습니다. 행사를 치르기 위한 예산을 만들고자 헌금을 강요했습니다. 헌금을 관리하기 위해 장로와 안수집사를 뽑았습니다. 이처럼 열심히 활동들을 해왔지만 정작 예수님과의 동행에 대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동행은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설령 예배당 조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이 땅에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정말로 예수님과의 동행을 이루고자 한다면 예배당 조직에 대해서도 마음은 죽어야만 합니다. 이 땅에 있는 것이라면 예배당이든 목회든 가족이든 건강 문제든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예수님과의 동행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것을 몰랐고 가르쳐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당 조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여전히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고 예수님을 바로 믿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예배당 조직에 속해있는 사람들이 예배당의 모임을 활성화시켜야만 한다는 속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가짐은 죽음 이전까지로만 국한시키고 있었던 제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무덤에 묻히심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동행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예배당 모임을 막는 코로나19 사태가 두렵지 않습니다. 우선 예배당에 모여야 한다는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임으로부터 예수님과의 동행은 시작될 수 있습니다. 목사님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 모임을 걱정하는 동안에서는 예수님과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가 출발점입니다.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만 합니다. 죽음 이전까지만 동행하고자 했던 제자들과 같은 마음을 가진다면 예수님과의 진정한 동행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과의 3년간은 예수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일까요?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의 3년간은 예수님 따르기가 아닌 예수님과 정들기의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좋아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성인이 되면 독립하게 됩니다. 언제까지고 부모가 자녀의 길에 동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자녀를 사랑합니다. 제자들의 3년은 예수님에 대한 정들기의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괴로워하며 통곡합니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진 예수님이 제자들의 유일한 소원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예수님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을 좋아하던 제자들을 부활하신 예수님은 만나주십니다.
여러분에게 선택지가 두 가지 주어졌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죽음 이전까지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 대신 예수님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얻는 대신 세상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지 앞에서 “예수님! 이제까지 정말 고마웠습니다. 섭섭하지만 이제는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은 가룟 유다의 선택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왔다면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정이 있을 것입니다. 말이라도 “예수님과 동행할 수 없다면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 곁에만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통곡했던 이유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과 동행한 줄로 알았지만 그것은 진정한 동행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정과 좋아하는 마음만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을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온전히 동행할 수 없었던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 길 위에서 이루고 싶은 것과 가지고 싶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십자가를 붙잡지 못했고 예수님과 진정으로 동행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 정이 들고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예수님과 헤어져서는 살 수 없겠다고 생각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좋아해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무덤에 묻히심에 연합하여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이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갈릴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마주하는 현장이 예수님을 만나는 갈릴리가 되어야만 합니다. 부모로써 자녀를 마주 대하는 현장이 또한 갈릴리가 되어야만 합니다. 오늘도 나가야 하는 사업장이 갈릴리가 되어야 하며, 내일도 이어져 갈 인간관계도 갈릴리가 되어야만 합니다. 예배당 모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여러분 삶의 현장이 예수님을 만나는 갈릴리가 되어야만 합니다.
갈릴리에 예배당이 있어서 그곳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만나고 무슨 일을 하든지 삶의 모든 현장은 갈릴리가 되어야만 합니다. 마음으로 십자가와 무덤의 길을 갈 때에 우리의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보좌 우편에 오르신 예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고서는 모든 지정의와 언행을 그만두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질 때에 하나님의 주권의 손이 나를 장갑 삼으시는 공생애는 시작될 것입니다.
예배당이 있느냐 없느냐, 예배당에 사람이 얼마나 모였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 한 사람이 갈릴리로 가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부터 출발하는 동행이 중요합니다. 코로나19 사태는 단순한 위기가 아닙니다. 이 사태에서 드러나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바람을 깨달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삶의 현장에서 갈릴리의 동행이 재현됨을 통해 이 사태 또한 극복되어질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삶의 현장이 주님과의 동행을 시작하는 갈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과 진정한 동행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권적으로 움직여 가심으로써 나로부터 코로나19 사태가 극복되는 은혜의 경험들이 만인에게로 전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