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집 (제1회 / 강기영)
아내와 나는 그녀를 깨비라 불렀다. 도깨비를 줄인 말이었다. 처음 이사를 와서는 옆집여자로 불렀다. 하지만 얼마 지내다 보니 하는 작태가 이해하기 힘들어 도깨비같은 여자가 되고, 나중에는 도깨비로 변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우리를 따라 서슴없이 도깨비라 부르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아이들은 철도 들지 않았지만 한국말이 서툴러 도깨비라는 말의 의미를 새길 형편이 아니었다. 그런 아이들의 입에 밑 잡아도 사십 중반은 되었을 여자를 이르는 말이 도깨비로 굳어진다면 난처한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우리는 도 자를 빼버렸다.
출근시간이 가까워오자 나는 몸을 뒤척이며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아내를 먼저 출근시키려는 속임수였다. 아내를 속여 가게를 열게 한다는 게 미안한 노릇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옆집 뒷마당에 쳐놓은 덫에 어마어마하게 큰 락쿤이 걸린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미적거리다 그녀가 락쿤을 처치하는 장면을 놓쳐버리면 낭패다.
“보약이라도 먹어가며 힘도 빼야지......”
아내는 엉뚱한 오해를 하며 투덜거렸다. 걱정 반, 투정 반이었다. 나보다 일찍 일어나는 법이 드믄 아내지만 내 앓는 소리에 부스스 일어났다. 낚싯줄에서 피융, 소리를 내며 월척이 걸리는 기분이었다. 이제 슬슬 손맛을 보는 재미가 남은 셈이다. 최근 들어 아내는 내 속임수에 자주 넘어가고 있었다. 공주병이 심해 어린 아이처럼 늘 조마조마한 아내지만 반대로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는 고마움은 있었다. 나는 아침마다 날이 밝아 오면 화장실을 가는 척 하고 옆집 뒷마당부터 살피는 습관이 굳어지고 있었다. 깨비가 락쿤을 잡으려고 쳐놓은 덫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담장에 열린 포도가 익어 가면서부터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락쿤은 동물 주제이면서도 포도라면 사족을 못쓰는 희한한 족속이었다. 락쿤이 잡히지 않아 실망도 하지만 덫이 흔들리고 있으면 가슴이 터질 듯 뛰었다. 그러면 나는 또 아내에게 속임수를 쓸 수밖에 없었다. 깨비가 담장에 포도를 심은 건 대여섯 해 전이었다. 그늘진 곳에만 잔설이 희끗희끗 남아 있는 이른 봄이었다. 창문을 통해 화창한 봄의 전령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그녀가 하얀 입김을 푹푹 쏟으며 포도 넝쿨을 한 짐 이고 나타나는 걸 보았다. 이젠 누구네 집에서 잘라 버린 포도 줄기까지 주어 오는구먼! 또 무슨 도깨비 같은 짓을 하려는 건가? 헝클어진 포도 넝쿨은 하도 커서 땔감으로 쓸 나뭇짐이라도 한 짐 묶은 것 같았다. 뒷마당에 짐을 부린 그녀는 허리를 두드리며 잠시 숨을 몰아 쉰 다음 포도나무 가지를 회초리처럼 잘게 자르기 시작했다. 그런 괴상한 짓은 나무 한 짐을 다 쏠고 나서야 끝이 났다. 잘라 놓은 포도 줄기는 봄철에 단으로 묶어 장에 가서 팔기 위해 다듬어 놓던 싱아 무더기 같았다. 그렇게 잘라 놓은 포도 줄기를 어디에 쓰려는 지 알게 된 것은 그녀가 담장 밑을 삽질로 헤치는 것을 보면서였다. 담장을 따라 포도를 심으려는 모양이었다. 포도는 가지를 잘라 심어도 뿌리가 내린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이 추운 캐나다에서도 과연 그럴까 싶었다. 겉은 녹았지만 아직 속은 얼어 있어 조그만 구덩이를 팔 때마다 곡괭이 질까지 하며 땀을 뻘뻘 흘렸다. 과수원을 꾸밀 요량은 아닐 테니 묘목 몇 구루를 사다 심으면 그만이겠는데 하는 작태가 역시 도깨비였다. 다음 날, 나는 가지 묻기를 끝낸 담장 밑을 바라보다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그렇게 많이 잘라 놓았던 가지를 70피트가 넘는 담장을 따라 기관총 실탄처럼 촘촘하게 박아 놓은 것이었다. 원 세상에 욕심도 유분수지, 쪽파 농사도 아니고 저게 다 뿌리를 내려 가지를 뻗는다면 담장은 무슨 꼴이 된 담! 그런데 신기하게도 날씨가 따듯해지자 그 말라비틀어진 가지에서 싹이 돋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너 해가 지나자 6피트 높이의 철망 담장을 온통 뒤덮어 버렸다. 바람이라도 심하게 불면 무게를 못이긴 담장이 쓰러질 듯 심하게 휘청거렸다. 그래도 나는 위태로운 담장보다 포도 잎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 옆집 뒷마당 때문에 숨통이 트였다.
남의 나라로 이민을 와서 집을 마련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우리도 어렵사리 집을 장만하며 잔디가 곱게 깔린 뜰에서 아기자기한 시간을 보낼 희망에 들떴다. 더구나 옆집이 한국인 교포의 집임을 안 아내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인구 사백만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무작위로 산 집이 한국 교포의 옆집이라니 행운이었다. 나는 음식을 만들어 오가며 조촐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그림을 그렸다. 공주병이 심한 아내의 그림은 더 화사했을 것이다. 아마 네델란드 공주 풍의 드레스를 살랑거리며 손님을 맞는 상상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내 집을 마련한다는 기대에 들떠 옆집의 환경을 간과한 게 불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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