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청송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전쟁 전 피해>
산간지역이었던 청송은 전쟁 전부터 토벌작전에 의해 주민들의 피해가 컸는데, 당시 피해는 1949년 8월 과 12월에 집중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1949년 8월 20일에는 파천면 황목리, 길안면 대곡리 주민 16명이 국군 및 청송경찰서 소속 등 군경합동토벌대에게 끌려가 안동 길안면 지동천변에서 총살당했다. 같은 날 산내면에 주둔하던 27연대(또는 제3사단 제23연대)는 박주덕, 박태준 등 산내지서로 끌려간 마을 주민들을 의곡리 동창천 원두숲에서 총살했다.
1949년 12월 20일에는 국군이 청송 안덕면 근곡리 주민 장병호를 근곡리 인근 강변에서 총살하고, 같은 달 25일 안덕면 노래리 주민 신갑술과 김몽용을 부남면 하속리에서 총살하였다.
당시 이 지역에서 토벌작전을 수행했던 부대는 ‘태백산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된 2사단 16연대였다. 지역 주민들은 이들을 ‘맹호부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청송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청송경찰서로 연행되어 희생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한 사건은 현서면 권극생 등 주민들이 7월 말 부동면 지동고개 인근, 사곡면 뒷산에서 총살당한 것이었다. 청송경찰서 근무자 김씨(김복근)은 당시 희생지가 황경재(안동방면), 추현고개(영덕방면)였다고 하며 황씨(황준상, 현서지서)는 달기 약수탕, 밤나무골, 월막리 골짜기였다고 한다.
전쟁 당시 청송에 백골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사』에 의하면 국민보도연맹사건 후 1군단 수도사단과 3사단이 7월 27일 청송에 진지를 구축했다고 한다. 7월 28일 전면전은 없었으며 7월 29일 포격전에 이어 30일 접전이 있었으며, 사단지휘부는 8월 2일 안동 길안면에 자리했다고 한다.
<부역혐의 피해>
청송지역은 9월 25일 수도사단 18연대에 의해 수복되었다고 하는데, 정작 수복하던 국군에 의한 주민들의 피해는 그 전부터 나타났다. 8월 19일 육군본부 직할 제1유격대대 소속으로 추정되는 국군부대가 갈천리 주민들을 현서면과 영천군의 경계가 되는 보현산의 속칭 칠미기라는 곳으로 끌고 가 총살했는데, 그 중에는 여성은 물론 두 살배기 아이도 있었고 50이 넘은 노인도 있었다. 사건의 희생자는 김동옥 등 모두 15명이었고 김우천은 현장에서 발에 총상을 입은 채 살아남았다.
<미군폭격 피해>
전선형성기와 짧았던 인민군 점령기간 동안 미군 폭격에 의한 주민피해 사건이 있었다.
8월 10일 10시 미 전투기가 현동면 거성리 마을을 폭격하여 최소 7명의 주민들이 사망했으며, 8월 21일에는 안덕면 성재리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복리 등 주민들이 정찰기가 떠난 후 B-29로 추정되는 미 폭격기 3~4대로부터 네이팜, 중폭탄 등 폭격을 당했다. 피해가 더 컸을 것으로 보이나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7명이다.
이상 청송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은 다음 <표>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