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화로운 궁중 생활과 성문 밖의 고통 (9)
즐거운 나날이었다. 숫도다나왕은 태자와 태자비를 위해 세 개의 궁전을 지어 겹겹의 수비병들이 지켜선 담장은 높고 튼튼했으며, 대문이 얼마나 크고 무거웠던지 사십 리 밖까지 여닫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건물 안팎에는 사계절 기이한 꽃과 나무가 찬란했고, 우짖는 새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숫도다나왕은 네 사람의 시녀로 하여금 하얀 일산을 받처 든 여인들은 한낮엔 태양을 가리고 밤에는 이슬을 가리며 밤낮 태자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기나긴 우기엔 행여 답답해 하진 않을까 싶어 가무에 능한 여인들을 보내 춤추고 노래하게 하였다.
다른 집에서는 밀기울이나 보리밥을 먹을 때도 태자의 궁전에서는 시종들까지 쌀밥에 기름진 반찬을 먹을 수 있도록 양식도 풍족하게 공급하였다. 부왕의 배려는 세심하였다.
새봄을 맞아 봄놀이를 나섰을 때였다.
동문을 나서 굽잇길을 돌아서던 행렬이 갑작스레 멈췄다. 놀란 말들의 몸짓에 몇몇은 자친 수레에서 떨어질 뻔하였다.
태자가 혀를 차는 마부 찬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노인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다들 놀랬나 봅니다. 저 느려터진 걸음 좀 봐, 어휴
볼품없는 꼬락서니 하고는.“
하얀 머리카락에 거무죽죽한 얼굴의 노인은 굽은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몽땅 빠진 이빨에 지적지적 눈물과 콧물까지 범벅인 노인에게 “저 놈의 늙은이!”
길게 숨을 돌리며 젊은이들의 행렬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노인의 시선이 태자와 마주쳣다.
초점을 잃어버린 잿빛 눈동자가 퀭했다. 태자는 생각에 잠겼다.
‘늙는다는 것, 참 서글픈 일이구나, 생기를 잃어버리고 비틀거리는 모습을 다들 조롱하고 싫어하는구나. 사람으로 태어난 이는 누구도 늙음을 피할 수 없다. 나도 저렇게 늙는 것을 피할 수 없으니라. 나 또한 초라하게 늙어 사람들의 조롱과 혐오를 피할 수 없으리라. 그런 내가 저 노인을 비웃고 업신여길 수 있을까? 봄날처럼 짧은 젊음을 과시하고 자랑할 수 있을까?’
새봄을 만끽하는 왕자들 틈에서 태자는 즐거울수 없었다.
기쁨을 누리기엔 다가올 미래의 모습이 너무도 두려웠고 먼 훗날의 일이라며 망각하기엔 오늘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홀로 숲을 거닐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성으로 돌아오는 일은 그 후로도 계속 되었다.
친족들의 성화를 이기지 못해 다시 나들이를 나서던 참이었다.
남쪽 성문 길가에 거적때기를 둘러쓴 섬뜩한 귀신 몰골을 한 사람이 누어 있었다.
엉겨 붙은 머리칼에 벌건 종기가 온몸에 불거지고, 종기에서 더러운 피고름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머리털이 곤두섰다.
그는 고통에 신음하며 자기가 토해 놓은 더러운 오물 위를 뒹굴고 있었다. 사람들은 코를 잡고 멀찍이 물서설 뿐 누구 하나 가까이 가지 않았다. 뭐라도 붙들려는 듯 허공을 더듬는 병자의 손끝을 스친 태자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저 사람인들 저 아픔을 상상이나 했을까. 저 사람 역시 지난날엔 젊고 건강했으니라.
찬란한 미래를 꿈꾸고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으며 넘치는 의욕으로 하루를 살았으니라. 허나,
보라. 밤손님처럼 들이닥친 병마에 저리 쉽게 쓰러지지 않는가. 저 사람에게 아직도 내일의 꿈이 남아 있을까? 어제는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오늘은 모르는 사람처럼 멀리 피해가겠지. 나 역시 저렇게 병드는 것을 피할 수 없으리라.
가족등의 바람과 달리 나들이를 다녀올 때마다 태자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다. 숫도다나왕은 아시따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은 아닐까 싶어 마음을 졸였다. 마하빠자빠띠는 근심에 잠겨 음식조차 삼키지 못했고, 야소다라는 더 이상 몸치장도 하지 않았다.
그날도 찬나의 손에 이끌려 동산으로 가던 길이었다.
서문을 나서던 무렵 한 무리의 장례 행렬을 만났다. 머리를 풀어헤친 그들은 망자의 옷자락을 붙들고 하늘이 무너져라 울부짖고 있었다. 아무리 소리쳐도 사랑하는 그 사람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부귀와 권세를 누리며 평온한 삶을 살던 이들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그들을 도울 수 없었다.
세상은 온통 고통으로 아우성이었다.
“찬나야 돌아가자”
궁전으로 돌아온 태자는 미루고 또 미루었던 말을 꺼냈다.
“아버지, 저는 수행자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
원치 않던 날이 오고 말았다. 불안이 현실로 닥치자 숫도다나왕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차라리 내가 출가하겟다. 아비를 버리는 불효에 가문의 대까지 끊겠단 말이냐.”
“가족에게 얽매여 산다는 건 너무도 답답한 일입니다. 저는 수행자로서 자유로운 삶, 청정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너를 얽어맬 가족이 과연 있기라도 한 것이냐? 너에겐 속박이 될 아들도 없지 않느냐? 허락할 수 없다. 이 나라에는 엄연히 국법이 있다. 가업을 이을 자식도 없는 이에게 절대 출가를 허락할 수 없다.”
고개를 숙인 채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태자의 안쓰러운 모습에 숫도다나왕은 노기를 누그려뜨렸다.
“제발 마음을 돌려 이 나라, 이 가문을 생각해다오. 네 소원은 무엇이든 다 들어줄 테니, 출가하겠다는 말 만은 말아다오.”
“저의 네가지 소원을 들어주실 수 있다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1) 영원히 젊음을 누리며 늙지 않게 해 주십시오. (동문-노인)
2) 영원히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해주십시오. (남문-병자)
3) 죽지않고 영원히 살게 해 주십시오. (서문-죽은사람)
4) 사람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이별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고통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게 해주실 수 있다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태자야, 그런 말 말아라. 이 세상에 늙고 병들어 죽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느냐. 행여 누가 듣고 웃을까 겁나는구나.”
“아버지, 그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면 저는 출가하겠습니다.”
숫도다나왕은 진노하여 신하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태자의 경호를 배로 늘리고 성곽의 경비를 철저히 하라. 앞으로는 태자가 지나는 길목마다 향수와 꽃을 뿌리고, 길가에 노인이나 병자나 죽은 사람을 보이지 않게 하라. 태자가 노니는 동산을 갖가지 보석으로 치장하고 나뭇가지마다 방울을 매달아 하늘나라 낙원처럼 꾸미도록 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