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상
한 여름이 저물어간다. 그토록 대지를 불태우던 태양의 열기가 식어가면서 조석으로 찬바람이 불어온다. 이렇게 또 한 해가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석양을 비추는 노을이 아름답기보다는 섧다는 생각이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뜨거운 열기는 오히려 풍작을 잉태하는 씨앗이었다. 무슨 일이던지 고통과 슬픔이 없이는 그 찬란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기나긴 고통 끝에는 희열의 기쁨이 있기 마련이다. 과연 인생의 끝자락에는 무엇이 열매로 남게 되는가. 단순히 자손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남긴 여남은 앙금으로 만족하면 될 일인지.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해 어떤 기쁨을 느끼는 성취감이 없다면 인생을 허비한 징표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를 부정한다. 바로 아직도 막연히 남아 있는 자기 확신의 자존감에서 오는 마지막 몸부림일지 모른다. 이러다보니 나이가 들면 오히려 인생에 대한 강한 애착이 생긴다는 생각이 든다. 머지않아 한 점 구름처럼 왔다가 흔적조차 없이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에 대한 거부감일 것이다.
누구나 가을이 오면 떠난 사람을 그리워한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잘 있으란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진 얼굴을 떠 올린다. 무엇보다 가까이에서 지냈던 부모 형제에 대한 생각이 먼저일 것이다. 언젠가는 아쉬운 이별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째서 함께한 그 시절에는 그만큼 무심하게 지냈는지 아무리 반추해도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후회를 대신할 그 아무것도 없다.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가 떠올랐다. 바로 『가을의 전설』이다. 역시 한창 젊은 나이의 「브레드피트」의 연기가 뛰어나다. 자연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울창한 숲이 아름답게 우거진 미국 ‘몬태나주’의 농장이 주요 무대이다.
주 내용은 제1차 세계 대전 전후를 배경으로 삼 형제 집안의 이야기이다. 전쟁을 피해 평화로운 곳에 안착한 「러드로우」 대령과 세 아들인 「알프레드」, 「트리스탄」, 「새뮤얼」의 애증이 뒤얽힌 가정사이다.
유학을 떠났던 막내 「새뮤얼」이 약혼자 「수잔나」를 집으로 데리고 오면서 형제간에 벌어지는 사랑싸움과 아버지와의 갈등과 전쟁이 어떻게 한 평화로운 가정을 파괴하는 가에 대한 담론이 담겨있다. 나아가 자연의 아름다움이 영상을 채우고 출연 배우들의 빼어난 연기도 볼만한 영화였다. 인생의 삶과 죽음, 사랑과 고통, 전쟁과 평화를 거치면서 인간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고 성숙해 가는지를 담담하게 느끼게 하였다.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라는 소설은 주인공 「파울 보이머」와 그의 전우들의 삶과 죽음을 그린 전쟁소설이다. 「파울 보이머」는 1차 대전이 끝나기 바로 한 달 전인 1918년 10월 어느 날인 가을에 전사한다. 이미 3년 전에 동료들과 학도 지원병으로 입대했으나 점차 하나, 둘 씩 그의 곁을 떠난다. 시간이 갈수록 불리해지는 전황 속에서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전우들의 모습에 점차적으로 삶의 의지가 꺾이며 생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너무나 외롭고 아무런 기대마저 없으므로 두려움 없이 모든 사물과 대면하고 지낸다. 그런 어느 날 몸을 앞으로 엎드린 채 마치 자고 있는 것처럼 땅에 쓰러져 전사하였다. 아마도 눈에 다가오는 그리운 얼굴을 대면하려다가 적탄에 맞았을 것이다. 너무도 태연한 표정으로 고통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의 영혼 역시 『폴랑드르』 평원에서 황적색의 ‘야생 양귀비꽃(poppy)’으로 환생했을 것이다.
동시에 가을은 노랫말에 새겨진 추억을 부른다. 머지않아 ‘코스모스’를 노래하고 단풍과 낙엽을 부르면서 막바지로 가는 세월을 더욱 재촉할 것이다. ‘마로니에’를 노래하던 그 가수는 지금은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가을을 남기고 떠난 「패티김」은 건강하게 살고 있을까? ‘코스모스’를 노래한 여가수는 지금도 웃으며 사는가? 그러고 보니 모두 제법 나이가 들어 황혼의 애가(哀歌)를 남긴 추억 속의 인물로 남았다. 최근에 들어서는 그런 가슴시린 애잔한 노래조차 들리지 않는다.
가곡에도 가을을 노래한 곡이 많이 있다. 한국 전쟁이후 피난처인 제주에서 「양 중해」시인의 『떠나가는 배』의 화답으로 「박 목월」시인의 『이별의 노래』가 탄생하였다. 두 시인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우리에게 익숙한 가곡이 되어 가을이면 모두의 가슴을 적신다. 두 시인의 아름다운 사연은 제주의 ‘카멜리아 힐’에 있는 양 시인의 기념관에 있어 찾는 이에게 잔잔한 기쁨을 선사한다.
누구나 나름대로 바쁜 계절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추석이 있으니 우선 성묘를 가야하고 묘역도 가꾸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선친과 동생이 애타는 그리움을 남기고 표표히 떠난 계절이다. 생전에 술 한 잔 올리는 일도 과연 몇 번이나 할 수 있겠는가! 또한 묘역은 그 언젠가는 내 자신의 영원한 유택일 것이니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아울러 가을은 모두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유혹에서 여행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계절이다. 외국에 나가는 것 못지않게 풍성한 제철 과일을 찾아 전국의 명소도 동시에 유람하는 조그만 기쁨을 즐기는 시간도 좋을 듯하다. 마냥 추억에 젖어 시간을 소비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가는 희망의 노력을 기울일 때이다. 이런 태도가 인생이라는 머나먼 항해 길을 뒤따르는 후대에 한 줄기 이정표가 될 것으로 믿는다.
(2024.9.3.작성/9.4.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