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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이라서 좋다>
편집자 주 : 부산광역시는 올 한해 대 내외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며 ‘시정혁신’ ‘시민행복’ ‘민생안전’에 온 힘을 다해 ‘다시 태어나도 살고 싶은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도약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한 ’혁신의 씨앗‘이 올해는 뿌리내리고 싹을 틔워 ’시민행복의 꽃‘을 피울 것을 다짐한다. 강건하고 굳건한 부산의 힘과 단단한 시민화합을 하나로 모아 2025년 올해를 “다시 태어나도 살고 싶은 부산”실현 원년으로 삼는다. 이러한 부산광역시의 행보에 참여하는 뜻으로 “부산이라서 좋다” 특집을 기획하였다.
부산의 주요 경승지
부산의 경승지 탐방은 관광을 위하던지 자연환경을 논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도시문학>의 특성상 문학적 접근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부산의 주요 경승지로는 해운대 태종대 신선대 몰운대 오륜대 의상대 겸효대 강선대 이기대 시량대 산성대 청학대 직선대 용두대 소학대등이 있다. 이중 도시가 팽창하는 과정에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곳도 있고, 그 의미를 상실한 곳도 있다. 이에 주요 경승지에 얽힌 이야기들을 문학적으로 승화 시켜 봄은 그 의미를 남다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산을 대표하는 몰운대와 태종대 그리고 해운대를 선정하여 문학적으로 접근 하고자 한다.
1. 문학적 접근
1) 몰운대
안개와 구름이 끼는 날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몰운대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곳은 경관이 뛰어나기로 소문이 나 있다. 원래 16세기까지는 몰운도라는 섬이었다가 점차 낙동강에서 밀려온 토사가 쌓여 육지와 연결되었다고 한다. 기암괴석과 울창한 소나무 숲, 그리고 바다가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야생화로는 여우콩 자금우 털머위 좀딱취 등이 있는데 좀딱취는 부산지역에서 유일하다.
(1) 황준량의 「몰운대차박중초운(沒雲臺次朴仲初韻)」
臺高天濶海氛收 대 높고 하늘 넓고 바다 기운 잔잔한데
做得仙區壯浪遊 신선의 땅에서 씩씩하게 마음껏 노니네
袖盡東南山海去 소매 끝닿은 동남쪽 산과 바다 저 멀리
遊人應怨少分留 노니는 사람 오래 머물지 못함 원망하리.
이는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1517~1563]이 1551년(명종 6) 경상도 감군어사(慶尙道監軍御使)로서 경상도 전 지역을 다니며 살필 당시 지은 칠언 절구의 한시이다. 하늘 넓고 바다 잔잔한 날에, 마치 신선이 노닐던 곳 인양 신비롭기까지 한 몰운대에 올라 마음을 열고 마음껏 경관을 감상하니, 저 멀리 손으로 가리킬 수 있는 끝닿은 동남쪽 땅은 진정 신선의 경지이기 때문에 이곳을 유람하는 사람들은 더 머물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노래하였다. 하늘과 바다와 대가 어울려 신선의 경지를 뽐내는 몰운대의 경관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 하겠다.
(2) 구봉령의 「몰운대차운(沒雲臺次韻)」
蒼然斷麓海東湄푸르게 깎아지른 산언덕 바다의 동쪽가
標出層雲勢欲飛 피어오른 겹겹의 구름 힘차게 날려 하네
玉宇冷風吹霽靄 하늘의 찬바람은 맑은 노을 속에 불고
咸池紅浪湧澄暉 함지(咸池)의 붉은 물결 맑은 빛 속에 솟아나네
羽仙笙鶴遊常慣 신선의 피리와 학은 노니는데 일상적인 것
人世塵氛到自稀 세상 먼지 낀 기운 절로 드물어지는 곳에 왔네
長嘯數聲煙霧裡연기와 안개 속에 긴 휘파람 소리 여러 번
蓬瀛何許路依微 봉래 영주 어디인가 길은 좁디좁구나.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언덕이 가파르게 바다로 꽂혀 있고, 그 푸른 언덕과 바다를 두르고 있는 구름은 두둥실 떠오를 듯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다. 시간이 지나 해 질 녘의 몰운대는 해가 잠긴다고 알려진 서쪽 함지(咸池), 즉 바다로 떨어지는 붉은 해와, 살랑거리는 찬 바닷바람에 일렁이는 붉은 물결을 작자는 묘사하고 있는데, 이 장면은 다대포 지역의 대표적인 풍경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비경 속에 서 있는 작자 구봉령(具鳳齡)[1526~1586]은 마치 스스로가 학을 타고 생황을 부는 신선이 된 듯, 세상에 찌든 모든 먼지와 티끌이 씻겨 나가는 맑은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3) 정일근 詩 <몰운대(沒雲臺) 저녁노을>
몰운대의 저녁을 보지 않고
내게 사랑에 대해 말하지 마라
멀리 태백산 피재에서 시작된
한 방울의 물이 낙동강을 만들어
길고 긴 물길 남해로 돌아갈 때
강의 팔짱을 끼고 부창부수 함께 흘러온
우리 산줄기 낙동정맥(洛東正脈)이
부산 남자처럼 작별을 하는 몰운대
강이 흘리는 이별의 눈물이 뜨거워져
구름이 안개로 부서지며 쓰러지고
산은 마침표처럼 침묵하며 바라볼 뿐인데
웅녀(熊女) 같은 땅의 강과
환웅(桓雄) 같은 하늘의 산이 나누는
아뜩한 별사를 읽지 못하고는, 감히
가벼운 세 치 혀로 사랑 타령은 하지 마라
몰운대 저녁노을이 다대포를 덮을 때
강과 산의 작별을 가슴 치며 바라보다
바다가 먼저 붉게 울어, 하늘의 눈시울이
덩달아 붉어지는 것도 보지 못한다면
사랑 때문에 울어본 적 있었냐고
그런 어둔 눈으로 내게 묻지도 마라
2) 태종대
높이 250m이며 영도 남단의 해안으로 삼면이 첨예한 암벽으로 이루어진 해식애로서 1969년 1월에 관광지로 지정되었다. 한국의 해안지형 가운데 관광지로서 개발이 가장 잘 된 곳으로 1년 내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1) 이춘원의 「태종대」
1607년(선조 40)에 동래 부사를 역임했던 이춘원은 「태종대」를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聖祖鑾旂駐此山 거룩한 임금의 말방울과 용 깃발이 이 산에 머물렀다니
千秋猶似拜龍顔 천추의 세월에도 용안을 배알하는 것은 오히려 같았으리라
英靈想在鈞天裡 영령의 생각은 균천(鈞天) 안에 있었을 터인데
欲奏咸韶一上攀 한 번 잡고 올라가서 함소(咸韶)를 연주하였으면
이춘원은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태종대에 머물렀던 역사적 유래에 착안하여 시상(詩想)을 전개하고 있는데, 태종 무열왕이 천하를 다스릴 기상과 의지가 있었음을 기리면서 함께 함소[천자의 악곡]를 연주해 보고 싶다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태종 무열왕의 혜안과 늠름한 풍모나 기상에 대한 예찬이 드러나 있지만, 태종대가 그의 발걸음을 머물게 했을 정도의 빼어난 승경을 지녔음도 아울러 나타내고 있다.
(2) 통신사 사절단이 태종대를 읊은 한시
조선 후기 통신사 사절단의 종사관들이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태종대를 경유하거나 태종대에 들러 창작한 한시가 있다. 1643년(인조 21) 신유(申濡)[1610~1665]는 「해사록(海槎錄)」에서 부산에 올라 1643년 조선 통신사의 독축관으로 참여했던 나산(螺山) 박안기(朴安期)[1608~?]의 시를 차운하여 「등부산차나산운(登釜山次螺山韻)」을 지었다.
形勝太宗臺 형승은 저기 저 태종대
島嶼連天遠 섬들이 하늘 끝에 멀리 보이고
波濤拔地廻 물결은 땅을 뒤흔드는 듯 몰아오네
使華留滯日 사절들 여기 와 머물면서
登眺共徘徊 경치를 구경하며 함께 서성거리네 라고 지었다.
태종대의 신비로운 경치에 대해 섬들이 하늘 끝 멀리 보인다고 하고, 해수가 주회(周回)[둘레를 빙 돎]하는 지리적 특성을 물결이 땅을 뒤흔드는 듯이 몰아온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통신 사절단이 태종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구경하기 위해 머물다 갔음을 밝히고 있다.
(3) 신유는 「부산(釜山)」 절구 5수 중 ‘태종대’ 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仙駕何年此地來 선가 어느 해에 이 땅에 오셨던
至今神物護高臺 지금토록 신물이 높은 대를 보호하네
雲間往往聞笙鶴 구름 사이로 이따금 학을 타고 생황을 부는 소리 들리니
疑是枚皐扈蹕廻 아마도 매고가 호종했다 돌아옴인가.
신유는 이 작품에서도 태종대가 임금이 머물렀던 신성한 곳이라서 신물이 대를 보호하고 있다고 하면서, 전체적으로 신비스럽고 거룩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4) 이재익 詩 < 태종대>
청명한 날 대마도가 보이는 부산항 관문 태종대
본래 너럭바위 기암은 신선들의 놀이터
봉래산 신선의 초대로 바다 건너편 신선이
오륙도 징검다리를 놓아 건너
호탕히 함께 노닐었던 '신비의 태종대'.
유람선, '다누비' 도로열차 오가고
그대의 아늑한 품에서 사람들은 휴식과 위로,
희망과 사랑이 익어가는, '환희의 태종대'여!
자신의 오장육부를 다 봬 주면서도
웃음꽃 밀어들을 블랙박스에 넣고
때론 슬픈 인생사 마음 생채기를 해무(海霧)로 감추는
마음 여린 '비밀의 태종대'여!
그대가 부르면 언제나 달려와
그대 이름 힘차게 부르노니,
제 이름에 낯설어 말라
'만인의 연인 태종대'는 영원하리라.
3) 해운대
‘해운대(海雲臺)’라는 명칭은 신라 시대 문학가 최치원(崔致遠)의 자(字) ‘해운(海雲)’에서 비롯되었다. 최치원은 방랑하던 중 부산 해운대에 들러 대(臺)를 쌓고 ‘해운대’라는 석 자를 바위에 새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1) 해운대·동해에서 느끼는 정서를 표출한 해운대 - 정포
落日逢僧話 저물녘에 스님 만나 얘기하다가
春郊信馬行 말 가는대로 봄 들녘을 간다
烟消村巷永 안개 걷힌 시골 마을 길게 이어지고
風軟海波平 여린 바람에 파도는 잔잔하다
老樹依巖立 늙은 나무는 바위에 기대서고
長松擁道迎 큰 소나무는 길을 감싸 둘렀네
荒臺漫無地 황폐한 대는 휑하니 터도 없는데
猶說海雲名 그래도 해운이란 이름만은 말하네
문헌 기록상 최초로 해운대를 노래한 고려 후기의 문인 정포의 시가 대표적이다. 그는 “황폐한 대는 휑하니 터도 없지만, 여전히 해운이란 이름을 말하네[荒臺漫無址, 猶說海雲名].”라며 당시 해운대의 정경을 묘사하였다.
(2) 蜀葵花(촉규화) 접시꽃 - 최치원(崔致遠)
寂寞荒田側 적막하여라 묵정밭 가까운 곳에
繁花壓柔枝 여린 가지 무겁게 다닥다닥 핀 꽃
香經梅雨歇 향기는 매우를 거쳐 시들해지고
影帶麥風欹 그림자는 맥풍을 띠고서 기우뚱
車馬誰見賞 거마를 타신 어느 분이 감상 하리오
蜂蝶徒相窺 저 벌과 나비만 와서 엿볼 따름
自慙生地賤 출신이 천해서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터에
堪恨人棄遺 사람의 버림받는다고 원망을 또 하리오
동백섬 오솔길에 시비가 있다.
荒田(황전) : 거두지 아니하여 거칠어진 논밭.
梅雨(매우) : 매실이 누렇게 익을 무렵 내리는 비.
적막하고 거친 밭가에 접시꽃
무성한 꽃송이 여린가지를 눌렀네
날리는 향기에 유월 비마저 그치고
바람에 고개 숙인 보리 그림자 기우네
수레와 말 탄 사람 그 누가 보아 주리
벌 나비만 부질없이 엿보네
천한 땅에서 태어난 것이 스스로 부끄러워
사람들에게 버림받아도 참고 견디네
최치원의 漢詩를 노산 이은상이 국역한 석판이 동백섬에 있다.
봄 새벽 - 최치원 ( 이은상 국역 )
흘러가는 저 물은 돌아 못 오고
불빛만 사람을 괴롭히누나
애틋한 아침비 부슬거리고
곷들은 피고 맺고 저리 곱구나
난리 때라 좋은 경치 주인이 없고
뜬 세상 명리도 쓸 데 없는 것
아내는 원망스레 소매를 붙들고
구태 어이 술잔 자주 못들게 하나
2. 부산의 주요 경승지
위의 3곳 이외의 경승지는 다음과 같다.
신선대
신선대는 용당동 해변에 위치한 바닷가 절벽과 산정(山頂)을 총칭한다. 신선대 해안의 지질은 화산암질로, 오랜 세월 동안 파도의 침식 작용에 의해 발달된 해식애와 해식동으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신선대는 신라 말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유람한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며, 산봉우리에 신선의 발자국과 신선이 탄 백마의 발자취가 있는 무제등이란 큰 바위가 있어 불린 이름이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신선대 가까이 가면 신선들이 노는 풍악 소리가 들려 왔다고 전한다. 1972년 부산광역시 문화재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오륜대
오륜대는 오륜대 저수지 안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를 지칭하나, 넓은 의미에서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회동동·선두구동·오륜동·금사동·부곡동 등 5개동에 걸쳐 위치한 뛰어난 경관을 가지고 있는 오륜대 저수지 일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의상대
의상대는 금정산에 있는 바위로, 금정산의 금정팔경(金井八景) 가운데 하나로 꼽힐 정도로 풍광이 수려하다. 『동래부지』(1740)에 “의상대를 금정산 산정(山頂)의 일출을 보는 곳”이라고 하였다. 역대 동래부사들이 이곳을 즐겨 찾아 절경을 노래한 한시(漢詩)가 전해 오고 있다.
겸효대
겸효대는 고려후기 문신 김겸효가 지낸 곳이다. 『동국여지승람』(1513)에는 “겸효대는 동래현(東萊縣) 남쪽 5리에 있다 하고 선인인 김겸효(金謙孝)가 노닐 던 바 있어 그리 이름하였다”라고 하였다. 또한 『동래부지(1740년) 산천조에는 "척산을 배산(盃山)이라고도 한다. 동래부의 남쪽 5리에 있는데 위에 겸효대가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동래부읍지(1832)에는 “동래부의 남쪽 5리에 있고 황령산에서 이어진 곳에 겸효대가 있다”라고 하였다. 겸효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시(詩)가 『동래부지』, 『동국여지승람』 등에 전해지고 있다.
강선대
강선대는 매년 음력 11월 1일이면 신선이 지상으로 내려와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노닐다 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동래부 사천면 덕포리에는 주민들이 화합을 위하여 상린(上隣, 윗마을)과 하린(下隣, 아랫마을)으로 나누어 각기 상강선대(上降仙臺)와 하강선대(下降仙臺)에 모였다. 신선(神仙)이 노닐었다는 이곳에서 주민들이 만든 동약(洞約)의 규정에 따라 동제(洞祭)를 지내고 덕개(德浦) 나루에서 진선(津船)을 모아 공동으로 운영하였다.
이기대
이기대는 용호도에 있는 해안 일대의 암반이다. 이기대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먼저 『동래영지(東來營誌)』(1850)에는 “좌수영에서 남쪽으로 15리에 있으며 위에 두 기생의 무덤이 있어서 이기대라 부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경상 좌수사가 두 기생과 풍류를 즐기던 장소라 하여 이기대라고 하였다고도 전한다. 앞의 두 견해에 대해, 옛날 관리들은 가는 곳마다 연회를 했으며, 천민에 속했던 두 기생의 무덤이 있어 붙인 이름으로는 보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랑대
시랑대(侍郞臺)는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 동암마을 남쪽 해변에 있는 바위로 예로부터 기장 제일의 명승지로 알려진 곳이다. 시랑대는 1733년(영조 9)에 시랑직(이조 참의)을 지낸 권적(權樀)이 기장현감으로 부임하여, 이곳 바위에서 놀며 바위 위에 시랑대라 새기고 이를 시제로 삼아 시를 지었다하여 붙은 이름으로 전한다. 이후 홍문관 교리였던 손경현(孫庚鉉)이 학사암(學士嵓)으로 불렀다고도 하나, 지금은 시랑대라는 이름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삼성대
삼성대는 기장군 일광면 삼성리 삼성마을 남쪽에 있는 해변일대이다. 삼성대의 삼성(三聖)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삼성교(三聖敎)에서 모시는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 등을 가리킨다는 설과 원효(元曉)‧의상(義湘)‧윤필(尹弼) 등을 가리킨다는 설, 고려 말의 삼은(三隱)인 목은(牧隱) 이색(李穡)‧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등을 가리킨다는 설 등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의 설은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문헌상의 기록이나 주변의 인문 지리적 환경과도 이렇다 할 연관성이 입증되지 않는 가설에 불과한 듯하다.
황학대
황학대는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해안에 있는 바위이다. 황학대 기장오대(機張五臺) 중의 하나로, 기장과 인근 지역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며 시상을 떠올리던 곳으로 전한다. 1618년 고산 윤선도가 경원에서 이곳 죽성으로 이배되어 와 6년간이나 유배 생활을 하면서 시‧ 서‧제문 등 29수를 남긴 곳으로 전해진다. 입구의 석벽에 이곳 출신 진사 방치주(方致周)의 이름이 각인되어 있어 후손들이 제사를 올리는 곳이기도 하다. 황학대는 황색의 바위가 바다를 향해 돌출되어 있는 모양이 마치 황학이 나래는 펼치고 있는 모양 같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전한다.
적선대
적선대는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 서암마을 동쪽에 있는 대(臺)로 읍파정(揖波亭)터라 부르고 있다. 옛날 이곳에는 해송이 우거져 있어 일출이 신비롭고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곳은 신선이 죄를 짓고 귀양와서 기거했던 곳이라 전한다. 예로부터 적선대는 원앙대(시랑대)·삼성대·황학대와 더불어 기장의 4대 경승지로 손꼽혔을 정도로 그 경치가 수려하여 다른 지역의 해안 절경과는 또 다른 경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용두대
용두대는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해안에 있는 야산이다. 용두대는 산의 지세나 형태가 용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용두대는 풍수적 명당으로 알려져 『기장읍지』에서 4대 경승지 가운데 하나로 꼽고 있다.
소학대
소학대(巢鶴臺)는 기장군 정관읍 매학리에 매바우라 불리는 거대한 암산을 말한다. 100여 척의 층암이 깎아 세운 듯 우뚝 솟아 있고, 정상은 편편한 대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백운산의 주봉인 망월산(望月山)이다. 백운산은 기장의 주산으로 항상 흰 구름 속에 잠겨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연로
* 2003 문학예술 등단
* 부산문인협회 편집위원, 문학예술 중앙위원
첫댓글 도시문학 5월호에 게재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