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newsn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20247
한국 선교의 소명과 준비 (2)
한국 선교 준비과정
갑신정변은 한국 내외의 경계를 더욱 날서게 했다. 어떤 선교사업도 힘든 상황이 지속되었다. 외교 관계에 있던 외국공사조차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미국 북감리교 해외선교부는 한국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고 이에 대해서 제일 먼저 지원한 이가 의사 스크랜턴(Dr. William Scranton) 과 그의 어머니였다. 스크랜터은 1884년 10월에 한국 의료선교사로 임명되었고 12월 4일(갑신정변일)에 선교사로 안수받는다. 가족 구성은 아내와 두 살 난 딸이 있고 스크랜턴의 어머니 스크랜턴 여사(M.F. Scranton)가 있다. 스크랜턴 여사는 여성 선교를 위해 한국에 파송된 최초의 여성 선교사로,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학당을 세운 인물이다. 이후 아펜젤러는 아내와 함께 한국 선교를 지원했고, 선교의 절차를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아펜젤러는 함께 한국 의료선교사로 파송될 스크랜턴 가족(the Scrantons)을 만나 한국 선교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885년 2월 2일, 파울러 감독(Bishop Charles H. Fowler)은 아펜젤러의 부인 엘라 아펜젤러를 아펜젤러의 한국 선교를 돕는 조력자로 임명하였다.
1885년 2월 3일, 드디어 아펜젤러 부부와 스크랜턴 가족이 아라 빅호(Arabic)에 승선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요코하마로 가는 여정은 23일이나 지속되었다. 기나긴 항해 가운데 기상은 그리 좋지 못 한 날도 많았다.
많은 승객이 태평양의 풍랑을 경험하기도 했는데 이때 아펜젤러 는 선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위로해주기도 했다. 스크랜턴은 아펜젤러의 선상 설교를 너무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출애굽기 17장 6절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여 바위를 쳐서 생수가 나오게 하는 말씀’을 전하는 아펜젤러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했는데, 풍랑 속에서 했던 그의 말과 행동에서 특유의 긍정적인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23일이 넘는 긴 항해 끝에 아펜젤러는 저 멀리 육지를 볼 수 있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 느낌이 마치‘인생을 마감하고 도착하는 황금의 해변가’와 같다고 말한다. 1885년 2월 26일 저녁에 일본 요코 하마에 도착한 아펜젤러 부부와 스크랜턴 가족은 일본 선교지부에 초대되어 긴 여정을 안전하게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를 드린다.
밤이 깊어 하룻밤을 아라빅호에서 지낸 아펜젤러 부부와 스크랜턴 가족은 낮에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일본의 풍경을 보았다. 그리고 일꾼들이 짐을 나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펜젤러와 드류신학교 동찬인 데이비슨(J. C. Davison)이 와서 일본에 방문한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일행을 환영해주었다.
아펜젤러가 일본 내지인 나가사키에 가면서 받은 인상은 일본의 서구화된 건물과 거리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일본에 있는 감리교 건물이 교회, 학교, 병원이 함께 있는 복합적 공간인 것을 보고 영감을 받아 서울의 감리교 건물을 세울 때 반영했다.
그날 오후, 요코하마에 들어온 아펜젤러는 한국 선교 준비를 위해 최소한 2주 정도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다. 드디어 2월 28일 주일에 아펜젤러는 한국 선교의 발판을 마련해준 동북아시아의 선교사 매클레이를 아오야마에서 만났다. 그곳에서 매클레이는 많은 이야기를 해주며 자신이 일본과 한국의 선교책임자이지만 한국의 실제 책임자로서 아펜젤러의 역할이 중요함을 말했다. 그 이유는 건강상의 이유로 한국에 재방문하는 것이 쉽지 않고 한국과 일본의 서신 왕래는 최소한 한 달 이상이 걸린다는 것 때문이었다. 또한 중국이 미국과 한국의 선교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를 유념하며 미 해군에게 신변보호를 부탁하라는 세심한 이야기를 전달했다. 이밖에 한국의 정세와 중국과 일본의 긴장관계, 중국 정부의 의화단 운동, 반서양 운동(Anti-Western actions) 이야기, 한국 정부가 이러한 움직임을 통제할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라는 점 등을 당부했다.
아펜젤러는 같은 날에 작은 집을 빌려서 교회로 개조한 곳인 일본인 감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주일학교 등을 방문했다. 또한 한국인이 유학하는 학교도 구경했는데 그들은 신자용(Shin Ja Yueng), 유승목(Yo Song Mok), 유승준(Yo Seung Juene), 사광철(Sa Quang Chul) 등이었다. 아펜젤러는 일본의 감리교 선교를 보면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특히 영어를 가르치면서 기독교를 가르치고 있는 스펜서(David Spencer) 선교사의 교육을 보면서 한국에서 교육선교에 똑같은 방식을 적용시키기도 했다.
또한 무어 선교사의 선교에도 감동을 받았다. 무어 선교사는 성실하고 신실한 사람으로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신실하고 정직하며 헌신적으로 선교하는 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일본 정부로부터 국립대학에서 가르치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조금도 망설임 없이 선교에 헌신하는 것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은 후에 아펜젤러 또한 한국 정부로부터 국립학교에서 가르칠 기회를 제안받았지만 이를 포기하고 선교를 선택하는 모범이 되었다.
일본에서 기독교 선교의 모습과 한국어를 보면서 한국 선교를 준비하고 있던 아펜젤러는 한국 선교가 가능함을 듣게 되었다. 윌리엄스크랜턴(W. B. Scranton)은 아펜젤러에게 혼자서 한국에 들어갈 것을 제안했고 의료선교사가 들어가기 전에 목사 선교사가 먼저 도착 해야 함을 말했다. 하지만 아펜젤러는 아내를 데리고 가기로 결심했다.
‘은둔의 나라’를 향하여
1885년 3월 23일 주일에 아펜젤러 부부는 증기선 ‘나고야마루(名 古屋丸)’를 타고 최종 목적지인 인천 제물포를 향했다. 도착 날짜는 13일을 전후로 예상했다. 나고야마루호는 아펜젤러가 한국 정치인과 문화를 처음 접한 곳이었다. 그는 요코하마에서 고베로 가는 한국 정부 관료들과 묄렌도르프를 만났는데, 이들은 갑신정변 때 한국 군인이 일본영사관에 불을 질러 외교조약을 어긴 일을 사과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3월 24일 아펜젤러는 묄렌도르프와 장시간 이야기 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아펜젤러는 일본과 중국이 한국에서 치열한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 후 아펜젤러 부부가 묄렌도르프와 이야기하는 동안 생소한 경험을 했다. 아펜젤러의 한국인 선생이 묄렌도르프와 아펜젤러에게는 인사를 하고 그의 아내 엘라 아펜젤러에게는 인사를 하지 않은 것이었다. 한국의 남녀차별을 경험한 아펜젤러 부부는 이후 한국인의 여성인식에 대한 교육뿐만 아니라 여성이 차별받지 않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더욱 열심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한국 선교의 첫발을 내딛었다. 도착 당시 제물포항.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3월 26일 배가 고베에 잠시 정착했을 때 한국 정부 관료들과 묄렌 도르프 일행은 고베에서 내렸다. 그리고 아펜젤러의 선교 동역자 언더우드 선교사가 탑승하였다. 이틀이 지나 3월 28일, 한국에 가기 전 마지막 정착지로 일본의 남쪽 지역인 나가사키에 배가 정착했고, 이곳에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는 각각 일본의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지에서 따뜻한 환영식을 가졌다. 그리고 31일에 작은 증기선 ‘세이료마루’호에 짐을 옮겨 실었다. 아펜젤러는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은둔의 나라를 향해 세이료마루호에 승선했다. 3월 31일, 나가사키에 여명이 밝아왔다. 우리에게는 역사적인 날이다. 항구까지 우리를 맞아준 일본의 미국 선교사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우리가 오기 전에 매클레이와 알렌에 의해 선교가 준비되었다. 우리는 미지의 땅으로 간다. 성령의 인도 하심과 보호하심과 평강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하시길 기도한다.”
배는 한국에 도착하기 전, 일본의 작은 섬 두 곳에 정착했다. 그리 고 4월 1일 밤에 부산에 도착했다. 아펜젤러는 그의 노트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4월 1일 밤 12시 30분에 부산 항구에 떨어졌다. 아내 엘라 아펜젤러는 저녁 내내 무척 아팠다. 항구 전체를 바라보면서 한국의 언덕을 처음 보았다. 이러한 언덕을 보면서 교 회가 저 언덕에 세워지기를 기도드렸다.”
아침 햇살은 부산을 더욱 선명하게 보게 했다. 그리고 4월 2일 아침 8시 15분에 작은 마을을 바라보았는데 초가집에 돌담이 있는 같은 모양의 집들이 보였고 다른 쪽에는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 있었다. 오전 9시가 되자 아펜젤러는 로바트(W. N. Lovatt)의 안내로 부산을 돌아다녔다. 항구에서 3마일 떨어진 곳을 걸으면서 가파른 길을 걷기도 하고 경작지를 둘러보기도 했다.
부산 체류를 마치고 4월 3일, 제물포로 출발했다. 한반도의 남단을 돌아 서해로 가는 동안 풍랑과 높은 파도로 배가 느리게 움직였고 대부분 사람이 뱃멀미로 고생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덧 제물포 항구에 다다라 닻을 내렸다. 날씨가 흐리고 비가 왔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 배는 부활주일인 4월 5일 오후 3시쯤 도착하였다. 하지만 한국에 도착한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를 환영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선교 현장의 현실 앞에 놓인 것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이제는 선교지에서의 신변을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배가 정박하는 동안 아펜젤러는 미국의 선박 오시피(ossipee)호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썰물로 인해 제물포항에서 1.5마일 떨어져서 정박해 있었다. 그리고 작은 배가 와서 짐을 옮겨 싣고 있었다. 100명이나 되는 인부들이 화물을 향해 덤벼들었고 사람들의 끊임없는 고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작은 나룻배로 한 시간이나 걸려서 육지에 다다랐다. 이어서 아내 아 펜젤러(Mrs. Appenzeller)가 먼저 바위 위로 뛰어내렸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몰랐지만 일단 일본인 해운업자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가 운영하는 대불(大佛, Diabutsu)호텔에 짐을 옮기고 방을 잡았다. 아펜젤러는 호텔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 다. 그는 호텔이 아닌 초가집에서 머무는 줄 알았는데 서양식 호텔 방과 음식에 만족했다. 하지만 임신한 그의 아내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고 호텔방도 추워서 힘들어했다.
이렇게 제물포에서의 하루가 지나갔다. 계속되는 비로 인해 아펜 젤러 부부는 하룻밤을 더 체류하기로 했다. 제물포에 정박하고 있던 미국 선박 오시피의 선장 맥글렌지(McGlensy)는 대불호텔에 머물고 있는 아펜젤러 부부를 방문했다. 맥글렌지는 서울에 있는 주미 대리 공사 포크(Lieutenant G. C. Foulk)에게 선교 타진 여부에 대해서 급하게 서신을 보냈고 포크에게 당일 연락을 받았다. “정치적으로 극도로 예민한 상황이라 항구 이상을 넘어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내용 이었다.
당시 외교적 절차로는 어떤 미국인도 한국에 들어올 수 업었다. 하지만 언더우드 선교사가 어제 도착하자마자 바로 서울로 입성했기 때문에 아펜젤러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선교 성공을 기도하며 제물포에서 기다리면서 언어 공부를 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고 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오후 5시에 일본영사 고바야시가 이들을 환대했다. 고바야시는 제물포에서 머물 계획이 있다면 당분간 일본 영사관 건물에서 머물 수 있다고 했다. 오후 6시에는 영국의 스코트 (James Scott) 영사가 방문하여 아펜젤러 부부, 고바야시와 함께 이야 기를 이어갔다. 서울은 아직 위험해서 가을까지 머물다가 선교가 아닌 영어 교육을 목적으로 서울 입성이 가능하다는 대화가 오갔다. 아펜젤러가 타국 영사 두 명을 만나 느낀 감정은 매우 고무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선교에 대한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도 곧 어려워졌다. 4월 10일 맥글렌지가 아펜젤러 부부를 두 번째로 방문하여, 일본으로 돌아가서 한국 선교의 기회가 조만간 생기게 되면 다시 올 수 있다고 하며 즉시 일본으로 돌아갈 것을 당부한 것이다. 그때의 상황을 아펜젤러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짐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나 없이 아펜젤러 혼자 갔다면 이미 서울에 입성했을 것이다. 맥글렌지는 수도 서울에 외국 여성이 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다고 했다. 나는 선 교가 나 때문에 더 힘들어지고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펜젤러는 맥글렌지의 말을 듣고 즉시 일본으로 회항을 결심했다. 자신의 신변은 어떠한 곤경에 있어도 되지만 아내 엘라와 선교의 문이 닫힐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적중했다. 아펜젤러 부부가 나가사키로 돌아갔기 때문에 서울에서 알렌과 언더우드 선교사가 제중원을 중심으로 아무 문제 없이 선교의 발판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아펜젤러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때의 심경은 그의 친구 웨더스 (Wadworth)에게 보낸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한국에서 기대감을 가지고 선교를 시작하려고 했지만 상황이 불가피하여 선교를 시작하지 못한 깊은 실망과 좌절감에 싸여 있다.…하지만 소망하며 인내한다면 최상의 결 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친구에게 절망적이라고 편지를 보냈지만, 그의 신앙고백처럼 여기에는 한국 선교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 아펜젤러는 깊은 좌절감에 빠졌으나 기도하면서 교육현장을 둘러보는 동안 많은 은혜와 영감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바라본 선교지 한국은 중요한 요충지였다. 아펜젤러는 나가사키의 해외 여성 선교부(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의 교육 선교에 참여하면서 한국, 중국, 일본의 중요성에 대해서 영감을 받았다. 도리어 일본에서 한국 선교에 대한 구상과 함께 체계적인 계획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었다.
당시 한국의 정치적인 상황에서는 목사 선교사보다 의료선교사가 먼저 필요했다. 따라서 아펜젤러 선교사보다 스크랜턴 선교사가 한국에 먼저 들어갔다. 혹시 있을지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가족을 남겨두고 1885년 4월 30일 혼자서 한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885년 5월 3일에 서울에 입성한다.
*이 글은 한국교회총연합에서 발행한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의 "한국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의 생애와 신앙"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