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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8일
본문: 마 20:1-16
제목: 포도원 주인 비유
본문의 비유에 등장하는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장터에 나가서 일감을 기다리던 품꾼들에게 하루치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고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초대했다. 이들을 아마도 성실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모이를 줍는다"는 말이 있듯이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일어나 인력시장에 나와 자신들을 써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도원 주인이 일하도록 기회를 준 이 품꾼들은 하루치 품삯을 약속받고 포도원에 가서 일했다. 주인은 오전 9시 경에 또 나가서 품꾼들을 초대했다. 예수님은 이들의 경우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장터에서 서 있는 자"라고 묘사하셨다. 이들은 하루 품삯보다는 적은 품삯이라도 받고 일자리를 찾고 있는 인력시장 사람들이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낮에 태양빛이 강하고 온도가 높아서 대낮에는 일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9시에 온 사람들은 쉬는 시간을 빼면 어쩌면 반나절 품삯 정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포도원에 들어갔을 것이다. 포도원 주인은 이들에게는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않고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whatever is right) 주리라"고 약속하면서 "너희도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했다.
12시와 오후 3시경에도 주인은 똑같이 장터에 가서 일거리를 찾고 서 있는 자들에게 자기 포도원에서 일하면 상응하는 품삯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고 포도원에 가도록 했다. 이 시간에 장터에 나온 사람들은 품꾼으로 일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지만 혹시나 싶어 나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다른 포도원 주인들도 와서 맡길만한 품꾼들은 다 데려가고 별로 힘이 없고 품꾼으로 쓸 가치가 별로 없는 사람들만 빈둥거리며 서 있었을 수도 있다. 오후 5시에 주인이 장터에 갔을 때 발견했던 사람들의 대답이 이런 해석이 가능함을 시사한다. 주인이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포도원 주인은 오후 5시에도 나가서 품꾼을 모집했다. 해가 질 무렵인 오후 6시까지는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도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초대하였다. 이 주인은 이들이 포도원까지 가야하는 시간을 포함하면 한 시간도 채 일하지 못하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는 특이한 주인이었다.
예수님은 천국이 이 포도원 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품꾼들이 포도원에서 해야 할 일이 풀을 뽑고 거름을 주는 일이었는지 아니면 포도 수확철이어서 포도를 수확하는 일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청지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주인은 직접 인력시장에 나가서 일꾼들을 모집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마태는 9장에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던 초기에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7-38). 하나님 아버지가 이 포도원의 주인이시며 예수님 또한 이 포도원의 주인이심을 알 수 있다.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예수님은 포도원의 주인으로서 포도원에 일하는 자들로 열두 제자들을 불러 일하도록 기회를 주셨다. 어떤 의미에서는 열두 제자들은 이른 아침에 포도원에 들어온 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마태복음 20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역은 포도원 주인이 오후 5시 경에 장터에 나간 것과 같이 공생애의 마지막 시점에 있었다. 오늘 본문 다음에 이어지는 17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라는 표현이 이것을 시사한다.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시점에 있는 예수님은 오후 5시에도 품꾼들을 불러 포도원으로 들이신 포도원 주인이셨다. 마지막 품꾼으로 만난 사람은 십자가에 달린 두 명의 강도 중에 한 사람이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고백한 그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영원한 포도원에 초대해주셨다.
포도원에 들어온 사람들은 시간대별로 달랐다. 군대에서 입대한 날짜 순으로 선임이 정해지듯이 이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들도 서로 그렇게 관계했을 것이다. 먼저 들어온 품꾼들은 나중에 들어온 품꾼들에게 유세를 부렸을 지도 모른다. 자기들은 당연히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는 성골(聖骨)에 해당한다고 여기며 늦게 들어온 품꾼들을 약간은 무시했을 수도 있다. 이 부분을 쓰는데 갑자기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던 시절이 기억이 난다. 훈련소에 입소하는 날 4주인지 6주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훈련 기간을 모두 마치고 더블백을 매고 이등병 계급장을 단 모습으로 자대배치를 받아 퇴소하는 이들이 우러러보이고 부러웠다. 마침내 나도 훈련소를 퇴소하던 날 그들의 입장이 되었을 때 훈련소를 새롭게 입소하는 훈련병들을 보면서 약간은 우월감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포도원에 일찍 들어온 품꾼들도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타락한 인간의 심리가 그렇기 때문이다. 심지어 열두명의 제자들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도중에 그들은 누가 더 크냐고 그들 사이에 서열을 정하려고 했던 행동에서 이런 모습이 드러난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등장하는 19장 30절 말씀을 오늘 본문과 연결해서 해석하면 그 의미가 선명해진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천국은 역설적인 나라이다. 나중된 자가 처음이 되며 처음된 자가 나중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똑똑하고 힘이 있고 먼저 입사한 사람이 더 나은 대우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노력한 만큼 더 대우받는 것이 정당하며 정의롭다고 여긴다. 그렇게 대우받지 못하면 오히려 분노하고 불의하다고 여기기까지 한다. 사실 노력한 만큼 대우받는 것은 건강하고 정의로운 일이다. 그러나 천국은 세상나라들과 구별된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며 나중된 자가 되어야 하는 역설적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시작해도 자칫 꼴찌가 될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해가 저물었을 때 주인은 청지기에게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지시한다. 놀랍게도 제일 늦게 와서 한 시간도 채우지 못한 품꾼들에게 청지기는 하루치 품삯을 주었다. 이들은 의아했을 것이고 다른 품꾼들은 놀라며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기대를 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비유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제일 늦게 온 품꾼들은 청지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을지도 모른다. "일당 계산을 잘못하신 것 같네요. 저희들은 한시간도 채 일하지 않았는데요"라고 말이다. 흉년으로 인하여 애굽에 양식을 사러 갔던 요셉의 형제들이 자신들이 지불했다고 여겼던 돈이 그들의 곡식 자루 안에 그대로 있는 것을 나중에 발견하고 깜짝 놀랐던 것만큼 놀라지는 않았겠지만 이들은 적어도 의아해하면서 놀랐을 것이다. 청지지가 품삯을 맞게 준 것이라고 확인해주었을 때 그들은 몇 번이나 감사함을 표현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각기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갔으리라.
이른 아침에 들어온 품꾼들 뿐만 아니라 시간차가 있었지만 한 시간도 채 일하지 않은 품꾼들에 비해 더 많은 시간 동안 일했던 품꾼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며 자신이 받을 품삯에 대해 흥분하면서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을 때 그들은 포도원 주인을 원망하기 시작했다(began to grumble). 원망했다는 것은 화가 난 것을 말한다. 화가 나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기대감이 좌절될 때 화가 난다. 어떤 대우를 당연히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다가 기대한 만큼 대우 해주지 않으면 화가 난다. 그래서 자기애성 성격장애자들이 화를 잘 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자기웅대성이 있어서 사람들이 자기를 자기 기대나 자기 이미지에 걸맞게 대우 해줄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심리적으로 미성숙하기 때문에 잘못 기대하고 화를 내는 것이다.
먼저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들은 제일 늦게 들어온 사람에게 베푸는 주인의 아량을 보고 칭찬을 하거나 존경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치 품삯을 받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그들을 공감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가 받을 품삯이 얼마가 될 것인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제일 먼저 들어온 품꾼들은 "적어도 열 데나리온 정도는 주겠지!"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예상과 전혀 다르게 한 데나리온을 받았을 때 기대했던 크기 만큼이나 더 실망하고 화가 났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주인에게 그들의 분노를 표현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그들의 항변은 나름 일리가 있게 들린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정당하고 정의롭게 들린다. 하지만 그들은 주인이 아침 일찍 포도원에 들어온 그들에게 하루치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한 계약을 신실하게 지켰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품꾼들의 경우 "상당하게" 주리라고 약속한 금액은 한 데나리온보다는 적은 금액임은 당연한 것이었다. 따라서 아침 일찍 일하기 시작한 품꾼들 외에는 모두 보너스를 받은 셈이었다. 처음 들어왔던 품꾼들은 약속했던 품삯을 받았으니 불평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나머지 품꾼들도 자신들은 추가로 품삯을 더 받았으니 불평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함께 불평했다.
포도원 주인은 원망하는 품꾼들 중의 한 사람에게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라고 대답하였다. 주인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모든 품꾼들은 은혜를 입은 자들이었다. 이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초청해준 것만도 은혜였다. 일이 없어서 빈둥거리다가 하루를 마감할 수도 있었는데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었다. 연결짓기와 구별짓기를 잘못 함으로써 불평했고 화가 난 것이다. 그들이 해석을 잘못 했기 때문이다. 포도원 주인과 연결되어 이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었다. 하루치의 품삯을 당일에 그대로 받은 것도 감사한 일이었다. 구약 시대 때부터 일부 악덕 포도원 주인들은 품삯을 미루기도 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품꾼들의 삯을 다음 날로 미루지 말라고 율법으로 규정할 만큼 품삯을 미루거나 떼먹는 주인들이 있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그들은 당일에 한 데나리온을 바로 받고 집으로 가는 은혜를 입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품꾼들은 자신이 수고한 시간에 비해 과분한 보너스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들조차 일찍부터 일한 품꾼들과 합세해서 불평했다. 그들의 마음은 이해가 된다.
마태만 이 포도원 주인 비유를 기록했다. 마태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을 19장 30절과 같은 내용으로 반복하면서 포도원 주인 비유를 앞뒤로 감싸는 샌드위치 기법이라는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16절).
나는 만 34세의 나이에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동기 중에서 먼저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가 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두 명 중의 한 명이지만). 오늘 본문의 비유로 본다면 시간적으로는 아침 일찍 부름받은 품꾼에 해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내 모습은 오후 5시에 부름을 받은 품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볼 때에는 나름 열심히 사역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포도원 주인이신 예수님이 평가하신다면 성실하게 교수사역을 하지 못했던 불충한 종이었다. 쉽게 탈진했고 게으름도 피웠기 때문이다. 귀한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힘들때 인내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날 생각을 여러번 했고 실제로 떠나기도 했다. 정년을 채우지도 않고 조기은퇴까지 했다. 솔직히 말해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따랐던 적이 별로 없었다고 생각한다. 은퇴한 후에야 조금씩 철이 드는 느낌이다. 나를 부르시고 기회를 주신 포도원 주인 예수님께 송구한 마음 뿐이다. 그래서 나는 해질 무렵에 부름을 받은 품꾼이라고 여기고 살고 있다. 해질 무렵에 포도원에 들어왔던 품꾼들은 주인이 자신을 불러준 은혜에 감격해서 짧은 시간이지만 최선을 다해 일했을 것이 분명하다. 불러 주는 이가 없어서 늦게까지 서성거리던 자신을 써준 포도원 주인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기 때문이다. 나의 삶에 언제 땅거미가 내려않고 일할 수 없는 밤이 갑자기 찾아올 지 알 수 없지만 그 시간까지 이제는 신실한 품꾼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꼴찌로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쓰임 받을 수 있다면 감사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매일 묵상한 것을 쓰고 블로그에 글을 업로드 하는 이유도 누구에겐가 복음이 전해져서 독자 중에 한명이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는데 조력자로 쓰임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사도로는 맨 나중에 부름을 받았고 예수님의 3년 공생애에 참여한 적도 없는 제자였지만 그는 기독교 역사에 가장 크게 쓰임받는 신앙인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교회를 핍박했던 죄인들 중에 괴수였다는 인식을 평생 가지고 살았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8-10). 예수님은 오늘 천국 비유를 말씀해주심으로써 자신은 이미 늦었다고 한탄하거나 후회하는 자리에만 머물러 있지 않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계신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에도 여전히 기회는 남아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곁에 함께 달렸던 한편 강도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과 연결되면서 낙원에 들어가는 은혜를 입은 자가 됨으로써 오고오는 세대의 사람들에게 구원과 은혜의 길은 마지막 순간에도 열려 있음을 웅변한다.
이관직 교수, 전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현 이관직 상담실 대표, kleecounseling.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