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고 남성적인 시인 아르킬로코스 뒤엔 아름답고 감미로운 선율로 사랑의 감정을 노래한 여류시인 사포가 있었다. 그녀도 아르킬로코스와 마찬가지로 서사시가 전제하는 거대한 가치체계에 맞서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내세운, 새로운 서정시인이었다. 사포는 서정시의 정신으로 깨어 있는 개인의 가치를 믿고 있던 것이 분명하다. 전쟁의 힘과 가치에 맞서 그녀가 내세우는 최고의 가치는 바로 사랑–사랑의 기쁨이었다.
어떤 이는 기병대를, 어떤 이는 보병대를 / 또 어떤 이는 함대를 말한다, 검은 대지 위에서 /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도. 하지만 나는 각자가 / 사랑하는 사람이라 말하리. (사포 조각글 16)
서사시의 영웅들은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웠던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들이 사랑한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명예였을지 모른다. 조국과 사랑하는 이를 위해 싸울 때도 마지막에는 자신의 영광이 빛나야 한다고 믿었을지 모른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이름도 없이 죽을 수 있을까? 사랑하는 이를 위해 비굴하게 생존을 택할 용기가 그 영웅들에게 있었을까? 사포는 아름답게 외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리고 묻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깟 군대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그녀는 서사시의 전설 속에서 다른 것을 읽는다. 사랑하는 파리스를 위해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가 보장하는 부와 권력의 울타리를 떠나, 부모와 자식을 버리고 트로이에로 간 헬레네의 아름다운 용기를. 그리고 아마도 조국의 위기와 멸망을 예감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고 떠난 파리스의 위험한 용기의 아름다움을. 아프로디테에 설득된 두 연인, 사랑이 전부였던 헬레네와 파리스를. 철학자 플라톤은 사랑을 노래하던 그녀를 단순히 시인이라고만 하지 않았다.
어떤 자들은 아홉 뮤즈들이 있다고 말하네. / 그들은 얼마나 무지한가! / 보라. 열 번째 뮤즈 레스보스의 사포가 있지 않은가. (『팔라티네 앤솔러지』, Ⅸ, 506)
열 번째 뮤즈. 플라톤이 그녀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그녀는 남자에게만 공식적으로 교육이 허용되어 있던 고대 그리스의 가부장적인 사회체제 안에서 소녀들을 위한 시의 아카데미를 열었고, 그 서클 안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의 신 아프로디테와 음악과 시의 신 뮤즈를 예배하는 모임을 가졌다. 그 안에서 그녀는 같이 지내는 소녀들과 사랑을 나누며 감격스런 삶을 살았고, 그 삶의 자취는 그녀가 남긴 시 안에 가득 담겨 있다. 그녀는 '레즈비언'. 기원전 620년경 레스보스 섬에서 태어났기에 그녀는 레스보스 사람, 즉 레즈비언.
하지만 이 명칭은 단순히 태생에 관련된 말에 그치지 않고, 사포로 인해 여성끼리 사랑을 누리는 여성 동성연애자를 지칭하는 말로 와전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실로 레즈비언이었다. 자신과 함께 시를 읊고, 삶과 자연, 사랑의 아름다움을 즐기던 소녀들과 기꺼이 사랑을 나누었기에. 그 사랑은 단순히 정신적인 데 그치지 않고, 서로의 윤기 나는 머리를 쓰다듬고, 우윳빛 감미로운 피부를 어루만지며 몸의 환희를 즐기는 데까지 이르렀다.(사포 조각글 126, 940 참조) 하지만 그녀의 동성애는 대상을 가리지 않던 무차별적인 사랑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아름답고 감동스런 모든 것에 대해 열렬히, 진실로 사랑을 표현하였던 것이다. 꽃도, 사과나무 가지와 바람, 남자도 그리고 여자도.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운 사랑의 감정을 노래하기 위해 특별한 운율을 고안한다. 격정과 분노를 거리낌없이 표현하던 시인 아르킬로코스가 대중들 사이에 군림하던 집단의 거대한 가치체계를 벗어나 생생한 삶의 현장 속에서 일상의 진실을 노래하기 위하여 비방과 평범한 말투에 어울리는 운율을 고안해 시를 지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포 역시 감미로운 사랑의 신비한 감정을 노래하기 위해 자기 시에 새로운 운율의 옷을 입힌 것이다.
사랑스럽게 네가 웃고 있는 걸. 한때 실로 나의 / 마음을 가슴 깊이 떨리게 했었지, / 내 너를 흘끗 볼 때, 그때 난 한마디 / 말도 더 이상 못할 것 같았어. // 하지만 내 혀는 굳어버렸고, 섬세한 / 불길 다시 내 살갗 밑을 휩쓸고 지나, / 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질 못하고, 윙윙거린 / 다네, 내 귀는. // 식은땀은 나를 흘러내리고, 전율이 / 내 온몸을 사로잡아, 풀잎보다 더 새파랗게 / 질려 핏기를 잃고, 분명 죽음에 가까이 와 / 있는 것 같아 〔 〕 // 하지만 이 모든 걸 견뎌야만 해 〔 〕. (사포 조각글 31)
그녀의 온몸을 죽음 같은 전율로 지배하는 그 짜릿한 감정. 그것은 그녀가 자기가 아끼며 가르치던 소녀에게 느끼는 절실한 사랑의 감정이었다. 이제 그녀는 그 소녀를 신랑에게 넘겨주어야만 하고, 그 소녀는 그녀의 곁을 영영 떠나야 한다. 이별의 순간에 사포는 그 소녀에 대한 추억과 느낌을 마지막으로 노래한다. 같은 시대의 시인 알카이오스의 구애를 받았던 매력적인 여인 사포. 그녀의 소녀에 대한 사랑. "내 안에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나는 그녀 앞에서 숨 막힐 충격과 전율에 소스라쳐야 하는가?" 사랑의 감정은 인간적인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녀 안에 일어나는 그것은 인간을 넘어서는 신성한 신비한 힘, 신에 의한 경이로운 충격이라 해야 할 것이다. 사랑의 신 에로스가 그녀의 온몸에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쏟아 부은 것이다.
사랑의 에로스 또다시 나를 마디마디 풀리게 흔드는구나. / 달콤하며 쓰디쓴, 대책 없는, 그 휘감는 신이여. (사포 조각글 130)
사랑은 마치 뱀처럼 시인을 타고 기어올라 온몸을 휘감고 몸의 마디마디에 힘을 빼 풀리게 만든다. 그녀는 그 감정의 힘에 저항할 아무런 방법도 알지 못하고, 갇혀 있다. 달콤하지만 동시에 쓰라린 감정 안에.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치열한 열망이다. 그 목마름. 그 사랑의 굶주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함으로 인해 충족될 수 있으며, 그 충족의 상태에 최고의 기쁨은 찾아온다. 하지만 나누어짐에 의해 갈증은 다시 일어나며 또다시 열망하게 된다. 함께 나눔 없이는 고통으로 지속되는 사랑의 감정. 달콤함과 쓰라림을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로 지니고 있는 사랑이란 감정은 인간이 겪는 가장 큰 모순일 것이다.
사랑은 또 나를 지우며, 그 지워짐의 아픔 속에서 또 나를 가장 생생하게 느끼게 만든다. 상대를 향한 간절함으로 인해 나는 사라지며, 그 공백 안에 그만이 남아 가득 채워지기 때문이다. 나의 영혼은 온통 사랑하는 사람으로 채워지며, 서서히 또는 별안간 나는 그의 분신이 된다. 나의 소멸. 사랑은 채워지지 않을 때 죽음의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소멸과 죽음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그 순간, 자기 존재를 가장 열렬하게 자각한다. 이 시는 소녀에 대한 사포의 사랑이란 점에서 매우 특이한 느낌을 준다.
사랑했던 그녀가 떠나간다. 영원히 나의 갈망은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무엇으로 견디며, 무엇으로 이 죽음 같은 굶주림을 이겨낼 것인가? 이 견딤은 인간적인 그 무엇으로는 불가능하다. 사랑은 인간을 초월한 어떤 힘에 의해서만 위로되며 견딜 수 있는 갈망이다. 사랑의 아픔은 인간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신비로운 절망이다. 사포는 사랑의 열병을 앓을 때마다, 위로를 받고 절망의 고비를 견뎌내기 위해 아프로디테를 부른다. 그의 가슴은 아프로디테의 숨결로 채워지길 원한다. 실연의 순간 아프로디테를 부르는 사포의 시 하나를 긴 호흡으로 읽어보기로 하자.
화려한 권좌를 누리는 불사신 아프로디테, / 제우스의 따님이여, 꾀를 잘 짜내는 당신께 기도합니다. / 부디 고통과 슬픔으로 짓누르지 마세요, 나의 / 마음을, 고귀한 이여, // 그 대신 이곳에 오세요, 만약 그 언젠가 다른 곳에서도 / 나의 목소리를 멀리서 듣고 / 귀기울이시다가, 아버지의 황금 집을 남겨두고 / 오신 적이 있다면 // 마차에 멍에를 지우고 난 뒤, 당신을 모시고 아름답고 / 빠른 참새들이 검은 땅 너머로 / 빼곡한 날개를 퍼덕이며 천공으로부터 / 그 사이를 지나, // 곧장 오셨지요. 그대, 아 복된 이여, / 영원히 죽지 않을 얼굴에 웃음 지으며 / 물으셨죠. 내 무엇을 또 겪었냐고. 왜 / 또다시 불렀냐고. //
무엇이 일어나기를 가장 원하느냐고 / 격앙된 마음에. "누굴 또 설득하여 / 곧장 그녀를 너의 사랑 안으로 이끌까? 누가 너에게, 아 / 사포, 잘못한 거지? // 만약 그녀가 도망간다면, 곧 그녀는 좇아오게 될 거야. / 만약 그녀가 선물을 받지 않고 있다면, 거꾸로 그녀가 주게 될 거야. / 만약 그녀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곧 그녀가 사랑하게 될 거야, /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 해도." // 오세요, 나에게 지금. 힘겨운 걱정에서 나를 / 풀어주세요. 모든 것을 이루어주세요. 내 / 마음이 갈망하는 모든 것을. 그리고 당신이 직접 / 동맹군이 되어주세요. (사포 조각글 1)
권태로운 일상의 평범함을 벗어나 그녀에게 아픔으로 또는 희락으로 일렁이는 그 무슨 감정. 그리고 그를 초월하는 힘. 그녀는 그 모든 것에서 신의 숨결을 읽고, 기원하며, 노래한다. 그녀는 모든 존재 안에서 모든 존재를 아름답고 신성하게 만들어주는 신비한 힘을 읽는다. 사랑의 형이상학. 일어나는 현상은 눈에 보이는 것 그대로만은 아니다. 사랑에 대해서도 이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녀에게 또 다른 위안이 있다면 그것은 신과 함께 더불어 아름다운 자연을 누리는 것.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자태와 인격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과 통한다. 아름다운 사람 역시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이기에. 하지만 그 사랑의 감정은 널리 자연에 대한 사랑과 기쁨으로 퍼져나간다. 시냇물의 경쾌하고 명랑한 흐름 안에서, 과일나무 그늘과 꽃잎, 나뭇잎의 살랑거림.
그 모든 색깔과 소리와 냄새를 부드럽게 전해주는 바람결. 이 모든 것은 신들이 즐기는 넥타르에 다름 아니며, 이곳으로 그녀는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를 초대한다. 도자기의 파편 위에 남겨져 전해 오는 사포의 시 한 편은 이러한 기쁨을 담고 있다.
이곳으로 오세요, 나에게 크레타로부터 이 성스러운 / 신전으로. 사랑스런 사과나무 / 작은 숲으로. 제단에는 향료가 / 불타오르고 // 그 안엔 차가운 물이 졸졸 소리 냅니다, 사과나무 / 가지들 사이로. 장미들로 그곳 전체가 / 그늘져 있고, 흔들리는 잎새 사이로 / 안면(安眠)이 쏟아져 내립니다. // 그 안엔 말을 먹이는 초원이 봄꽃을 / 피우고. 바람결이 / 달콤하게 불어올 제면 〔 〕 / 〔 〕 // 이곳으로 진정 그대 화관을 취하신 후 / 황금 술잔 안에 부드럽게 / 술잔치와 어울리는 넥타르를 / 부어주소서. (사포 조각글 2)
자연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감정 안에 깃든 신비롭고 신성한 힘의 존재를 느끼며 볼 줄 알았던 사포. 그리고 이것을 아름다운 시심으로 노래할 수 있었던 그녀. 그녀는 진정 인간의 몸을 빌려 이 땅에서 살았던 열 번째 뮤즈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