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발을 썼네요? 지난달 촬영이 끝난 영화 ‘검은 사제들’에 출연하느라 삭발을 했어요.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한 뒤 위험에 처하는 인물이거든요. 지금은 반삭 정도로 자라났는데 머리를 감고 말릴 때 너무 편해요.(웃음) ‘경성학교’를 촬영할 땐 숱이 많고 긴 머리라 드라이하는 데만 20분이 걸렸어요. 머리가 더 자라기 전에, 반삭에 어울리는 강렬한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어요. 그런 여성 캐릭터가 별로 없잖아요.
영화 얘기를 해보죠. 고아인 연덕은 일본 유학을 꿈꿀 만큼 야망 강하며 책임감 강한 리더이면서 외톨이 주란, 실종된 시즈코와 든든한 우정을 만들어 가더라고요. 감독님께서 제게 “무표정함이 떠오르게 해달라!”라고 주문하셨어요. 무표정한 모습이지만 장면 별로 충분한 이유나 상황을 만들어내려 했어요. 주란에게 시즈코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할 때, 강하고 통솔력 있는 급장이지만 알고 보면 똑같이 여린 소녀임이 느껴지도록 연기했어요. 강해보이는 애들이 여리고 정이 많잖아요. 감정을 세게 드러내기보다 절제하는 게 더 강하고, 관객 입장에서도 더 안타깝게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죠.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10대 소녀를 연기한 느낌은 어땠나요. 각 잡힌 생활을 하는 등 지금의 10대들보다 불쌍한 면이 있고, 순수함에 있어선 요즘 세대와 똑같고요. 다만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에 그들끼리의 결속력은 훨씬 강했던 거 같아요.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부터 10대 여자애들의 시기, 질투, 섭섭함과 고마움과 같은 미묘한 감정선이 흥미로웠어요. 저의 청소년 시절이 자연스레 떠올랐죠.
지난해 ‘상의원’ ‘일대일’ ‘마담 뺑덕’ ‘레디액션 청춘’, 올해 ‘쎄시봉‘에 연달아 출연했어요. ’경성학교‘ 이후엔 ’베테랑‘ ’사도‘ ’검은 사제들‘ 개봉을 앞두고 있고요. 신인치곤 굉장한 다작이네요.작년 한해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어요. 후후. 많이 했지만 워낙 짧은 분량으로 나와서 ’경성학교‘가 저를 알리는 시작점이죠. 대학시절부터 출연한 단편영화들에서 만났던 캐릭터들이 대부분 많은 일을 겪은 뒤 묵묵히 살아가는, 어찌 보면 연덕과 비슷한 인물들이었지만 2시간에 이르는 긴 시간을 그 감정만으로 끌고 가기엔 무리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힘 조절과 표현력에 집중했던 이 영화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단기간에 김기덕 이준익 류승완 임필성 등 쟁쟁한 감독들과 작업했다는 건 큰 행운이네요. 그 분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무섭고 설렜는데 연기 얘기까지 나눠 큰 도움이 됐어요. 신인임에도 제 장점을 간파해 용기와 조언을 해주셔서 엄청 감사하죠. 감독님들께서 “영화계에서 계속 보고 싶으니 꾸준히 해라”란 따뜻한 환영의 말씀을 해주신 게 기억에 오래 남아요.
영화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들려준다면. 중고교 시절 밴드 보컬을 했을 정도로 노래에 흥미가 있었으나 가수가 꿈은 아니었어요. 그러다 17세에 뮤지컬 ‘그리스’를 봤는데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너무 행복해 보였어요. 그들의 열정이 부러워 뮤지컬 배우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연기학원에 다니며 입시준비를 해 대학에 입학, 졸업 전까지 ‘로미오와 줄리엣’ ‘옐로우 문’ 등 4편의 연극에 출연했어요. 그런데 무대 연기보다 카메라 앞에서의 디테일한 연기가 더 매력적이더라고요. 물론 언젠간 꼭 연극·뮤지컬 무대에 다시 서고 싶어요. 뮤지컬 ‘고스트’는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작품이고요.
정형화된 미인은 아니잖아요. 요즘 각광받는 모델 얼굴 같단 생각도 하게 되는데 자신의 외모에 대해 평가한다면. 제가 전형적인 미인상은 아니지만 남들과 다르잖아요. 배우는 본인만의 색깔이 있어야 한다고 여겨요. 동양적 눈매와 얼굴형, 성형으로 만들 수 없는 얼굴이라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언젠가 우연한 기회에 모델 장윤주씨를 뵌 적이 있었는데 계속 쳐다보다가 대뜸 “너 키가 어떻게 되니?”라고 물으시더라고요. 165cm라고 대답했더니 너무 아쉬워 하셨어요. 하하.
이선균 오만석 문정희 김고은 한예리 임지연 등 한예종 출신 배우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네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대학시절 내내 학교에서 살았어요. 수업 끝나면 조별 과제, 신(Scene) 연습을 하고 도서관에서 이론과제를 미친 듯이 했었죠. 배우가 소품, 의상, 세트를 직접 만드는 ‘극장실습’도 제작 전반을 배울 수 있기에 의미 깊었고요. 또 2학년부터 영상원 단편영화 출연이 가능해요. 3학년부터는 KAFA(한국영화아카데미) 및 타 학교 작품도 할 수 있고요. 21세부터 23세까지 총 15편의 단편·독립영화에 출연하게 됐죠. 여러 현장에서 쌓은 경험이 지금 연기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죠.
과 동기는 누구인가요? (김)고은이와 (이)유영 언니랑 동기예요. 영화계에 먼저 입문한 고은이는 그때부터 늘 좋은 자극을 주는 친구예요. (임)지연 언니는 한 학번 선배고요. 지금은 각자도생의 시기이다보니 “나중에 자리를 확고히 잡으면 뭉치자”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롤 모델로 삼는 여배우가 있다면? 문소리 선배님이요. 다양한 작품에서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주세요. 여배우로서 소화하기 어려운 역할을 너무 잘 해내시고요. 본받고 싶은 연기자예요.
연기력을 늘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나요. 학교 다닐 때 배운 건대 배우는 말로써 뭔가를 전달해야 하므로 호흡, 발성, 딕션이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소리 내서 시를 읽거나 아침마다 목과 몸을 충분히 푸는 등 꾸준히 훈련하고 있고요. 또 배역에 접근할 때 시나리오에 나와 있지 않은 부분을 채우기 위해 틈나는 대로 글을 써내려가며 정리를 해요.
영화 ‘설행’의 수녀 역을 촬영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 쉬지를 않네요.(웃음) 어떤 소망을 품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아직까진 연기를 많이 해보지 못한 상태라 다양한 연기를 해보는 게 가장 큰 소망이죠. 선배님들 정도의 연륜이 되고 상황이 가능하다면 연기 외에 다른 작업들(극작이나 연출 등)도 해보고 싶어요.
[취재후기] 작고 긴 동양적 눈매에 담아내는 깊은 눈빛, 시시각각 변하는 배우다운 얼굴, 입을 떼지 않아도 풍겨 나오는 존재감이 제작자, 감독들을 설레게 하는 요인이 아닐까. 인터뷰에서도 자기만의 소신과 철학이 드러난다. 여기에 지칠 줄 모르는 체력까지 갖췄으니, 가히 '괴물급' 여배우의 탄생이다.
출처:
http://m.sportsq.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883#_adte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