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대화에서 높임말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상대나 때에 따라 반말이 더 정감 있고 자연스럽게 들린다. 현직에있을 때 나는 학생 여럿에게 말할 때는 높임말을 썼고 한 사람에게 말할 때는 반말을 썼다. 이게 자연스러웠고 습관이 되어 학생들도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지방에 따라 그 지방 특유의 사투리 반말이 훨씬 가깝고 정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엄마, 저거 좀 던져 주게.” 어느 지방에 근무할 때 초등학생이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는 걸 듣고 깜짝 놀랐다. “주게,” “하게”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명령어이다. 그 지방에서는 이런 어투가 전래로 일상화되어 별 거부감 없이 통용되며 말 문화로 정착되었음을 알았다.
올해 경남 부산지방에는 전례 없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오랜 가뭄이 이어졌다. 밤에는 열대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거실에 가정용으로 큰 에어컨이 있지만, 마음 놓고 틀면 전기 비용이 만만찮을 것 같았다. 마침 홈쇼핑에 냉풍기 판매 선전을 했다. 안내하는 대로 스마트폰을 여러 번 눌러 겨우 연결되었다. 주소, 성명, 생년월일 등 신상을 속속들이 털리고 나니 씁쓸했다.
마지막 단계다. “나이가 많아 스마트폰으로 주문을 못 하니 은행 계좌번호를 좀 알려줘.” 이렇게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십 분이 지나도 계좌번호가 뜨질 않았다. 며칠 전에도 다른 상품을 똑같은 방법으로 주문했으나 역시 무소식이었다. 의아하여 아내에게 이야기했더니 마치 옆에서 들은 것처럼 대뜸 이랬다. “당신, 반말했구나.” 그러며 비슷한 일을 겪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내는 소청(訴請) 관계로 서울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하는 여사무원을 몇 번 만나 서로 면식이 있었다. 스물세 살쯤으로 보이는 그 사무원에게 전화로 소청 내용 중 변경 부분을 알려주었다. “변호사님께 알려줬으면 고맙겠어.” 이 말을 듣자마자 그 여직원이 버럭 화를 내더란다. “왜 반말을 합니까?” 소청 인은 고객일 뿐만 아니라 그 여사무원에게는 할머니쯤되는 나이라, 아내는 손녀쯤으로 생각하고 일상적으로 한 말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항의를 들으니 좀 씁쓰레했다고 말했다.
아차 싶어 공손한 어조와 높임말로 홈쇼핑 상담원에게 다시 계좌번호를 원했더니 이내 메시지가 왔다. 이전에 계좌를 알려주지 않은 것은 반말 탓인 걸 확신했다. 상거래에서 고객이 왕이라는 말은 옛말이 됐다. 이젠 높임말을 써야 상거래도 이루어지는 것 같다. 반말하면 주문을 묵살하기로 한 모양이다. 전래의 우리 말 문화가 무너진 것 같아 어리둥절했다.
반말은 과거 우리 사회의 권위주의를 반영하고, 나이가 많고 적음이 억압 수단으로 적용한 것은 사실이다. 군대를 비롯하여 상하 명령체계가 엄격한 조직에서는 나이가 억압과 차별의 조건이 되었다. 반말이 업무 하달에 효율적일 수도 있었다. 일반 사회에서 반말은 억압이나 차별 수단이라기보다 우리 전래의 언어문화로 오랜 세월 다정한 의사소통의 수단이었다. 손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반말이 더 정나미가 있다. 반말은 자연스러운 우리의 대화 문화로 이어져 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자 손녀에게 높임말을 한다고 예의 바른 것은 아니다. 반말이라 하여 다 잘못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의 짧은 외국어로 한 가지 예를 보면 영어의 ‘죽음’을 뜻하는 명사‘death’나 동사 ‘die’라는 단어 자체에 높임말과 반말의 구분이 없다. 물론 죽음을 뜻하는 여러 가지 단어가 있지만, 우리말과 달리 높임말과 반말로 시비가 있기 어려웠다. 우리말은 지체가 높거나 성인이 태어나면 탄생, 탄신 등의 높임말을 쓰고 보통 쓰임새에 따라 출생 등으로 통용한다. 우리말에 ‘죽음’은 붕어(崩御), 승하(昇遐), 운명(殞命), 입몰(入沒), 서거(逝去), 졸(卒), 작고(作故), 타계(他界), 사망(死亡), 절명(絶命), 종명(終命), 기세(棄世) 등 여러 가지 단어가 있다. 종교에서 ‘죽음’은 열반(涅槃), 시적(示寂), 입멸(入滅), 극락왕생(極樂往生), 선종(善終)등으로 표현한다. 경우에 따라 자살도 서거라고 하고, 속된 말로는 뒈졌다거나 골로 갔다고도 한다. 다양한 어휘로 높임말과 반말이 상황에 따라 쓰이고 말의 정감이 달라진다.
사회적으로 높임말이 기본 언어생활이 되어야 하지만 때에 따라 일상의 예외법칙이 있다. 반말은 차별, 억압, 지배를 위한 도구라는 사람도 있지만, 반항심이 깔린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와 아내가 친손자나 친손녀가 아닌 청년에게 반말을하여 상대가 불쾌했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하대하거나 억압하려는 게 아니었다고 항변하고 싶다. 혈육처럼 친근한 마음이 앞섰기에 늙은이로서 다소 억울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전승되어 온 언어를 높임말, 반말이라는 이분법으로만 듣고 아무런 말도 없이 소통을 단절하는 건 재고해 볼 문제이다. 먼저 상대의 마음을 읽으려 드는 자세가 필요하다.
상품 판매가 본업인 홈쇼핑의 전화 상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젊은 사람이다. 스마트폰으로 주문을 하면 할인 혜택도 있다. 노인이라 스마트폰 사용이 서툴러 늘 하던 방식대로 한 말이 반말이라 하여 매몰차게 거절당하니, 참으로 무안하고 허탈했다. 그들이 결속하여 반말에는 답을 하지 않기로 결의한 것이 아닌가 싶다.
상담원에게 폭언이나 음충스러운 말, 생게망게한 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느 직종이라고 직무수행을 하려면 어려움을 감내하고 넉넉한 웃음으로 삭일 줄 아는 자세를 장착해야 한다. 무시하는 어조나 폭언이 아니라면 반말에도 따뜻한 정감이 묻어난다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쌀농사를 하는 농부가 무논에 들어가 일을 할 때 흙탕물과 진흙을 묻히지 않고는 농사를 짓지 못하는 법이다. 별별 사람을 상대하려면 수럭수럭한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첫댓글
세상이어찌돌아가는지모르겠습니다. 이러단 자식에게도존대를해야하는세상이오지않을까두렵습니다.
찾아주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