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산동 뒤똥산 군사도로를 따라 차를 몰고 올라가서 군시설앞 산날맹이에 주차를 시켜놓고 안양유원지까지 걸어서 넘어가는데... 한바탕 빗줄기라도 뿌리려는지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는 후덕지근한데 바람마져 어디로 숨어 버렸나 산행시작부터 온몸엔 땀이 흠뻑 젖어 사우나탕이 따로 없다.
오늘같은 날은 한 번쯤 산행을 생략하고 쉬어도 좋으련만, 지난 산행에서 맛본 시원한 산바람을 못잊어서 부득불 배낭을 들쳐메고 집을 나섰다. 최근 산행한 중에 최소의 인원이다. 선두를 재촉하는 사람도 없으니 산행 반 쉼 반으로 오늘 하루를 보낼 작정이다. 안양유원지에 막 도착할 무렵에는 갑자기 장대같은 빗줄기가 퍼붓더니 금방 뚝 그친다.
작년부터 진행중이던 안양유원지의 도로 및 하천의 정비공사는 이제 막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큼직한 바위들로 막아놓은 삼성천에는 실하게 모인 물속에 그야말로 아이들 반 물 반이다. 흙탕물을 아랑곳하지 않고 물장구치며 떠들고 노는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리를 뒤로하고 삼성산 들머리로 본격적으로 들어서니 어느 순간 인적은 뚝 끊기고 사방에 매미소리 풀벌레소리만 요란하다.
더위를 먹지 않겠다는 조심스런 생각에 2, 3십분마다 휴식을 취하면서 가져온 과일과 음식으로 원기를 보충하는데, 다행히 여기서 부터는 길목이 트였는지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주기 시작했고, 앉아 쉬기 적당한 널찍한 바위들은 여기 저기 널려 있었다.
500미터가 채 못되는 삼성산이라고 업수이 여기기 쉽상이나 안양유원지쪽에서 바라보는 삼성산은 영락없는 악산으로 그 규모가 다소 작을 뿐 도봉산이나 수락산에 별 손색이 없다. 아기자기한 재미는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모른다. 동행자도 예상하지 못한 삼성산의 산세에 감탄을 한다.
이구아나(문 X호)의 속도로 한참을 오르니 상월암에 도착한다. 암자의 자그마한 마당엔 임신한 암캐 한 마리가 더위에 지친 모습으로 눈만 멀뚱멀뚱 껌뻑일 뿐 미동도 없다. 냉큼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줬지만 꼬리 한 번 움찔한 것이 고작이다.
대부분의 암자가 그렇듯이 상월암도 그 위치한 자리가 가히 명당이다. 바로 앞은 깍아지른 절벽이요, 뒤편 역시 훤출하게 생긴 바위가 우뚝 솟아 암자를 아우르고 있었고, 그 옆에는 자그마한 텃밭이 정감있게 누워있는가 하면 주위에는 소나무들이 기품있게 뻗어올라서 우산처럼 가지를 펼쳐놓았기에 하루종일 그늘이 사라질 일이 없는, 등산객의 쉼터로는 더할 나위 없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소나무 뒤로는 관악산 팔봉능선이 모습을 고스란이 드러내고 있다. 수로부인이 오매불망 기다리시는 그 능선이다.
우리들의 감탄소리에 잠이 깨었는지 이미 스킨쉽을 나눴던 암캐가 슬며시 다가와 손에 든 음식에 눈길을 고정시키고 적선을 구한다. 던져준 카스테라 한 개를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운다. 그녀(?)의 집요함에 굴복하여 결국 2개를 더 주었는데 급기야는 이제 사람이 먹을 양에도 모지란다는 하소연까지 하고나서야 겨우 그녀를 떠나보낼 수 있었다.
마침 소파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서 등을 대고 드러누우니 촘촘한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에는 흰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루종일 그늘로 식혀진 탓인지 등에 닿은 바위에서는 서늘한 감촉이 등줄기를 타고 온몸으로 전해졌고, 산줄기를 타고 오른 시원한 바람은 마치 어릴적 어머님이 부쳐주시던 부채인 양 얼굴을 간지럽힌다. 얼마쯤 지났을까... 지나가는 등산객의 핸드폰소리에 잠에서 깨니 피로는 간데없이 온몸이 개운하다.
원래는 이곳에서 망월암으로 내려갈 계획이었지만, 예의 그 산행욕심이 또 꿈틀 꿈틀... 상월암 바로 뒤의 478봉을 올라 삼성산 정상을 돌아서 망월암으로 내려오자며 동행자의 동의를 구했다. 478봉에 올라서니 삼막사의 모습이 저 아래에 보이는데 언젠가 그 곳에서 얻어먹은 막국수의 맛이 되살아나 입에 침이 고인다.
478봉에서 삼성산 남능선을 타고가다가 정상 바로 직전에 있는 우회등산로까지의 코스에는 갖가지 형상의 바위들이 심심찮게 서있어서 감상도 하고 직접 넘기도 하는가 하면 지돌이 안돌이 돌아가는 재미로 도무지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는 멋진 코스다. 안타깝게도 정상에는 시설물이 있어서 갈 수가 없는 것이 아쉽다. 우회로를 타고 정상을 270도 가까이 빙 돌아가면 무너미고개로 내려가는 능선이 나온다. 능선을 타지 않고 오른쪽으로 급하게 내려가면 망월암을 만나는데 이 코스 역시 속세와 절연된 듯한 주위의 조망으로 마음이 즐거워지는 곳이다. 조망좋은 바위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그동안 시간을 물쓰듯이 했기에 망월암에서는 잠깐 둘러보았을 뿐 지체없이 계곡을 타고 내려왔다. 관악산과 삼성산 사이를 관통해서 안양유원지에 이르는 삼성천계곡 상하류 어딘가에는 지친 발을 식힐 만한 물이 남아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면서... 얼마후, 허연 바닥을 드러낸 계곡을 보는 순간 우리의 실낱 같은 기대는 무참히 이그러졌다. 어쩌다 만난 등산객에게 '물이 흐른는 곳을 보았느냐' 물으니 '한 방울도 못보았다'라는 비보만 무심히 던져주고 지나친다.
더군다나, 계곡 저 아래에는 서울대 수목원이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우회등산로를 따라 지친 몸으로 다시 산능선을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부담스레 느껴졌다. 그러나, 이 싯점에서 어찌하랴... 이겨내야지! 마음을 추스려 다잡이를 하고는 발길을 재촉하니 소로를 벗어나 평탄하면서 제법 널찍한 길이 나타난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벌레소리 매미소리를 취악대 연주삼아 행군하듯 활개를 치며 걸으니 걱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마냥 즐거울 뿐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앞에 수목원이 나타나고 그 오른편에는 만든지 얼마않되 보이는 구름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구름다리에 올라서는 순간, 우리는 예상치 못한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리 아래에는 많지는 않지만 아쉬운대로 물이 흐르고 있었고 주위에 다수의 사람들이 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무심한 말 한 마디에 지레 낙망했던 얄팍함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겹쳐 일어난다더니 오늘은 좋은 일이 겹친다. 물에 발을 담그고 남은 과일을 나눠먹고 있는데, 많은 등산객들이 우회등산로를 마다하고 수목원을 따라 계속 내려가는 것을 의아스런 눈으로 보고 있던 차에, 지나가던 등산객 한 분이 '들어올 때는 수목원이 통제되지만 하산길로는 통과할 수 있다'고 귀뜸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수목원을 통과하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동안이었지만 마치 유럽의 어느 공원에 와 있는 것 같은 환상에 빠지기도 하였다. 산을 넘는 우회등산로를 면하게 하여준 것도 감사한데 이렇게 공원감상의 선물까지 받았으니 오늘은 정말로 운수 좋은 날인가 보다. 이것으로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는 멋진 휘날레가 되었으련만...
주차를 한 비산동 뒤똥산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침에 왔던 습하고 바람없는 길로 들어서니 다시 흘러내리는 땀으로 온몸이 범벅이 됐다.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속도를 내보려고 했지만 지친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30분간의 지옥코스. 마라토너 이봉주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벗어나 주차한 곳에 이르니 오후 6시 40분. 아침에 이곳을 출발한 지 정확히 9시간만의 일이다.
비산동 칼국시집에서 먹은 펄펄 끓인 해물칼국수의 시원한 국물 맛이 하루종일 묵었던 갈증을 말끔히 풀어준다. 동행자와 나는 마주보면서 서로의 무모함에 고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어느 무더운 여름날 하루를 별나게 잘 보냈다는 꽉 찬 즐거움에 겨워 서로에게 감사함 나누기를 거듭했다.