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가야산(678m)
2025년 01월 27일(월요일)
산행코스 : 주차장(08:40) - 가야봉(10:20) - 석문봉(11:25) - 옥양봉(12:00) - 상가리미륵불(13:00) - 주차장(13:10)
산행거리 : 10.7km
덕산도립공원관리소
남연군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1호)
석문봉 2.7km, 옥양봉 2.1km, 가야봉 3.0km
우측은 석문봉, 좌측은 가야봉으로 가는 길입니다.
남연군의 묘(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남은들상여(국가민속문화재 제31호)
대원군이 부친 남연군의 묘를 옮긴 후, 덕산면 광천리 마을에 하사했다고 전하는 궁중식 상여입니다. 장강 위에 구름 차일을 친 용봉 상여로 4귀에는 용모양의 금박이 있고, 중앙 부위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동자상이 있으며, 휘장은 검정, 노랑, 흰색 천으로 되어 근엄하면서도 호화롭습니다.
진풍은 국립고궁박물관에 기탁보관중에 있으며, 이곳 상여 보호각에 전시된 복제품은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자 2012년 문화재청으로부터 국비를 지원받아 국립고궁박물관 진품 실측과 정밀 실측 보고서를 근거로 상여는 중요무형문화재 74호 전흥수 대목장이, 유소는 무형문화재 32호 배순화 매듭장이 제작하여 보호각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가야봉 2.60km, 헬기장 2.09km, 주차장 1.15km, 석문봉 2.9km
상가저수지에서 바라본 가야산
가야봉 1.29km, 헬기장 0.94km, 주차장 2.30km
헬기장 갈림길
가야산 1.13km, 헬기장 0.78km, 주차장 2.49km
가야봉 0.62km, 주차장 2.97km
너덜지대
가야봉 0.27km, 주차장 3.32km
헬기장 갈림길
헬기장 0.86km, 가야봉 0.12km, 주차장 3.47km
주차장 3.52km, 헬기장 0.91km, 가야봉 0.05km
가야산 정상이 보입니다.
가야산 정상
주차장 3.59km, 헬기장 0.98km, 석문봉 1.48km
가야산 정상에서 바라본 해미읍성 방향 파노라마
645봉, 연암산, 한서대
한서대, 산수저수지
해미읍성, 일락산
일락산, 석문봉, 원효봉
가야산정상에서 바라본 원효봉 방향 파노라마
석문봉, 원효봉
좌측 원효봉, 서원산, 상가저수지
서원산, 상가저수지
상가리
가야산 갈림길
가야봉 0.30km, 석문봉 1.18km, 주차장 3.06km
뒤돌아본 가야산
가야봉 0.59km
거북바위
소원바위
소원바위
가야할 석문봉이 보입니다.
가야봉 1.07km, 석문봉 0.51km
뒤돌아본 가야산
데크에서 바라본 가야산 방향 파노라마
가야산
연암산, 한서대
해미읍성
일락산
석문봉이 보입니다.
사자바위
석문봉 정상이 보입니다.
석문봉 정상
해미산악회 백두대간 종주기념탑
주차장 3.20km, 옥양봉 1.33km, 가야봉 1.48km, 일락사 2.74km
석문봉 정상에서 바라본 가야산 방향 파노라마
가야산
가야산, 뒷산, 삼준산, 연암산
삼준산, 연암산, 한서대, 산수저수지
산수저수지, 서산시 해미읍성 방향
석문봉 정상에서 바라본 옥양봉 방향 파노라마
옥양봉
서원산
상가리, 옥계저수지
가야산
석문봉 정상
석문봉 0.08km, 옥양봉 1.25km, 주차장 3.12km
옥양봉 0.94km, 석문봉 0.39km
석문봉 0.62km, 옥양봉 0.71km, 주차장 2.70km
석문봉 0.82km, 옥양봉 0.51km, 주차장 2.60km
석문봉 0.97km, 옥양봉 0.36km
옥양봉에서 바라본 가야산 방향 파노라마
서원산
상가리마을과 상가저수지
가야산, 석문봉
옥양봉에서 바라본 일락산 방향 파노라마
석문봉
일락산
서산방향
서산방향
옥양봉 정상이 보입니다.
옥양봉 정상
옥양봉 0.06km, 석문봉 1.33km, 주차장 2.67km
쉬흔길바위
옥양봉 0.36km, 주차장 2.31km
관음전 갈림길
옥양봉 0.65km, 주차장 2.02km
옥양봉 1.04km, 주차장 1.63km
석문봉 1.90km, 옥양봉 1.37km, 주차장 1.30km
석문봉 2.04km, 옥양폭포 0.82km, 옥양봉 1.51km, 주차장 1.16km
저멀리 가야산이 보입니다.
상가리미륵불
상가리 미륵불(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2호)
미륵불의 높이는 2.5m이고 코부분과 하단을 보수한 흔적이 있습니다. 상가리 미륵불은 원래 가야사터(현재 남연군 묘 터)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절터를 남연군 묘터를 쓰면서 미륵불(彌勒佛)이 등을 대고 돌아섰다는 것입니다. 이후 흥선대원군이 원래 상태로 돌려 놓았으나 곧 등지로 돌아섰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미륵불의 코를 떼어가면 아기를 못나는 아낙이 아기를 가질수 있다는 전설이 있어 많은 아낙내들이 코를 베어 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공덕비
주차장에서 바라본 원효봉
헌종태실
이곳은 조선 제 24대 헌종(憲宗, 1827~1849, 재위 1834~1849)의 태(胎)를 안장한 태봉(胎封)입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왕가의 자손이 태어나면 태를 백자항아리에 보관하였다가 좋은 날을 택하여 풍수적 의미를 배려한 길지를 찾아 봉안했습니다. 이는 아기의 무병장수와 왕실의 기복 번창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제가 강제병합 후 왕실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이왕직(李王職-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왕족을 관리하던 직제)'이란 기관을 설치하고 1928년 전국에 안치된 조선 왕의 태 53기를 파헤쳐 서삼릉으로 옮겼을 때 이곳 태실도 훼손당했습니다.
태실의 무늬와 모양은 조선시대 풍수와 미술양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의 모습은 완전한 모습이 아니고 대다수의 석물은 없어진 상태입니다.
귀부의 머리는 거북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거북 등에는 육각형의 귀갑문(龜甲文)으로 조각하고 비석을 세우는 비좌(碑座) 아래에는 연꽃 잎사귀를 조각하였습니다.
귀부 위의 비신(碑身)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중앙에는 태실비가 세워져 있던 가로 54cm, 세로 26cm 크기의 장방형 비신공(사각형의 탑 구멍)이 남아있습니다.
귀부의 뒷모습은 등에는 귑갑문양을 새기고 꼬리는 옆으로 돌려서 통통하게 새겼습니다.
15조각으로 된 기단석위에 둥근 중근석을 올려 놓고 그 위에 고깔모자 형태의 개첨석을 덮고 가장 꼭대기에 보주를 올려놓았습니다.
기단석에 뚫린 15개의 구멍은 난각석이 세워져 있던 자리입니다.
태를 안장한 태실 위에 돌을 덮고 석물을 올렸습니다.
태실(胎室)은 일반적으로 태옹(胎甕)이라 하여 항아리에 안치하는 것이 통례이나 왕세자나 왕세손 등 다음 보위를 이어받을 사람의 태는 태봉(胎峰)으로 가봉(假峰) 될 것을 감안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습니다.
태를 태실까지 봉송하는 절차와 봉안하는 의식도 까다롭습니다.
왕자나 공주, 옹주가 태어나면 태를 봉안할 장소를 관상감(觀象監)에서 물색하고 봉송 및 개기(開基), 봉토(封土) 등의 날을 가려서 정하였습니다.
선공감(繕工監)에서는 태를 봉송할 도로를 수치하고 역사(役事)에 지장이 없도록 대비합니다.
봉송일이 되면 봉송관원을 임명하는데 당상관으로 안태사(安胎使)를 정하고 안태봉송의 책임을 맏게 하고 배태관(陪胎官)을 차정하여 태를 봉송하는 도중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여 전향관(傳香官)과 주시관(奏時官)을 차정, 안태사와 배태관의 임무를 보좌하게 하였습니다.
그와는 별도로 당하관으로 감동관(監董官)을 뽑아 일체의 공사를 감독하게 하고 상토관(相土官)을 파견하여 이미 선정된 태실이 길지(吉地)인가를 확인시킵니다.
그 밑에 감역관(監役官)을 두어 도로의 수치와 태실의 역사를 감독하게 합니다.
태실의 필역(畢役)이 되면 토지신에게 보호를 기원하는 고후토제(告后土祭), 태신안위제(胎神安慰祭), 사후토제(謝后土祭) 등의 제례를 치르며, 태실의 주위에 금표(禁表)를 세워 채석, 벌목, 개간, 방목 등의 일체의 행위를 금지시킵니다.
금표를 세우는 범위는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왕은 300보(540m), 대군은 200보(360m), 기타 왕자와 공주는 100보(180m)로 정하였습니다.
보주(寶珠)를 두른 상륜부에는 영꽃 봉오리(連峰)을 올렸습니다.
옥개석에도 문양을 새겼습니다.
둥근 중동석 안에 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태를 담은 항아리는 지하에 묻혀있고, 그 위 지상에 기단석을 깔고 기단석 중앙에 사방석을 놓은 다음 그 위에 중동석을 올려 놓는데, 여기에는 사방석이 없습니다.
몸돌에는 연결된 고리문양을 두르고, 옥개석에는 서까래 모양을 조각하였습니다. 중동석의 상단부에는 테를 돌리듯이 둥그런 원을 여러 개 겹쳐 돌렸고, 그 밑에는 4곳에 불꽃 형태의 화문을 양각하였습니다.
2009년 예산군이 기단, 태실, 귀부석 등 일부를 수습하여 복원한 헌종태실입니다.
헌종 태봉 태실은 일제감점기인 1927년 일본이 조선의 맥을 끊기 위해 왕의 태 53기를 한 곳에 집중하여 관리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서삼릉으로 이안하며서 석물들은 모두 파괴하여 훼손하였는데 이때 도굴꾼을 이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