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평리(中坪里)는 원래 신북면(身北面) 지역이다. 대미산(黛眉山, 大美山 1,116m) 아래에 있는 마을로 주위가 아늑하고 마을 중앙에 들이 있다고 하여 중들, 중평(中坪)이라 부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중평리(中坪里)라 하였고, 1932년에 문경면(읍)에 편입되었다. 東은 동로면 생달리, 南은 산북면 가좌리, 西는 갈평리와 접하고 있다.
중들(中坪)은 1300년경에 단양 장씨(張氏)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는 지릅재(鷄立嶺)에서 이마을을 거쳐 여우목재를 넘어가는 길이 예천, 안동으로 가는 큰 길이었기 때문에 이미 이곳에는 여행객이 쉬어갈 수 있는 마을이 생겨났었다고 보는것이 바람직하다. 중평의 박마, 박마을은 예로부터 박씨(朴氏)가 집단으로 거주하여 마을이름이 박마(朴村)가 되었다고 하며, 여우목 마을은 중평리에서 동로면 생달리로 넘어가는 재에 있던 마을로서 대미산과 운달산이 이어지는 재로 여우의 목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여우목 마을은 신유교난(辛酉敎難)때에 천주교의 박해를 피해 온 천주교인들이 집단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중평 큰마(아랫마)에는 예전에 주득천(周得天)이라는 효자가 살아서 나라로부터 정문(旌門)을 받았었다, 구 문경현지(舊 聞慶縣誌)에 보면 주득천은 신북(身北)의 양인(良人)이다. 어머니의 눈이 어두웠기에 득천이 밤낮으로 옆에서 모시면서 어려운 살림인데도 단맛나는 음식을 받들고 여름에 어머니가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하여 사방으로 구했으나 얻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데 솔개가 꿩을 그의 앞에 떨어뜨려서 어머니에 드렸으며, 돌아가신 뒤에 3년을 여묘하였다.
나라에서는 정문을 내리고 복호(復戶)를 명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 중들 ·중평(中坪)
대미산 아래 자리잡고 있는 산간마을로서 북으로는 충북 제원군과 경계를 이루고 동으로는 동로면과 접경하고 있는 이곳은 1300년경에 단양장씨가 처음으로 개척할 당시 주위가 아늑하고 들이 마을 중앙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중들 또는 중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박마 ·박마을
1680년경 밀양박씨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한 이후 박씨가문의 30여 가구가 집단으로 거주하여 박씨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박마을 또는 박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여우목
문경읍과 동로면 경계에 운달산 준령인 재가 있어 그 모양이 여우목과 비슷하다하여 여우목이라 불렀다 한다. 일설에 의하면 사냥하는 사람들이 이곳이 여우가 많이 다니는 길목이라고 하여 여우목이라고 하였다는 말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