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의 추억을 더듬으면/정동윤
시청역 앞 3 번 출구서 만나
영국 성공회 성당의
세실 신부는 한국 전쟁 때
북한에 납치되어
모스크바로 가다가
포로 교환으로 풀려나셨지요
로마네스크풍의 건물엔
한국의 서까래와 기와를 엮어
고풍스러운 멋을 풍겼지요
조선 태조의 지극한 사랑은
신덕왕후의 무덤을
바로 곁에 두어
그 능을 정릉이라 불렀다가
계모와 사이가 나빴던
아들 태종이 정릉에서 무덤을 옮기니
정동이라는 이름만 남았는데
그곳이 바로 영국 대사관 자리
미국은 실패를 하였고
러시아는 성공했던
신흥 강국 일본의 강짜를 피해
고종의 경복궁 탈출을 도운 일는
바로 엄상궁의 지혜,
상궁 시절부터 궁궐 출입 시
문을 지키는 수문장들에게
용돈을 잘 주어 인기가 있었지요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를 잃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눈치 빠르고 영특하며 성실한
엄귀비와 사랑에 빠져
이듬해 영친왕을 낳았죠
처음 커피의 맛을 본 뒤로
정관헌에 앉아 귀빈들에게
커피를 알리기도 했고
얼마 후 대한제국을 선언했지요
사람들은 놀라워하였는데
배재학당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 선생이
한글의 우수성을 깨우치고
주시경 학생과 더불어 한글
띄어쓰기와 쉼표 등을 만들었고
서재필이 발간한 독립신문은
띄어쓰기로 종이에 구멍이
난 것 같았다는 구독자의 평도 들었죠
정동의 끝자락 한편에 있는
대만의 한성교회 신도들은
백 년 넘게 고국을 그리워하며
귀국의 날을 손꼽으며
간절히 기도하던 교회였고,
정동 한복판의
정동제일교회의 벧엘 예배당은
백 년 전의 벽돌 건물 안에서
이화학당의 여학생과
배재학당 남학생의 꽃피운 사랑이
커튼 너머로 오고 갔었겠지요
한성 재판소에서 대법원으로
지금의 시립미술관 자리는
덕수궁 돌담길 걸으면
헤어진다는 이유가
가정법원의 이혼 판결문 때문이겠죠
소녀시대 윤아는
'덕수궁 돌담길의 봄'이라는 음악에
"덕수궁 돌담길 걸어도
절대 헤어지지 않아"라고 항변하였죠
정동극장에 울려 퍼진 판소리
우리 국악이 살아났고
이동백 판소리 명창이
홀로 마당을 지키고 서 있으며
이문세의 감성 짙은 노래도
정동길의 사랑으로 넘쳐흘렀죠
봄엔 아늑하고 여름은 싱그럽고
가을은 눈부시며
겨울은 차분한 정동길 걷기
어깨를 나란히 하며
덕수궁 돌담길 한 바퀴 돌아
영미의 많은 대사관
고풍스러운 19세기 건물 사이로
고즈늑하게 이어지는 길
역사의 향기 진한 정동길
헤어질 수 없는 사랑이
가로수 사이로 넘쳐흐릅니다
돈의문 박물관, 경교장
김종서 장군 집터
딜쿠샤, 권율 도원수 집의 은행나무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과
러시아 정교회 이야기는
짧은 일정에 밀려 생략하고
홍난파 집 앞에 잠시 머물다
이야기 많이 품고 있는
인왕산으로 빨려 들어갔죠
숲속 쉼터
대관료 없는 자연의 무대
조금만 신경 쓰면
품격과 울림이 번질 수 있는
나무 관객, 바람의 시
햇살과 구름의 조명이 어우러진
도처에 숨어있는 자연의 무대
바라보는 시선의 높이만
조율하면 멋진 무대가 만들어지죠
수성동 계곡, 기린교
윤동주 하숙집 지나
박노수 미술관, 이상 집터나
위항 문학의 벽화는
또 나중으로 미루고 말았죠
아쉬움을 달래며
2월의 역사 문화 산책을
마무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